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 1 - 개정판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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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닭띠 여사님 보니 가머스는 시애틀 출생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창작과 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직업으로 했다는데 뭐 그냥 광고업으로 돈벌이를 했다고 여기면 맞겠지? 또 아니면 어때, 다시 보지도 않을 거 같은 걸. 지금은 영국에서 그레이하운드 종으로 보이고 이름이 ‘99’인 개 엄마로 살고 있으면서 조정rowing을 한다고. 어쩐지 책 속에서 조정에 관해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설명을 하더라니까. 출연하시는 개도 대형견에다가 이름이 “6시 30분”이고.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가머스가 써놓고 아흔여덟 군데 출판사에 책 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원고를 보내 전부 물을 먹었고, 99번째에 가서 출판 계약을 맺어, 가머스의 나이 예순넷에 작가로 데뷔하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면 이이의 작품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 딱 한 작품만 나온다. 근데 이 책이 서양권에서 대박을 친 모양이다. 영국도서상, 워터스톤 올해의 작가상, 반스앤노블 올해의 책 상, 오스트레일리아 ABIA의 올해의 국제도서상, 리더스어워드 무슨무슨 상 등을 휩쓸었다. 아멘.


  책은 1961년 11월에 시작한다. 물론 첫 장면의 시간적 배경이 이때라는 말이다. 여자들이 오후마다 셔츠웨이스트 원피스 차림으로 이웃의 정원에 모여 수다 떨던 시절. 메들린, 정식 이름은 매드, 맞다, 미쳤어 글쎄, 할 때의 매드 MAD가 호적에 오른 진짜 이름이고, 이걸 그대로 썼다가는 세상의 으뜸가는 놀림감이 되리라 싶어 메들린이라고 부르기로 한 건데, 이 메들린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는 새롭게 또는 새삼스럽게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 서른 살 먹은 여사님이었다. 리즈로 말할 것 같으면 기가 막힌 음식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매일 메드의 도시락을 싸주며 도시락 통에 쪽지를 써 딸에게 주는데 오늘의 쪽지는 특별히 두 장이었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운동 하면서 놀아. 하지만 남자애들이 이기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돼.”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못됐어.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네 생각이 맞아.”

  문제는 매드가 무척 똑똑하다는 거. 지금 다섯 살이지만 한 살을 올려 여섯 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여섯 살을 먹었어도 서양 아이들은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ABC도 모르는 게 정상 수준임에 반하여 매드는 이미 동몽선습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거쳐 지금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를 반쯤 읽었을 정도다. 에이, 뭐,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구라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지금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대부분 독파했다. 아이가 워낙 똑똑해 학교에서는 자기도 마치 글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니 위의 쪽지 같은 걸 학교에 가지고 가겠느냐고. 매드는 도시락 통에서 엄마 모르게 슬쩍 쪽지를 꺼내 읽어보고 자기 찬장 위에 놓인 신발상자에 쏙 넣은 다음에 학교에 간다. 진짜 똑똑하지? 얘보다 좀 덜 똑똑한 아이들이 학교가서 아이들 앞에서 책 읽고, 그것도 소리 내서 읽은 다음에 왕따 당하는 거다.

  여기까지 왔으면 작품의 주인공은 당연히 매드 같다. 나도 매드가 주인공이겠거니 했다. 근데 오산이다. 주인공은 매드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 매드는 메드 조트. 엄마와 딸이, 1961년에 성이 같다? 혹시 사촌간 혼인인가? 아니다. 혼외 출산이다. 당시 말로 하자면, 물론 지금 이렇게 발음하는 건 실례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1960년대 초에 일컫는 말로는 ‘사생아’이다.

  이쯤에서 한 마디.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Zott 양. 이이의 이름을 짧고 강하게 발음하지 말기로 하자.


  1961년 11월. 엘리자베스 조트 양의 직업은 처음엔 캘리포니아 지방방송에서 송출하다가 이제는 U.S.A. 전국에 방송하는 저녁시간대 TV 프로그램 “6시의 저녁식사”의 진행자로 자타공인 이 쇼의 스타이며, 조트 양 본인은 상당히 불쾌하게 듣는 애칭 ‘맛 좋은 리지’로 불린다. UCLA 화학 석사학위 소지자이며, 1952년 1월에 대학원을 졸업 후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지도교수이자 학과장이며 DNA 연구에 관해 별로 실력도 없으면서 우연히 권위를 얻은 마이어스 교수한테 성폭행을 당한다. 조트 양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큰 키에 탁월한 외모, 총명한 지능을 겸비한 양은 늘 HB연필을 귓가에 끼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난생 처음 이 연필을 본능적으로 오른손에 쥐고 피부를 노출한 마이어스 교수의 옆구리에 가져다 박아버렸다. 얼마나 세고 깊게 박았는지 약 12cm 길이의 얇은 나무 부분이 다 들어가 대장과 소장 일부에 박혀 버렸으며 피부 밖으로는 지우개와 지우개를 둘러싼 금속만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트 양은 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마이어스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박사과정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모자란 조트 양이 마이어스 교수를 성적으로 유혹했고, 이를 거절하자 폭행을 저질렀지만 스승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더 이상의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고 조트 양이 학교를 떠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마이어스 이 개자식이 그래도 뒤가 켕기기는 했는지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자베스 조트 양이 주인공이라서 독자는 당연히 그리고 전적으로 주인공의 입장, 주인공의 시각으로 책을 읽을 터인데, 사실 조트 양은 막무가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구소에 진짜 스타 연구원이 한 명 있다. 캘빈 에번스. 양친 부모가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서 고모네 집에서 자랐는데 고모 역시 고속도로를 가다가 차선 이탈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천주교가 운영하는 소년의 집에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탁월하게 총명해 거의 천재급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고 싶은 하버드에서 입학 허가를 내주지 않아 대서양 건너 케임브리지에 조정특기생으로 입학해 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눈부신 업적을 쌓아 아마도 서른 앞뒤의 나이로 보이는데, 최근 5년 동안 노벨화학상 수상 후보자로 세 번이나 거론되었을 만큼 전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과 연구소에서 캘빈을 교수로 모시고자 했으나 애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하버드는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었고, 어디로 갈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궁리를 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날씨가 좋다는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최악의 박봉을 대신해 연구소에서 가장 큰 연구실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온 거였다. 날씨가 좋으면 뭐 하려고? 조정. 보니 거머스 여사의 취미가 조정이잖여?

