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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 소년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패트릭 맥케이브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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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북쪽, 북아일랜드 페르마나 카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마을 클론에서 1955년에 태어난 패트릭 매케이브는 더블린 북쪽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 칼리지를 졸업하고 17세에 런던으로 이사해 교사로 일했다고 하는데, 세인트 패트릭 칼리지가 초등교육에 강점을 갖는 학교라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지 않았나 싶다. <푸줏간 소년>을 감안하면 이런 이력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넘어가자. 교사를 하며 소설을 써서 1992년에 <푸줏간 소년>으로, 1998년에 <명왕성에서의 아침식사>로 두 번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가는 등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후, 두 딸과 아내 퀸 여사와 함께 작고 가난한 고향 클론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잘했다. 20세기에 작고 가난한 마을이라는 것이지, 2010년대 이후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2021년 기준 8만4천 유로)를 누리는 나라이다. 수백년 동안 가난하고 찌질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잉글랜드로 이주했지만 이젠 잉글랜드 사람들도 (식민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라 아니라) 일자리와 복지를 위하여 기꺼이 해협을 건넌다니까. 하여튼 부커상 숏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푸줏간 소년>은 후에 극작가와 협업해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고, <명왕성에서의 아침식사>는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니 올해 일흔살에 접어든 매케이브는 어쩄든 고향의 푸른 들판 위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노년을 지내고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여유롭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듯. 나는 <푸줏간 소년>이 처음 읽은 매케이브라서 뭐라할 수 없으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 가운데, “폭력, 광기 등 잔혹한 이야기만 쓴다는 일부 비판”(출판사 제공 책 소개)이 있으며 이 또한 당연한 것 같아, 폭력과 광기 같은 것이 취향에 맞지 않는 독자를 당혹시키는 모양이다. <푸줏간 소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작가들처럼 구름 끼고 바람 부는 초원 같은 쓸쓸함을 배경으로, 더구나 매케이브의 고향인 클론 마을은 아일랜드 북쪽에 있어서 춥고, 비 많이 오고, 가을부터 개울이 꽁꽁 얼어버리고, 전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 가운데 하나라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더욱 강조되는데, 그곳에 신경정신과 쪽으로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소년 프랜시스(프랜시) 브래디가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점점 부적응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그렸으니, 읽는 내내 불안과 안타까움이 점증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버나드(베니) 브래디 씨는 클론 마을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 트럼펫 주자였다. 195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영국의 트럼페티스트 에디 캘버트를 만나기 위해 해협을 건너기도 했다니까, 비록 책에서는 트럼펫 연주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더라도 그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베니도 그리 편하게 산 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살던 할아버지 앤디 브래디는 아빠 베니와 앨로 삼촌을 벨파스트의 추레한 여관에 남겨놓고 종적을 감추었다. 형제는 소정의 절차를 거쳐 천주교 신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게 됐으며, 이곳에서 베니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망가졌다, 라고 매케이브는 주장한다. 이후 베니는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 앨로를 집요하게, 프랜시의 말에 의하면 “세월이 많이 지나도 앨로 삼촌에게 개처럼 달려”들었다.
왜 그랬을까? 베니는 애니를 만나 사랑을 하고, 외아들 프랜시를 낳았지만 이후 심한 알코올 의존증 단계로 접어들면서 수시로 애니에게 “너를 만난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가뜩이나 신경이 약한 애니는 아마도 유전적 형질이 있었을 것 같은데, 신경발작을 일으켜 몇 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자신의 생활이 막장으로 떠밀릴수록 잘 사는 동생 앨로에 대한 공격이 더욱 심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앨로는 그의 말에 따르면 20년 전부터 캠든 타운에서 사는 런던 사람이다.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입신양명한 우러러볼 만한 사람은 아니고, 자기보다 스무 살이 더 많은 여자와 결혼해 결혼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일할 필요가 없어졌을 정도로 부를 즐기고 있다. 핏줄이라고는 웬수 같은 형과 조카 프랜시 이렇게 딱 둘뿐이라 아무리 웬수 같아도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 런던에서 배 타고 아일랜드 클론 고향집에 찾아온다. 원래는 두 주 동안 머물렀던 모양이지만 이제 형제 사이가 극적으로 갈라져 그저 딱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간다. 아버지는 술이 취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단어만 취합해 가장 모욕적인 말을 만들어 자신의 친동생에게 쏟아 붓는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형네 집을 찾는 앨로 삼촌, 보살이다, 보살.
