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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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가 서른일곱 살 때 출간한 단편집. 책은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리고 <종말> 이렇게 세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은 당연히 서로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이어져 있어 연작의 형식을 띄기도 한다.
 <초봄>은 방랑자 크눌프의 전성시기에 무두장이 친구 집을 방문해 세련된 모습과 태도로 여성들의 찬미를 받는 모습을 그렸고,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길지 않게 살다 간 크눌프와 젊은 시절의 한 때, 한 여름동안 방랑을 함께 했던 화자가 주로 대화를 중심으로 크눌프의 예민한 감수성을 회상하는 일인칭 소설이고, <회상>은 마흔 줄에 들어선 크눌프가 폐에 깊은 병이 들어 마지막으로 고향인 소도시 게르버자우에 도착해 지난 추억과 장소를 완상하며 스스로 소비한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을 담았다.
 각 작품이 단편소설이라 독후감에서 작품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총명하고 조숙한 소년이었던 크눌프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빨리 여자의 몸에 대해 눈을 뜨고 세 살 위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라틴어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진학 대신)전문직업인meister 밖에 될 수 없는 독일어학교로 전학한다. 그러나 손위의 아가씨는 벌써 다른 애인이 생겨버리고. 당연히 크눌프도 크눌프답게 새로 두 번의 연애를 경험하고는 생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 방랑의 길을 떠난다.
 방랑길에, <초봄>처럼 갓 결혼해 아직 아이도 없는 무두장이 친구네 집에 들러 며칠 신세지는 동안 평생 노동을 해보지 않아 얇고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섬세한 청년의 모습으로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친구의 아내로부터 추파를 받기도 하고, 옆집 하녀 아가씨와 춤추러 가기도 한다.
 방랑을 하면 길 위에서 숱한 사람을 만나기도 할 것. 어느 여름에 한 사내를 만나 함께 길을 걷다가 교회 담을 넘어 공동묘지의 반듯한 묘석과 꽃들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석양이 지는 묘지들 옆에서 기분이 고조되어 이런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으리라.


 난 어려서 죽었으니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줘요, 그대 아가씨들,
 작별의 노래를 말이에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난 멋진 젊은이일 거예요.


 또 지난 시절 사랑했던 두 여인에 관해서도, 이젠 다시 뵐 수 없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으리라. 그리던 어느 날 새벽 곤히 자는 동무를 놔두고 혼자 안개 깊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미 죽음의 그늘이 덮칠 무렵 우연히 라틴어학교에서 문법을 가르쳐주곤 했던 친구가 의사가 되어 늙은 말을 타고 가는 걸 보고도 총명했던 어린 시절의 크눌프, 그러나 이젠 허름한 방랑자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모른 척했을 수도 있고, 우연히 그를 알아본 의사의 배려로 도시에 있는 빈민구제병원에 입원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자기 몸의 절망적 상태를 알고 있는 그는 입원을 포기하고 기꺼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을 나설 수도 있고, 솜같이 푹신한 눈이 함빡 내리는 따뜻한 날,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 옆에 선 하느님과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자기의 덧없는 방랑의 일생 역시 누군가가 했어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그의 연표를 보니 27세에 <페터 카멘찐트>를, 29세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다. 85세까지 장수한 헤르만 헤세는 젊었을 때부터 애늙은이였다.

 

 역시 헤세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읽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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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0-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하고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요, 헤세는 딱 10대 때 읽어야 하는 것 같다고. ㅎㅎ 10대 때는 그렇게 좋았던 <지와 사랑>을 서른 넘어서 다시 읽었더니 아주 별로더라고요. 하하하. 마지막 문장에 정말 공감합니다.

Falstaff 2018-10-17 09:4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도 10대 때 헤세의 장편소설을 두 작품 빼고 다 읽었는데 하나같이 얼마나 가슴이 알알한지 몰랐습지요.
몇 년 전에 <유리알 유희>를 읽고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만 그건 그냥 남겨두려합니다. 그냥 마음 속에서 알알했던 헤세로 있는 것이 좋을 듯해서요. ^^
 
한국 현대대표희곡 선집 1
한국극예술학회 엮음 / 월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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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월인”이라고 있다. “연극과 인간”과 같은 회사로 내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희곡과 연극에 관해서 가장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출판을 하고 있는 단체다. “연극과 인간”에서 나온 중국현대희곡선집 여덟 권을 읽으면서, 한국의 현대희곡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실이 정말 창피했다. 그래서 꼭 한국의 희곡작품을 읽어보리라 작정을 하고 책을 찾던 중, ‘도서출판 월인’에서 나온 이 선집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은? 1917년 이광수가 쓴 <무정>. 이건 중학교 이상의 학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안다.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희곡은? 나도 어제까지 몰랐다. 조중환이 1912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한 <병자삼인病者三人>이다. 매일신보는 이 희곡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1912.11.6.일자 신문에 사고社告를 게재했다.


