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랜 세월 알라딘을 이용해온 고객입니다. Falstaff 라는 이름을 쓴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서재도 4년 전에 만들었을 뿐이지만 하여튼 책 좀 읽는다는 독자 가운데 한 명일 겁니다. 플래티넘 고객이기도 하고요.

  문제는 북플이었습니다. 어제, 그러니까 2020년 6월 26일 아침부터 북플을 열면 아래와 같은 서비스 주의 사항이 뜨는 겁니다. 제 북플 화면에는 아직도 같은 메시지가 뜹니다.

 

하루종일 무시하고 있다가 퇴근 무렵에 결국 아래를 클릭했습니다. 바보같이.

 

 

  그랬더니 제 계정 전부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4년간 쓴 독후감, 서재 친구들 리스트는 물론이고 7만원이 넘는 적립금, 1만원 중반 대의 마일리지, 여태까지 구매한 리스트, 보관함 내역, 아놔, 금요일에 살까 하다가 7월 초에 추가 적립금 받아서 한 방에 사야지, 하고 대기했던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 여섯 권 세트 외의 것들까지. 그냥 구입할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북플 여태 안 하다가 뭐하는 짓인지 말입니다.

 

  뭐 알라딘이 복구는 해주겠지만 이게 무슨 시간 낭빕니까. 이런 바이러스는 누가 만드는 건지 참, 정말 사이코에다가 니힐적 사디스트 같아요.

 

  여러분, 조심하세요. 혹시 이런 메시지 뜨면 절대 클릭하지 마세요. 피해자는 저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 서재도 복구가 되었는데요, 서재 친구들은 다시 사귀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이나마도 다행이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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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읽는책 2020-06-3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기 안녕하세요! 제가 오르한 파묵 <검은책>리뷰를 보고, 책 다 읽고 히뷰읽으러 오겠다고 덧글을 남겼었는데 그분이 맞으신지요? 리뷰를 찾아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수가 없어서 어떻게 된거지..??? 하고 있었는데 오르한 파묵 리뷰도 남겨주신 분 맞으신지요??

Falstaff 2020-06-30 08:46   좋아요 1 | URL
예. 맞습니다.
그 사이에 알라딘 궁에 해적들이 침입해 와서 제 모든 계정이 그만 피살을 당했답니다.
<검은 책> 독후감은 여기에도 있어요. 별거 아닌 독후감을 기억해주시다니, 감격입니다. ㅠㅠ
https://blog.naver.com/wunderhorn/221080952018

GoldenSlumber 2020-06-3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리뷰 보러 종종 서재를 들르는데 계정이 폭파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얼른 복구되시길 바랍니다.

Falstaff 2020-06-30 14:09   좋아요 1 | URL
복구는 현재가 최선이라고 하네요. 마일리지하고 적립금 돌려주는 거요.
서재 독후감 써놓은 거, 서재친구들 목록, 이딴 건 그냥 다 묻힌답니다.
그래서 슬럼버님에게 친구 신청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
근데 이름이 너무 좋아요, golden slumber, 아 정말 부럽습니다. 언제 한 번 저도 그렇게 자 보나... 싶어서요. ㅋㅋㅋㅋ

hnine 2020-06-30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새벽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알라딘, 꼭 복구해주겠지요? 그래야만 하는데.

Falstaff 2020-06-30 14:11   좋아요 0 | URL
헙. 저도 hnine 님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노무 알라딘에 아예 접속하기가 팍 싫어지더라고요. 와, 순식간에 정이 뚝 떨어지는데 그거 붙이느라 한 3일 걸리더라고요.
복구는 안 된답니다.
˝자진해서˝ 알라딘 탈퇴한 걸로 표시가 된다더군요.
문제는 북플에 접속하면 아직도 똑같은 메시지가 표시된다는 겁니다. 세상에나...
무서워요. 덜덜덜.... ㅋㅋㅋㅋ

잠자냥 2020-06-30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게 정녕 복구의 끝이랍니까?
이 낯선 뚱땡이 폴스타프는 무엇입니까??? ㅋㅋㅋ 예전 폴스타프가 왠지 더 폴스타프스러운데 말입니다. ㅎㅎㅎ
암튼 이렇게라도 돌아오신 것 환영합니다. 이 호색한 이미지의 폴스타프에게도 적응해야겠죠. ㅋㅋㅋㅋ

