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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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마흔 개의 희극을 생산해 온전한 열한 개 작품을 남긴 아리스토파네스를 사람들은 흔히 “희극의 아버지” 또는 “고전 희극의 왕자”라고 추앙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은 그의 열한 작품 가운데 초기 여섯 작품을 싣고 있다. 혹시 이 책을 읽을 다른 분이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는 바,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열광적으로 공연을 했던 희극, 비극 말고 희극 작품을 21세기에,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면, 드라마틱한 코미디로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리스토파네스를 통해 발견한 그리스 고전 희극의 특징은,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을 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전시에는 항상 그렇듯이) 아테네를 대표해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을 통솔해나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명예로운 이름을 올리는 클레온과 극적으로 반목하여 희극에 실명으로 등장시켜 망신을 주고 있는 정치 드라마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스 로마 고전의 선구자이자 권위자인 역자 천병희에 따르면, 아리스토파네스는 당대 가장 치열한 보수파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클레온의 민중선동적 주전론에 극적으로 반대한 건 당연하다고 쳐도, 소크라테스마저 철학자가 아닌 궤변론자로 인식해 당시 민중의 의식을 호도해, 능숙하게 익힌 논리로 사악한 것으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능히 이기게 만드는 법을 주로 가르치는 썩은 지식인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사약을 들이켰으니 이 책에 실린 희극을 다 공연할 때까지 자신을 희화화 한 극을 전부 보았을 텐데, 원래 아내가 사나우면 사람이 점잖아지는 법이라서(나를 봐라, 나를 봐!) 그리 크게 열을 내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22년에 암피폴리스 전투 중에 전사해버린 클레온은 주전파답게 아리스토파네스와 격돌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은 얻을 것도 없이 이웃한 강국 스파르타와 만날 코피 터지게 싸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해서 얼른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 반면 클레온을 수장으로 하는 강경파들에게는 이도 들어가지 않았던 건 물론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해놓고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린치를 가하지 않았던 당시의 아테네가 얼마나 문화적인 공기를 향유하고 있었는지는 유신과 5공을 겪은 우리는 아주, 아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터.


  책의 첫 작품으로 실린 <구름>의 타겟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여기서 궤변론자이자 개소리 전문가 소크라테스는 돈만 받으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에게 옳은 것(正)과 그른 것(邪)을 토론자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기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젊은 시절에 시골에서 몸치장도 하지 않고 더운물에 목욕도 하지 않으며 벌떼, 양떼, 그리고 올리브 나무와 열매 같은 것들을 향유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던 선량한 스트렙시아데스가, 지금은 비참하게 죽기를 앙망하는 중매쟁이의 소개로,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도시 아가씨를 만나 결혼은 했다. 그리하여 둘이 신혼의 침상에 올랐을 때, 신랑의 몸에서는 지게미와 치즈와 양털 냄새가 진동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샤프란 색의 옷과 프렌치 키스와 낭비와 식도락과 애욕과 욕정 덩어리였던 예쁜 신부의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흘렀는데, 이런 극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건장한 아들 페이딥피데스가 태어났다. 이 귀한 아드님이 대가리가 커지자 취미를 붙인 것이 마차 경주. <일리아드>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마차 전투를 치루는데, 전쟁 중이라도 옛 사람들은 정취를 찾아 잠깐 휴전을 선언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레슬링, 권투, 달리기, 그리고 마차 경주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바로 이 마차 경주에 우리의 페이딥피데스가 전력 투구를 시작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말 한 마리 건사하는 게 보통 버거운 것이 아니어서, 불쌍한 주인공 스트렙시아데스는 날이면 날마다 고리의 부채만 늘어가고 있던 거였다.

  생각하다 못해 아버지가 스스로 이웃하고 사는 소크라테스의 학습 방에 들어가 그로부터 채권자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토론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나. 이제 늙어서 머리가 돌지 않아 열을 가르쳐주면 아홉을 잊고, 그나마 한 시간만 더 흐르면 그것도 잊어버려 놀라운 교수법을 지닌 소크라테스도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퇴학을 시켜버린다. 대신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받아들여 천하에 둘도 없는 말장난을 성공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게 과연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 마음대로 되기는 할까?

  이걸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던가에서 말했던 명언. 희극엔 최고의 악당이, 비극엔 최고의 선량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럼 누가 악당일까? 젊은 것이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말 타고 노는 일로 가산을 탕진한 아들? 아들에게 법을 거꾸로 세우는 말재주를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닌 게 분명하고. 결론은 소크라테스인데 하, 그것 참.


  클레온에게 악역을 맡긴 작품들은 몇 개나 나오지만, 작품 소개는 생략하고 마지막에 실린 <새>를 잠깐 이야기하겠다. 이 작품은 책에 실린 다른 것들과 확연하게 구분을 할 수 있는데, 이 보수주의자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현실과 떨어진 상상의 세계로 독자와 관객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획기적 분기점이 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가차없이 코피가 터져 치명적 상처를 입은 직후에 쓴 작품이다. 도널드 케이건이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시라쿠사 전투가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만, 속상하게도 오래 전(2014년)에 읽어 왜 시칠리아까지 기어들어 싸웠는지, 어떻게 아테네가 패전했으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는 다 잊었다. 하여튼 이제 아네테 시민들에겐 일종의 공황상태가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새>에도 이런 인간이 둘 등장한다. 에우델피데스와 페이세타이로스. 에우델피데스는 ‘낙천가’, ‘희망의 아들’이란 뜻이고 페이세타이로스는 ‘믿음직한 친구’라는 뜻이라고 431페이지 주석에 쓰여 있다. 이 순간, 팍, 머리에 떠오르는 다른 작품 하나. 발터 브라운펠스라는 유대인 작곡가가 만든 같은 이름의 <새>라는 오페라. 브라운펠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은 ‘좋은 희망’ (Hoffegut: Good Hope)과 ‘충실한 친구’(Ratefreund: Loyal Friend)가 비슷하다. 흉악한 그리스 신화, 후투티로 변신한 테레우스, 나이팅게일로 변신한 테레우스의 처 프로크네, 제비로 변신한 프로크네의 여동생 필로멜레의 다음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여간 시라쿠스 전투에서 크게 패전하는 바람에 현타를 진하게 경험한 두 늙은이 에우델피데스와 페이세타이로스는 진한 현실 도피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이들은 도시 아테네를 떠나 숲 속에서 새들의 나라, 아직도 새들의 왕을 해먹는 왕년의 인간 테레우스가 변한 후투티의 영토로 들어가 초연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들은 후투티를 설득해서 제우스가 사는 하늘과 인간이 사는 땅 사이에 성을 건설해 신과 인간을 정복해버리라고 살살 꼬드긴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신들이 먹고사는 미세먼지, 즉 제물로 바친 짐승들의 연기를 중간에서 약탈해 이들을 굴복시키자는 것이다. 그래 곧바로 새들은 허공에 대규모의 성을 건설하게 되고, 힘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또 자연스럽게 나라를 건설하니, 나라이름을 “구름뻐꾹 나라”로 명명한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전령 또는 스파이로 구름뻐꾹 나라로 내려와 하는 말이, 얘들아, 제우스한테 덤벼, 덤벼. 자기 딸을 아내로 보낼 때까지 개겨! 프로메테우스의 등장까지 발터 브라운펠스가 작곡한 <새>와 똑같다. 다만 브라운펠스는 새들 가운데 독수리라고 불리는 외로운 현자가 있어서 이렇게 조언해주는 것이 차이가 난다.


