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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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를 ‘대단히’ 흥미롭게 읽어서 애초부터 올해에 꼭 읽겠다고 꼽았던 책.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했던 책. 무엇보다 먼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사탄탱고>의 문장은 <저항의 멜랑콜리>에 비하여 많이 짧다. 원래 이이의 글이 대단히 긴 편이라고 한다. 경애하는 서재 동무님께 들은 바, 헝가리어 자체가 쉼표 한 번만 찍으면 글을 무한히 길게 쓸 수 있단다. 그래 이 책도 원래는 길고 긴 문장을 역자의 의도에 의하여 몇 개의 우리말로 자른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초기작이라 본격적으로 문장이 길어지기 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는 데는 그것의 길고 짧음이 그리 큰 문제인 것 같지가 않다.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이이의 다른 책 <마지막 늑대>도 포함하여,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주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가장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접하는 것과 비교해, ‘미친 듯이’ 길고 긴 문장이라 하더라도 만연체 특유의 늘어지는 감정은커녕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의 신상체腎上體, 즉 부신의 수질髓質에서 아드레날린을 급격하게 분비하게 만든다. 쉬운 말로하면, 이야기에 빠져버린다는 뜻.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말 번역을 통하기는 했지만, 직접 읽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작년 연말, 2019년에 읽은 가장 좋은 책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선정하면서 “카프카는 특정한 한 사람, 예를 들면 측량 기사나 K, 딱 한 명만 골라 후벼 파는 반면 크러스호르커이는 이 책에서 시골에 있는 수상한 소도시의 그나마 다양한 사람을(아니, 어쩌면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 전 <사탄탱고>를 다 읽고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초기 소설은 카프카 적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단독자單獨者를 그린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군상群像을 등장시킨다.” 이런 해설을 읽으면 나 같은 아마추어, 기껏해야 딜레탕트들은 기분 좋다. 역자가 나처럼 카프카와 비교하는 것만 해도 그런데, 작가가 집중하는 대상까지 내가 생각했던 점과 같다고 하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우쭐대는 모양이 밥맛없더라도 좀 이해해주시라.
  구성도 <저항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저항의....>는 아주 추운 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전시하겠다는 서커스가 들어옴으로 해서 일이 벌어지는 반면, <사탄탱고>는 이제 가을비의 첫 번째 방울이 떨어질 무렵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밤,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다 망해가는 집단 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농장 구성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으면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성당이 4km 떨어져 있지만 종도 없고 종탑마저 지난 전쟁 때 완전히 무너져버려 종이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 거리. 농장에서 가장 예쁜 슈미트 부인의 침상에서 새벽에 깨어 불길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절름발이 후터키의 불안과 한 순간에 환영처럼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아) 검게 보이는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듯한 혼돈의 감정을 독후감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가 종소리가 끝난 다음의 완벽한 고요. 적막은 더 불안과 불운의 영감에 휩싸이게 하고. 슈미트 부인 역시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흔들고 있지만 정작 고함도 나오지 않는 고통스런 악몽을 꾼다. 그래 초장부터 소설은 제목처럼 뭔가 악마주의적인 분위기 속에 불길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댄다.
  이같이 소설 첫 머리가 강렬해 독자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작품의 어느 곳, 어느 장면도 이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단박에 기억이 날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데, 농장의 모든 일꾼들이 마을 북쪽의 농장으로 가 8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번 돈을 남편과 이웃 크라네르 둘이 몽땅 챙겨 갑자기 들이닥친다. 둘이 이 돈을 반씩 챙겨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으나, 불륜의 밤을 지낸 후터키가 창밖으로 튀었다가 새벽 불빛을 보고 방문한다는 듯이 나타나 결국 셋이 나누기로 한다. 이때 역시 불빛을 보고 또 다른 이웃 헐리치 부인이 놀랄만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니,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 전직 기술자인 후터키는 이리미아시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생산과 농사가 놀라울 만큼 발전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마음을 바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리마시아는 위대한 마법사 비슷한 인물로 심지어 쇠똥으로도 성을 지을 수 있을만한 추진력과 지식과 연줄이 있는 영웅이기 때문에. 크라네르 부인도 등장해 아리미아시가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뭔가를 이룰 것이라 첨언을 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새벽 가을비를 맞으며 슈미트 부인이 정말로 그들이 농장으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옷과 두툼한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고, 후터키와 슈미트 역시 “짜증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희망가를 노래하며 메시아를 맞으려 빗속을 행진하는 것으로 1부의 첫 번째 장章이 끝난다.
  책은 모두 2부, 열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 2, 3, 4, 5, 6장으로 되어 있는 반면, 2부는 6, 5, 4, 3, 2, 1장의 순서다. 그리하여 이 장들이 만들어내는 건 한 사이클cycle. 즉 원이다. 원의 특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돌고 도는 것. 이게 어떤 뜻인지는 밝힐 수 없다. 진짜로 책을 읽을 분을 위하여. <저항의....>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끈질기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력이 조금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끈질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앉아서 한 번에 30쪽 가량을 읽을 수 있는 모든 분께 권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이의 이름을 기억하시라. 출판사 알마는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어 <저 아래 서왕모>를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으며 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알라딘에 광고를 했다. 이제 <....서왕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그것 말고도, 그의 작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번역 출간해주었으면 좋겠다. <저항의 멜랑콜리>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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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집 범우문고 16
김소월 지음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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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소월 김정식(金廷湜). 1902년 9월(음력 8월)에 태어나 서른두 해를 살다 1934년 12월에 생을 접은 시인. 그의 죽음조차 뇌일혈로 인한 자연사인지, 독극물 자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 일본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미쳐버린 아버지,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교육, 이른 결혼, 오산학교에서 김억金億을 사사, 교장 조만식 흠모, 일본 도쿄상과대학 진학, 관동지진으로 귀국, 사업 실패, 가장으로서의 자괴감 같은 모든 바이오그래피도 김억이 자비출판해준 시집 《진달래꽃》 한 권으로 지워진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시인이 김소월일 것이다. 나도 물론이고. 그러나 교과서 말고 진짜 그의 시집을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무나 많이, 너무도 자주 그의 이름과 시와, 시에 곡을 붙인 가곡과 가요 때문에 오히려 정작 이이의 시를 읽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리라.
  굳이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를 인용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절묘한 은유의 벼랑 끝. 이런 게 진짜 시 아닌가 싶다. 말로는 죽어도 안 울겠다고 하는 동시에 가슴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역설. 하긴 소월이 누군가. 국문학 전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를 공부해 박사를 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연구주제로 삼은 이가 김소월이다. 소설? 이광수. 그러나 지금 시대에 소월처럼 시를 쓸 수도 없고, 쓸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앞으로도 몇 세기를 거쳐 애송될 것이다. 이게 바로 고전의 힘. <가는 길>이라는 시 한 번 읽어보자.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전문)