Falstaff 2020-06-30 15:16   좋아요 0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이렇게 반겨주시니요. 하하하하....
친구는 다시 사귀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얼른 친구신청 했습니다. ^^

밤에읽는책 2020-06-30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북플;;; 안심하고 쓸 수가 없겠어요 .. 복구하시느라 고생이십니다;;;

Falstaff 2020-06-30 20:06   좋아요 0 | URL
다행스럽게도, 알라딘에서 연락이 와서요, 회사의 실수임을 인정했답니다.
이제 100% 완벽 복구는 힘들더라도 많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coolcat329 2020-07-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엊그제인가요. 다른 분. 글들은 다 들어가지는데 폴스타프님 글만 튕기고 안 들어가지는거에요. 제가 얼마나 읽고 싶었으면 북플을 삭제하고 다시 설치했는데도 역시나 안되더라구요. 이런 일이 있었군요...

Falstaff 2020-07-15 16:06   좋아요 0 | URL
윽! 그러셨습니까. 이런....
저도 예전에 제가 쓴 글에 원활하게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알라딘에선 복구가 완료됐다고 하는데요, 사과한다고 주는 적립금 만원 받고 헤~ 해버린 대가로 그냥 참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7-15 15:45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요즘 폴스타프 님 새로 복구하신 뒤로.... 저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새 글 올리시면 똑같은 글이 두 개 나란히 중복으로 올라와요(북플 및 컴터로 보는 서재 모두 그러하옵니다).ㅋㅋㅋㅋㅋㅋ 이것도 알라딘의 과한 배려일까요?

Falstaff 2020-07-15 16:04   좋아요 0 | URL
음하하하.... 거 참 재미있군요.
근데 왜 그럴까요? 참, 저도 어느 분이던가, 글 두 개 뜨는 것 봤습니다.
알라딘 전산 쪽에 한 번 물어봐야겠네요. 이거 참 웃긴 배려네요. ㅋㅋㅋㅋㅋㅋ
 