  조트 양은 석사 출신이다. 돌 던지면 박사학위 소지자 대가리에 떨어지는 연구소에서 누가 석사를 사람 취급이나 하나? 게다가 1950년대 초중반에 여성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신청을 하면 말이지. 그래 조트 양이 실험용 비이커를 사달라고 수십장의 신청서를 써도 그 하찮은 물품이 들어오지 않아 열폭하고 있을 즈음, 캘빈 에번스의 연구실엔 비이커가 남아돈다는 걸 알고 무작정 연구실에 쳐들어 갔다. 문 앞에 “절대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조트 양이 선택한 것은 연구실 주인이랄 수 있는 캘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이커를 얻어온 것이 아니라 대판 말싸움을 하고 선반에 놓인 비이커 케이스를 무작정 통째로 들고 나온 거였다. 이쯤 되면 사실 조트 양이 사회부적응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다음으로 하자. 주인공이니까. 1950년대 초반이니, 캘빈이 어엿한 연구원인 조트 자신을 사무행정 보조원 정도로 알고 대우한 것이 극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다음날 조트 양이 연구원이었던 걸 알고 사과하러 온 캘빈을 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모난 돌이었던 것. 캘빈 역시 과학에 관해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비슷한 면이 있어서, 캘빈과 조트 양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아 얼마 후 둘은 각본에 의하여 연애를 하고,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함께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동거생활로 들어가며, 당시 미혼 남녀의 동거란 불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음에도 워낙 캘빈이 유명한 학자라서 눈꼴이 시어도 뭐라 하는 인간이 없었다. 이 커플은 혼인제도와 출산에 관해 부정적이었는데 조트 양이 훨씬 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콘돔을 두 겹으로 둘러쳐보아라, 빠져나올 놈은 다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서 조트 양은 임신을 했다. 이 좋은 세월에 캘빈은 양친부모와 고모처럼 개 ‘6시 30분’과 함께 노닐다가 경찰차에 치어 죽어버린다.


  여태까지는 캘빈의 유명세 덕분에 연구소에서 버틸 수 있었지만, 조트 양 역시 천재는 아니더라도 수재급 인재라서 놀라운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연구소에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애를 밴 여성 연구원을 내친 화학과장 도나티 박사는, 조트 양의 화학진화에 관한 연구를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고, 우리의 엘리자베스는 혼자 딸 매드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맛난 점심 도시락과 쪽지 쓰기를 멈추지 않고.

  이때 나타난 홀아비 TV 연출자와 그의 딸. 매드가 연출자의 딸 어맨다의 도시락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기꺼이 자기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했다가, 매드는 집에서 얼마든지 먹으니 거의 다 어맨다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이를 알게 된 조트 양이 꼭대기까지 열을 받아 어맨다의 아빠인 월터 파인 씨 사무실로 쳐들어가 무턱대고, 조트 양 특유의 사회부적응적 항의를 퍼붓는다. 월터 파인 씨가 조트 양을 보기에, 난리 피우는 건 난리를 피우는 것이고, 외모가 지극히 훌륭하고 말빨 역시 좋아 저녁 시간대 TV 프로그램을 새롭게 만들어보자고 했고, 명색이 과학자인 조트 양이 단칼에 거절하자 그녀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높은 보수를 제의하는 터라 그렇게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매드를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고 국영수 과외도 시켜야 했으니. 다만 요리쇼가 아니라 철저하게 화학과 생물학에 입각한 요리법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때가 196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미국의 가정주부들 역시 자존감의 싹이 트기 시작하던 무렵. 조트 양의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그래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한 놀라운 행운이 이 모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적 행운. 뭐긴 뭐야? 미국적 행운이면 돈이지. 이상무 화백이 그린 만화 시리즈 가운데 독고탁이란 주인공이 있어서, 고생고생해가며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겪어 조금 이름이 알려지자 어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또는 사고가 생겨 잃어버린 재벌급 아버지가 나타나 한 방에 인생 역전하는 드라마를 연이어 그린 적이 있다. 그래, 그래. 이게 힌트다. 미국적 기적. 너무 유치한 클리셰. 재미있게 읽다가 한 번에 폭망하는 기분. 뭐 미국 소설에서 그리 드물지 않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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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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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인 아베 코보는, 성姓 아베安部가 말해주듯이 일본의 그럴싸한 가문 출신이다. 맞다. 총맞아 죽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같은 성씨다. 의사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는 아베가 어린 시절에 만주로 진출한 소위 “개척자” 가족의 일원이었는데, 만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도쿄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다. 의대생 시절이었던 1944년에 문과생들은 모두 징집을 당하고 이제 이과생 차례라는 말이 돌자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만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돕다가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소집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삶을 접었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 아베는 만주에서 사이다를 만들어 팔아 살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선을 탔다. 가족을 홋카이도의 조부모 댁으로 옮긴 후 다시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아베는 (나도 이런 제도가 있는지 처음 알았는데) 의사가 되지 않겠다는 전제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가 뭘 하겠는가? 당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49년부터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후 가난하다 못해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가 아베 코보. 피를 팔아 아베 코보 매혈기를 쓸 정도였던 그가 많고 많은 장르 가운데 초현실주의 문학을 했다니, 거 참. 하여간 이후 아베는 장르는 다르지만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전후 문학의 기수로 알려졌다고 한다. 미시마? 에휴, 그러거나 말거나.