  시집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설렘과 안타까움과 외로움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도 숨겨진 작품은 언제나 있는 법. 이 시 하나를 찾아낸 것으로도 시집을 사 읽는 본전은 뽑았다. 강물은 서로 따라가고 흘러도 연이어 흐르는데 어찌 사람은 그리워도 그립다 말 못하고, 그냥 갈까 망설이면서도 뒤 돌아보고 싶은 마음 못 다스린 채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소월, 하면 대개 여성성, 그리고 슬픔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사실로도 그런 취향의 시들이 소월을 국민시인으로 만들었지만 <초혼>같은 외침의 시도 있기는 하다. 평안북도의 망해가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마지막 남은 가산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바로 그 해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숱한 조선인을 살해한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 소월. 곧바로 귀국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할아버지의 광산 사업을 말아먹고,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다가 역시 깨끗하게 말아먹은 소월에게 어찌 동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없었으랴. 다만 조선인의 한과 설움에서 비롯하는 시들의 막강한 감동의 아우라에 빛을 잃었을 뿐이지. <마음의 눈물>이라는 시 일부.



  내 마음에서 눈물난다.
  뒷산에 푸르른 미류나무 잎들이 알지,
  내 마음에서, 마음에서 눈물나는 줄을,
  나 보고 싶은 사람, 나 한 번 보게 하여 주소,
  우리 작은놈 날 보고 싶어하지.