청춘예찬 범우문고 235
민태원.이육사 지음 / 범우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별점은 작품 <청춘예찬>이 아니라, 하드웨어로의 이 책 《청춘예찬》에 대한 평가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글은 대부분 당대 최고의 명문일 경우가 많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를 통해 읽고 공부하고 시험문제에도 나와 풀어본 <청춘예찬>. 이 수필을 읽어보기로 결심을 하기까지 매우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머리가 채 커지기도 전에 주위에서 이런 저런 수필집을 권하고는 했다. 수필집의 제목을 밝히기도 송구할 정도의 높은 학문, 숭고한 종교적 성찰, 흉내 낼 수 없는 철학적 깊이로 이름이 높은 분들이 쓴 수필집을 몇 권 읽기는 했다. 그러나 도무지 적응을 할 수 없었던 거다. 이토록 높은 성가를 즐기며 서울 시내 종이 값이 하늘을 찌르게 만드는 베스트셀러 수필집이 어째 내 눈에는, 내가 읽기로, 이제 겨우 대가리에 쇠똥이 벗겨지기 시작한 내가 인식하기로, 한낱 신변잡기나 잡문 또는 낙서, 아니면 괴문서처럼 읽히는 거였다.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사실은 잘난 척 말고는 별로 하는 일 없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두뇌활동을 사색이라는 이름으로 윤색한 것에 불과한 책을 읽고 도대체 배울 것이 없는 잡문이라 결론을 지었다. 이후 수필은 안 읽겠다고 결심을 했으며, 수십 년 동안 결심한 바를 지켜왔다. 그러나 올해부터 수필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변영로의 <명정 사십 년>에 이어 이번에 민태원의 <청춘예찬>. 며칠 후 양주동의 <문주반생기>도 계획에 있다. 수필. 내 생각으로 가장 쓰기 어려운 산문이 수필 같다. 아무나 그저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은 수필이라고? 천만의 말씀. 어떤 글이 수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정의도 내리지 못하겠다. 우리는 위대한 수필의 나라에 살아왔지 않은가. 나라의 행정 업무를 담당할 높은 직위의 공무원을 뽑는 과거 시험에 무려 9백 년 동안 좋은 글씨로 쓴 멋있는 수필을 요구해왔던 해동수필국. 그러니 어떤 것이 수필이라고 내가 굳이 따로 설명할 이유가 없다.
  <청춘예찬>. 이런 것이 수필이다. 물론 낡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라는 표현이 신선한 은유였던 시절에 쓰인 수필이니. 그러나 청춘,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봄바람의 시절을 이렇게 강건한 문체로 화려하게 쓴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글쓴이 민태원. 갑오농민전쟁이 있었던 1894년생. 약관 20세에 매일신보에 입사해 사회부장까지 하고 기미독립만세운동 이듬해인 26세 때 동아일보로 옮기고 회사의 지원을 받아 와세다 대학에 유학한다. 서른 살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서른두 살에 중외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옮기는 매우 바쁜 사회활동을 한다. 서른여섯 살에 중외일보가 폐간됨에 따라 잠시 실직을 하다가 만주의 친일신문인 만몽일보 창간에 그만 발을 딛어 한동안 친일인사의 낙인이 찍히고 만다. 민태원이 친일신문의 창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성원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 곧바로 발을 뺐으며, 이에 문학평론가 윤고종은 오히려 뼈저리게 느끼던 일제의 압박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항거에 몸을 바친 애국문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민우보(민태원의 호 牛步)는 신문기자로서 일제의 거듭하는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필봉을 굽히지 않았고……”라고 썼다. 그가 1935년에 폐결핵으로 사망을 했으니 친일행위를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을 듯한데 그건 역사가의 해석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초간이 1976년. 민태원의 작품으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일어 중역한 <애사哀史>, 부아고베의 <철가면>을 역시 일어 중역한 <무쇠 탈>과 <죽음의 길>이라는 번역 소설 등이 있고, <어린 소녀>, <음악회>, <천야성> 같은 소설을 창작, 발표한 바 있으나 해방 후 격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필 세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자료는 모두 망실되었다고 한다. 그래 이 책에는 민태원의 세 편의 수필 <청춘예찬>과 <월남 선생의 일화> 그리고 잡지 “개벽”의 의뢰로 충남지방의 특징에 관해 쓴 글 <추억과 희망> 이렇게만 실려 있다. 다 합해봐야 30쪽도 되지 않으니 그래도 한 권이 책으로 만들기 위해 이육사의 수필 열세 편을 함께 실었는데, 아뿔싸, 육사의 수필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이육사 시집》에 전편을 이미 실린 것들이다. 그러니 이 책은 온전히 민태원의 세 수필만 읽기 위한 것이 됐다.


  이제 다시 세월이 흘러 민태원의 작품을 읽어보려 하면 이 책이 아니라 당연히 ‘현대문학’에서 나온 《민태원 선집》을 읽어야 할 것이다. 《민태원 선집》은 범우사가 《청춘예찬》을 찍고 34년이 흐른 2010년에 출간한 것으로 수필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망실됐다고 생각해온 민태원의 창작 소설 세 편과 김옥균 평전 비슷해 보이는 <오호 고균거사嗚呼 古筠居士 - 김옥균 실기>까지 실려 있으니 굳이 내가 읽은 범우사의 옛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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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6-26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춘예찬의 저자로만 알았지 정작 민태원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덕분에 자세히 알고 갑니다. 소설까지 낸 바 있다는 것도요.
그러니까 저는 범우사의 <청춘예찬>이 아니라 현대문학에서 나온 < 민태원 선집>을 읽어야겠군요.
수필이란 그저 붓가는대로 쓴 글이 아니라는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적어도 자기만의 통찰이 있어야 하고 그 통찰과 사유의 결과가 담겨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남들이 이미 한대로, 쓴대로 말고 ‘자기만의‘ 무언가 담겨야 한다는 점에서 아무나, 아무때나 쓸 수 있는 글 같진 않아요.