  “사람들의 우정이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먼지 구덩이 속에서 숨쉬는 그자들, 질투어린 눈길로 쏘아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인생을 부정하는 천박한 것들이 우리한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인식해라. 우리가 창공의 순정한 높이에서 우아한 궤도를 그리며 성스러움과 빛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었는가? 도대체 사람들이 우리한테 뭘 원하겠니?”


  브라운펠스는 극장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를 직접 관람하고 자신 스스로가 대본을 각색해 자신의 작품 <새>를 만들었다. 멘델스죤, 쇤베르크, 말러 등 유대인과 유대 혼혈 작곡가들의 작품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던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 그들의 견해를 완전 무시하고 만든 작품이니,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끝물, 살벌했던 시기의 아테네에서 공연했던 비유적 희극을 자기 것으로 만든 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을 듯했다. 하여간 아리스토파네스건 브라운펠스건 편안히 쉬시라.



내가 갖고 있는 발터 브라운펠스, <새> CD 표지. 그림이 독특하고 예뻐서 가져왔다.

 히틀러가 브라운펠스의 50% 유대혈통을 알지 못한 채 국가사회주의 독일의 국가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하자, 브라운펠스는 거칠게 거절했단다. 작곡했으면 더 우스운 꼴이 될 뻔했겠다.


 * 브라운펠스의 <새>의 결말은 아리스토파네스와 달리 제우스가 바람을 한 번 훅 불자 새들이 쌓던 허공의 성이 쑥대밭으로 허물어지고, 인간들 역시 새들에게 쫓겨나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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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9-30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쌩뚱 맞지만 그리스 사약은
어떤 스타일인지 좀 궁금합니다.

Falstaff 2022-09-30 17:05   좋아요 1 | URL
그리스 시대에 벌써 비소의 존재를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먹은 다음에 시간이 좀 지나 죽은 걸로 봐서 비소는 먹지 않았을 거고요, 생약 성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니면 비소 먹고 곧바로 죽었는데, 주인공은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다 하고 죽는다는 소설작법 3장 1절에 따라 후세의 인간들이 사약 먹은 다음에도 몇 마디 하게끔 연출했을 수도 있고요.
중국의 한나라 시대에는 짐이란 새의 몸 속에서 추출했다는 짐독을 사약으로 썼다는데 짐이란 새가 과연 있는지, 있다면 이마트에서 한 마리에 얼마 주면 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울나라의 사약은 비상이라고 하는 비소가 있었음에도 생약 성분의 독을 사용했지만 그게 생약 성분이라 먹는 즉시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곧바로 죽지 못하거든요. 그래 사약은 대개의 경우 그냥 형식적인 절차로, 사약 마신 다음에 형리가 가서 수양대군이 단종 죽인 것처럼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더군요.

coolcat329 2022-09-30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희곡에서 희화화하여 악당으로 묘사했군요. ㅋㅋ ‘희극엔 최고의 악당이 비극엔 최고의 선량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말 정말 그런 거 같네요.

브라운펠스는 첨 듣는데 히틀러와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CD표지 정말 예쁩니다. 브라운펠스의 오페라 <새>의 내용을 이미 알고 원작인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을 읽으니 골드문트님은 재미있으셨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Falstaff 2022-09-30 20:00   좋아요 0 | URL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_-;;
아무래도 너무 낡아서 말입죠.

브라운펠스의 작품도 재미있는데, 이이의 활동 자체가 나치에 의해 소위 퇴폐예술로 직혀서 ㅎㅎㅎ, 근데 퇴폐음악, 퇴폐미술 같은 거 찾아 즐기는 재미가 꽤 괜찮다는 말씀입죠. ㅎㅎㅎㅎ
물론 여기서 말하는 ˝퇴폐˝는 우리가 아는 단어가 아니라 나치의 시각에서 보면 퇴폐라는 뜻이긴 합지요. ^^;;

그레이스 2022-10-01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파네스 읽을 당시에는 몰랐는데 읽고 난 한참 후에 그 풍자의 힘에 대해 새삼 느꼈어요.