  건넛집 갓난이도 날 보고 싶을 테지,
  나도 보고 싶다, 너희들이 어떻게 자라는 것을.
  나 하고 싶은 노릇 나 하게 하여 주소.
  못 잊어 그리운 너의 품속이여!
  못 잊고, 못 잊어 그립길래 내가 괴로와하는 조선이여  (부분)


  솔직하게 얘기해서, 이 시가 비록 소월표 서정시가 가슴 속을 푹 질러주는 감동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작은 것들에서 시작하는 조선을 위한 영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 역시 시집을 통해 얻은 수확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월 시의 본류는 슬픔의 아름다움. 예컨대 <접동새>의,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구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중략)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부분)



  같이 시인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들은 우리의 옛 이야기 속 정서를 품고 있다거나, 제대로 대가리가 굵어지기 전인 중학생 때 썼지만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역설로 만든 절창 <먼 훗날> 같은 것이 더 좋다. 이 시 전문을 읽으면서 너무도 유명한 시인의 시들이라서 잘 써봐야 본전인 독후감을 마친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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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5
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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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마틴 에이미스는, 여태까지 영어로 출간된 소설 75선에 포함된 <럭키 짐>을 쓴 킹슬리 에이미스의 친아들로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런던 필즈>라는 재미있는 책을 국내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마틴 에이미스는 아버지 킹슬리의 작풍作風을 따라 코믹한 분위기의 촌철살인 작품을 썼으며, 외국의 언어로 쓰인 유머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생산연도가 현재와 더 근접한 아들 에이미스의 작품이 ‘훨씬’ 더 독자에게 다가왔다. <런던 필즈>에서 마틴은 개차반 성향의 남자 키쓰 탤런트를 등장시켜 팜 파탈 형 미모의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하려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으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블랙 유머 형식으로 표현했다.
  <런던 필즈>보다 5년 먼저 출간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노트 : 이후 “돈”으로 표기>는 1981년부터 1982년의 런던과 뉴욕을 무대로 뉴욕의 필딩 구드니가 영국의 CF 감독 존 셀프에게 미국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장편 상업영화를 한 편 제작하자고 꼬드겨 사기를 치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기는 1권 중후반에 접어들면 어떤 독자라도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언질을 주어도 별 까탈이 없으리라 믿는다. 필딩은 스물다섯 살에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체력까지는 확실하고, 거기다가 눈부신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책 제목처럼 기어이 자살 노트를 쓰는 주인공 존 셀프는 영국의 CF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했으나 세상에 둘도 없는 속물이면서도 기본적인 심성은 나쁘지 않은 인물로 설정했다. 존 셀프는 책을 출간할 당시의 마틴의 나이인 서른다섯 살. 출연진 가운데 끝까지 눈에 띄는 등장인물은 ‘마틴 에이미스’라고 하는 체스 잘 두는 영국 소설가. 정말이다. 마틴은 마치 미국의 영화감독 히치콕처럼 자신이 쓴 책의 한 귀퉁이에 슬쩍 등장해 참견까지 한다.
  아아, 이 말 먼저 하자. 마틴 에이미스의 <돈>은 당시 언론이 뽑은 세계 100대 소설책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 에이미스는 영문소설 75선, 아들은 세계 100대 소설.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가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기겁을 하고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건 주인공 존 셀프의 행적과 입담 때문이다. 사기꾼 필딩으로부터 제의가 오기 전까지 완전한 영국 잡놈인 존의 일상은 말 그대로 ‘무위의 하루’로 책의 초반에 쓰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침부터 술 마시고, 밥 먹고, 면도하고, 자위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자위하고(이거 많이 하면 피난다는데 걱정이 될 정도로), 잇몸이 퉁퉁 부은 채 TV보고, 술 마시고, “작고 나긋나긋하고 잘 튕기고 몸이 유연하고 침대에서 영리하지만 남자들의 공격과 성추행, 강간을 두려워”하는 영국 소설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국가대표 걸레인 애인 셀리나 스트리트와 액체교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일이다. 사기꾼의 낚시에 걸린지도 모르고 뉴욕에 가도 관심의 초점은 영화보다 술과 패스트푸드와 포르노와 여자에 집중되어 있는 말종이다. 그러니 존이 자신의 행적을 묘사하기 위해 점잖은 분들이 읽기엔 과하게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과 단어가 자주 출몰하니 미리 주의를 기울이시라는 말씀. 내 경우엔 뭐 이왕 알 거 다 아는 처지라서 그런지 그냥 읽는 재미가 넘쳐흘렀다.
  그래도 CF 감독이고, 알렉 루엘린이라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절친에게 돈도 활수하게 꾸어주고 그의 아내와 계단에서 관계도 맺는 ‘영국’ 인간이, 나이 서른다섯에 이를 때까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한 번 읽어보지 않았으며,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와 정말로 밀통을 해서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줄 안다. 물론 알렉 루엘린이라는 작자도 역시 존의 애인인 셀리나와 여러번 관계를 맺는 등,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책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건 남편이 하필이면 영국의 국가대표 걸레 셀리나와 바람을 피운 미국여자 마티나 트웨인과 위에서 얘기한 마틴 에이미스, 그리고 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트립 바 “세익스피어”에서 잡역부이자 경비원 일을 하는 늙은 뚱보 빈스 정도. 나머지는 전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 속물들 themselves다.
  마틴 에이미스의 의도는 현대를 지배하는 20세기 배금주의 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비트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이런 흐름 속에서도 피해를 입는 속물에게 독자는 가여움을 느끼고, 피해의 당사자인 존 역시 간혹 “이제 그만 젊어야겠다. 왜냐고? 죽을 거 같으니까. 젊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고 철학적인 문장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아직도 돈이 없이 사는 삶이란 상당히 괴롭다. 물론 돈이 많다고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괴로운 건 아니지만. 현대인의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돈을 좇아, 돈을 위해, 돈에 의해 몸을 맡기고 있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돈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가 되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 얻은 크고 튼튼한 애인,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내게 많은 돈이 생기면 분명 그녀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 그러나 지금은 내게 오직 한 명인 그녀를 신도림 트랜스퍼 계단에 앉아 모자를 벗은 채 기다리는데 한 곱게 생긴 중년여인이 모자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넣어주며 상큼한 미소를 보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 하지 말고 한 번 해볼까? 근데 내가 생긴 게 도무지 없어 보이지 않아서 성공할 거 같지는 않네.