Falstaff 2020-06-26 11:28   좋아요 0 | URL
이 분이 너무 일찍 가고, 남긴 저술이 몇 개 없었던 모양입니다. 소설 역시 당시 소설들이 그래야 했듯이 계몽적 요소가 많이 들어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분의 책을 읽을 만할까,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청춘예찬>이 명문이라 그것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읽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월남 선생의 일화> 같은 거는 국한문 혼용이지만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좀 쉬울 정도라 아예 사전을 열어놓고 읽어야 할 정도입니다.
수필을 쉽게 알고 막 써낸 수필집 때문에 오랜 동안 멀리 해왔습니다. 어떤 것이 잘 쓴 수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에는 공감하지만 어떻게 통찰과 사유의 결과를 알아서 읽어야 하는 것인지, 에휴.... 끝이 없습니다. 걍 소설이나 읽고 마는 게 제일 속 편합니다. 하하하......
 
마루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베시 헤드가 쓴 <권력의 문제>를 읽고 이이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93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생인데, 1930년대에 백인 어머니와 당시엔 사람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흑인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이이의 앞에 남은 구만리 같은 한 생애가 녹록하지 않으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아봤다. 아프리카 남쪽의 흑백 혼혈을 ‘컬러드colored’라고 칭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백인 아버지가 노예와 비슷한 흑인 하녀와 관계해서 낳은 자식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경영하는 상점의 점원노릇을 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를 포함해 세상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베시 헤드처럼 거꾸로인 경우엔, 흑인 남자는 백인들에 의하여 무참한 린치를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들었다. 이이의 경우엔 어머니가 신경증 증세가 심해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병원으로 보냈고, 아이는 가톨릭을 믿는 혼혈 유색인 부부에게 입양을 시킨 후, 그래도 혈육이라고 외할머니가 열네 살이 되는 해에 법원에 데려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정치활동을 하기도 하고 유명 예술가에게 성폭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쉽지 않은 시절을 살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보츠와나로 주거지를 옮기고 그곳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잠깐 했다. 그때 학교 교장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갈등을 겪은 내용을 고스란히 <권력의 문제>에서 증언하면서 남녀 간 권력의 문제를 통해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자리를 굳힌다. 이번에 읽은 <마루>의 경우도 극명하게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남자에 의한 여성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피부색의 농도와, 같은 농도의 피부색일지라도 종족에 따른 권력의 유무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천착한다. 이 작품은 베시 헤드가 망명한 보츠와나의 세로웨에 정착해서 쓴 <비구름이 모일 때>, <마루>, <권력의 문제>, 그의 소설 삼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권력의 문제>보다 쉬운 문장과 구조인데다 적은 분량으로 되어 있어 무거운 주제일망정 금방 읽을 수 있다.
  유난히 비뚤어진 정신세계 때문에 지구상 어디에서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종이 있다. 바로 백인들이다. 그들은 백인종이 아닌 다른 모든 인종의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습관이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이 되어 이제 자신들의 가치체계마저 세계에서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판정하려고 한다. 이들은 일찍이 동양인에게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해 경멸했으나, 동양인들은 아프리카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잘 읽어야 한다.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을 칭하는 말이다. 백인들은 이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도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이라고 경멸했지만, 이들은 또 적어도 부시먼이 아니어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단다. 부시먼을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인도가 수천 년 전통이라 자랑스레 내세우는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천한 불가촉천민 계급인 수드라 정도로 이해하면 될지 모르겠다. 같은 아프리카에서 사는 흑인이라도 부시먼이 나타나면 노예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거나, 마치 나병 환자처럼 옷자락에 종(대신 빈 깡통)을 달고 다니게 하거나,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얼굴에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거나, 바로 앞에서 ‘더러운 부시먼’을 외치면서 온몸을 흔들며 모욕적인 춤을 추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가 들어와 곳곳에 학교, 병원, 교회가 들어섰고, 대개의 경우 선교사는 교회를 책임지며, 선교사의 아내는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나 보다. 