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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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대프니 듀 모리에가 미국인인줄 알았을까? 히치콕의 영화 <새>와 <레베카>의 원작자라서 그랬을까?
  첫 장면에 화자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사촌형 앰브로즈가 일곱 살 먹은 나, 필립을 데리고 얼굴과 몸에 부패 방지를 위해 검은 타르를 칠해진 채 바람 부는 대로 대롱대롱 흔들리는 사형수의 시신을 구경한 에피소드를 적어 놓는다. 상당히 인상적인 첫 장면. 빅토르 위고가 쓴 <웃는 남자>의 첫 장면과 대단히 유사하다. 입술을 귀밑까지 절개해 자신의 기분과 관계없이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성형을 당한 소년 그윈플레인을 콤프라치코스 일당들이 영국 도싯의 포틀랜드에 홀로 떨어뜨려놓고 떠나버려, 소년은 그토록 추운 날 시내로 들어가다가 시내 초입에 온 몸이 타르로 칠해진 채 대롱대롱 흔들리는 사형수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이 단박에 연상되었다. 그래 미국에서도 교수형에 처한 다음에 타르를 칠해 시신의 부패를 늦추어 몇 주 동안 시민들의 경각심 고취 목적으로 그냥 매달아두었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소년들이 악당의 몸에 타르를 뒤집어씌우고 나서 흰 닭털 세례를 퍼부어 망신시키는 장면이 있으니까 말이지. 그러나 아니었다. 무대는 일찍이 트리스탄이란 영웅이 삼촌의 아내 이졸데를 중간에서 인터셉트한 적 있는 영국의 콘월 지방.


  발단 부분에 나를 헷갈리게 한 것 중 다른 하나는, 앰브로즈 애슐리가 영국의 젠트리 계급이란 것. 젠트리 계급이면 준남작의 작위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에 줄을 넣는 지방 지주계급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젠트리 가문에서, 아무리 이제 겨우 스물일곱 살에 불과한 청년이지만 일곱 살 먹은 사촌동생을 데리고 교수형 당한 시신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독자인 나는 처음부터 앰브로즈와 필립이 부랑배, 불량배, 천민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지레짐작했다는 거. 그런데 알고 보니 앰브로즈로 말할 거 같으면 초년팔자가 기구해 일찌감치 천애고아가 된 필립을 데려다 키운 후견인이자 아버지이자 형이자, 조언자였다. 천성이 공평하고 정의롭고 매력 넘치고 이해심 많은 성격에, 아이를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알아서 영국의 유명한 욕설의 첫머리 글자를 따 필립에게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누구보다 일찍(어린 나이에), 그리고 빨리 가르쳐줄 수 있었다. 근데 필립을 끝까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식이 강해서, 여자를 멀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필립이 세 살 때 헤어브러시로 엉덩이를 때렸다는 이유 하나로 유모를 해고한 후, 집에는 요리사를 포함해 어떤 여자도 고용하지 않았다. 아, 오해마시라. 앰브로즈는 이성애자니까.
  세월이 흘러 이제 필립이 스무 살이 넘고, 더하기 스물, 하면 앰브로즈가 마흔 살이 넘어갈 즈음, 류머티즘이 앰브로즈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는 필립을 마치 자기 친아들처럼 키워 영국의 명문인 해로스쿨에 이어 옥스퍼드에 진학을 시켰으나 사실 영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산수의 사칙연산과 상법과 형법 개론 정도의 지식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때마침 공부하기 싫어하는 필립을 영지로 불러 자기가 없는 동안 영지 관리를 부탁하고 의사의 처방에 의거해 겨울 동안 알렉산드리아나 이집트 등 따뜻한 남쪽나라로 휴양을 떠나기 시작한다. 앰브로즈의 가장 큰 취미는 정원 가꾸기. 영국 젠트리들에게 가장 널리 유행하는 취미이기도 하지만 그의 취미생활은 대단한 재력이 밑받침되어 이에 걸맞게 남쪽 지역의 화초를 적극적으로 식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마흔세 살이 되어 겨울휴양지로 고른 곳이 피렌체와 로마. 물론 로마식 정원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앰브로즈 입장에서 보면 치명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때마침 피렌체에서 애슐리 집안과 가까운 친척이 되는 코린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상갈레티 미망 백작부인과 만나게 된다. 어려서 코시모 상갈레티 백작과 혼인을 했는데, 백작께서 와인을 얼큰하게 자신 상태로 결투를 벌여 그만 불귀의 객이 되어 졸지에 청상과부로 떨어진 여인으로 이름을 레이첼이라고 했다. 비록 어머니는 이탈리아 여자이지만 태도나 외모 모든 것이 영국인과 다름없어 상아 같은 피부에 파르스름한 혈관이 손등에 비쳐 보이는 자그마한 체형의, 꼭 안아주고 싶은 여성이었다. 이 레이첼 역시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지라 천부적으로 원예와 정원에 일가견이 있어 앰브로즈에게 피렌체와 로마의 정원 견학을 안내하겠다고 제의해 둘은 급격하게 친해져, 앰브로즈는 평생 지켜온 독신의 의지를 순식간에 꺾고 결혼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나폴리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필립에게 편지를 보내 알려주었는데, 필립은 오직 자기 하나를 위해 살 것 같은 사촌 형님의 변심에 수치스럽고 쓸쓸한 이기심, 즉 질투를 느끼는 건 뭐 다 인지상정이니까.
  앰브로즈에겐 가족 병력이 있는데, 그의 부친, 그러니까 필립의 백부가 뇌종양으로 숟가락 놨다는 거. 앰브로즈는 이탈리아에서 열여덟 달 동안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가 앞뒤 다 떼고 이탈리아 전문의들의 소견에 의하면 부친과 같은 병명인 급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접고 만다. 자, 이제 남은 건 콘월 지역의 거대한 영지와 집과 정원, 그리고 은행 금고에 든 수많은 보석들의 소유 관계. 이탈리아에서의 운명의 순간, 옆에선 지켜본 새색시가 있었으니 여태 최우선 상속자의 지위에 있던 필립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필립은 놀랍게도 죽기 전에 쓴 앰브로즈의 마지막 편지를 받고 그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급하게 이탈리아 행을 결행했으나 시신을 보기는커녕 무덤에도 가보지 않고 귀국하는데, 그동안 콘월의 집에서 봉사해왔던 집사, 마차기사, 요리사 등 하인들에게 유증하는 일정 금액의 현금을 제외하고 앰브로즈의 모든 재산은 늙은 개 던의 털 하나까지 모두 필립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더라는 것. 그럼 아내이자 앰브로즈의 사촌 레이첼은? 국물도 없다.
  이탈리아까지 쫓아가 앰브로즈의 죽음에 관해 조금은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것을 해소하지 못한 필립은 피렌체의 아르노 강의 다리 위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레이첼에게 앙갚음을 해주겠노라 맹세를 한 바 있다. 9월 첫 주에 필립이 다시 콘월의 집에 도착을 하니 이젠 필립 도련님에서 필립 씨로 승격을 하고, 예전 같으면 소작인들과 함께 일을 하던 처지에서 이젠 말로 지시만 내려야 하는 위치로 올라선 일 등, 영지 경영에 대한 무거운 책임 등으로 잠깐 잊고 지내게 된다. 앰브로즈의 유언장에 따르면 지금 필립의 나이 스물네 살, 아직 자신이 꽉 찬 스물다섯 살, 내년 4월 1일 까지는 자기가 상속받은 재산을 사용하고 싶으면 대부이자 후견인인 닉 켄들 씨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부속조항도 이제 딱 육 개월이 남았을 뿐. 다시 말해서, 아직 반년 동안은 내 재산임에도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
  이 상태에서 유능한 상속관리인이자 진중한 신사 닉 켄들 씨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하니, 앰브로즈의 미망인 레이첼 애슐리 여사께서 배편으로 폴리머스에 도착해 영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필립은 어땠을까? 라면 국물 한 방울 얻은 거 없는 과부한테 피렌체 아르노 강의 다리에서 맹세한대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톡톡히 쓴 맛을 보여주겠노라고 작정을 하고 있는 동안, 시계 바늘은 째깍째깍 쉼 없이 돌아가 드디어 9월 셋째 주 바람이 휘몰아치는 음산하고 변덕스러워 영낙없는 콘월의 날씨 속에 레이첼이 자기 짐 없이 오직 앰브로즈의 유품만 가지고 저택 앞에서 마차에 내려 필립 앞에 서니, 에구머니, 벌써 책은 135쪽까지 진도가 나가버렸지 뭐야. 그러니까 135쪽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필립의 사촌 레이첼이 눈썹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이 말씀.