  * 이 책의 주인공 존 셀프를 읽는 내내 존 케네디 툴의 명품 희극 <바보들의 결탁>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라일리를 떠올렸다. 이그네이셔스한테 돈이 많다면 딱 존 셀프의 모습일 거 같아서. 어쨌든 이그네이셔스도, 존도 슬픈 희극의 주인공들이다. 아니면 희극의 슬픈 주인공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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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커스의 밤
앤절라 카터 지음, 조현준 옮김 / 창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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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사님 책 가운데 읽어본 건 딱 하나, <피로 물든 방>. 이것 읽을 때 제법 놀랐다. 말 그대로 고딕 소설. 열일곱 살 먹은 처녀애가 돈 하나 보고 나이 많은 남작님한테 시집 가 첫날밤을 치룬 다음 서방님이 출장을 가면서 금색 열쇠를 넘겨받긴 했는데, 이 열쇠를 돌려야 열리는 문을 여는 순간 넌 끔찍한 일을 당할 줄 알아라, 라는 경고를 받는 소설. 딱 그거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
  <써커스의 밤>에도 고딕식 등장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19세기 후반에 키가 19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맨발로 서서 188cm) 장신과 건장한 체격을 지닌 영국 여인. 지금 시절로 얘기하면 2미터가 넘는 여자를 생각하면 된다. 거기다가, 놀랍게도 날갯죽지에 정말 날개가 돋았다. 심지어 비행까지 가능하다. 이름하여 헬렌 페버스. 직업은 곡예사다. 보통 고공 곡예를 하는 사람들은 키가 작아야 유리해서 당시엔 여자는 150미만, 남자는 160 센티미터 정도의 사람들이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었으나 페버스는 무려 190 센티미터. 거기다가 초특급 대우를 받는지라 주로 묶는 숙소는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며, 주요 사교 대상 역시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 별명은 곡예줄 위의 헬레네, 런던의 비너스 등.
  헬레네는 그리스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정을 통해 낳은 알에서 껍데기를 까고 나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알에서 태어났으니 헬렌 페버스의 날갯죽지에 날개가 돋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터. 여기서 드는 의문 두 가지. 아시다시피 조류의 교미시간은 길어야 2초. 근데 신 중의 신 제우스가 겨우 2초 동안 레다와 교접을 하려고 백조로 변신했을까? 게다가 조류 수컷은 돌출된 생식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생식강 비슷한 구멍이 있어서 통로와 통로를 맞붙인 상태에서 사정을 해 암컷의 체내에 흘려보낸다. (그래서 병아리 감별사가 유망직종인 것이기도 하고.) 제우스가 변신하기로 선택한 동물이 하필이면생식기도 없(는 것처럼 작)고 지속시간도 겨우 2초에 불과한 백조였다고? 흠. 의심스럽다. 두 번째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김알지를 비롯해 19세기 헬렌 페버스 등에게 아홉 달 여 동안 태반에서 영양을 흡수해온 통로의 말단, 배꼽이 있었을까? 첫 번째 의문은 책을 다 읽어도 해결이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의문은 풀린다. 근데 그것을 확인하려면 500쪽이 넘는 책을 거의 다 읽어야 한다. 확인해보시라.