책에서도 날 때부터 바보 천치 비슷한 수준의 덜 떨어진 선교사가 매우 진취적이라서 딱 그만큼 다른 인종에게 가혹하기도 한 덩치 큰 아내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와 함께 아프리카에 들어와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다가, 선교사가 먼저 그리운 주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이제 과부가 된 교장선생님은 성질이 급하고,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반면 늘 원기왕성하게 힘든 일을 척척 해치우면서도 뛰어난 유머 감각까지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는 유럽 백인스럽게 과학적 사고방식에 입각해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애를 쓰며, 인간은 유전적 형질보다는 양육되는 환경에 따라 앞날이 정해진다는 굳센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프리카까지 와서 은퇴하는 나이가 되도록 학교 선생을 하고 있지.
  흑인 동네를 간신히 벗어난 관목지대에 부시먼, 마사르와 족 여인이 땅바닥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이미 죽은 시신일지라도 절대로 마사르와의 몸에 손을 대기 싫은 주민들은, 신기하게도 고귀한 백인들이 더러운 부시먼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주는 것을 기억해내고 냅다 교회로 달려가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래 현장에 도착한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 여사가 시신을 보니 영양실조로 바싹 마른 두 다리에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어 굳은살이 박인 발을 한 누더기 여인. 이미 죽은 불쌍한 시신에게 무차별적으로 증오를 쏟아 붓고 있는 운 좋은 자들의 시선과 욕설을 모른 척하고 일단 병원의 안치실에 시신을 보관한 다음 장례를 위해 간호사들에게 시신을 닦으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나 간호사들이 부시먼의 시신에 손을 대? 천만의 말씀. 기어이 여사에게 한 바탕 엄한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대강대강,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가 아닌 시멘트 바닥 위에서 처리를 해버리는 수준이다. 하여간 매장을 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죽은 자의 딸을 시설에 넘기려다가 갑자기 반짝, 전에 유전보다는 환경이 우선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직접 실험해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맡아 정식 교육을 시켜가며 기르기로 결심을 한다.
  가히 신과 같은 백인이 키우는 아이더러 누가 감히 드러내놓고 부시먼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아이를 보고 더러운 혈족이라느니 덜 떨어지고 미천한 족속이라느니, 개새끼라고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어서, 세월이 조금 지난 후 미션스쿨에 입학해 학급의 절반이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이며 간혹 다른 아이가 “부시먼 주제에!”라고 시건방을 떨어도, 보츠와나의 가장 큰 종족인 바츠와나 족이 부시먼을 노예나 개 취급을 할 때를 빼고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데려온 후 17년이 지나 캐드모어 선생은 제자들 가운데 특출한 학생을 발견하는 기적을 만난다. 바로 자기가 주워와 키운 소녀. 그러나 몰랐을 것이다. 소녀 마거릿은 학교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집안의 다른 흑인들 속에서 거의 완전하게 소외를 당하는 것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 소외에서 비롯한 소통의 결여를 책을 읽는 방법으로 해소하고자 했다는 것을.
  그러나 기적을 발견한 캐드모어 여사는 그 해에 바로 은퇴할 나이가 되어 열일곱 살의 마거릿에게 50 파운드를 주고 영국으로 떠나버리고, 마거릿은 여사가 기분 좋을 때 쏟아놓고는 했던 농담과 웃음, 재미와 기상천외, 그리고 무엇보다 보장되어 있을 것 같던 약동하는 행복이 여사의 귀국과 동시에 상황이 종료되고 만다. 캐드모어 여사가 마거릿에게 남긴 것은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을 정도의 학력과 50 파운드의 돈, 그리고 교훈 몇 가지. 입술연지는 바르지 말고 눈 화장은 해도 좋다. 너는 눈동자가 예쁘니까. 겨드랑이 털은 정기적으로 밀고 향기 나는 분을 칠해라, 같은 것들. 그리고 달포 후 여사로부터 엽서가 한 장 도착한다.
  “네 종족을 위해 어쩔 수 없었을 뿐, 너를 남겨둔 채 그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단다.”
  백인들이 다 그렇지 뭐. 마거릿이 알다시피 캐드모어 여사는 부자였을 뿐 선한 사람은 아니었다.
  넉 달 뒤, 마침 사범학교를 졸업한 마거릿 캐드모어 주니어는 ‘딜레페’라는 이름의 외딴 오지마을의 학교로 첫 교사직 발령을 받아 마치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 들면서 이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얽히고설켜 딜레페의 사실상 대족장인 작품의 주인공 마루와 연결이 되는지, 연결이 되기는 하지만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붐소설에서 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핵심인물인 젊고 유능하고 신과 같은 왕이 되고자 하는 마루와 무사하게 사랑하는 사이가 될지 말지는,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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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리의 잃어버진 천재, 영숙이가 다시 등장한다!