  작품집 《벽》은 아베 코보의 대표작인 모양이다. 2000년에 위덕대학 출판부에서 정가 7천원에 팔던 책을 사반세기만에 마르코폴로에서 정가 2만원으로 새단장해 나왔다고 한다.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이 여섯 편 가운데 제목을 <벽>이라 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두 이 “벽”이 특별한 상징으로 등장하니 작품집의 제목을 《벽》이라 한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아베 코보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처음이 <모래의 여자>이고 두번째가 <불타버린 지도>이다. <불타버린 지도>가 생각나지 않고 머리속에서 “용의자의…” 어쩌고저쩌고가 뱅뱅 돌아 결국 검색까지 해봤다. 두 작품 다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이 책들도 읽으면서 뇌 좀 써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리 낯설거나 어리둥절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벽》은 완전히 초현실주의 작품 자체이다. 초현실주의는 내가 제일 경원하는 장르라서 만일 이 책도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작품들만 실은 책이란 걸 알았으면 과연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의심스럽지만, 정작 읽어보니 이 정도면 뭐 그냥저냥 읽을 만했다. 아, 이건 내 생각이다. 이런 장르 좋아하시는 분한테는 최상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 없다.

  여섯 편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고, 위키피디아 보니까 제일 중요한 작품으로 삼는 <S. 카르마 씨의 범죄>만 보기로 하자.


  화자 ‘나’와 ‘나’의 도플갱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 S. 카르마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아침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서 수프 두 그릇과 빵 한 조각 반을 먹었는데, 먹다보니 ‘나’가 평소에 먹던 양이 아니다. 하여간 먹어 치우고 외상 장부에 서명을 하려는데, 아뿔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거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방법이 있지. 서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어, 이름이 쓰여 있는 명함이 이날 따라 한 장도 없다. 신분증을 찾아봐도 흑백 사진까지 다 들어 있는데 이름이 적힌 부분만 지워져 있다. 주머니에 아버지가 보낸 편지가 있어 그걸 펴 봐도 이름을 쓴 곳만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다. 재킷 안주머니에 금실로 수를 놓은 이름도 실이 다 풀려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날 아침 밥값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왔다. 방에 들어와 봐도 이름이 새겨진 모든 장소와 물건에서 아무 흔적을 찾지 못한다. 창 밖에서 속절없이 출근 사이렌이 울렸다. 근데 보니까 책상 위에 있을 가방도 없다. 며칠 전에 3개월 할부로 산 소가죽 가방. 가방 속엔 중요한 서류가 잔뜩 들어 있는데 이걸 어쩌나? 할 수 없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구두도 어딘가로 가고 없어 허름한 검은 신을 신은 채 걸어서 출근했다.

  현관에 들어가서, 당시에 일본 회사는 현관에 들어가면 벽에 커다란 이름표가 있어서 특정인의 이름을 적어둔 모양인데, 이 이름표의 세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적힌 S. 카르마가 ‘나’의 이름일까 잠시 궁금해한다. ‘나’의 책상이 있는 곳은 건물의 2층 3호실. 방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라, 내 의자에는 내가 아닌 또다른 내가 앉아 있다. ‘나’는 소름이 끼치고 수치심이 들어 문 뒤로 몸을 숨긴다.

  타이피스트 Y양에게 보고서를 설명해주고 있는 또다른 나. 그의 책상 위에는 ‘나’가 아침에 찾았던 소가죽 가방이 놓여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왼손으로는 Y양의 무릎을 더듬는 것을 보니까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역시 틀림없는 ‘나’이다. 음. 내가 나 자신이 아닌가?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당연히 또다른 나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나도 그를 알아본다. 틀림없는 ‘나’이다. 근데 한쪽 눈을 가리고 보니까 ‘또 다른 나’의 정체가 보인다. 그건 ‘나’의 명함이었다.

  “N 화재보험. 자료과. S. 카르마”

  명함은 ‘나’에게 주장한다. 처음부터 이곳은 나의 영역이오. 솔직히 말해 난 당신 같은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소!