  20세기 형 고딕소설 작가인 카터는 처음부터 우리의 날개 달린 비너스 헬렌 페버스에게 평탄한 인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런던을 따라 흐르는 템스 강의 북단 선착장 ‘와핑’에서 누군가가 세탁 바구니를 가져다 놓고 뺑소니를 쳤는데, ‘리지’라는 이름의 여인이 바구니를 열어보니 깨진 알 껍질이 어지러이 널린 가운데 분홍색의 갓 낳은 여자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때마침 리지의 신세 또한 어렵게 낳은 아이를 잃은 상태라 자기가 데려다 키우게 된 사연이 있었다. 처음엔 헨렌의 어린 날갯죽지엔 그냥 솜털 같이 생긴 것이 눈에 뜨일 정도로 소복하게 나 있었던 수준이었으나 점점 자람에 따라 확실하게 날개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보통의 고딕이겠으나, 의붓엄마가 된 리지의 직장으로 말할 거 같으면 “넬슨의 예술원”이란 곳인데, 눈 한 쪽을 선원이 휘두른 깨진 유리컵에 퐁당 빠뜨려 외눈이 된 창녀를 사람들이 트라팔가 해전의 애꾸눈 영웅 넬슨을 칭하는 ‘제독’이라 불렀고, 이 제독이 돈도 벌고 나이도 들어 창녀 여럿을 두고 사업장을 벌여 자신을 위해 일하는 창녀들에게 관대한 대우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리지는 처음엔 몸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페버스를 얻고 아기가 어린이로 자랐을 즈음부터는 부엌데기로 전직을 했다고 한다. 이때 이미 날개가 돋은 페버스는 넬슨의 예술원에 설치된 벽감壁龕에서 나신 비슷한 차림으로 날개를 노출시켜 마치 큐피드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성적이고 합당한 성격을 가진 제독은 죽을 때까지 결코 페버스에게 창녀의 직업을 주지 않았지만, 유언장 없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숟가락 놓는 바람에 예술원은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하여 예술원에서 쫓겨나 거처를 ‘배터씨’라는 동네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곤궁한 처지를 당하게 되자 육체의 쾌락이 대단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인 “슈렉의 집”으로 마담 슈렉을 찾아간다.
  슈렉의 집이란 애초부터 영혼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고 고딕 소설에 더 이상 맞춤한 곳이 없을 장소로, 헬렌 페버스는 네눈박이 올드 패니, 잠자는 미녀, 키가 90cm가 채 안 되는 위트셔 패니, 둘이 갈라져 한 쌍인, 다시 말해 반반씩이지만 각각은 아무것도 아닌 앨버트와 앨버티나, 거미줄이라 불린 여인, 입이 없는 남자 하인 뚜쌩 등과 함께 지내며 일종의 활인화 숍의 멤버가 된다. 이후 그 집에서 날개를 펼쳐 달아나 지금은 커니 대령이라 칭하는 서커스 단장의 팀에 합류해 명성을 떨치는 곡예줄 위의 헬레네로 활약하는 중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날 수 있어? 진짜 날개가 달린 사람이 있나? 하는 궁금증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었고, 이런 호기심마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나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태생이며 뉴욕의 한 신문사에 기사를 팔아 생활하는 프리랜서 기자 잭 월써가 헬렌 페버스를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잭 월써 역시 페버스와 함께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날개달린 페버스와 기자 잭 월써, 그리고 도저히 전직 창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학식과 언변을 지닌 리지가 런던, 쌍뜨뻬쩨르부르그, 씨베리아를 관통하며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데, 이거, 재미있다. 문학적 표현인 날개달린 거구의 여인이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자신의 것을 차례대로 상실하는 것은 틀림없이 작가가 주장하는 무엇인가를 은유할 터이며,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뉴욕의 청년이 바이칼 호 북부 지역에서 몽고계 아시아 무속인과 깊숙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틀림없는 은유일 터. 그걸 밝히는 것은 독자들 개인의 몫이리라.
  이 책을 읽고 앤절라 카터의 다른 책을 한 권 보관함에 담았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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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02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중고로 사들였는데
당최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ㅠㅠ