  이 책을 읽는데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월요일엔 아예 시작도 하지 마시라는 것. 한 번 첫 장을 열었다하면 어느 새 날밤을 새웠는지 모를 테니 금요일 저녁밥 자시고 시작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란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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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3-22 10: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크- 폴스타프님이 레이첼을 읽으셨군요. 크- 너무 재미있지요! 크-
그러고보니 제가 읽은 책을 폴스타프님이 나중에 읽고 리뷰 쓰신 건 너무너무 드문 일이데, 그런 일이 일어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쩐지 기뻐한다)

Falstaff 2021-03-22 10:59   좋아요 3 | URL
옙. 진짜 재미있습니다! 5백 쪽을 훌쩍 넘기는 분량인데도 너무 빨리 지나가 아깝다는 생각까지 했더라니까요!! ㅋㅋㅋㅋ
아이고, 다락방님도 무슨 그런 말씀을요. ㅋㅋㅋㅋ 이런 경우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별점이 하나 깎인 이유는, 시대가 흘러 당시엔 파격이었겠지만 이제 독자는 작가가 슬쩍 흘린 복선도 놓치지 않는다는 거, 딱 하나였습니다.

청아 2021-03-22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의사촌 레이첼>빨리 읽어야겠네요!헉!! <웃는남자><허클베리핀의 모험>도 보관함에 쑥쑥ㅋㅋㅋ팔스타프님 리뷰는 항상 조급증을 일으킵니다!댓글도요.😭👍

Falstaff 2021-03-22 11:25   좋아요 2 | URL
ㅎㅎㅎ <웃는 남자> 강추! 열린책들 추천합니다. 위고의 다른 작품 <93년>도 재미있습니다!!!
근데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제가 무지하게 안 좋아하는 책이예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3-22 1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을 보니 이건 안읽을수가 없겠네요 ㅋ일단 장바구니로~!

잠자냥 2021-03-22 11:25   좋아요 2 | URL
<레베카>도 꼭 읽으세요. ㅎㅎㅎㅎ

Falstaff 2021-03-22 11:26   좋아요 2 | URL
아오, 저도 <레베카> 읽어봐야겠군요!

잠자냥 2021-03-22 11:29   좋아요 2 | URL
사실 저는 <레베카> >>>>> <나의 사촌 레이첼>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1-03-22 12:08   좋아요 1 | URL
아 폴스타프님 아직 레베카 안읽으셨구나! (거만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ㅋㅋ)

레베카 진짜 재밌어요. 아니 레이첼도 진짜 재밌고 레베카도 진짜 재밌으면 뭐가 더 진짜 재미있는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레이첼이 더 좋았어요!