 “금번에 본사에서 가장 참신한 연극재료로 취미 진진하고 포복절도할 각본(脚本)을 창작하여 명일부터 본지에 기재하겠사오니 보시오 제군이여 제일착으로 희극 병자삼인(病者三人)이라 하는 것이 출생할 터이오며 그 내용에 활해(滑稽)할 사실은 독자로 하여곰 배를 쥐이고 허리를 분지를지라 이 오늘날 이십세기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 우승열패함은 정한 이치라 제군도 명일부터 그 내용을 보시면, 아시려니와, 겸하야 이 각본을 연극으로 할 날이 있을 터이오니, 하나도 누락없이, 잘 보아 두시면 일후 연극할 때에는, 실지로, 그 광경을 보시고, 다대한 흥미를, 도울 줄 믿사오니 더욱 애독하시오”


 이 책에 든 희곡을 쓴 극작가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조중환, 조명희, 김정진, 김우진, 송영, 유치진, 유진오, 백철, 임선규, 채만식, 함세덕, 김사량, 오영진.
 모두 열세 명의 극작가가 쓴 열네 편의 희곡.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에서부터 지금도 자주 무대에 올리는 유치진의 <토막>, 우리나라의 대표적 슈프레히코어 작가 백철의 <수도를 걷는 무리>, 불후의 명곡 “홍도야 우지마라”의 원전이 되는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시집가는 날>로만 알고 있던 오영진의 사회비판적 희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까지 한국전쟁 전 시기의 대표희곡을 감상할 수 있다.
 멍징후이가 쓴 <워 아이 XXX>를 읽으면서 생소하면서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표현방식을 '슈프레히코어'라고 한다는 것도 <수도를 걷는 무리>의 해설을 통해 알게 됐으며, 슈프레히코어 방식의 공연을 하면 연극에 음악성과 집단성을 동시에 줄 수 있겠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 <워 아이 XXX>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를 하는 등장인물을 표기하지 않고 오직 “나는 빛을 사랑한다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빛이 곧 생겨났다 / 나는 너를 사랑한다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네가 생겨났다” 같은 말하기(sprechen)와 합창(chor)이 만들어낼 거대한 호소력을 체험했다.
 그런데 극작가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책에 소개한 이이들의 작품은 대개 1930년대까지의 작품이다. 나는 단박에 이유를 알아차렸다. 대부분의 극작가들(오영진을 빼고)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 본격적인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친일부역 작가라는 멍에를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유치진, 유진오, 백철, 채만식, 오영진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건 카프 문학을 거쳐 “조선연극동맹”에 집결하여 대부분 월북한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에서 북측 참전문인으로 활동하다 폭격을 당해 숨을 거두기도 한다.
 채만식의 소설작품들은 몇 개 읽어봤지만 희곡은 처음 읽어보는 것. 나만 그렇지는 않을 거 같다. 이 책에 실린 <제향날>에서 채만식은 소설에서 보는 풍자를 넘어, 동학혁명 때 접주를 하던 남편이 죽어 청춘과부가 되고, 기미독립운동 때 앞줄에 섰던 아들이 청국 상해로 넘어가 독립군이 되고, 이제 하나 남은 손자가 일제치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나중에 하근찬의 <수난이대>보다 20년 앞선 리얼리즘 적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걸 알기도 했다.
 재미는 차치하고, 우리나라 희곡사상 의미 있는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 1세기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희곡부터 모은 선집이라 누백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희곡과 직접 비교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조촐한 유산도 알뜰하게 챙겨 읽는 독자가 있어야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도 빛나는 극작가가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께서도 일독을 하심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이 “코미디”인 것이 참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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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것은 모두 펭귄클래식 104
0. 헨리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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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청소년들은 모르겠는데 대강 중학교 1학년 들면 추천도서 가운데 하나로 꼭 지명되던 것이 오 헨리가 쓴 <마지막 잎새>였다. 나는 여태까지 이 작가를 <마지막 잎새>, 이 알싸한 트로트 작가로만 알았다. 역자 최인자도 “옮긴이의 말”의 첫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오 헨리의 단편소설들을 번역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평소 오 헨리의 작품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말짱 착각이었으며 사실은 다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작품을 번역한 영문학자의 말이 이러니 일개 독자 입장에서 그를 트로트 작가로 치부해오고 있었다는 건 그리 타박할 일이 아닐 듯하다. 이제야 오 헨리의 사진을 처음 봤다. 생각했던 것과 영 다르다.