  ‘나’는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간다. 방에 혼자 있자니 외로움과 공허함이 밀려든다. 명함이 돌아오면 나는 이 방에서도 쫓겨날까? 이름을 잃어버렸으니 명함과 비교해보면 만사가 불리하다. 가슴에 뻑뻑한 통증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까, 에구머니, 가슴이 정말로 뻥 뚫렸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 접수창구에서 건장한 사무 주임이 또 이름을 묻는다. 이름을 말하면 나중에 명함이 어떤 까탈을 잡을 지 몰라 가짜 이름을 대기로 한다. 카르테. 아닌 거 같다. 아르테. 조금 어색하다. 그래서 아르마. 이것도 아냐. 아쿠마. 좋다, 아쿠마는 근데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사무주임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라 한다. ‘나’는 잡지를 편다. 잡지 속에 레이몽 라디게의 초상화가 있다. 허 참. 민음사세계문학전집 321번. 레이몽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 무진장 잘 어울린다. 페이지를 더 넘겨보니 황량한 광야 사진이 나온다. 왼쪽 중앙에 사구砂丘가 있고 사구 기슭에 띠 모양의 황사 소용돌이가 있는. 근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까 내가 사진 속에 실제로 들어가 있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있으니, 그건 아니고, 사진이 내 뚫려 비어버린 가슴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가슴이 비었다는 건, 흉곽이 진공상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상당한 수준의 음압이 발생해서 잡지의 사진이 통째로, 종이라는 물질을 제외한 사진의 형상만 ‘나’의 가슴 속으로 쏙 들어와 버린 것. 정말로 얼굴이 새카맣고 키가 큰 의사가 가슴의 흉압을 측정하자 단위는 나오지 않지만 하여간 130, 끔찍한 저압이란다. 의사와 사무주임은 ‘나’가 자신들마저 흡수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둘이서 ‘나’를 번쩍 들어 2층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2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 이번엔 동물원으로 향한다. 많고 많은 동물 가운데 사자가 ‘나’의 눈을 보더니 애수에 찬 모습으로 발발 긴다. 그러더니 사라져버렸다. 다른 동물은 안 그러는데 이번엔 또 낙타가 ‘나’한테 설설 긴다. 왜 그럴까? 아하, ‘나’의 가슴 속 황야 사진, 넓고 넓은 초원지대에 사는 동물인 사자와 낙타만 ‘나’한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어떠셔? 더 할까? ‘나’ S. 카르마 씨는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놀라지 마시라, 바벨탑까지 간다. 거기 누가 있느냐고? 별 인간 다 있다. 당연히 여호와를 비롯해서 수 세기 동안 연옥을 팔아먹은 단테, 놀랍게도 힛솔리니, 그리고 명색이 초현실주의 소설이니까 앙드레 브르통까지. 사람이 이 바벨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벽.” 벽을 통과하는 방법은? 아마 유일하게 말 그대로 대가리 박치기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나올 때는? 안 알려줌. 그러면 S, 카르마 씨는 어떤 범죄를 저지른 거냐고? 마찬가지로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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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속삭임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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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책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건 어쩌면 우리나라에 넓은 팬덤을 가지고 있는 줌파 라히리가 이이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 시장에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일 수 있다, 라고 들었다. 스타르노네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라히리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우리말 번역서를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믿을 만큼 독특한 작가이다. 이이는 주특기로 가족이나, 가족과 비슷한 친밀한 사람들, 구성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 중요하고 복잡한 일이 무진장 많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거니 하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 문제는 내가 상처받는 건 귀신같이 빨리, 민감하고 유별나게 알아차리지만, 상처주는 일은 그게 왜 상처가 되는 말, 태도, 행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게 당하는 사람한테 일종의 가벼운 폭력인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던 짓 계속, 한 번, 두 번, 세 번… n번. 상대는 그때마다 가슴과 뇌와, 특히 전두엽에 무수하게 실금이 가, 어느 날 드디어 와장창창, 전두엽이고 심장이고 간에 폭발하는 현상을 우리는 뭐라고 한다? 파탄이라고도 하고, 이혼이라고도 하고, 가출 또는 독립이라고도 하건만, 상처를 주고받은 당사자는 여전히 도대체 어떻게 이 단계까지 왔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고는 있었어도 정말로 파투가 날 줄은 몰랐거나, 아니면 설마 저것이 나 없이 살 수 있겠어, 오만방자했던 것이었겠지. 부모자식 사이에도 그렇고, 부부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뭐 하러 입 아프게 그걸 말로 해 그냥 그런 것이지. 연인관계도 그렇고, 형제자매 사이도 이하동문이다.

  이런 걸 도메니코 스타르노네는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가뜩이나 21세기 초장부터 우리나라 출판계에 새롭게 블루칩으로 떠오른 이탈리아 소설 가운데서도, 내 취향으로만 말하자면, 이이만큼 우리 주변 찌질한 인간들의 집합인 가족들의 내밀해서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꺼내 독자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놓아두고 시침 뚝 떼는 작가는 드물다. 그렇다고 이이의 이야기가 202X년의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우리나라 가족들의 이야기하고 비슷하다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문화의 차이가 있고, 의식 수준과 생활패턴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라서, 오호, 이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렇게 살았구나,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그러나 시간과 장소를 떠나 이들의 삶에 호흡을 같이 해 읽어가면서 등장인물의 행위와 생각에 동의하는 거야 설마 다를 수 있으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서두가 기냐고? 좋다. 시작해보겠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피에트로 발레가 화자 ‘나’로 등장하는 1부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피에트로 발레는 나폴리에서 전기 기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주부 엄마 사이의 네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나 가족의 희망을 등에 짊어지고 유년, 소년, 청소년, 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번에 읽은 책이 기껏 세번째 스타르노네의 작품이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주인공의 고향이 나폴리, 주로 살고 있는 곳이 로마, 가끔 나폴리에 전처와 함께 사는 아이들 만나러 가든지, 자식의 단기 여행 기간 동안 손주 봐주러 가든지, 하여간 가끔 고향에 발길을 한다는 거. 이 책에서는 피에트로의 고향이 나폴리이고 피에트로의 아내 나디아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하여 공부하는 대학이 나폴리에 있기는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앗, 지금은 나디아가 나올 시간이 아니다.

  피에트로가 그리 특출난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 형제 가운데 그래도 공부 좀 잘한 유일한 자식이라서 그랬던 듯하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어른들이 보기에 싹수가 있고 뭐 그래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거였다. 근데 사실을 알고 보면 좀 비극적이다. 피에트로가 보기에도 형제 가운데 그나마 공부에 소질이 있는 건 자기 혼자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공부를 좀 하는 것뿐이지 그쪽 방면으로는 열심히 해봐야 될 성싶지가 않다. 그냥 좀 하는 것과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는 건 엄연히 차이가 나는데, 워낙 학문과 거리가 먼 집안 출신이라 피에트로 정도면 적어도 나폴리 수재급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재빨리 알아챈 피에트로는 소년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특급 모범청소년 모드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과 피에트로는 매사에, 자기가 특출나지 않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매사에 적극적이고 전념을 다하는, 열심히, 열심히, 열쒸미 하는 것이 몸에 배게 되었고, 특히 남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이렇게 좀 세월이 지나니까 그냥 보통으로 사는데도 저절로 남들 보기에 매사 성실한 모범청년이 저절로 된 거였다. 물론 보이는 것과 피가 혈관에서 벌떡벌떡 뛰는 젊은이의 진짜 모습하고는 차이가 나겠지만.