Falstaff 2021-03-22 12: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러면 레이첼도 읽는 걸로 해야겠습니다.
한 번 더 옆구리 콱! 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2 12:29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 님 <레베카> 말씀하시는 거죠? 아 왜 레이첼, 레베카 둘다 레 씨 성이라서 폴님을 헷갈리게 하느냐!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3-22 12: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레베카 맞습니다. 거참 영국사람들 성씨가 좀....

coolcat329 2021-03-22 1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동참합니다~~

Falstaff 2021-03-22 11:27   좋아요 2 | URL
이래서 오늘도 즐거운 낚시는 성공적으로...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3-22 1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폴스타프님! <레베카>를 안 읽으셨다뇨! 저는 당연히 읽으시고 이 책 읽으신줄 알았어요. 우와~~제가 읽은 책 중에 폴스타프님이 안 읽으신 책이 있다니 넘 기뻐요!

Falstaff 2021-03-22 11:32   좋아요 4 | URL
ㅋㅋㅋ 사실 전 이런 미스테리, 추리, 공포 같은 건 잘 읽지 않거든요.
이 책을 고른 건 조금의 우연도 있었고요, 결정적으로 다락방님하고 잠자냥님의 낚시에 옆구리가 걸린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2 11:35   좋아요 3 | URL
이왕 이렇게 된 거, 현대문학 단편선 대프니 듀 모리에편까지는 읽어보세요. ㅋㅋㅋㅋ 거기에 실린 <새> 이거 정말 명불허전입니다. 물론 히치콕이 영화로도 잘 만들었는데, 히치콕이 탐낼만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Falstaff 2021-03-22 11:37   좋아요 3 | URL
진짜 웃기는 게요, 현대문학단편선 듀 모리에를 재미나게 읽었는 줄 알고 사촌 레이첼을 샀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 근데 단편선 안 읽었어요.ㅋㅋㅋㅋㅋㅋ
미칩니다, 미쳐. 이번엔 완전히 뒷발로 쥐 잡은 거예요. ㅎㅎㅎㅎㅎㅎㅎ
그래 위 답글에 조금의 우연 운운한 겁니다.

coolcat329 2021-03-22 11:42   좋아요 2 | URL
네~저도 데프니 단편집 추전합니다. 저는 첫번째 단편 <지금 쳐다보지 마>가 너무 강렬해서 잊히질 않았어요. 아 오늘 밤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3-22 11:45   좋아요 4 | URL
아, 낚고 낚이는 무간지옥이라고, 어느분께서 말씀을 하시긴 했는데 도무지 출구가 없어요!!!

coolcat329 2021-03-22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ㅋ 개미지옥(잠자냥 님이던가요?), 지뢰밭(요건 미미님 같구요) 등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ㅋㅋ 다 살아 돌아갈 수 없는 곳들이죠 ㅋㅋ

청아 2021-03-22 16:44   좋아요 1 | URL
저 또 헛소리를ㅋㅋㅋㅋ이제바로 이해함.🙄😳
근데 이 책보다 <레베카>가 먼저 인가요??

다락방 2021-03-22 12:10   좋아요 2 | URL
미미님, 무엇을 선택하시든 후회 없으실 겁니다. 장담장담.

청아 2021-03-22 12:14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까지!! 저 심장이 안좋아질것 같아요!😳 궁금궁금!ㅠ

잠자냥 2021-03-22 1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개미지옥 무간지옥설. 알라딘 엠디들은 그저 웃지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3-22 12:36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알라딘 MD로 스카웃 설이 시중에 맴도는데 그건....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3-22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레이첼이랑 레베카 다 우리집에 있단말에요.

Falstaff 2021-03-22 13: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럼 이제 읽어치우시는 거만 남았군요. ^^

단발머리 2021-03-22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의 사촌 레이첼>이 저의 2020년 책이구요 ㅎㅎㅎㅎㅎㅎ 두번 읽었지만 아직도 책들이 쌓여 있는 김치냉장고 위에 기품 있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답니다. 몇번을 읽은 책인데 폴스타프님 리뷰 왜케 재미있나요. 마저 읽으시고 마저 리뷰 써주시어요^^

Falstaff 2021-03-22 13:55   좋아요 2 | URL
호호호... 마저 다 읽고나서 쓴 독후감 최종본입니다. ㅋㅋㅋ
전 절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답니다. 그래야 읽는 분이 궁금해 하시잖아요. ㅋㅋㅋ
아, 제 집 김치냉장고는 뚜껑이 위로 열려서 잠깐 헷갈렸습니다!
 