 

   미쳤어 정말. 영숙이도, 창피도.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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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24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영숙이가 쓴 드라마 보는 사람이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는 또 엄마 타령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6-24 09:50   좋아요 2 | URL
긁적긁적... 사실, 이번엔 아빠랍니다. 돌려가며 다 팔아먹는 거예요. ㅎㅎㅎ

잠자냥 2020-06-24 09:55   좋아요 2 | URL
푸하하 너무 절묘하게 디쟌하셨습니다. 폴스타프 님 포토샵 재능까지 겸비! ㅋㅋㅋㅋㅋ 아니, 이젠 정말 아빠 타령이네요. ㅋㅋㅋㅋ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송순섭 옮김 / 버티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제 우리말로 번역한 보후밀 흐라발은 다 읽었다. 공산주의 체코슬로비아 치하에서 흐라발의 수다한 작품들이 판매금지 조치를 당해 생전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영국 왕을 모셨지>와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이렇게 세 편만 소개되고 있어 아쉬운 바가 작지 않다. 출간한 책마다 금서의 딱지가 붙어도, 또 다른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자 노상 노벨문학상 수상 예상자의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밀란 쿤데라와 달리 죽으나 사나 체코 땅 안에서 금서 작가의 면류관을 쓰다가 1990년 벨벳 혁명을 맞아 조국이 민주화되는 광경을 목도하였으니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그러나 7년 후, 흐라발은 프라하의 한 병원 5층에서 아스팔트를 향해 자유낙하 해 죽었으며, 아직도 이 사건이 자살인지 살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책의 부록 겸해서 실린 단편소설 <간이주점>을 읽어보면 혹시 자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가까이서 본 열차>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개봉했던 모양이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이 영화가 죽기 전에 봐야 할 1,001 편 가운데 하나로 든다 하니 꽤 괜찮은 평을 받은 거 같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보리라 마음먹었다.

 

 

 