  하여간 공부 잘하고 성실한 청소년 피에트로는 좋은 대학 국문과에 진학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속 공부할 재질도, 돈도 부족해서 졸업과 함께 로마의 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임용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 정년을 맞을 때까지 교편을 잡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교편敎鞭, 이게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다. 가르침의 회초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 안 듣거나 가르쳐 줘도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뒤지게 패도 괜찮은 채찍을 말한다. 근데 요즘에 학생이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한다고 채찍은커녕 30센티미터 대나무자, 회초리, 지시봉, 대걸레자루, 곡괭이자루, 야구방망이로 두드려 패도 괜찮은 겨? 우리 또래 교사들이야 취미생활로 아이들 차려 시켜놓고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 뒤돌려차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요즘에 교편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해고통지서와 함께 덤으로 콩밥까지 먹는다.

  이제 교사가 되었으니, 발레 선생께서는 일찌감치 터득한 지혜, 자기는 죽어도 특급교사가 되지 못할 푼수임을 충분히 감안해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말 그대로 전념을 다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생들은 전부 교탁에 앉아 수업을 진행했지만 발레 선생께서는 단 한 번도, 단 일초도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수업시간 내내 집중한 상태로 학생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을 전해주기 위해, 말 그대로, 몸바쳤다. 얼만큼이냐 하면, 학생들도 알 정도로. 아오, 저 선생은 비록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진짜로 열심히 가르쳐주려고 하는구나, 이리 인정할 수밖에 없게. 이 학교에 누구보다 총명하고, 로마 교외지역에서 30년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할 수준의 똑똑한 지능을 가지고 있는 ‘테레사’라는 1학년 학생이 있었는데, 가난한 집안의 준천재급 학생들이 항용 그러하듯 성격이 좀 삐딱해 가자미 눈알을 하고 있었음에도, 피에트로 발레 선생을 향해서는 슬금슬금 존경심이 솟구치더라는 거였다. 그럴수록 담임이기도 한 발레 선생에게 가능한 한 대답하기 어려운 짓궂은 질문만 쏟아대고, 그럴 때마다 선생은 또 선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다 하는 것처럼) 설명을 하려 하는 걸 어찌 몰라라 하겠느냐는 말이지. 세상에 참. 이런 담임-학생 관계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이어진다.

  테레사가 빛나는 졸업장을 타고, 로마 최고의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해, 피에트로는 당연히 기억 속에 그런 똑똑한 아이가 있었지, 수준의 추억으로 남았건만, 졸업하고 1년쯤이 지난 오후에 테레사한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선생님, 저 테레사예요. 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안부 여쭈어서 죄송해요, 호호호. 오늘 시간 있으세요? 그냥 저녁이나 한 번 했으면 좋겠어요,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1년 만에 약속을 하고 학교 앞에 서 있으니 테레사가 은빛나는 모터사이클을 붕붕거리면서 몰고 와 헬멧을 씌워주고 뒷자리에 피에트로를 앉히고는 냅다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조금 후, 고개를 뒤로 제친 테레사는 난데없이 피에트로 선생의 목을 오른팔로 감싸더니 다짜고짜 뜨겁고, 축축하고, 깊숙한 키스를 퍼부었으며, 이때부터 3년 동안 둘은 격렬하고, 뒤틀리고, 폭발적이고, 위험한 연애를 펼친 거디었던 거디었다.


  뜨겁고 강한 두 사람의 연애. 어찌 잘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옆에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무려 3년 동안 지속하더니 이제 남은 건 서로 잘, 좋은 모습으로 헤어지는 일인 것 같았다. 서로 그런 단계임을 알았다. 이때 테레사가 제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만일 들통이 난다면 영원히 매장될 만한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이런 격렬하고 위험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둘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별을 미루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겠지. 그리하여 먼저 테레사가 피에트로에게, 그리고 피에트로 역시 테레사에게 만일 다른 사람이 알게 되고, 그것이 사회 일반에게 퍼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비밀을 이야기한다.

  피에트로는 확실히 그랬다. 치명적인 잘못을 테레사에게 말했다. 테레사는?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나 지어 이야기했는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모른다. 그리고 며칠 후, 이들은 서로에게 낯설기만 한 점잖은 태도로 서로의 앞날에 행운을 빌며 안녕을 고한다.

  세월이 흐른다. 무정하게 흐른다. 테레사는 과학적 두뇌에 드디어 꽃이 만발하게 피어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위스콘신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이어서 MIT, 하버드 등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이가 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다. 피에트로는 역시 성실하게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이탈리아 교육계의 문제점을 담은 에세이집 두 권을 내면서 교육계의 스타로 등극해 일년 365일 바쁘게 전 국토를 종단하면서 사인회와 강연회, 세미나에 참여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건 같은 학교 대수학 교사였던 나디아와 결혼 후 이야기로, 나디아는 나폴리의 한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공을 들이다가 실패하고, 맏딸 엠마, 그 밑으로 아들 둘을 낳고 키우느라 죽을 똥을 싼다.

  도메니코 스타르노네가 항용 그러하듯이 피에트로 입장에서 본 80평생이 1부를 이룬다면 2부는 피에트로와 나디아의 맏이 엠마가 본 부모, 3부는 피에트로의 첫 애인 테레사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 피에트로가 교육관련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일이 생겨 그 자리에서 연설하기 위하여 정말 오랜만에 로마로 가기 전에, 그리고 로마에 가서, 테레사가 본 일, 생각한 것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테레사가 화자로 등장하는 3부에, 하도 이탈리아 교육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지루했던 독자로 하여금 눈이 초롱초롱해지게 만드는 반전이 등장하건만,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없지.