이혼전야
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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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거 참. 분명히 신판데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후벼 파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맞다. 신파만큼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없다. 하여튼 마라이, 이 양반 글 쓰는 건 정말 못 말린다. 이번에도 일종의 삼각관계. 역시 20세기 초반, 조상이 독일에서 내려왔음 직한 귀족 시민계급 주인공의 경험을 써내려간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1920년대 초 정도로 보이는 시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초가을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 일곱 시 정도까지.
  크리스토프의 직업은 판사다. 젊은 판사. 처음엔 형사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망한 신입이었다가 가정법원으로 발령을 받아 지금은, 만일 이런 게 있다면, 이혼 전문 판사로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이이가 집무실에서 다음날 재판이 예정되어 있는 이혼소송의 서류를 검토하는데 소송의 두 당사자들의 이름만 보고도 누군지 딱 알아맞힌다.
  남편은 임레 그라이너 박사. 북헝가리 태생. 조상은 역시 독일에서 건너온 이주민으로 할아버지는 유리 세공업자, 아버지는 그냥 수공업자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살기가 팍팍해서 미국으로 돈 벌러 가 처음엔 곧잘 송금도 해주고 그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딱 두절되고 이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외갓집에 얹혀사는 신세로 전락했으나, 외삼촌이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자기 누이, 즉 그라이너 박사의 엄마에겐 어떠한 복지도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그라이너 박사를 의과대학에 보내 졸업시켜 뛰어난 의사로 키워주었다. 하긴 그것만 해도 그 시절에 그게 얼만가. 그라이너 박사는 쾨뮈베스 판사의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 동창이며 학창시절부터 겸손하고 조용하며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서로 내성적이라 그저 아는 척만 하고 지낸 사이다. 지금은 개업의인 동시에 사립 요양소 소속 실험실 소장도 겸하고 있으며, 이름난 의사로 돈도 숱하게 벌고 있다.
  아내는 안나 파체카스. 벌써 서른 살이 넘은 여성으로 시골학교 장학관의 딸이다. 이 장학관으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헝가리 판 고리오 영감. 시골학교인데 아무리 장학관이라도 살림이 풍족했을 리가 없다. 오직 딸 하나를 키우는 아버지가 부다페스트의 기숙학교를 보내고 최상의 드레스와 순정품 진주목걸이 등의 사치품들을 무한 공급해주어 안나는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이라고는 책 속에서만 있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인 줄 알고 큰다. 9년 전 여름에 우리의 쾨뮈베스 판사가 부다와 페스트를 가르는 다뉴브 강 위에 떠 있는 마르기트 섬에서 미혼이었던 파체카스 양을 처음 만난 적이 있는데 이후에 그저 ‘아는 사이’로 여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옆집 아가씨가 시집간다고 해도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 남자들 속셈이라서 자기가 결혼하고 두 달인가 지나서 임레 그라이너 박사가 안나 파체카스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던 가벼운 충격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독후감 시작할 때 이야기한 ‘일종의 삼각관계’라고 함은 30대 후반에 달한 판사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박사와 의사 임레 그라이너 박사 그리고 그의 아내 안나 파체카스와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변화한 수많은 것들과 심하게 와해되어버린 공동체적 삶의 형태에 대한 그리움을 추구하는 당대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는 이들 간의 관계를 내놓고 난삽하게 만들지 않는다. 할아버지 크리스토프 1세는 아홉 명으로 구성된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아버지 가브리엘 쾨뮈베스도 말수가 적고 절도있는 강인함으로 이름을 드높인 판사여서 법조계에선 쾨뮈베스 학파의 창시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작가는 삼각관계라는 세속적 단어가 사실 그리 어울리지 않을 수준의 심리묘사를 통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지속해나가는 결혼의 정체를 탐구하고 있다.
  부부. 이들이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랑. 이런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마라이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사랑은 부부간 둘 중의 한 명이 배우자의 모든 것, 육체적 혼인의 순결은 당연하고 가슴 속에 담고 있는 모든 감정을 소유하는 상태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이 책에서도 임레 그라이너 박사는 외과의사이면서 내과도 보고, 최면시술을 행하는 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한데, 이이가 사고하는 범위와 톨러런스, tolerance, 이걸 우리말로 뭐라 해야 하나, 가끔은 외래어 그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쉬운데 말씀이지, 좋다, 관용적 허용치, ‘일상의 도덕률로 허용하는 한계’가 거의 없다. 바로 앞에 독후감을 쓴 <결혼의 변화> 1부의 주인공 일롱카 여사도 비슷한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자신들은 모르고 있다는 점.
  예를 들어, 아내가 예전에 한 남자를 연모, 한 침상에 누워본 것도 아니고 그저 깊이 연모했고 지금도 그걸 깨끗하게 지우지 못한 채 간혹 그리워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그때마다 커피 한 잔 내려주고 어깨를 쓰다듬은 다음 조용히 방문을 닫고 옛 추억에 젖게 도와줘? 그럼 당신은 보살이다. 낌새가 보이면 그때마다 깨져도 아깝지 않은 것들만 골라서 바람벽에 집어 던지며 포악을 떨어? 그럼 당신은 지질이다. 아내의 경우가 아니고 배우자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신의 가슴속에 그런 일이 있다, 지금도 그 새끼 생각만 해도 찌릿찌릿하다, 이런 낌새를 보이지 않는 에티켓을 서로 지켜줘야 하는 거 아냐? 이게 내 생각. 만일 눈치 챈다고 해도 알면서 모른 척, 둔하기가 나무늘보 엉덩잇살인 시늉을 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배우자의 전부를 가지고, 알고 사는 부부는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근데 소설에서 명색이 주인공 정도가 되려면 부부 가운데 한 명이 아니고 두 명 다 좀 이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왜 이혼을 하려는가 하면, 흠. 이건 알려드리면 안 되겠다. 하여튼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판사는 퇴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일곱 시부터 시작한 전쟁 후 부르주아들의 검소한 다과모임에 참석한 다음 자정 가까운 시간에 귀가를 했는데, 내일 자신이 이혼 판결을 해야 하는 당사자 임레 그라이너 박사가 집에서 판사와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새벽, 여섯시 반까지 그라이너 박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마라이의 특기, 장황한 독백이 이때부터 흥미진진 이어지기 시작한다. 진짜 재미있으니 동네 도서관에라도 방문 해보심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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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2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살과 지질^^ 신파면서 재밌다고 하시니, 저도 리스트에 올려놓고 갑니다^^