Falstaff 2022-10-02 10:22   좋아요 1 | URL
옙. 아무래도 풍자는 희극이 제격입지요. 당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환장하겠지만 말입니다. ㅋㅋㅋ
 
톨레도의 유대 여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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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온 포이히트방거(이후 “포이히트방어”로 표기)는 1884년에 뮌헨에서 부유한 유대인, 이라기보다 독일 시민으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보충병으로 징집당했다가 병명 불상의 이유로 의가사 제대를 했다. 포이히트방어 본인은 20세기 두 번의 불행한 큰 전쟁을 겪은 다음 유대인 말고 세계인으로 삶을 지속했지만 태어날 당시엔 ‘유대인을 위한 마가린’ 제조공장의 사장이었던 부친 지그문트 포이히트방어, 모친 요한나 네 보덴하임머 부부의 전통적 유대교를 지키는 집안 장남이었다. 뮌헨과 베를린의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1907년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 <바하라흐의 랍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위가 취소를 당하기도 하고, 1920년대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나치의 핍박을 받은 경험 등,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만 했던 온갖 신난의 경험이 그를 종교와 민족 등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1940년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 머물던 포이히트방어는 독일이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한 채 마르세유로 탈출에 성공한다. 당시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경로인 독일-프랑스-피레네 산맥–스페인–리스본–뉴욕1이라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후기의 대표적 장편소설인 <미국을 위한 무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그리고 <톨레도의 유대여인>을 발표한다. 우리말로 번역해 발매하고 있는 포이히트방어의 책은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 2018)과 오늘 소개하는 <톨레도의 유대 여인> 두 권 뿐이다. 후기 작 뿐만 아니라 그의 초기 역사소설이자 작가로 명성을 날리게 해준 <유대인 쥐스>도 이른 시일 내에 소개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쉽지는 않을 듯.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함>은 “18세기 말 무렵 서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중세는 말살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대는 이런 서유럽의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세르반테스 시절과 비슷하게 여전히 “완고한 중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이었다. 옆나라에는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근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역사의 격변기 속 스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식민지 전쟁에서 판판히 무릎을 꿇기는 했으나,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축복받은 자연의 나라’ 스페인이었다면, <톨레도의 유대여인>의 무대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를 여전히 무슬림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의 이베리아 반도, 이 가운데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를 배경으로 한다. 자우메 카브레의 말에 따르면 “지구가 편평했던 시절” 이야기. 이제 고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중세가 시작하려하는 때.

  특별하게 주인이라고 내세울 것 없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통치권을 쥔 건 한니발로 대표하는 카르타고였다고 포이히트방어는 주장한다. 카르타고의 짧은 통치 시기가 지나가고 이어서 6백년 간 로마인의 지배를 거쳐, 서고트족 기독교도가 3백년간 통치한다. 이때 로드리고라는 이름의 멍청한 왕이 있었는데 최고의 영웅이자 명장인 쥴리아노 장군이 북 지중해 해안선을 지키러 출정하고 없는 사이 장군의 딸 플로린다를 무책임하게 자빠뜨리고 만다. 플로린다의 배는 불러오지만 돈 로드리고는 이혼할 수 없는 가톨릭 유부남①이었던 것.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쥴리아노 장군은 눈이 뒤집혔을지언정 명장답게 완전하게 가면을 쓴 채 왕을 접견해, 무어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병력이 더 필요하다면서 왕의 군사를 빌려, 용감하게 무어족을 향해 전선으로 떠난다. 그러나 장군은 무어족과 연합해 거꾸로 창을 거꾸로 쥐고 스페인을 침공해서 돈 로드리고 부부를 참살, 이베리아 반도를 무어족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바친다.2 무려 4백년 동안. 작품이 시작하기 백 년 전쯤, 산악지방의 험한 지형에 기대 생존한 마지막 서고트 족이 험한 자연에 의하여 단련된 야성으로 이베리아 수복 전쟁을 시작했고, 무려 4백년에 이르는 평화로운 시간 동안 화려한 면모를 자랑했지만,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유약해질 대로 유약해진 무어족은 전쟁에 패해 순식간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가 싶었는데, 이들은 지중해 남쪽 아프리카 무슬림에게 구원을 요청해 주로 사하라 남부의 거센 무슬림이 주축이 된, 수를 셀 수도 없는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부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지역, 세비야, 그라나다, 코르도바에서의 지배를 유지하게 된다.②

  ①을 귀찮게 왜 썼느냐 하면, 이 로드리고 왕의 멀고 멀고 또 먼 후손이자 <톨레도의 유대 여인>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카스티야의 국왕 돈 알폰소 역시 이혼할 수 없는 가톨릭 국가의 왕이면서 표제 “톨레도의 유대 여인”인 라헬 이븐 에스라와의 사이에 사생아이자 외아들인 산초를 생산한다. 이걸로 봐서 스페인에서는, 나중에 헨리 2세의 웬수 같은 아내 엘레오노르3의 말을 참고하면 전 유럽의 이혼할 수 없는 왕들에겐 사생아를 만드는 전통이 내려온 듯하기 때문이다. ②는 작품의 시대를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허구의 특권으로 약간 조정해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가 아빠 헨리 2세가 죽자마자 잉글랜드 군사를 이끌고, 당시엔 가히 세계대전이었던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철없이 호전적이기만 한 카스티야의 왕 돈 알폰소 역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수십만의 무슬림 군을 격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톨레도의 유대 여인 라헬에게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세비야를 선물해주려 한다.

  마호메트 사후 80년에 안달루시아를 침공한 무슬림은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전 이베리아 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유럽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우수한 무슬림 문화를 들여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정돈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로 만들었다. 코르도바는 서방 칼리프의 관저 소재지로 전 서방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이에 따라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토지가 비옥해지고, 고도로 발달한 무슬림의 광산, 제련기술, 정교하고 훌륭한 양탄자와 직물기술을 들여왔다. 코르도바 시에 학교가 무려 3천개가 있었으며 모든 대도시에 대학을 설립하고, 당연히 유명한 무슬림 도서관4을 만들었다. 그리스 철학을 새로운 사상 체계로 인정한 것은 당연히 피지배민족에게 온정을 베풀었다는 증거라서 기독교도를 위해 복음서를 아라비어로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산악 서고트족의 침공으로 유입한 아프리카 형제국이 집권하자 사정이 바뀌어 자유로운 정신의 문명화된 무슬림 군주 역시 추방을 당하게 되었으며, 무수한 인구의 유대인에게는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두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거나 떠나라고. 유력 유대 가문 가운데 하나인 이븐 에스라 가문에서는 아들 한 명을 이브라힘으로 개명을 하고 무슬림으로 개종시켜 그들의 재산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친척들은 기독교 이베리아 국가들로 떠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이브라힘은 대단히 총명한 중늙은이가 되었고, 원래 적지 않았던 재산이 유대인의 유전자를 타고 흐르는 셈법5에 의하여 세상에 몇 번째 되지 않는 거부를 쌓았다. 이런 이가 세비야가 아닌 톨레도의 옛집, 멀고 먼 과거 한 시절에 자신의 조상이 직접 지은 폐허 우물가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카스티야의 제1 장관 돈 만리케 데 라라가 국왕 돈 알폰소에게, 패전으로 인한 경제적 피폐를 극복하고 다시 이베리아 반도의 수복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능력있는 재무장관으로 이브라힘을 추천했기 때문에.