 

 


 책의 앞날개를 통해 이이의 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는 것도 처음 알고, 은행에 근무하던 중 바보같이 서류를 잘못 작성해서 공금횡령죄로 3년 3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은행원 이전에 전전했던 직업으로 약국 조수(나중에 약사 자격증 취득), 목동, 우편배달부, 점원, 직공 등 다양하며, 감옥살이 중 딸을 키우기 위해 원고료를 벌 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단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나 스무 살부터 텍사스에서 살아서 그런지 책을 읽으면 오 헨리의 정체성이 남부 중류 이상 계급이며, 서부 개척시대의 관습 같은 것도 간혹 보인다. 젊어서 고생 오지게 한 건 여지없이 그의 작품 속에 다 들어있을 것이니 문학적 자산은 만든 셈이다.
 앞에 독후감을 쓴 너새니얼 호손의 생몰이 1804~1864, 오 헨리의 생몰은 1862~1910. 호손의 손자뻘이다. 산업과 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58년의 차이면 정말 상전벽해의 시간. 오 헨리의 단편에서는 호손의 단편에서 보던 청교도적 엄숙함과 신비주의 또는 우화 같은 것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하여, 당연히 내 기준에 입각해 말씀드리자면, 훨씬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데,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많은 단편 작품들이 길이가 조금 긴 콩트를 읽는 것 같았다. 물론 읽기에 따라 마지막 결말 부분의 반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렇게 썼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 21세기의 독자들은 이미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져서 결말 부근에 이르면 작가가 어떤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지 벌써 알고 있기 쉽다.
 펭귄 클래식에서 오 헨리의 단편 작품은 두 권에 54편을 싣고 있다. 그의 단편을 모두 합하면 3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약 1/6만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 <반짝이는 것은 모두> 한 권을 읽고 이제 오 헨리는 졸업을 하려고 한다. 물론 책이 나온 20세기 초반에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었겠지만 세월이 100년 이상 흘러 이젠 책의 제목처럼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는 것 같다. 당연히 아마추어 독자의 의견에 불과하겠지만 하여튼 내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는 대한민국, 단편소설의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여간한 단편은 도무지 눈에 차지 않는 독자들이 우글대는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조금 더 숨 막히는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하물며 번역문학의 경우에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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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0-15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는 것 같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좀 많이 낡은 느낌이죠.

Falstaff 2018-10-15 13:56   좋아요 0 | URL
예, 이젠 유통기한이 좀 지난 듯합니다.
 
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
나사니엘 호손 지음, 천승걸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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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주홍글씨>를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이유를.
 열두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선집.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불안, 우울, 절망, 청교도 적 엄숙주의와 악마, 이런 거다. 당시 미국의 빽빽한 삼림. 도처에 원주민이 목숨을 위협하고, 하늘을 덮어 대낮에도 컴컴한 우울한 밀림 속의 분위기. <주홍글씨>에서도 봤지? 대낮에 산보하기도 겁나는 지역. 시도 때도 없이 엘크와 요정과 목신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곳. 습기와 이끼와 썩은 낙엽이 깔려있는 숲 속의 한 그루터기에 마주보고 앉은 헤스터와 아서 딤스데일. 원죄와 원시, 배신과 야만 그리고 청교도의 잡탕밥.
 이 단편선에서도 참 골고루 나온다. 후원자 삼촌을 찾아 길을 나섰으나 삼촌 이름을 꺼내자마자 폭소를 터뜨리기만 하는 동네 사람들(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 원주민과의 전투, 가망 없는 밀림과 생사의 기로, 구조는 됐지만 죄의식에 싸여 평생 음울한 인간으로 살아가고(로저 맬빈의 매장), 악마를 추종하는 회합에 참여하며 야생 샐러리 즙과 양지꽃에 늑대의 독즙에다가 고운 밀가루와 갓난아이의 비계를 섞어 묘약을 만드는 이야기(젊은 굿맨 브라운), 언제 사태가 날지 모르는 가파른 언덕 아래 집을 짓고 사는 가족과 손님(야망이 큰 손님) 등등 참 어둡다.
 이렇게 쓴다고 호손의 단편들이 격이 떨어진다거나 재미없다거나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우화적인 소재를 끌어들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다만 ① 지독히 우울하고 음산할뿐더러 농담이나 유머 있는 장면이 한 컷도 나오지 않고, ② 18세기 이야기를 쓴 19세기 작품이라 지금 시각으로는 별로 효용이 없는 내용일 거 같으며, ③ 기독교와 이단 혹은 악마주의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분야라서, 소설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현대인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렇다. 우화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각각이 독특하게 엽기적이다. 그럼 “성인용 호손 우화”라고 해도 되리라. 혹시 호손의 우화적 단편소설들에게 “유통기간 만료” 딱지를 붙이면 야만스런 일일까?
 나 같으면 <주홍글씨>말고 호손을 한 권 더 읽으려면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읽겠다. <일곱 박공의 집>은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하지 못하겠고.