Falstaff 2021-03-21 12:39   좋아요 0 | URL
옙. ㅋㅋㅋ 낚이셨습니다. 지금 품절이라 헌책을 사시거나 도서관에 가셔야겠군요. ^^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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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뭐야! 책에 실린 첫 작품 <티끌 같은 나> 겨우 스무 쪽 남았는데 내 앞의 도미회와 쐬주 한 병!!
토카레바가 누구며, 어찌 이리도 재미있는 것인지. 기로에 서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미회와 쐬주의 베누스에 굴복하면서.....도, 낼 새벽 동쪽 하늘의 금성이 반짝이기 전에 다 읽어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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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18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미회와 겨룰 정도로 재밌군요! 도미회! 맛있죠~~맛나게 드셔요. 🤤

Falstaff 2021-03-18 21:55   좋아요 2 | URL
ㅋㅋㅋ 지금 알딸딸 합니다. 25도짜리 쐬주 한 병에다 좀 모자라서 한계령 막걸리 어제 마시다 남은 거 홀짝 했더니, 아하, 여기가 천국이넵쇼! ㅋㅋㅋㅋ

새파랑 2021-03-1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랑 소주가 있는데 책은 중요한게 아니죠 ㅋ 이런 상황에서 책을 생각하시는게 대단하십니다^^

Falstaff 2021-03-19 08: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책을 읽는데 딱 도미와 쐬주가 도착한 겁니다.
평소라면 어딜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

잠자냥 2021-03-18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도미회랑 쏘주랑 토카레바라니 천국이 따로 없군요. 저도 폴님 따라서 도미회랑 소주랑 토카레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21-03-18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이 토카레바 이리 극칭찬해주시니 제가 다 기쁘군요. 음하하

Falstaff 2021-03-19 08:59   좋아요 1 | URL
와, 이 책 독후감은 담 주 목요일에 올라오겠지만, 이모뻘인 토카레바 여사의 글이 어떻게 이리 신선할 수 있는지 벙~ 쪘습니다.
하긴 오죽하면 잠자냥님이 그 비싼 지만지 책까지 뒤져보셨겠습니까. ㅋㅋㅋㅋ

잠자냥 2021-03-19 09:39   좋아요 1 | URL
토카레바 단편집은 전자책으로 샀지만 <눈사태>는 전자책이 없어서 걍 책으로 샀어요. 178쪽! 아주 얇은데 5%할인해서 17,100원! 크하 정말 비싸지만 정말 잘 썼습니다. ㅠㅠ 눈물.... 토카레바, 누가 좀 더 번역해주면 좋겠어요. 지만지 말고 현대문학단편선으로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3-19 09:45   좋아요 0 | URL
현대문학단편선으로요? ㅎㅎㅎㅎ 진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현대문학.... 질문하면 답변 잘 해주는 출판산데 민원 한 번 넣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21-03-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회와 소주와 토카레바 라니...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닙니까?!

Falstaff 2021-03-19 08:59   좋아요 0 | URL
옙. 어젠 오랜만에 천국에 한 번 갔다 왔습니다!
 