  이브라힘은 제의를 받고 숙고를 해도 결정을 하지 못해, 오랜 무슬림 친구이자 의사이며 역사가, 철학자, 모든 지혜의 결집, 정신적 자유의 소지자라 할 수 있는 무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맏딸 레히야, 아들 아흐메드, 친구 무사와 함께 세비야에서 톨레도로 이사를 결행한다. 이브라힘은 열세 살 이전에 쓰던 자신의 본명 예후다 이븐 에스라를 다시 사용하게 되며, 따라서 딸 레히야와 아들 아흐메드도 유대식 이름인 라헬과 알라자르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한다.

  아직 어려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았던, 비록 상대가 왕이라도 조금은 거만한 성격의 라헬이 세월이 조금 흐르면서 어떠한 기독교도가 바라보아도 그의 입을 통해 “라 페르모사” 즉, “아름다운 여인”이란 단어를 뱉게 하고야 마는 미모를 갖게 되면서, 이 길고 긴 비극은 시작한다.


  대단히 재미있다. 본문만 750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이지만 밤을 밝히게 만들 정도. 당신의 온전한 즐거움을 위하여 스토리의 거의 전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치밀한 구성에, 구태여 숨기지 않는 포이히트방어의 평화를 위한 주장이 가볍지 않다. 완전한 유대인 작가라서 실제 주인공 예후다 이븐 에스라에 과한 방점을 찍은 듯 하긴 해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약점이 오히려 작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포이히트방어의 다른 작품을 빨리 더 읽고 싶다.


  1. 독일-프랑스-피레네 산맥–스페인–리스본–뉴욕의 경로를 다룬 대표작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쓴 <리스본의 밤>이 단연 돋보인다.
  2. 이 일화가 본문에 소개되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를 동화라고 선언한다. 서고트 족의 멸망은 망할 때가 돼서 망했다는 거다.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6백년 동안 다스리다보니 유약해진 것과 비슷하게. 핸델의 오페라 <로드리고>의 스토리가 이 사건이다.
  3. 매우 복잡한 엘레오노르의 생애는 그냥 넘어가자. 매우, 매우 매우 복잡하다. 사실과 관계없이 이 책에선 엘레오노르가 질투에 눈이 멀어 헨리 2세의 애첩을 살해해 열받은 왕이 왕비를 15년 동안 유폐했다가, 왕이 서거하면서 자유의 몸이 된 것으로 설명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고, 작품의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엘레오노르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는 한다.
  4. 무슬림 식 중세 도서관과 필사본에 관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깜짝 놀랐었다.
  5. 유대인 작가 누군가가 그랬다(솔 벨로든가?). 유대민족이 세계에 남긴 탁월한 두 가지 업적이 악기 연주하는 거하고 고리대금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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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09-2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도 “대단히 재미있”어요.

Falstaff 2022-09-27 13:44   좋아요 0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책은 훨씬 더 재미나요!!

coolcat329 2022-09-27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저도 읽고 싶지만 스페인 역사를 모르니 자신이 없네요.
우와 근데 책값이 놀랍습니다! 도서관에 신청하기도 눈치가 보이는 금액이에요.😬

Falstaff 2022-09-27 13:45   좋아요 2 | URL
세금 많이 내셨잖아요. 그냥 신청해버리세요!

그레이스 2022-09-2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야는 제게 인상적인 화가라 장바구니에 넣어놓았구요
이 작품도 재미있을것 같네요

Falstaff 2022-09-27 13:46   좋아요 1 | URL
고야도 재미있는데요, 이 책이 좀 더 재미납니다.
참, 그림 좋아하시면 고야도 읽으셔야지요. ^^

바람돌이 2022-09-27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톨레도 제가 좋아하는 도시.
그래서 더 재밌어 보인다는... 골드문트님 서재는 항상 새로운 작가와 책이 가득입니다. ^^ 그런데 정말 책값이 사악하네요. ㅠㅠ

Falstaff 2022-09-27 13: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톨레도 가보셨군요. 혹시 산티아고 순례하시는 김에?
지만지 책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까 도서관에 구입 신청한 책의 거의 대부분 지만지 책이군요. 이러다 사서한테 찍히는 거 아닌지 몰겄습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2-09-27 16:16   좋아요 1 | URL
산티아고는 아니고 스페인에 고야 보러 갔어요. 그때 톨레도도.... 얼마전에 지만지 책 한권 샀는데 살때는 가격 보통 책하고 비슷해서 뭐 그냥 샀는데 온 책 두께보고 경악했어요. 진짜 비싸...ㅠㅠ

잠자냥 2022-09-27 1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격 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탈해지네요.
100자평 보니까 골드문트 님이 심지어 도서관을 이용하셨군요! ㅋㅋㅋㅋㅋ
저희 도서관에서는 받아줄랑가 모르겠네요. 책 값이 너무 비싸도 안 받아주더라고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2-09-27 10:0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망설여지는 가격이죠?
적립금 부자 잠자냥님만 주저없이 사실듯요 ㅋㅋ

잠자냥 2022-09-27 10:13   좋아요 2 | URL
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참 비싸네요.
그리고 살 책이 왜케 많은지;;;; 아껴써야 해요...;

독서괭 2022-09-27 10:35   좋아요 2 | URL
지만지 책은 정말 다 비싸네요;; 이 책은 특히나 헉 하는 가격이군요;;