이 정도면 대강 짐작하시겠지? 당시가 아마도 1960년대로 보이는데, 세계에서 알코올 의존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추운 소비에트와 폴란드를 꼽았는데, 아마 가난한 아일랜드가 이들을 능가했거나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베니 브래디의 알코올 남용은 마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엄마 역시 가끔 신경발작을 일으켜 그때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는데, 엄마는 이때마다 “정비소”에 다녀온다고 말했다. 이런 집안에 딱 하나, 당연히 마땅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소년이지만 돌봄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날마다 부모의 극한 언쟁과 눈물과 아우성을 들으며 자라야 했던 소년이 주인공 프랜시스 브래디였다. 프랜시 역시 엄마 쪽에서 물려받은 신경정신과적 병질과 아빠 쪽에서 넘어온 알코올을 포함한 약물 오남용 가능성을 풍부하게 지닌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이 작 후반에 드러난다.
프랜시가 초등 고학년일 때였다. 런던에서 살다가 부모의 고향이 이곳이라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하여 이사 온 전학생, 누전트 가문의 외아들 필립. 필립 혼자 런던의 사립학교에 다니다 온 거 같다. 아니라고 보기에는 누전트 부처가 이 북쪽 시골마을을 너무 잘 안다. 하긴 중요한 거 아니다.
프랜시는 지난 겨울에 유일한 친구 조를 사귀었다. 중산층 가구의 외아들인 조는 프랜시가 어떤 집의 아들인지, 학교에서도 어떤 아이인지 잘 알면서도 한 마디로 말해, 처한 처지에 관계없이 꽝꽝 언 개울 위에서 얼음을 깨며 놀다가 친구가 되었다. 조의 입장에서 비슷한 부류인 전학생 필립의 집에 놀러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서, 프랜시도 함께 묻어 갔다. 놀다가 당연히 나중에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필립의 만화책 한 세트를 슬쩍 들고 나와, 프랜시의 방에서 조와 재미있게 봤다. 물론 정말 돌려줄 생각이었는지, 필립이 돌려달라고 해야 그렇게 했을지, 그건 모르겠다. 이걸 누전트 부인이 알았다. 그래서 누전트 부인이 프랜시의 집으로 찾아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프랜시의 엄마한테 말했다.
“부인, 아비가 아침부터 밤까지 주점에 널브러져 아예 집에 안 들어오는 집에서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그런 아버지는 돼지보다 나을 게 없어요.”
독일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나가는 스킨헤드족을 세워놓고 그에게 “Schwein!”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이 말을 들은 스킨헤드가 당신의 소원을 즉각 들어준다. Schwein. 돼지라는 뜻이다. 세계대전 때마저 독일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일랜드에서도 ‘돼지’가 최고의 모욕적인 욕이었을까?
하여간 이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암퇘지가 된 엄마는 식탁에 올라가 아버지의 전선을 목에 감고 매달리려 했다가 천국의 즐거움을 찾아가지 못하고 대신 정신병원으로 실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 후, 동네를 지나가던 누전트 여사와 필립 누전트를 발견한 프랜시. 느긋한 걸음으로 여사 앞에 선 그는 부인에게 이 길을 지나가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 요구했다. 이른바 “돼지 통행세.” 한 번에 1실링. 부인이 프랜시를 밀치고 지나가려 하지만 프랜시는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망할 놈의 세금. 그런 걸 내야 한다니 너무 하죠?”
프랜시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오늘은 처음이니까 특별히 무료로 지나가게 해준다.
며칠만에 정비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엄마.
“우리는 누전트 식구들처럼 되면 안 돼. 그 인간들을 닮으면 절대 안 돼! 우리가 그 인간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거야, 그렇지 프레시?”
이제 프랜시가 누전트 가족, 특히 누전트 여사를 겨눈 악감정은 절대 사라질 수 없다. 엄마가 퇴원하면서 사 들고 온 레코드를 건다. 이 노래의 제목이 <푸줏간 소년>. 2절 가사만 옮긴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부쉈어
그녀가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지
그는 칼을 꺼내서 줄을 자르고 그녀를 내려주었어
그녀의 주머니 속에 이런 말들이 있었어
프랜시는 누전트 가족이 집에 없는 사이에 담을 넘어 들어가 첫번째 사고를 쳐서 소년원 정도의 시설에서 반년을 지내고 온다. 노래 가사의 방식으로 죽는 일에 실패한 엄마는 결국 강바닥에서 건져 올려지고, 돌이킬 수 없이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버린 아버지와 먹고 살기 위하여 정말 “푸줏간 소년”이 되어 호텔의 음식쓰레기를 수거하고, 돼지 도살장에서 진짜 돼지한테 충격 총을 발사하는 프랜시스 브래디. 자신이 저지른 비행으로 소년원을 다녀오고, 이 사이에 필립과 친해진 절친 조와 눈에 띄게 사이가 벌어져, 조의 부모도, 조 자신도 더 이상 프랜시와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럴수록 조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프랜시.
오직 더욱 심각한 오해와 집착과 사고만 남아 있는 저 먼 북국의 쓸쓸하고 잔인한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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