찾아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0-03-02 11: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매냐 님은 ‘기억‘이 문젭니다. ㅋㅋㅋ
 
[수입] 베토벤 : 현악 사중주 전곡집 [8CD]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Budapes / SONY CLASSICAL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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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61년 스튜디오 녹음.
  오랜 동안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들어봐야 하겠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갖고 살던 적이 있다. 후기 사중주 음반은 과르넬리 사중주단,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40년대 녹음, 바릴리 사중주단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전설적인 이 음반, 모두 여덟 장의 CD에 베토벤의 전곡을 담아 할인가 30,500원에 발매한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고, 생각 하고 말고가 없이 단박에 사서 들었다. 물론 그동안 이 녹음을 구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가격이 마음 약한 사람 심장마비 걸릴 수준이어서 이왕 40년대 녹음이 있는 바에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가 오늘날까지 왔던 것이다. 그간 음반 구입을 많이 망설여 왔었나보다. 2010년에 염가반으로 최초 발매를 한 것을 10년만에야 알았으니.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이어폰을 꼽고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오중주를 선택하려다 손가락을 잘못 움직여 베토벤의 14번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들었던 음원이 바릴리 사중주단의 녹음. 당시까지 듣기는 가끔 들었지만 남들이 좋다 하니까 그냥 좋은 곡인가 싶었던 것이 갑자기, 고막의 진동을 통해 가슴을 콱 찌르듯이 절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막 50세가 된 추운 날 아침이었다.
  나는, 다른 글도 잘 쓰지 못하지만, 음악을 듣고 느낀 감정을 글로 쓰는 일을 제일 힘들어 한다. 음악 공부를 조금 했으면 약간의 전문용어를 섞어서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마음에 와 닿는지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게 그런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문학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나은 것이 대학 2학년 시절까지 교양국어 같은 걸 통해 글을 읽는 방법 정도는 깨우칠 수 있었잖은가. 더군다나 음악이라는 장르는 문학이나 회화, 조각, 무용 등 다른 예술과 달리 자연이나 삶을 모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청자가 느끼는 감정, 감동, 흥분 같은 것을 구체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일이 진짜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이렇게 음악을 묘사하는 단어, 특히 형용사의 부족은 숱한 필자들로 하여금 공허한 수사로 음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하게 만들었다. 단어의 부족 현상에 열을 받은 한 시인이 스스로 두껍고 겁나게 비싼 화려 장정의 책을 낸 바 있으나 허망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지금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이 1958년부터 61년까지 컬럼비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여덟 장의 CD를 듣고 감상을 쓰려는 순간의 난감함을 고백하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작품도 아니고 쉰 살에 접어들고서야 비로소 듣기를 허락한 베토벤의 (특히 후기) 사중주에 관해. 음악이란 무엇일까. 악보를 읽는 것만이 진정하게 작곡가와 소통하는 길이다. 우리가 음악이라 생각하고 듣는 것은 작곡가와 청자 사이에 연주자라는 매개가 끼어들어 작곡가가 오선지에 그린 악보를 그들이 해석한 결과물을 듣는 일이다. 그것도 또 녹음을 듣는다면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가 한 번 더 개입을 한 것. 내 귀로 여태까지 들어본 모든 기계는 특별히 현악기의 음색을 완벽 ‘비슷하게’ 들려주지 못했다.
  거기다가 여태까지 가장 훌륭한 녹음이라고 단정하고 지내던 바릴리 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와 극명하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연주하는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연주를 듣고, 독후감이 아닌 소감을 쓰려하니 여태까지 A4 용지 한 장 분량 동안 변죽을 울리고도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음악을 들은 소감을 쓰는 일이 어렵고, 그것도 가장 유명한 연주단의 두 연주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벽이 앞을 가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얘기해보자.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58~61년 연주에 비하면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말랑말랑하다. 평온하다. 침잠한다. 느리다. 사색적이다. 단색이다. 소박하다. 은은하다. 천상의 기분이다. 곡을 내게 헌정한 느낌이다. 더 1 바이올린 위주라서 비올라와 첼로의 반주역할이 크다. 내가 듣기로는.
  주로 12번부터 16번 사중주와 <대푸가>를 후기 작품으로 구분하고 요즘 내가 제일 자주 듣는 곡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15번 3악장을 연달아 들어보면 이런 의견에 동의하실 줄 믿는다. 물론 호오를 분명하게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면 그동안 귀에 익어서 그런 줄은 모르겠으나, 내 취향으로는 바릴리 사중주단의 연주가 더 편하다고 말하겠지만, 확실한 건 부다페스트의 이 음반도 바릴리에게 최고의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을 거란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언제나 음악을 문자로 말하는 건 어렵고 어렵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3악장