Falstaff 2022-09-27 13:48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있는 분이 더 무섭다니까요? 적립금 말입니다. ㅋㅋㅋㅋ
근데 적립금도 돈이니까, 비싼 건 비싼 거고, 너무 비싼 것도 너무 비싼 거예요.
아이고, 정말 책값은 하품 나와서리.....

stella.K 2022-09-27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넘 비싸 대신 예비 독서로 <리스본의 밤>이라도 먼저 읽어 볼까
했더니 악명 높은 범우사. 그나마 절판이네요. ㅋ
그럴 리는 없겠지만 중고샵에 나오면 그때...^^

Falstaff 2022-09-27 13:50   좋아요 2 | URL
리스본의 밤은 레마르크의 대표작 세 작품하고 비교하면 좀 덜 재미있기는 하지만 ㄱ래도 썩 좋습니다. ㅎㅎㅎ 약 올리는 겁니다. ㅋㅋㅋㅋ
 
불타버린 사람들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64
패트릭 화이트 지음, 이종욱 옮김 / 범우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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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대산세계문학총서 165~166번, 패트릭 화이트의 장편소설 <전차를 모는 사람들>을 정말 인상 깊게 읽고, 시중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2008년에 나온 중판. 초판은 화이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1973년 11월 1일에 나왔다. 아시다시피 노벨 문학상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 몇 주가 더 지나야 한림원에서 작가에게 직접 전화를 해 수상소식을 알려준다. 상 받을 작가가 잠을 자고 있든지, 샤워 중이든지 전혀 신경 안 쓰고 무조건 스톡홀름 기준으로 업무시간에 전화 건다.

  1970년대의 별로 바람직하지 않던 우리나라 문화적 환경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요새말로 블루 오션 취급을 받아, 문학상 발표가 나자마자 각 출판사들은 수상 작가의 책을 경쟁적으로 서둘러 출간함으로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별 지랄들을 다 했다. 이 책,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64번에 자리한 《불타버린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금속활자 시대에 내가 좋아한 출판사였던 비상하는 독수리, 범우사 역시 1973년 가을1에 기대하지 않았던 패트릭 화이트가 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화이트가 1964년에 출판한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The Burnt One》을 허겁지겁 얻어와 외대 대학원 아프리카지역 연구학과에서 공부한, 또는 공부하고 있는 이종욱에게 번역을 의뢰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건 당연히 납기였겠지. 세상에. 번역에도 납기가 있다니. 그땐 그런 시대였다. 아마 저작권이고 뭐고 그딴 것들도 신경쓰지 않았을 거다. 남한이 북한보다도 못 살았던 시기2니까 뭐.

  그런데, 이거 참, 얘기하기도 민망한데, 원래 패트릭 화이트가 쓴 《불타버린 사람들》은 모두 11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던 책이지만 열한 편을 다 번역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고 이종욱은 고백한다. 그리하여 중편 분량인 <말라죽은 장미>, <차 한잔>, <유쾌한 영혼>, <고양이를 길러서는 안 되는 여인>, 이렇게 네 편은 번역서에서 빠졌으며, 분명히 “지워지지 않는 활자”로 말하기를, “차후에 보완할 예정”이라고 했음에도, 사내가 이렇게 얘기했으면 못 먹어도 질러봐야 하는 게 당연하거늘, 내가 읽은 “같은 책의 중판”에도 어찌하여 똑 같은 서문을, 부끄럽지도 않은지, “ctrl + v”하고 자빠졌느냐, 하는 거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뭐라고 보태느냐, 그대로 서문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다.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말로 옮기기에 만만치 않은 화이트의 작품을 서둘러 번역하느라고 졸역이 군데군데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부끄럽다.”


  어떠셔? 욕 안나오셔?3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세상에나. 단편을 번역하는 것이 장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단편에 비하면 시 번역하는 게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종욱한테는 거꾸로였나 보다. 좋다,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우리말로 옮기기 만만치 않은 화이트라니. 어떤 외국 작가가 우리말로 옮기기에 편한데? 있으면 두 명만 대보셔. 하지만 무엇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건 역자 자신이 졸역이 군데군데 있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책을 찍는데 동의를 했다는 거다. 부끄러울 짓을 왜 해? 미치신 거 아니심?

  범우사도 똑 같…거나 더하다. 35년만에 중판을 내면서 그래 초판 서문까지 그대로 베껴? 그럼 초판에 빼먹은 네 편을 중판엔 보완을 해야 할 거 아닌가 말이지. 이종욱이 이젠 늙어 힘들면 다른 역자한테 부탁을 해서라도. 아마 못했을 거다. 35년 세월 동안 세상이 바뀌어 엄중해진 저작권 법 때문에 새로 네 편을 번역하려면, 특정시기 이전 번역물의 복사 말고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렇게 콕 집어 얘기하면 범우사 입장에서 내가 얼마나 얄미울까?