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이번에 마라이의 장편소설 세 편을 연달아 읽는다. 몇 년 전에 <열정>과 <성깔 있는 개>를 읽고 마라이 특유의 어법에 빠진 이후로 이이의 작품을 한 번 천착하리라고 작정을 했었다가 그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애하는 서재동무 님께서 올 1월에 참 근사하게 읽었지만 귀찮아서 긴말을 적지 않겠다는 걸 보고 나서야 아, 마라이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고는 세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순서대로 <유언>, <결혼의 변화> 그리고 <이혼전야>다. 당연히 다 상태 좋은 헌책을 샀다. 마라이 작품 읽기를 중도무이한 건 솔 출판사가 이이의 책들을 전부 품절시킨 채 오늘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이혼 전야>는 아직 읽지 않아 어떤지 모르겠는데(지금은 읽었다. 이것도 대박이다.), <결혼의 변화> 같은 좋은 작품의 출간을 멈춘 건 소위 문화사업이란 출판업을 영위하는 법인으로서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솔 출판사는 조속히 쇄를 찍거나 아니면 다른 회사에 판권을 팔았으면 좋겠다. 유독 솔 출판사에 이런 책들이 많다.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에 지금은 슬로바키아 영토인 카사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유복한 시민 가문에서 출생했다. 마라이의 선조가 독일 작센에서 이주한 헝가리 인이라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중동부 유럽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구사할 줄 알았던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스로 끔찍해 했던 뉴욕에서 십여 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년 살면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만큼 영어도 능숙했다고. <결혼의 변화>를 비추어 본 산도르 마라이는 양차 대전 이전 유럽의 귀족 부르주아 문화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나치를 혐오했으며 소비에트 체제에 반대하여 헝가리 안에서 적응하기에 곤란함을 겪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고서도 1956년 헝가리에서 있었던 반공산주의 시민운동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지원해주지 않은 것에 매우 실망한 마라이는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군사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나 자신의 작품 출간하게 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1989년 여든아홉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사람이 너무 오래 사는 건 분별없는 짓이라는 말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당시 마라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60년이 넘게 함께 산 아내도, 양아들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모두 3부로 되어 있는 <결혼의 변화>는 일롱카와 페터는 친구에게, 그리고 유디트는 젊은 애인에게 한 장소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일롱카와 유디트는 페터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이다. 1부에 해당하는 일롱카의 페터에 대한 열정적 사랑만을 이야기해보자.
  일롱카와 친구는 제과점 한쪽 구석에 앉아 삼 년 전에 이혼한 페터가 진열장에 든 설탕에 절인 오렌지 껍질을 사고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는 걸 발견한다. 악어가죽 지갑. 그건 십여 년 전에 일롱카가 페터의 마흔 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 일롱카는 이혼 후에도 서로 정중하고 세심하며 관습과 풍습의 요구에 충실하여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결혼은 결혼이고 이혼은 이혼이니까. 그리하여 일롱카는 이혼 당시 남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받아냈다. 거의 치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실어왔으니.
  일롱카의 친정집은 한 달 수입이 8백이었던 데 비하여 남편은 한 달에 6천5백을 벌었으며, 친정은 임대주택에 살았고 시댁은 빌라를 통째로 빌려 살았다. 친정은 제라늄이 놓은 발코니로 충분했던 반면 시댁은 늙은 호두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원과 아담한 꽃밭 두 개가 있었다. 일롱카는 어떤 식으로든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았고 남편은 무엇보다 절도 있고, 교양 있고, 우아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교육을 받아, 이혼 당시에 일롱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하루의 지체도 없이 매달 첫날에 일정한 금액의 생활비를 일롱카의 당좌계좌에 입금하고 있다. 남편은 공장을 운영하며 자주 여행을 떠난다. 예술가들에게 일을 맡기고 남들보다 특별하게 후한 보수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번 입 밖을 나온 말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다. 페터가 아내 외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는 양식과 도덕과 절제를 지니고 있음을 일롱카는 누구보다 확신하지만, 남편은 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밀을 간직한 낯선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결혼 3년 반 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두 돌 삼 주 만에 성홍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2년여를 더 살다가 이혼에 이른다.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함께 살 수 없음을 깨달았는데 이때 아이가 생겨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이 부유한 귀족인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페터와 결혼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슬픔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고통을 겪었다. 페터는 결혼을 하고도 마흔 살의 나이에 사막, 결혼과 가정이란 사막에서 은둔자만큼 고독했음을.
  어느 날, 일롱카는 페터가 실수로 두고 출근한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관찰하게 된다. 고액권 지폐, 어음과 수표, 죽은 아이의 사진과 가위로 자른 3센티미터 가량의 보라색 끈. 이게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고 토스카의 부채일 줄이야. 보라색은 왕비의 색. 잠깐 반짝이는 한순간의 광채로 사용해야지 조금이라도 과하게 쓰면 전부가 유치해져 버리는 마법의 빛깔인 것을 아는 일롱카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색. 그러니 페터가 어느 여인에게 정표로 끈의 끄트머리를 잘라 그것을 아들의 사진, 이미 죽어 찬 땅에 묻힌 아들의 사진과 함께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 그러니 복장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물론 뒤에 가면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아는 페터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음을 독자는, 일롱카의 영원한 오해와 별개로 독자만 알게 되지만, 자기 앞에서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아내에게 페터는 변명 한마디도 내놓지 않는다. 어쨌든 보라색 끈이 자기 지갑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니까.
  일롱카가 페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품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조연인 작가 라자르에게 힌트를 받아 보라색 끈의 주인을 밝혀낸다. 너무도 가난해 겨울을 나기 위해 고향 트란스다뉴비아에서 땅을 파고 토굴 속에 살다가 하필이면 특별한 한파가 몰아쳐 수천 마리의 들쥐들이 토굴로 몰려들어 쥐들과 겨울을 나야 했던 시절을 겪은 시댁의 하녀 유디트. 일롱카가 알던 하녀들과 달리 솔직하고 당당한 유디트의 목엔 보라색 끈으로 메달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낚아채 열어보니 남편의 16년 전과 1년 전 사진이 들어있었다. 남편이 자기 집 하녀하고 관계가 있다는 충격. 라자르가 그녀에게 말했듯 현실이 얼마나 단순하고 진부하면서도 불안에 떨게 하는지 일롱카는 격렬한 상실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나 유디트는 곧바로 영국으로 가버리면서 이들의 결혼생활이 이어질 수 있게 만든다. 일롱카에게 사과를 하고.
  남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정열적인 아내의 사랑과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남편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의사소통의 부재.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의 종말은 의사 불통에 있었다고 믿는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파탄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로 돌이킬 수 없었던 이들은, 유디트가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서로 합의하여 즉각 이혼하고 페터는 바로 다음 날 유디트와 재혼해버린다.


  이 작품의 백미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다. 어쩌면 그렇게 세심한 문장들로 마음에 저린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지 놀랍다. 1949년 나폴리 포실리포에서 초고를 쓰고 1978년에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레르노에서 완성을 한 작품. 두 장소가 그리 멀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은 무려 29년. 산도르 마라이는 이 책에서 제목처럼 결혼이 어떻게 변하는지 만을 관찰하고 있지 않다. 이 속에 먼 시절의 정의와 신뢰 등 귀족 출신의 시민계급이 지녀야 할 미덕을 향한 향수를 농밀하게 그리기도 했고,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예술론에도 집중하고 있다. 즉 자신의 기본이 됐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이 소비에트가 무력을 앞세워 진입을 한 새 시절의 격류 속에 느껴야 하는 소외와 우울 등. 그리하여 아름답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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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1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도르 마라이가 이 작품을 나폴리에서 썼다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불끈 주먹을 쥐고 읽어야지 하게 되네요. 저는 산도르 마라이 작품 별로 읽지 못했지만 읽는 동안 정신 못차리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 그 느낌만 갖고 있어요. 올해 저도 산도르 마라이에게로.