  하여간 재미있는 작가이고 작품이다. 아직 스타르노네의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명작까지는 아니니까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지갑을 여시라 말은 쉽게 못하겠다. 그래도 이탈리아 소설이 블루칩인 건 아실 터이니 비교적 저렴한 책값으로 즐거운 하루 이틀을 보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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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5-05-06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이 작가 정말 좋아하시네요.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몇 권 사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5-05-06 10:44   좋아요 1 | URL
재미난 양반이예요. <끈>이 인상 깊었습니다. ㅎㅎㅎ
 
여기 있잖아요
나탈리 사로트 지음, 클로에 고티에.권현정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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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네 권째 나탈리 사로트를 읽는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탈리 사로트가 정말 천재라서 그가 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①애초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평균 이상, 전 인류의 상위 1~2퍼센트 안에 드는 고급 두뇌를 지니고 ② 무지하게 좋은 커리큘럼을 가진 교육과정을 거친 인간들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썼는지, 아니면 어떻게 하다 보니 굳어진 스타일을 동 시대의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이 마구 띄워주는 바람에 천정 높을 줄 모르고 이름값을 날렸는지, 둔한 내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다고. 네 권까지 달린 것이 아까워, 최근에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467번 <향성>은 읽어봐야겠다 싶었다가, 그래도 내돈내산하기 겁이 나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다.

  그나마 사로트의 희곡은 소설에 비해서 그나마 접수가 되는 편이다. 도무지 적응하기 쉽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면 일단 읽고 보는 거, 이것도 병이지? 나도 미친다, 미쳤다.


  본문이 77페이지에서 끝나는 짧은 희곡. 짧다고 우습게 봤다가는 쌍코피 터진다. 원래 사로트가 그렇다. 어느 작품 하나 빼지 않고 다 짤막하다. 근데 뇌세포가 도무지 적응하기를 꺼려한다. 대단한 공통점이다. 소설의 경우엔 소위 신소설, 누보 로망, 찬쉐가 쓴 <오향거리>의 주인공 X여사처럼 사물을 보긴 보되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만 보다가 보살급의 남편이 현미경을 사주자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사로트 표 누보 로망도 로브그리예처럼 사물과 사람을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는 것 같이 미시적 묘사로 일관하는 바람에 독자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치닫게 만든다. 거기에 비하면 희곡은 얼마나 친절한가 말이지. 내가 지금 이렇게 쓴다고 해서, 희곡은 그러면 읽으면 딱 감이 잡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귀족의 후예답게 사로트의 희곡은 프랑스의 유구한 부조리 연극의 바탕 위에 놓여 있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자면 그렇다. 그냥 쉽게 말하면, 배우가 말하는 대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거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남1, 남2, 남3, 그리고 여. 대개 남자들과 여자가 나오면 남자들은 헛소리만 하고 여자는 진리의 말씀을 시전하다 결국 남자들에 의해 망가지는 드라마가 보통인데, 이건 거의 전적으로 대개의 (극)작가가 이런 구도로 (극)작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독자가 갖게 되는 선입견이다.

  등장인물은 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팀원들인 것으로 보이고, 방금 업무상 회의를 마친 듯하다. 회의를 하다가 여자는 무슨 의견을 말하려 하다가 할듯 말듯, 결국 아무 의견 없이 회의를 끝낸다. 이제 해산해 밖으로 나온 남1과 남2는 왜 여자가 의견을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인공인 남2가 여자에 대하여 말한다.


  “아, 알아요… 명석한 두뇌는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건 누구나… 훌륭한 지식인이 아니어도… 그녀는 판단할 수 있어요, 그렇죠,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니 여기, 그녀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 여기… 이곳에…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갖다 댄다.) 여기에 그녀의 작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왜 ‘작은’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안심하고 싶은 걸까요… 그녀는 그녀 안에 자기 생각이 있어요, 생각이 여기 있죠, 감춰진 채. (하략)” (p.10)


  제목 <여기 있잖아요>에서 “여기”란 여자의 머리. 뇌 속, 생각하는 장치가 있는 위치를 말한다. 또는 여자 자신이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나는 위 대사를 읽고, 이 대사가 남2의 긴 대사 가운데 거의 처음에 나오는 것이라서 그랬는지, 나탈리 사로트가 페미니즘에 관하여 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남2가 분명히, “여자도 생각할 줄 안다. 비록 작은 생각이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근데 사로트가 적극적인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페미니즘 작품도 쓴 거 같지 않은데…. (더 읽어보자.)

  남1이 퇴장하고 남3이 등장한다. 잠시 후 객석에서 누군가 종이를 구겨서 뭉친 걸 무대로 던진다. 희곡에서는 남3이 그걸 한 손으로 멋지게 잡아 펼쳐 읽은 후에 남2에게 보여준다. 종이에는 “불관용”이라 적혀 있다. 불관용不寬容. 관용을 베풀지 말아라? 관용을 베푸는 것이 불가능하다? 뭐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붙어 있는 해설에 불관용에 관하여 나와 있어 그걸 읽어보았는데도 그렇다. 어제 혈액검사 하느라고 하루 쫄쫄 굶고 빈속에 소주와 막걸리를 부어 꽐라가 된 후유증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사실 어제 염하고 시체 비슷한 수준까지 갔다가 오늘 하루 벌벌 기었지 뭐야, 분명 중요한 메시지 같은데도 모르겠고, 모르겠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좀 봐주시라. 술이 웬수다.

  하여간 주인공 남2는 회의 때 여자가 의견을 내지 않은 데 대하여 화를 낸 걸 사과한다. 다음에 여자가 대사를 한다. 여자의 대사를 보면 남2가 이들의 조직에 조금 더 우월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같다.