  그러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범우사 사장이고 이 책을 중판까지 찍을 정도로 아꼈다면, 새롭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정식으로 출판하는 쪽을 선택했을 거 같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이이가 쓴 장편소설, 분명히 부담이 되는 분량이긴 해도, <전차를 모는 사람들>를 읽어보면 넉넉히 짐작하실 수 있다. 지금 알라딘을 검색해봐도 아직까지 독후감 올라온 건 내가 쓴 거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인상 깊었던 책이다. 이 작품집 《불타버린 사람들》은 <전차를…>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고드볼드 부인과 같거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집중 관찰한 작품들로 채웠는데, 물론 11편 가운데 7편만 실려 있지만, 이때 52세였던 패트릭 화이트의 시선이 어찌 이렇게 감각적이고 쓸쓸하고 애잔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삶에서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동성애자로 살면서도 동성애 해방운동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저 조용한 삶을 유지하는 편을 선택한 천성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섯 편의 단편과 하나의 중편 가운데 나이 든 부부가 다른 나이든 부부의 집에 정찬을 하러 가서 초청한 부부의 취미였던 새 울음 소리 녹음을 듣는 과정에서 그만 행복한 부부의 기초가 삐긋거리는 장면을 우연히 듣게 되는 <달밤의 할미새>와, 고물상을 하는 가족이 쓰레기장으로 소풍을 가 결코 이혼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부부싸움을 하고, 쓰레기장 옆 공동묘지엔 평생 분방하게 살다 간 자그마한 여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고물상 집 장남과 고인의 조카딸이 이 사이에 자그마하지만 예쁘기도 한 사랑을 만드는, 또는 시작하거나 배우는 내용의 중편 <쓰레기장에서>를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이 책의 초판이 모르긴 해도 내려쓰기를 했던 금속활자 시대의 것이었고, 그걸 그대로, 단 한 번의 추가 교정도 하지 않은 듯하게, 그대로 복사해서 책을 만들어 여기저기 눈에 거슬리는 철자법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그것”이라 쓰지 않고 구태여 “그 것”을 고집하는 거. 정말 한 시절 도약하는 독수리4, 범우사를 좋아하는 출판사로 꼽았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미련을 두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까 말까, 거 참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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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73년은 아직 특정 출판사를 좋아할 단계는 아니었다. 출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월간지 '소년중앙'을 막 떼고, 이제 겨우 '학원'을 읽어볼까 생각했던 소년 시절. 불과 몇 달 후 단번에 집구석 거덜이 나서 학원은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2.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X년 우리나라 남자들 가운데 유일한 내 라이벌 신성일이 역사상 거의 최초로 일본 로케를 떠났다. 이때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무’들을 술집에선가 어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신성일더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라가 가난한 주제에 간나들이 무슨 영화를 찍으러 일본까지 오고 그래?”
  3. 이렇게 말하니까 “치키치키차카차카쵸코쵸코촉!”의 저팔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라디오 전성기 땐 아마 이런 손오공 주문이 유행했을 걸? “우랑바티바라움 무따라까빠따라까 쁘라냐!”
  4. 도약하는 독수리는 범우사라는 회사가 독수리 스타일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회사 로고가 그랬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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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0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범우사는 걸드문트가 얄밉겠지만 일을 하라! ㅋㅋㅋㅋ

Falstaff 2022-09-23 11:45   좋아요 2 | URL
ㅋㅋㅋ 바로 그게 제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레이스 2022-09-23 0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젠 저도 범우사 책에 손이 안가네요.^^

Falstaff 2022-09-23 11:46   좋아요 1 | URL
저는 애써서 좀 읽어보려 하는 축입니다만 자꾸 이러면 재미 없어요. ^^;;;

잠자냥 2022-09-23 08: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단 범우사는 표지 디자이너도 없는 거 같아요…;; 요즘 나오는 책들도 음….

Falstaff 2022-09-23 11:47   좋아요 2 | URL
요즘 책은 더 정이 안 가서 말입죠. 에휴. 디자인에 돈 쓰기 싫고, 번역료에도 쓰기 싫으면, 문 닫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_-

stella.K 2022-09-23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각주가 더 재밌네요.ㅎㅎㅎ
예전에 삼중당 대 범우사였는데 다 한 시절의 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잘 나가는 출판사도 앞으로 2, 30년 후에도 지금의 명성을 유지할지는
아무도 모르죠. 좀 안타깝네요.
작년에 임헌영 선생님 인터뷰 자서전을 읽으니 윤형두 사장 대단했더군요.
지금은 정말 초라해졌죠. 경영을 혁신해야할 것 같은데...
그래도 요근래 새로운 책도 간간히 나오고 뭔가 달라질 기미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골드문트님의 전차를 모는... 리뷰 읽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도 사 놓은 책이 많아서...요.ㅠ

Falstaff 2022-09-23 16:50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ㅋㅋㅋ 각주를 가끔 달 생각입니다. 다음주에도 하나 있답니다. ㅋㅋ
정말 삼중당, 범우사, 아직도 건재한 을유, 여기에 망한 정음사까지 대단한 출판사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아까운 바가 작지 않습니다. 에휴....
요새 나오는 범우사 책들 검색해보니까 거의 예전에 찍었던 거 같더라고요. 번역물은 저작권 물지 않는 것 위주고요.
<전차를 모는 기수들>은 분량이 끔찍하고 가격도 이에 비례해서 함부로 추천하기는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십사, 하는 편입니다. 새털 같은 날들인데 사 놓은 책 먼저 읽으시고 천천히 시작하셔요. ^^

바람돌이 2022-09-23 17: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범우사는 표지가 너무 구려요. 까치보다 더해요.
그나마 까치출판사는 아무도 안내는 양질의 책으로 승부수를 던지는데,
범우사는 좀 어정쩡한 느낌이에요.
그런데 진짜 35년만에 중판을 찍으면서 그대로 내는건..... 안타깝네요.

Falstaff 2022-09-23 19:02   좋아요 2 | URL
ㅎㅎㅎ 까치도 참 오랜만에 듣는 출판사군요. 거긴 주로 레프트 사회과학 서적과 철학 책을 찍지 않았나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굳이 레프트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말입죠. ㅋㅋㅋ
요즘 까치는 표지 디자인이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아닌가요? ^^;;

바람돌이 2022-09-25 12:16   좋아요 1 | URL
아직 까치출판사 표지 괜찮은거 못봣어요. ㅎㅎ
특히 역사쪽으로는 학술서적들을 많이 번역해줘서 좋은 출판사인데 극악할 정도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촘촘한 편집으로도 유명해요. ㅎㅎ

Falstaff 2022-09-25 17:34   좋아요 1 | URL
지금 검색해보니 정말 그렇군요. 표지 ㅋㅋㅋㅋ
까치 같은 출판사가 돈을 좀 벌어야 하는데 제가 기여해주지 못해 미안한 바가 작지 않군요. ㅜㅜ

바람돌이 2022-09-25 19:12   좋아요 1 | URL
옛날이 많이 사 제껴서 저희집에는 많습니다. 요즘은 공부를 안해서 없군요. ㅠㅠ
 
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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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객관식 문제 하나 풀어보시라.


  문제)  당신은 오늘 출근하면서, 또는 쇼핑 몰에서 한 명의 잘생긴 이성을 봤다. “봤을 뿐”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폰 번호 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오늘 출근 길에, 또는 쇼핑 몰에서 당신이, 만났다기 보다 스치고 지난 이성의 모습을 “2백자 원고지 50장 이상”으로 가장 충실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다음 중 누구일까?