Falstaff 2021-03-18 09:53   좋아요 2 | URL
읽어보니 제일 재밌는 게 <열정>이고요, 대표작은 <결혼의 변화> 같더라고요.
내일도 마라이 다른 책의 독후감 올릴 겁니다. ㅎㅎㅎ (에이, 본문에 써 놨네요, <이혼전야>라고 ㅋㅋㅋ)

수이 2021-03-18 09:55   좋아요 3 | URL
이혼전야_라니 두근두근, 제목만으로도 두근두근거렸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저 이혼할뻔 하다가 아 그때 그 스트레스 갑자기 막 몰려오네요 폴스타프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책장 어디에 산도르 마라이가 있지 하고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Falstaff 2021-03-18 10:03   좋아요 3 | URL
살다가 대판 걷어차고 사네 안 사네 한 번 안해본 인간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배우자 스트레스 때문에 한 10년 빨리 죽는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수이 2021-03-18 10:07   좋아요 1 | URL
저는 너무 마음이 평안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이 사는 남자가 그러던데요. 자기는 120세까지 살 거 같아. 왜 그렇게 보여? 하니 무념무상_이라고 이야기하길래 내가 너땜시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무념무상을 노상 외치구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120세 찍을 거 같다 고 답해줬습니다

coolcat329 2021-03-1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셋 중 아무거나 먼저 읽어도 상관없는거죠?

Falstaff 2021-03-18 11:02   좋아요 2 | URL
걍 두 작품만 읽으셔도.... <열정>하고 <결혼의 변화>,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청아 2021-03-18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조심스럽게 알베르토 모라비아<경멸>추천드려요.어쩐지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레삭매냐님 리뷰보고 어제부터 읽고있는데 좋아하실듯해요ㅋㅋ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이랍니다.

Falstaff 2021-03-18 12:44   좋아요 3 | URL
음하하하... 이런 추천, 조심 안 하셔도 됩니다!
냉큼 주워와야지요. 6월~7월 정도에 읽을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 전 책 읽는 것도 예약제예요.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2:48   좋아요 3 | URL
오 예약제 멋짐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이 책 한잔 하시면서 서서읽으신다에 500원 걸겠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1-03-18 13:17   좋아요 3 | URL
예약제 하면 생기는 최대의 미덕이,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없다는 겁니다.
일정 기간에 산 책들을 초간이 빠른 순서대로 읽거든요. 읽는 도중에 산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무더기가 다 끝나야 새롭게, 같은 순서대로 읽으니까, 말 그대로 한 권도 빼지 않고 싹 해치울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3:24   좋아요 1 | URL
음..예약제 관련해서 언제 시간되시는대로(간략하게라도요) 페이퍼 한 번 써주심 어떨까요.
놀랍고 솔깃합니다! ‘쌓인 책 읽기‘에 저포함 다른 분들에게도 영감을 줄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1-03-18 15:24   좋아요 1 | URL
경멸도 예약요~~

청아 2021-03-18 16:2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재밌을 뿐만 아니라 소중해지려고해요.(읽는 중이니 ‘하다‘가 아님요ㅋㅋ)
이것도 커플 이야기예요.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그냥 사려구요! 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결혼의 변화인데 이 책의 내용이 결혼에 대한건가요? 아님 어떤 비유적인 의미?

Falstaff 2021-03-18 15:19   좋아요 2 | URL
진짜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들이 출연합니다.
페터가 마음 속에 유디트를 담아두었음에도 일롱카와 결혼을 해서, 아주아주 충실하게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마음 속 유디트의 존재를 알게 된 일롱카와 불화를 해 이혼을 하는 과정이 일롱카의 입장에서 고스란히 들어 있고요,
유디트와 재혼한 다음에 유디트와의 만남, 결혼, 1년 후 이혼까지 페터의 입장에 쓴 것이 2부,
이런 모든 것을 저 시골 빈민 출신의 유디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젊은 애인에게 호텔방에서 밤새 이야기해주는 것이 마지막 3부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에 관한 것입지요. 이 속에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밀려드는 폐허 헝가리,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라이의 쓸쓸함, 지나간 신사들의 범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좌악 깔리고요.
이런 거 다 제쳐두고, 아 글쎄, 재미있다니까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23   좋아요 2 | URL
넵!
예약했습니다^^
 
햇빛 속에 호랑이 아침달 시집 12
최정례 지음 / 아침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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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월에 세상을 뜬 시인. 1955년생이니 기대수명보다 한참 덜 살았다. 아쉽지만 그게 인생인데 어쩌랴. 편히 잠들기를.


  이이의 두 번째 시집. 살아생전 세 권의 시집을 남겼다. 첫 시집 《붉은 밭》과 세 번째 시집 《빛그물》은 창비에서 냈고, 이 시집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출간했다가 절판된 것을 ‘아침달’이란 귀여운 이름의 출판사에서 2019년에 복간했다.
  1990년, 만 35세에 등단. 1990년이면 시의 파편화가 본격적으로는 진행되지 않았을 시기. 최정례의 시가 비록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지독한 자기감정의 특화 현상이 두드러지지는 않아 요즘 시들과 비교하면 무슨 뜻인지 짐작은 하겠다. 나는 이번 세기에 활발하게 시작을 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은 그리 많이 읽어보지 않아 선뜻 입에 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적어도 허풍이라도. 그래서 조금의 용기와 많은 허풍을 섞어 말을 해보자면, 최정례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잡고 시인이 보는 해당 사물의 감각을 덧칠하고 있는 거 같다. 쉽게 얘기해 시의 개별화 현상이 이미 최시인의 시에 시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시에 따라 사물의 정형에, 또는 감각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것이 정상이리라. 세상의 딱 가운데란 건 없으니까. 예를 들어 시집에 제일 먼저 실은 시를 보자.