  “하, 제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결코? 제가 거위처럼 목에 밀어 넣기만 한다? 당신… 당신은, 당신만 ‘생각하신다?’… 당신은, 당신은 ‘아신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의 ‘진실’을 ‘목구멍에 밀어 넣지’ 않아요, 그냥 밀려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받는 거예요’. 게다가 저는 그렇게 했어요… 저는 불평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말이 되는 소리예요?” (p.17)


  그럼 이건 뭘까? 남2를 비롯해 여자에 비해 조직에서 조금 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1과 남3은 여자의 의견을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의견을 받아 그것을 자신(남2)의 의견에 동의한 것처럼 만들어서, 세계사적 의미로 과장해 말씀드리자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극)작가는 결코 확실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렇게도 읽힌다. 사로트 자신이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소비에트 정권을 피해 파리로 망명을 했으니 스스로 느끼고 있는 의식의 범위가 세계사적 의미로 확장할 수도 있을 터이니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불관용의 딜레마가 한 번 더 내 머리 속에서 터져버리는데, 불관용의 법칙을 어디에 적용하느냐, 이게 문제다. 제목에 밝힌 것처럼 “여기”에 불관용의 딱지를 붙여? 불관용이란 말 자체가 문제라면, 불관용의 반대말인 관용이란 단어도 문제다. 관용이 있으니 불관용이 있을 것. 관용과 불관용은 각종 소통의 부재로 야기되는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불관용하느냐, 이것은, 어떤 문제까지 관용하느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고, 사로트가 겪은 20세기 전체에 걸쳐 이 관용과 불관용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커다란 비극을 만들었으니.

  그럼 관용과 불관용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로트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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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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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이탈리아 어느 지역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그라치아 델레다가 1876년에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던 샤르데냐 섬사람들의 외지인에 대한 텃세는 여간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주민들은 대단한 결속력으로 결집되어 있었을 것이다. 뭐 당연히 서로 이익의 충돌이 되지 않는 선에서이기는 했겠지만. 그리하여 외지 사람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괜찮은 집안 사람과 혼인하고, 이후 성실하게 처가의 업을 이어 성공을 할 정도라면 당연히 한 작품의 주인공 또는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훼방하는 갑급 조연 정도를 맡는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조금 무게가 나갈 엑스트라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반면에 섬 구성원의 한 명이, 그것도 귀족 집안의 따님께서 야반도주에 성공해 밤배를 타고 바다 건너 장화를 닮은 반도에 나가, 한 평민과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다가 아쉽게도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이 아들이 나중에 머리통이 커지자 어머니의 고향에서 살고 싶다며 귀향했을 경우에는 어떨까? 나도 궁금했다. 뭐 놀랍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는 동네가 쌍수를 들고 귀족도 아닌 청년을 환영한다. 음, 그렇군.

  그라티아 델레다는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여성 작가. 전에 <악의 길>을 읽은 기억이 나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악의 길> 역시 샤르데냐 섬의 주도 누오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베리즈모 오페라였다. 그걸 읽으면서 재미는 있지만 암만해도 이젠 구식이 된 이야기라서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여기에다 그 동네 사람들의 핏줄에 밴 가톨릭 종교 의식儀式과 의식意識을 완전히 도배하는 바람에, 엎어치고 메쳐도 골수 유물론자인 나는 3미터 파고 속에 통통배 탄 것처럼 멀미가 나 견디기 쉽지 않았다. 작품도 이미 옛날 옛적 스타일이라서 내가 혹시 80~90년 전 유럽사람이라면 모를까 21세기도 웬만큼 달려온 이 시점에 굳이 참아가면서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라고 쓰면 틀림없이 과장, 작품에 대한 혹독하고 무책임한 비평일 터이니 읽는 분께서 좀 디스카운트해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샤르데냐 섬의 갈테 마을에 악마처럼 혈색이 붉고 폭력적인 귀족 돈 차메 선생이 살았다. 이이는 성녀같이 아름답고 차분한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님과의 사이에 위로 아들 둘, 아래로 딸 넷을 두었으니, 생떼 같은 두 아들은 전쟁에 나가서 죽었는지 염병을 앓다가 죽었는지 하여간 작품 시작도 하기 전에 세상 하직했고, 나이 든 순서대로 루트, 에스테르, 리아, 노에미 이렇게 네 따님이 있었다. 돈 차메가 처음부터 성질 더럽고 폭력적인 건 아니었다. 심지어 두 아들을 잃었을 때까지도 안 그랬다. 천사 같은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님이 세상을 접으면서 돈 차메는 조상들이었던 남작들의 난폭한 성질이 발현된 것처럼 딸들에게 엄격하고 못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네 딸을 집안에 고립시켜놓고 젊은 남자가 집 밖에 세 번만 지나가면 사실여하를 불문하고 딸들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사람을 꼬였길래 남자가 집 앞에서 어정거리게 했느냐고 닦달을 할 정도였다. 딸들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주민들과도 온갖 소송과 불평, 불화를 만들었고, 하루 종일 이웃집 처마 아래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욕설이나 험한 시비를 붙자고 해 사람들이 아예 길을 돌아다녔으니 오죽했겠을까.

  이 핀토르 가문의 따님들 가운데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이 셋째 따님 리아 아가씨가 가뜩이나 좁은 섬에서도 지루한 일상만 해야 하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귀족 딸들을 노예처럼 일을 부리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해, 못살아, 못살아, 나는 못살아, 유행가 가락처럼 입에 달고 살더니 달도 없는 새까만 밤에 깨끔발을 하고 그대로 내빼 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이 집의 충직한 하인 에픽스가 리아 아가씨를 연모하여, 연모가 뭐야, 사랑도 그런 사랑이 없어서, 리아 아가씨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아가씨의 행복을 성취시켜주기 위해 기꺼이 함께 동네 바깥 다리까지 동행을 해주었고, 거기서 지나가는 마차에 태워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는데, 야밤에 무슨 마차, 아마도 뭔가 수를 써주었겠지. 하여간 부두에 도착해 날이 밝자마자 연락선을 타고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간 리아는 언니들과 동생한테 편지를 부쳐 말하기를, 자기는 가축 파는 상인과 결혼해 차비타베키아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다고. 얼마 후에 다시 편지를 보내 알리기를 아들을 낳았다고. 자매들은 편지를 받고 결코 리아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평민, 그것도 가축상인과 결혼을 했으니 이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꼴이라 그랬다는데, 정말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세 자매는 결혼은커녕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팍팍하게 살고 있건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은 리아한테 질투가 나서 그랬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리아가 낳은 아들이 자기들의 조카인 건 확실해서, 리아한테는 엽서 한 통을 보내지 않았어도 조카 자친토 앞으로 출생 선물 같은 걸 보냈고, 리아가 젊은 나이에 숟가락 놓은 다음부터, 자친토는 매년 부활절과 성탄절마다 이모들한테 열심히 안부편지를 부쳤던 모양이다.