 다시 강조. 전적으로 내 의견이다. 내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드릴 말씀 있다.
 “당신의 생각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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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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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노레 드 발자크. 이 사람의 소설을 읽으면 가끔 확 질려버린다. 퐁스 선생의 외모를 묘사하는데 무려 여덟 쪽의 지면을 할애하고, 파리의 한 (구역區域도 아니고) 동네를 설명하게 위해 또 열 쪽의 종이를 소비하는 세밀한 묘사. 여기서 끝? 천만의 말씀. 인물의 외모에 대하여 그리 많은 말을 했음에도 다시 직업과 지나간 세월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보다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고도 이젠 특정 건물과 건물 속의 호실號室의 전경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또 많은 페이지를 할당한다. 이거 읽는데도 이리 장황하니 쓴 사람은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그럼 질리는 책을 왜 읽느냐고? 그야 재미있으니까 읽는다. 말을 그냥 “질리다”라고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은 발자크 표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사물을 포장하는 그이의 솜씨가 기막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 퐁스 선생이 19세기 초에 거의 날마다 부르주아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고급 음식만 먹었을 것. 이걸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렇게 교육받은 위장은 미식의 지혜를 얻었으므로 반드시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타락시킨다. 마음의 모든 주름마다 웅크려 있는 쾌락은 여왕이 되어 명령하고, 의지와 체면을 맹렬히 밀어 내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충족되고자 한다. 여태껏 주둥이 폐하의 욕구는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에 가려져서 문학적인 비판을 면했다. 하지만 밥상으로 파산한 이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봤을 때, 밥상은 파리에서 매춘부의 경쟁자인데, 달리 말해 전자가 수입이라면 후자는 그것의 지출이다.”