  1945년 2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중부 소도시에 있는 작은 기차역이 작품의 배경이다. 이 역에 스물두 살 먹은 철도학교 졸업생이자 철도 업무를 배우고 있는 수습생 ‘밀로시 흐르마’라는 청년이 재직하고 있다. 소설은 이 밀로시 흐르마의 일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는 바, 먼저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 청년에 관해 설명을 좀 해야겠다.
  밀로시의 증조부 루카시 할아버지. 1830년생인데 18세 되던 1848년에 당시 보헤미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해 육군에서 북치는 고수鼓手로 카렐대교 전투에 참전한다. 카렐대교 전투? 보헤미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보헤미아의 독립혁명 중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루카시 할아버지가 전심전력을 다해 북을 쳐서 그리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투는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오스트리아 군대의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루카시는 다리 위에서 동포 학생들이 던진 돌에 무릎을 맞아 평생 절름발이 신세로 보내야 했다. 막강한 국력과 국부를 자랑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충성스런 열여덟 살 먹은 보헤미아의 청년 상이군인에게 원호보상으로 매일 금화 한 닢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도 하고 진짜로 주기도 했다. 루카시 할아버지는 이 돈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럼주 한 병과 담배 두 갑을 사서 일부러 힘들게 일을 해야 그저 먹고 살 수 있는 보헤미아 시민들 곁에 다가가 술을 마시고 고급 담배를 피우다가, 당연하게, 자주 시민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아 거의 분기에 한 번씩은 아들이자 밀로시의 할아버지가 손수레에 실어 와야 했을 정도였단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가 망할 때까지 무려 70년 동안을. 아, 오스트리아가 망했다는 이야기지 루카시가 죽었다는 건 아니다. 그는 1935년에 백다섯 살이 되는 해에 막 채석장을 폐쇄해 이제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노동자들 앞에서 술과 담배를 자랑했다가 얻어터져 드디어 천국의 환희를 맛보았는데, 의사가 검사를 해보더니 앞으로 20년은 확실하게 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했을 정도란다.
  할아버지는 서커스단에서 맹활약한 최면술사 출신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이이가 최면술사가 된 건 일하기 싫어하는 자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그랬던 거라 결론을 냈다. 그러나 1938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를 침공하자 할아버지는 독일군 탱크를 저지하고자 나선 유일한 사람으로 기억되기에 이른다. 그는 부대를 선도하고 있는 탱크 앞에 맨 몸으로 우뚝 선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로 선도 탱크는 할아버지 앞에서 우뚝 멈추고, 탱크를 따르던 모든 독일군 병력도 당연히 그 자리에 멈춰버리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탱크의 해치를 열고 지휘하는 사람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수십 년 동안 밥벌이였던 최면을 걸기 시작한다. 그러나 몰랐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최면이 통하지 않았던 지휘자는 탱크를 진격하도록 명령했고 절대로 최면을 멈추지 않았던 할아버지를 박살내며 전진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저주로 인해 탱크는 프라하를 앞에 두고 멈춰 서버리고 마니, 궤도 안에 이물질이 끼어 그것을 빼지 않는 한 꼼짝도 안 하는 상태가 된 것. 그래 크레인이 한 대 동원되어 탱크를 들어 올렸을 때 나타난 건 할아버지의 머리였는데, 온전한 장례를 치루기 위해 달려온 밀로시의 아버지 발아래로 얼굴이 또르르 굴러와 그나마 아버지를 잃은 위안이 되었더란 것. 어쨌거나 독일군이 체코를 침공했을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일하게 나선 사람이 바로 밀로시의 할아버지였던 거다.
  밀로시의 아버지는 기관사 출신. 스무 살 때 시작한 기관사 일을 마흔여덟까지 하고 일찌감치 은퇴를 결정했는데, 28년간 노동의 대가로 지금은 재직할 당시의 두 배에 가까운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시간이 남으니 이것저것을 만드는데다가 취미를 붙이고 산다. 예를 들어 연합군 전투기에 격추되어 동네에서 좀 떨어진 벌판에 독일군 전투기가 추락하자 냅다 달려가 비행기 잔해에서 나온 항공유의 도관導管을 가지고 와 60개의 파이프로 잘라 샤프 연필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그러니 하여간 밀로시가 타고난 흐르마 가문을 보통사람이 본다면 이들의 집단적 특징으로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스물두 살의 밀로시는 어떤가. 밀로시가 프라하 카를린에 사는 노네만 사진사의 집에 며칠 묵은 적이 있었다. 밀로시를 위하여 내줄 방이 없어 촬영실의 카우치에 이불을 덮고 자기로 했는데, 노네만 씨의 조카인 사랑하는 마샤가 담요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뿔싸. 밀로시한테는 일종의 증상이 있었던 것을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숫총각이었거든.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 이게 어떤 증상인가 하면, 성적 자극이 되어 잔뜩, 통증이 올 정도로 피가 몰린 생식기가 이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할 결정적 시기가 오니까 그만 급성으로, 급성이라기보다 특급열차처럼 생식기에 몰렸던 피가 순식간에 다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현상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끔가다 겪는 일이지만 문제는 밀로시가 아직도 한 번의 경험도 없었다는 거. 