  악마처럼 혈색이 붉은 돈 차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어느 날 마을 밖 다리, 하인 에픽스가 리아를 배웅했던 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시신에서 외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심장발작 때문에 죽었거니, 당시엔 과학수사나 부검 같은 말이 없어서 그렇게 결론을 내고 그냥 파묻었다. 한 때 언덕에 올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땅이 자기 소유였던 것이 아내 죽은 다음부터 소송이니, 술값으로 다 날려서 이제 투박한 농장과 저택만 남은 상태로, 집에 남은 딸들은 앞에 남은 구만리 같은 세월에 시집 가기는 애초에 텄고, 귀족한테 허용이 되지 않았던 농장의 과수원에서 딴 과일 등속을 몰래몰래 팔아 생계를 이었다니 거 참,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근데 알고 보면, 하인 에픽스가 한 일, 자기 딸 도망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동네 밖의 다리까지 배웅해준 것을 돈 차메가 알아내 잔뜩 열이 올라 에픽스를 때려 죽이려 했고, 맞대응할 생각도 못한 하인 에픽스는 삐질삐질 뒷걸음질 치다가 정말로 맞아 죽을 거 같아서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돌을 하나 들어 휙 던졌더니 그게 하필이면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렸단다. 돌을 맞은 돈 차메가 허청걸음으로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20~30미터 이상을 비틀거리면서 기어이 비운의 다리 위까지 도착해 거기서 자빠져 죽어버렸다.

  이때 벌써 10년 동안 핀토르 가문의 하인으로 일했던 부처님 가운데 토막 에픽스는 이후 자기가 주인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남은 생을 남은 세 따님을 위해 바치기로 작심을 해서, 세상의 어떤 하인보다 더 지극하게 루트, 에스테르, 노에미 아가씨를 보살피고, 먹여 살리고, 보초 서고, 나름대로 아가씨들 결혼시키려 눈알을 굴리며 늙어갔다. 가뜩이나 충실한 사람이 가톨릭에 입각한 희생까지 뒤집어썼으니 딱 결론이 나지? 이 작품은 에픽스가 죽어야 끝나겠구나, 하고.


  돈 차메가 죽고 20년이 흘렀다. 그러니까 착한 에픽스는 30년 동안 품삯 한 푼 안 받고 하인 노릇을 한 건데, 딸들도 이를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귀족 신분의 고귀한 인간이 하찮은 하인에게 미안하다거나, 언제 주겠다고 허튼 약속을 하거나, 기타등등 아쉬운 얘기를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뭉개기만 했다. 딱 이럴 때 이탈리아 반도에서 편지가 와 말하기를, 조카 자친토가 세관에 다니다가 도무지 비전이 없는 직장이라 세르데냐의 이모댁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거다. 하나만 알려드리지. 자치토가 세관에서 일한 건 맞는데, 전직 선장이었던 신사가 큰 돈을 납부하기 위해 세관에 들고 와 세관장이 발행한 영수증을 받으려 했는데, 이때 사무실에 혼자 있던 자치토가 세관장이 외출을 해 없으니 돈을 자기한테 맡기고 내일 와서 세관장이 서명한 영수증을 받으라 했다. 거액의 현금이 어쨌거나 수중에 들어온 자치토는 퇴근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튀어나가 도박장에서 거액을 몽땅 잃고 만다. 다음날 선장이 와서 영수증을 요구하니까 자치토 하는 말이, 선생께서 내게 돈을 언제 주셨는데요? 나는 받은 적이 없나이다. 이렇게 세관에서 해고당했다. 선장이 이를 불쌍히 여겨 자치토를 자기 집에 불러 밥도 먹이고, 옷도 사 입히고, 좋은 말로 젊은 사람의 실수를 덮으면서 앞으로 열심히 살라고 충고를 했건만, 이를 잔소리로 여긴 자치토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여 샤르데냐 이모들한테 가겠다고 한 거다. 이를 들은 선장 부부는 기꺼이 뱃삯과 자전거를 한 대 사주고 앞날의 성공을 기원했단다.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듯. 당신이 옳다. 자친토는 샤르데냐 섬 갈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에픽스의 오두막 옆집에 사는 포로이 할머니의 손자 잔안토니오에게 아코디언을 사주고, 동네 사람들 전부한테도 포도주를 사주는 활수한 씀씀이를 자랑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훤하게 다 안다. 자친토가 써 제끼는 돈을 알고 보면 동네의 고리대금업자 칼리나 여사한테 고리로 얻은 돈이며, 이것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아가씨들의 재산이 거덜날 것임을. 이 와중에 핀토르 가문의 딸을 위하여 에픽스가 영웅적인 하인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하는 건데, 뒤로 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점점 더 가톨릭적 은혜와 구원, 고행으로 회전, 지극한 상투성을 띈다. 그러니까 독자가 생각한 것 보다 남은 이야기가 훨 더 많으며, 그게 읽기에 지겹다는 말이다. 아 씨, 잘 나가다가 말이지. 그래도 이런 점 때문에 이야기는 베리즈모에 머물지 않지만. 근데 베리즈모는 재미라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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