 이게 극히 일부만 발췌한 것이다. 불쌍한 건 2번이 프랑스 문자로 발자크를 읽지 못하는 한국 독자이며, 3번이 발자크를 한국말로 번역해야 하는 역자이고, 제일 불쌍한 1번이 발자크를 읽지 않고 세상을 하직하는 세상의 숱한 인간들이다.
 퐁스 선생의 직업은 작곡가이자 극장 지휘자. 작곡가로 제법 잘 나가다가 혜성처럼 등장한 게으름뱅이 천재 조아키노 로시니 때문에 명함 한 장 내밀지 못하는 변두리 작곡가 신세로 떨어졌다. 그래도 부모가 돈 좀 있어서 식도락을 겸해 이탈리아를 주로 여행했는데, 부모가 물려준 돈의 거의 모두를 선생 특유의 심미안이 뒷받침해 고른 명품 이탈리아 문화재를 구입하고, 파리로 운송하는데 소비했다. 당시엔 운송료가 무척 비쌌던 모양이다. 이해는 간다. 사고가 많았을 테니 그만큼 적하보험료도 대단했겠지.
 퐁스 선생은 작가가 묘사하기를, “자연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인물이라 했다. “중국 사람만이 낼 줄 아는 도자기 인형처럼 생기 없고 우스운 얼굴이 늘어져 있”고, “거품을 떠내는 국자처럼 송송 뚫린 구멍이 만들어 내는 그늘로 얼굴지고, 로마 시대의 가면처럼 돋을새김이 있는 그 넓적한 얼굴은 해부학의 모든 규칙을 부정”했으며, “정상적인 윤곽이라면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젤라틴질의 평면이 있었고, 파였어야 하는 곳에는 짓무른 혹이 솟아 있었다.” 또 “눈썹을 대신한 두 개의 붉은 줄 아래 회색빛 눈 때문에 슬퍼 보이는 이 얼굴은, 큰 호박 모양으로 눌려 있었고, 돈키호테풍의 코가 들판 위에 표석(漂石: 잘못 쓴 한자 같음. ‘標石’이 맞을 듯)처럼 두드러졌다.” 선생도 자신이 자연에게 버림받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줄 잘 알았기 때문에 여태 결혼 한 번 못하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못하고, 있는 돈이란 돈은 모두 예술품 수집에 쏟아 넣어 손엔 현금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부르주아 수준에 그렇다는 말씀. 원래 있던 집안 출신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렇다는 거.
 그런데 이 영감님이 도무지 포기하지 못해 하는 것이 바로 미식에 대한 욕망. 억지로 가져다 붙인 족보에 의하면 현직 법원장하고 사촌이라는데, 이 끗발로 여기저기, 이집 저집의 만찬에 초대받아 밥을 얻어먹고 있었나보다. 돈이 없어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숙집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는 도무지 미식 취미에 맞출 도리가 없어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온갖 동네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첫 장면이 스펜서재킷을 입은 촌스런 외모인데 그것도 오래 입어 꼬질꼬질하고 낡은데다가 크기만 하고 오히려 짐스러운 귓불이 깃에 닿아 헤진 모습이 꼭 문둥병 환자 같았다고 써놓았다. 그러니 법원장 집에서 좋아하나. 그래 날마다 만찬을 얻어 자시는 게 조금 보대꼈는지 한 날을 잡아 18세기 초엽의 프랑스 화가 장 앙투안 바토가 앞 뒤 양면을 그린, 일찍이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사용하던 부채를 법원장 부인에게 선물하지만, 도대체 예술품과 감식안에 전혀 무지한 부인과 딸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날마다 염치없이 자기 집에 와서 밥만 얻어먹는 퐁스 선생이 얄미운 것만 알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핑계를 대서 쫓아내버린다. 귀한, 그러나 낡은 부채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아, 맛난 음식이여. 나는 퐁스 선생의 고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차라리 좋은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독자는 부채 사건으로 선생과 법원장 댁 사람들과 사이가 이미 틀어져버렸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사촌 집에서 쫓겨난 후 한 두어 주 절친한 친구이자 동거인이며 자신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독일인 슈뮈크와 함께 하숙집에서 제공하는 수수한 밥상만 받으며 우울증을 키워 간다. 그러다 퐁스 선생을 다시 초대한 사촌. 얼른 가보니 사촌의 딸이 부유한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날이었던 것. 하지만 청혼은 조카가 외동딸이란 사소한 이유 때문에 딱지를 맞고, 한쪽에서만 열라 기대했던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법원장 부인과 딸은 그걸 몽땅 퐁스 선생의 파렴치한 잘못으로 뒤집어씌운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파리의 부르주아 계층한테 사발통문을 보내 앞으로 퐁스 하고는 상종하지 말 것을 종용해 이에 타격을 받은 선생은 곧바로 자리에 누워 진짜로 골로 갈 때까지 침대만 지키고 있게 된다. 원래 작곡가이며 예술품 수집가에다가 애초부터 자연이 버린 외모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포기하고 살았던 퐁스. 그렇기에 집단 따돌림은 큰 바위가 되어 퐁스를 압사시켜버리게 되는 것.
 근데 이리 집단으로 따돌림을 시킬 때까지 퐁스의 경쟁자인 유대인 예술품 수집가 한 명을 빼고는 선생이 여태 모은 예술품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진짜 예술품인줄 아무도 몰랐던 거였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한 명,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이, 나중에 거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자, 친한 친구만 빼고는 어떻게 죽어가는 선생의 뒤통수를 한 방 호되게 쳐 국물이나 좀 떠먹을까 껄떡대기 시작한다. 그렇다. 퐁스 선생이 죽음의 침상 밑에 거액을 깔고 누우면서부터 인간들의 적나라한 본성이 드러나면서 이제 다음 편이 없는 발자크의 삶의 목표, “인간극”은 대단원을 찍는다.
 발자크의 경우엔 이렇게 작품 내용을 다 말해줘도 전혀 께름칙하지 않다. 19세기에 쓴 작품이지만 외모와 심리를 묘사하는데 진짜 기막힌 솜씨를 보여주고, 무엇보다 여태까지 위에 쓴 스토리를 풀어가는 입심이 차라리 경이적이기 때문이다. <사촌 퐁스>. 처음엔 작가 특유의 입심에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다가, 죽음의 침상에서 선생이 이웃들로부터 얻어터지는 걸 보며 함께 절망하다가, 결국엔 “인간극La Commedie humaine”의 의미를 깨닫는 의미심장한 코미디.
 작가 본인이 상류계급에 어울리게 차려입고, 먹고 마시느라 진 빚을 갚느라고 꼬박꼬박 하루 열네 시간씩 소설쓰기에 매달렸다는데 어떻게 작품마다 다 재미가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연표를 보니 만 51세에 세상을 떴다. 한 20년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인류의 즐거움이 더 늘었을까, 아니면 일찍 세상 마감하기 잘 했을까. 하여간, 뭐 잘난 것이 있기에 발자크보다 더 길게 살고 있는지, 그게 부끄러운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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