  ① 찰스 디킨스

  ② 오노레 드 발자크

  ③ 빅토르 위고

  ④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⑤ 헨리 제임스


  답은 없다. 각자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정답인데, 나라면 ②번 오노레 드 발자크를 고르겠다. 나머지 인간들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발자크와 함께 제안을 한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세묘사에 관해서는 발자크가 끝장을 본다. 이 책도 ‘미쉬’라는 사나이의 생김새를 상세 묘사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새 세기가 열리고 겨우 3년이 지난 1803년 11월 15일 오후 네 시. 샹파뉴 지방 오브 현의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자이며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첫 장면에선 초록 단추가 달린 초록색 즈크천으로 만든 사냥복 윗도리와 같은 천의 바지를 입고, 정성을 들여 소총을 손질하고 있다. 그런데 보아하니 능란한 사냥꾼은 아닌 듯하다. 사냥에 필요한 기타 도구들이 보이지도 않고 총기도 필요 이상으로 육중한 모습이다. 이어서 미쉬의 생김새를 발자크스럽게 유장하게 그리다가 두 가지의 인상적인 코멘트를 한다. 만일 작가가 묘사한 미쉬의 모습 전부를 그대로 여기에 적어놓는다면, 그게 하도 길고, 자세하고, 장황해서, 적어도 절반의 서재 친구가 ‘친구 취소’ 버튼을 클릭하시리라 믿어 딱 두 개만 소개해보자면 이러하다.

  1.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

  2. 고장에 퍼진 미쉬의 별명은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였다.

  소설책 좀 읽는 독자들은 위 두 가지 문장만 탁 읽어도, 아하, 이자가 악행만 저지르다 비명에 가겠구나, 하고 짐작할 것이다. 짐작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키가 작고 뚱뚱하며 냉정한 성격임에도 원숭이처럼 거칠고 민첩한데다, 하얀 얼굴에 붉게 충혈된 자국이 있는 노란 눈동자의 사나이 미쉬는, 보잘것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고아 신세가 됐는데, 공드르빌 영지의 드 시뮈즈 노후작의 며느님이 거두어 보살피다가,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와 글 읽기와 쓰기, 셈법을 가르치다가, 나이가 차니 공드르빌 소유지의 관리자로 승격을 시켜주었다. 1789년에 프랑스에서는 귀족 부르주아에겐 지옥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고, 공드르빌 성château도 시민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게 된다. 이어 1790년, 노후작의 아들 내외는 쌍둥이 아들을 서둘러 국외로 망명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체포 당해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이때 미쉬는 영지의 관리인 자격으로 단두대 곁에서 목 두 개가 육체에서 분리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

  같은 지역 주민들이 미쉬를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인 가롯 유다로 여기는 건, 기묘한 방식으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생김새와 언변에도 이유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1789년 이후, 특히 산악당 자코뱅 일파에 의한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3년 이후에는 미쉬 자신이 마치 공드르빌 땅의 주인이나 다름없이 행동을 한 것에 있다. 여기에 근동에서 보기 힘들 막강한 위력을 지닌 소총도 가지고 있지, 시간만 나면 아예 내놓고 그 총을 분해, 수입(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 조립을 반복하고 있어서 국가에 의하여 몰수당한 드 시뮈즈 후작의 영지를 새롭게 구입한 마리옹조차 미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해고하고 다른 이를 관리인 자리에 앉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치기는커녕 미쉬에게 연 3천 리브르의 급여를 보장하고 여기에 따로 매매이익을 분배해주기로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으니, 어느 정도의 악명인지는 아시겠지?

  한 가지 더 드 시뮈즈 후작에 관해 말하자면, 1790년에 시민들에 의하여 체포당해 아르시의 트루아 혁명법정이 사형을 선고했을 때, 당시 법정을 주재한 사람이 누군고 하니, “고대의 조각상 같은 몸매에 깊은 상념에 잠긴 푸른 눈의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지만 음울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한” 여인이자 미쉬의 아내로 그와의 사이에 열 살 난 프랑수아를 생산한 여성의 아버지, 쉬운 얘기로 미쉬의 장인이다. 피혁제조인 출신 장인이 보기에, 무려 1만 프랑의 재산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큰 영지를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미쉬에게 자기 딸을 결혼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장인 자신은 바뵈프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을 피하기 위해 자살해버리지만, 미쉬가 어려서부터 큰 은혜를 입은 드 시뮈즈 후작 부부의 목을 딴 사람이 장인이고, 자신은 당시 단두대 옆에 서 있었으며, 이후 후작의 영지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좋은 평판은 아예 날 샌 거였을 수밖에. 그러나 1만 프랑이 넘는 재산이라니.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순식간에 오브 현의 아르시에선 미쉬가 서민들 가운데 재산가이자 애국자라는 명성도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프랑스에서도 인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 측정의 도구는 돈이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1799년이 되어 나폴레옹이 쿠데타에 성공한 시점엔 어느덧 야금야금 사들인 미쉬의 토지 가치가 10만 프랑에 육박했으니, 이는 매년 받는 급여와 이윤이 6천 프랑에 이르렀고, 마르트가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과 장인한테 받은 상속분으로 이루어진 합법적인 재산이었다. 하지만 유다의 명성은 더욱 굳건해져 잔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작가가 보기에도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 같은 것이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읽힌다. 여기에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과 왕정복고에 이은 공화정과 다시 왕정 때까지 살아남을 시민 말랭이 등장해 마리옹으로부터 공드르빌 영지를 백만 프랑에 구입한다. 땅 매매에 관한 소문을 들은 미쉬는 득달같이 마리옹에게 달려가 자기가 사겠다고, 말랭처럼 은화 백만이 아니라 금화 8십만으로 사겠으니 넘기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금화 8십만? 그게 어디서 나서? 미쉬가 직접 말한다. “그건 알 거 없어. 그러나 안 팔면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야.”