  * 이렇게 전곡 녹음을 구입하면 좋은 것이, 여간해 듣지 않는 숨겨진 곡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초기 작품 가운데 몇 몇 곡 속에 정말로 “숨겨진” 낭만성이 놀랄 만하다.


  * 음악이란 것이 신기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왜 이 연주가 좋은지 이야기하기는 무척 곤란하지만, 한 번 진짜(라고 청자가 느낀 연주)를 들은 후에 다른 연주단의 연주를 들으면, 그게 주관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단번에 ‘에이, 이건 아니다.’ 하는 감정이 확 든다는 거. 그래서 보편적으로 특정 작품에 관해 소위 ‘명반’이 탄생하는 것일 게다.

 

위에서 얘기한 바릴리 현악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집.

나는 전곡이 아니라 개별 CD들로 후기 곡들과 일부 중기곡만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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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 앨범 저도 몇 년 동안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는데, 그렇단 말이지요? 올해는 꼭 사야겠습니다. ㅎㅎ (사실 알라딘에서 1년에 한 번 수입 앨범 할인전 할 때 이 앨범은 2만원대에도 살 수 있습니다. 쿨럭;;)

Falstaff 2020-02-27 14:21   좋아요 1 | URL
옙. 이건 정말 물건입니다!
근데... 2만원대... 아,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ㅋㅋㅋㅋ

oren 2020-02-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은 거의 매일 듣고 살지만, 막상 그 음악을 언어로 표현할라치면 언제나 막막하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그토록 표현하기 힘든 음악도 어떤 이들은 어찌 그리 잘도 표현하던지, 그런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부러워 죽겠더군요.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가운데 14번은 <마지막 사중주>를 본 이후 언제 들어도 가슴을 흔드는 곡이 되었더랬지요. 보름쯤 전에도 어떤 이가 스마트폰으로 그 음악을 듣고 있길래, 참 좋은 음악 들으시네요. 베토벤의 어쩌구 저쩌구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좋아하더군요.^^