  드디어


  그를 나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나무가 둥글게 부풀었다
  바람이 부니
  느낌표가 되었다가
  물음표가 되었다가
  흔들렸다


  아주 멀리
  나도 이제 여행을 간다
  쓱
  나무 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아닌 표정으로
  손바닥 내밀고
  아니야 아니야
  흔들리는 것이다  (전문)



  나무 속? 어디긴 어딘가, 죽어야 들어가는 관 속이지. 단 내가 들어가 멀리 여행을 가는 나무의 속이 관 속이고, 그를 밀어버린 나무의 속은 내 가슴 속, 또는 내 마음의 속이겠지. 그러니 1연에서는 그를 나의 나무, 내 가슴이나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이고, 그걸 간직한 채 이제 아주 멀리 나도 여행을 떠난다는 시. 물론 독자의 독법에 따라 의미가 바뀌겠지만 내가 읽은 <드디어>는 그렇다. 사실관계야 어떻든 간에 독자가 이리 쉽게 이해 또는 오해할 수 있는 건 시어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파편화, 즉 극도로 개별화한 심상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은 자유다. 오해할 자유도 있으니 절대 이 말은 믿지 마시라. 난 아마추어다.
  이 시도 그렇거니와 최정례의 시는 곱상하지 않다. 사물을 표현하는데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나무속으로도 그냥 쑥, 여행을 가는 것처럼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건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끝 장면



  한참을 걷다가 집 한 채를 만났습니다 울타리 가득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불타는 거 같앴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두 남자가 보였습니다 하나는 아이고 하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장독대 옆에도 칸나가 다알리아가 붉은 꽃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꽃을 좀 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두 말 않고 돌아서 걸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한 줄 불더니 나뭇잎들 쏟아지고 벌판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오래 걸었습니다 아이가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 들은 것도 같습니다 꽃을 내미는 것도 같았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뒤돌아 안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돌아본 듯도 합니다 그 집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아니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의 꿈입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일까 수년을 생각했습니다 어디 먼 다른 생의 알 수 없는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 길은 길이란 길은 다 멀고 캄캄했습니다  (전문)



  띄어쓰기, 구두점과 맞춤법은 전부 시 원문에 따랐다. 한 번 다시 읽어보시라. 무슨 뜻인지 이거야말로 애매모호. (근데 ‘애매모호’가 독일어 ‘애매모흐’에서 온 거라며? 프랑스에선 같은 뜻으로 ‘아리숑’을 쓴다던가 그렇지 아마!) 나도 읽다가 중간에서 멈추길 세 번 정도 한 거 같다. 그러다가 마음먹고 끝까지 읽었더니 뒷부분에 “오래전의 꿈입니다.” 하는 거다. 꿈속에서 걷다가 집을 만나고 집 울 안에 붉은 꽃이 있고 남자 둘이 있었는데 뭐 전형적인 개꿈이다. 그냥 꿈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꿈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야망이나 뭐 그런 게 아니고 진짜 꿈. 나도 있다. 아주 밝은 여름날, 내가 조금은 관능적인 여자로 변해 남자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주황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재떨이로 쓰는 중간 크기의 항아리에 하이힐 신은 오른쪽 발을 올리고 몸을 조금 숙인 채 깊숙이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장면. 담배 끊기 전이었다. 시인은 하여튼 자기가 오래 잊지 않았던 꿈을 혹시 살았을지도 모를 다른 생의 끝 장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최정례는 하여튼 돌아가지 않는다. <끝 장면>에서도 보라. 별다른 수사법의 구사 없이 ~했다, ~이었다, 로 끝나는 문장들이, 비록 처음 읽으면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일지라도, 줄줄이 나와 적어도 어떤 그림인지는 눈에 보인다. 꿈 이야기가 나왔다가, 독자가 매우 혼돈스러울 때 쯤해서 이게 예전에 꾼 꿈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생의 끝 장면으로 이어가는 스토리텔링 비슷하게 최정례는 시를 쓰고 있다.
  이이의 시가 거의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 정도 아닐까 싶다. 솔직히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개별적 감수성의 시, 사변의 파편화가 상당부분 진행된 시들은 내 수준에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앞으로 그런 시들을 더 읽음으로 해서 먼저 익숙해지고 조금 더 있으면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시를 읽는 일은 사물이 시인이란 반사경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엔 도로나 인도가 좋아져 별로 이런 경우가 없지만 예전엔 길이 자주 푹 패여 비가 오면 웅덩이가 생기고, 웅덩이를 표면에 내 모습도, 간판 글씨와 그림도, 동무들의 옷깃도 보이고 그랬다.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과 간판 글씨와 그림과 동무들의 옷깃을 보는 일도 시를 쓰거나 감상하는 것하고 비슷할까? 그럼, 당연하다.



  길이 움푹 파이다


  빗물이 고여 있다 네가 거기 가만히 있다 얕고 투명하다 잠깐뿐이다 네가 빗물에 담겨 있는 동안 구름이 나뭇잎이 들어섰다 갔다 택시가 비켜 갔다 노랗게 흔들렸다


  너는 거꾸로 말하는구나 추악하다는 아름답다로 사랑하다는 끔찍하다로 거꾸로 서서 훌쩍이는구나 누가 네 말을 알아들을까 네가 길바닥에 엎어졌을 땐 자는 줄 알았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다시는 읽어나지 않는구나


  길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다 햇빛이 났다 새 떼가 높이 날았다 새들은 웅덩이를 끌고 어디로 날아갔나 길이 움푹 파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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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16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똑같은 개꿈을 꾸고도 저렇게 생각 할 수 있다니... 다른 생의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게 아닐까...시인은 왜 저 꿈에 그토록 집착했던 걸까요. 꽃을 받을걸 한 번쯤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근데 폴스타프님 주황원피스 관능녀꿈ㅋㅋㅋ 어쩔까요 ㅋㅋ 항아리 재떨이ㅋㅋㅋ

Falstaff 2021-03-16 09:53   좋아요 1 | URL
주황원피스 입고 무릎 높이의 항아리에 한쪽 다리 올린 채 담배 피우는 거.... 그게 혹시 제 다른 생의 끝 장면 부근이 아니었을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