  미쉬의 이웃에 있는 생시뉴 성. 1790년에 공드르빌 성을 함락시킨 시민들이 생시뉴 성에까지 몰려왔을 때, 성 안엔 시민들을 피해 공드르빌 성의 드 시뮈즈 후작 부부가 미리 보낸 쌍둥이 형제가 사촌 누이이자 고아인 드 생시뉴 양 남매와 함께 있었다. 이때 겨우 열두 살이었던 드 생시뉴 양은 시민들의 협박을 무시하고 오빠들에게 싸울 것을 독려해, 스스로 총탄을 장전하고 화약을 날라 오는 등 대단한 활약을 해, 저항군은 열한 명의 시민을 죽이고 끝끝내 성을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 오빠는 독일로 망명을 가 전투 중 전사를 해버려 본인이 직접 여백작으로 작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곳으로 몸을 피했던 쌍둥이 오빠들 역시 후에 라인강을 넘어 망명을 했다가, 나폴레옹을 척살하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조직의 일원으로 귀국, 생시뉴 성에 잠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것이 작품의 커다란 분기점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 아버지를 단두대에서 몸과 머리를 분리시키게 한 인간을 장인으로 둔 남자, 여태껏 자신의 집안 영토를 마치 자기의 개인 땅인 양 아무 거리낌 없이 활보하며 사냥을 즐기고, 나무를 베고,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자신의 살림집으로 삼고 있는 미쉬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뻔하다. 딱 이럴 때, 공드르빌의 영지를 금화 8십만에 사들이는 걸 거절당한 미쉬는, 새로운 땅 주인 말랭이 아르시의 이름난 공증인 그레뱅과 사방으로 넓은 벌판이라 누가 접근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언덕 위의 한 그루 나무 아래에서 드 시뮈즈 후작 가문의 쌍둥이 형제가 프랑스에 잠입해 오브 현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었는데 자기는 어떤 줄에 서야 유리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이때 나무 위에서 정말로 말랭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총을 겨누고 있던 미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말랭 따위를 죽일 시간조차 없다는 절박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예전에 모셨던 영지의 적법한 주인이지만, 자신이 금화 8십만으로 사려고 하는 땅의 원래 주인이기도 한 쌍둥이 형제의 등장에 온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미쉬. 이 유다 같은 외모의 남자가 과연 무슨 짓을 벌이기에 소설작법 8장 1절. ‘소설 속의 불운한 예언은 언제나 틀림없이 들어맞는다’에 의거해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의 여로를 걷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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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9-20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6쪽의 각주 109에 역자가 썼듯 딱 하나의 명백한 오류가 매우 아쉽다.

그레이스 2022-09-2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발자크...
계속 주행중이시군요!

Falstaff 2022-09-20 13: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도 뵈는 족족 읽어 치우는 증세가 있습니다. 여간해서 고쳐지지가 않는군요. ㅜㅜ

잠자냥 2022-09-20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일단 2번하고 5번이요... 리뷰는 책 다 읽고 다시 읽으려고 실눈 뜨고 스킵 ㅋㅋㅋㅋ
아, 최근에 이 책으로 땡스 투 120원? 받지 않으셨나요? 그거 저예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9-20 13:57   좋아요 3 | URL
옙. 발자크와 제임스는 말 할 필요가 없습죠. 디킨스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ㅋㅋㅋ
줄거리요? 뭐 2백년 전에 쓴 거니까....는 아니고요, ㅋㅋㅋㅋ 아무리 읽으셔도 스포 거리는 아예 하나도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아이고, 그게 잠자냥 님이셨구먼요. 크.... 고맙습니다. 백수한테 120원이 얼만데요!!!

stella.K 2022-09-20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요즘 사람들 고전들을 안 읽죠.
옛날이야 영화를 맘대로 봤겠습니까? 그래서 자세한 묘사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장면전환이 얼마나 빠른데요.
저 다섯 사람은 가히 묘사에 있어서 악마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독자야 어떻든 작가는 묘사를 잘해겠죠.
그래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요? ㅋ

Falstaff 2022-09-20 19:1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요즘이야 고전이 아니더라도 재미난 게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예시를 든 다섯 사람들을 젊은이들은 TMI 라고들 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2-09-21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굴에 죽음의 낙인 찍히고 유다같은 남자가 주인공이라니 발자크의 묘사가 얼마나 굉장한지 저의 구매욕을 자극하네요. 존경하는 골드문트님! 추가 120원은 저입니다. 원래 땡투 발설 안 했는데 다들 하시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한게 좋네유~^^

Falstaff 2022-09-21 15:16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 땡투 고맙습니다.
예수의 열세 번째 남자의 진짜 정체, 아주 예상 밖일 겁니다. ㅎㅎㅎ 개봉박두!
 
톨레도의 유대 여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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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이후 처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책 구입 요청도 내가 했다. 좋은 책을 너무 비싸게 받으면 빌려 읽을 수밖에. 포이히트방거의 후기 장편들은 분량도 대단하지만 거 참, 이야기 꾸려나가는 게 진짜 일류다, 일류. <고야, 또는 인식의 혹독한 길>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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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18 0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격보고 진짜 깜놀했습니다. ㅎㅎ 저도 어제 지만지 책 한권샀는데 두께보고 가격보고 계속 번갈아봤어요. 뭐 이리 비싸 하면서.....ㅠ.ㅠ

Falstaff 2022-09-18 08:21   좋아요 2 | URL
옙. 지만지 책이 너무 비싸요.
번역 좋고, 다른 회사에 비해 오탈자 별로 없고, 종이질 좋고, 제본상태 좋고, 뭐 이런 것들은 다 인정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비싸야지 너무 비싸면 되겠습니까. -_-;;
근데 더 속상한 것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도 좋은 작품들을 어떻게 그리 잘 골라내서 출간하는지, 신기할 정도라는 겁니다. 안 읽기도 쉽지 않아요!!

그레이스 2022-09-21 0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야...
관심 갑니다
지만지는 책값을 좀 고려해줬으면 좋겠어요
두께와 가격때문에 멈칫하게 돼요^^

Falstaff 2022-09-21 10:15   좋아요 2 | URL
전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젠 백수잖아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