뭐라? 당신은 한 번도 이런 증상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그럼 기다려보시라. 곧 그런 시기가 도래할지니. 하여튼 밀로시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밀로시는 역으로 가 아무 곳으로나 가는 열차표를 끊고 도착한 곳이 베네쇼프의 비스트르지체. 역 앞의 자그마한 여관에 들어 욕탕에 뜨거운 물을 받은 다음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이 주는 고통을 느끼면서 몸을 담그고 면도날로 오른 손으로 왼쪽 팔을 그은 다음,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해놓은 면도칼 위를 오른 손목으로 강하게 내려쳐 마치 로마의 귀족처럼 죽어버리기를 바랐으나, 세상에 주인공이 중간에 죽는 거 보셨어? 극적으로 구조되어 3개월 병가처리. 정신병원에 있을 때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는 누구나 겪는 것이며 밀로시 같은 젊은 청년의 경우엔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도와주면 금방 극복할 수 있다는 처방을 받았다. 이제 다시 역무원으로 복귀하여 일상의 일을 하고 있게 됐으니, 다음엔 이 역에 어떤 인간들이 있는지도 한 번 봐야겠다.
  완전 뺀질이 후비치카 씨. 이 양반은 마음을 먹으면 일단 저질러버리고 마는 성격이다. 그래 나이가 차도록 승진 한 번 못해보고 비슷한 또래가 역장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배차계장에 머무르고 있지만 체코의 철도계에선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최근에도 사고를 한 번 친 바 있어서 철도계는 물론이거니와 5km에 이르는 벌판의 끝에 자리한 성의 주인인 킨스키 백작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는데, 전신원 즈데니츠카 또는 애칭으로 즈덴카를, 야간 근무할 때, 전신기에 엎드리게 해놓고 치마를 훌렁 걷어올린 다음, 엉덩이에 대고 역의 모든 직인/스탬프를 쾅쾅 찍어버렸던 거다. 그래 이 사건이 형사법정에 까지 가야 하는 성폭행 사건인지, 아니면 역의 징계위원회에서 끝내버릴 업무시간 근무태만의 건인지 가리기 위해 철도 본부에서 국장이 직접 방문할 예정인데, 암만해도 사실의 이모저모가 궁금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사회정화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한 역장은 인생의 두 가지 목표가 있는 인물로 하나는 철도청 감독관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루제 가문의 란스키 남작이란 칭호를 얻는 것이다. 이런 인간을 쉬운 말로 극도의 속물이라고 하는데, 취미생활로 뉘른베르크 종 비둘기를 키우는 것이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해서 자신이 흐라데츠로 출장 간 동안 비둘기의 목을 전부 비틀어버리라고 해놓고, 오는 길에 폴란드 종을 새로 사 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이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스트레스가 올라오면 즉시 커다란 파이프에다 대고 온갖 욕을 해대는 것이고,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아내를 향해 이것저것 욕설을 해대는 것이었는데 볼라리 지방의 정육점 집 딸인 아내는 평소엔 역무실에 앉아 넓은 식탁보에다 얌전하게 뜨개질을 하는 어여쁜 여인임에도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남편의 가리지 않는 욕설을 견디지 못하고 귀싸대기를 올려 부치는 경우가 있었다.
  한 마디로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다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었으니 자기들을 침략한 독일의 군대. 우리의 밀로시는 발음하기에도, 기억하기에도 고통스러운 에야쿨라치오 프레콕스를 치유하기 위하여 역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지하에 내려가 역장의 부인에게 말을 잘 듣지 않는 자신의 몸을 좀 만져달라고 부탁을 하고, 이미 갱년기가 지난 역장의 부인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불쌍한 바 작지 않아,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도와줄 터인데 차마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하는 와중에 역 전체가 부르르 진동을 하니 저 지평선 너머가 갑자기 불빛에 환해지는 것이, 드디어 2월 13일, 엘베 강의 피렌체, 드레스덴에 연합국의 공군 폭격기들이 무차별 적으로 공습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코의 벌판에 있는 자그마한 역에서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독일의 병사들과 무기를 잔뜩 싣고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열차가 역마다 독일 병정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갈 예정인데, 7년 동안이나 독일의 강제와 폭력과 수탈에 시달린 체코의 시민들도 뭔가를 하나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영웅은 아닐지라도.
  자, 개봉박두.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 알려드리지 않을 터이니 궁금하신 분은 얼른 책을 사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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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23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멘젤 감독이 보흐밀 흐라발 열혈팬인지, 흐라발 작품을 많이 영화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예전에 운 좋게도 <가까이서 본 기차>를 영화로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오히려 원작과 흐라발을 알지 못하던 시기네요. ㅎㅎ 영화는 꽤 괜찮으니 보시는 거 추천이요.

Falstaff 2020-06-23 10:15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2022-08-26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