https://blog.aladin.co.kr/oren/6529278

Falstaff 2020-02-27 20:07   좋아요 2 | URL
14번 사중주는 무려 7악장을 한 번의 쉼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난곡이라고 합니다. 듣기엔 후기 작품 가운데서는 말랑말랑하니 좋습니다만 연주자들은 죽어나가는 곡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얘기하신 영화를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네요. ^^
아직까지 아쉽게도 전 음악을 잘 표현한 글을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비극입니다. ㅠ

oren 2020-02-27 20:28   좋아요 2 | URL
니체만 하더라도 그 어떤 음악평론가 못잖게 숱한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작품에 대해 예리한 글들을 많이 남겼던 듯합니다. 바그너를 비롯,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 비제, 롯시니 등등의 음악을 어쩌면 그토록 예리하게 파고드는지 저는 정말 감탄을 거듭했더랬습니다.
* * *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가라앉을 때 상상력을 가지고 물러서지 말라. 그러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이제,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에서 각자는 자신의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고, 융해되어 있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베일이 갈가리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一者)‘ 앞에서 조각조각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웃과 하나가 됨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그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 니체,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장

Falstaff 2020-02-28 09:05   좋아요 2 | URL
니체 역시 음악을 이야기한 것이라기 보다, 음악을 매개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습지요. 그냥 니체의 문장과 특유의 철학적 논의, 단문을 엮어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드는 일 같아서요.
저는 한 번도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디오니소스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을 추앙한 환희의 송가를 디오니소스와 연결시켜 들을 수 있는 철학자, 신학자는 망치를 내려쳐 신을 살해해버린 니체 말고는 없을 겁니다.
니체가 평한 바그너도 그렇고 비제도 그렇고, 그는 음악을 자신의 철학을 위한 한 제재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요. 니체도, 음악도.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건, 맞춤법 이야기가 아니고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을 봐서 사실 내용이 엉망이 된 일을 이야기했던 겁니다. 주로 나라 이름 때문에요. 秦과 晉, 衛와 魏 이런 것들이요. ^^;;

oren 2020-02-28 12:34   좋아요 2 | URL
니체가 음악을 메타포로 철학을 설파했다는 말씀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단순히 자신의 철학을 위한 재료로서 음악을 이야기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직접 작곡까지 할 정도로 ‘음악예술‘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로 보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연히 ‘니체가 작곡한 음악‘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니체의 음악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가 심심찮게 열린다고도 하더군요.

혹시나 해서, 조금 전에 ‘니체와 음악‘에 관련된 책은 나온 게 없나 살펴봤더니, 그럴 듯한 책이 한 권 나와있네요. 알라딘 책 소개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덧붙입니다.^^

* * *

니체가 크게 은혜를 입은 중요한 ‘스승’ 쇼펜하우어가 그랬듯이, 니체도 음악적 메타포를 자주 동원한다. 건반, 끈의 진동, 불협화음, 화성, 선율의 메타포…… 이 메타포는 그의 말을 꾸며주고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생(生)의 메타포다. 태초의 인간과 문명이라는 화성(和聲)의 마그마, “심히 불안을 자아내는 근음(根音)”에서 떠오르고 차츰 분명해지는 선율에서 “자유로이 제멋대로” 나아가며 의욕과 “인간의 완전한 의식의 욕망”을 우리가 알아본다면, 음악은 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의 메타포다. 그 음악이 정점에 도달할 때, 인류가 때때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보게 되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강력한 개인성”은 음악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의 “지속화음”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자기 글을 악곡과 동일시하여 『도덕의 계보학』을 3악장짜리 소나타라고 말할 때,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일종의 교향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 첫 권을 베토벤 교향곡 9번 의 첫 악구에 비유할 때, 이를 단순한 음악 애호가의 꾸밈이나 겉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마도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음악에만 해당할 것이다”라고 쓸 것이다. 니체는 확실히 “들음(聽)의 재생”을 전제한다. 그러나 니체는 늘 깨어 있는 귀로 읽어야 하고, 이건 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읽기는 무엇보다 듣기이기 때문이다.

- <니체와 음악> 중에서


* 민음사 역사서의 교정 교열에 관한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