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계속된다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박현주 옮김 / 알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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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중산층 변호사 유대인 아버지 크러스너호르커이 죄르지와 사회보장관리사인 어머니 줄리어 펄린커스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1973년부터 78년까지 두 곳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978년부터 83년까지 학교를 외트뵈스 롤란드 대학으로 옮겨 헝가리어와 문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았다. 졸업 논문은 헝가리 문학의 거장 마라이 산도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두었다는 등의 사생활은 그냥 모른 척하겠다. 2015년까지 영어로 번역 출판한 작품 가운데 ‘작품명과 상관없이’ 작가와 역자에게 만5천 파운드를 주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마지막 순서로 받았고, 2016년부터 ‘특정 작품’의 작가와 역자에게 상을 주었는데 첫 해에 받은 인물과 작품이 한강 <채식주의자>였다.

근데 사생활에서 이이의 특징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중에서 페스트 지역의 필리센틀라슬로의 언덕에서 은둔하고 있기는 한데, 일년의 절반쯤 세계 각지에서 머물면서 글을 쓴다고 한다. 이걸 왜 굳이 말하는가 하면, 《세계는 계속된다》 가운데 특히 두번째 파트에 전세계 많은 곳을 무대로 하는 단편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오래 묵었다. 중국, 몽고, 일본에서만. 한국에 오면 전쟁 나서 죽을까 겁먹었나 보다. 뭐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이이가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죽는 거하고는 얘기가 다르거든.

본문만 470쪽 가까이 되는 책이고, 작가 이름 하나만 보고 책을 고르는 습관이 있기도 해, 유명세를 타게 한 <사탄 탱고>나 <저항의 멜랑콜리>처럼 장편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 읽었는데 아주 짧은 초단편부터 노벨라 정도 분량까지 스물 한 작품을 싣고 있다.

모두 3부로 나누어 각 부의 제목을 “말하다”, “이야기하다” 그리고 “작별을 고하다”로 지었다. ‘말하다’와 ‘이야기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 가를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면 될지 모르겠다.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이다. 또는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이제 세계는 누구도 존재할 수도 없고 남을 가치도 없고 참기 어렵고 차갑고 슬프며 황량하고 치명적인 무게를 지녀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곳이다. 이것을 첫 작품 <서 있는 헤맴>에서 말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가라든지 왼쪽으로 가라든지 같은 말이다. 중요한 건 현재 위치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일 뿐이니까. 왼쪽, 오른쪽 이야기는 평면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니까 2차원적 세계에서 한 지점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라는 건데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앞으로 나가면 “온 세상 젊은이를 다 만나고” 다시 원점으로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 있기는 있는데 절망스럽다. 3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결론이 같다면 남은 것은 아래쪽 또는 위쪽 방향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가는 일. 두번째 장 “이야기하다”에서는 두 경우가 다 등장한다. 대기권을 넘어 저 멀고 먼 암흑의 지구 궤도를 돌아본 첫번째 인류,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을 탐색하는 정신병원 속의 나가 쓴 <저 가가린>. 가가린은 1961년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 위에 뚫린 세 개의 선창을 통해 지구를 보고는 “지평선이 보인다, 아주 아름다운 섬광이 비친다. … 아주 아름답다.”라고 송신한다. 그는 물론 나중에 지상에 착륙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이때 그만 인간은 봐서는 안 될 것, 안 되는 장면, 애초에 볼 수 없게 디자인된 진실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건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것. 나이 들고 정신이 깜박거려 오늘 낼 하는 늙은이들만 모인 정신병원에서 가가린에 몰두한 ‘나’는 6층의 창가에서 가가린처럼 위를 향해 도움닫기를 하지만 결국 땅바닥에 메다 꽂힐 것임을 알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가린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일 뿐이라는 것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1985년에 장편 데뷔작 <사탄 탱고>를, 89년에 두번째 작품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출간했다. 물론 84년에 단편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이 두 장편소설이었다. 이것 말고 《서왕모의 강림》과 《라스트 울프》도 우리말로 번역 출간했으나 아무래도 두 작품만 하지 못했다. 이이의 특기라고하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세계는 계속된다》에서도 지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갖는 음울한 분위기와 집단 최면 또는 집단 우울증적 혼돈만큼 깊이 있는 공감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생각에 동의하실 필요는 없다. 내가 읽기로 그렇다는 얘기에 불과하니까. 대신 단편집 특유의 읽을 거리, 다양한 관점과 이야기의 만찬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하루 이틀 안에 단편집을 후다닥 읽어 치우는 내 책 읽는 습관 때문에 단편집을 읽을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기 위하여”는 진이 빠진다는 등의 것이 있는데, 좋은 작품이 많이 실린 단편집이 장편소설보다 못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한 이야기 한 번 더 하는 듯한 기분은 단편집을 짧은 시간 안에 읽어 치우는 독자에겐 눈이 좀 침침해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단편집을 쓴 작가는 나 때문에 조금 손해를 보고 있는 것도 맞다.

헝가리 작가들 가운데 케르테스 임레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은 상당히 긴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거의 모든 작품들도 무지하게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이의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헝가리 문자로 쓴 건 콤마만 찍으면 얼마든지 문장을 길게 늘일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적이 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의미였는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첫째는 우리말과 일본어는 문장을 마치는 종결어미가 거의 비슷하다. 주로 “이다”, “하다.”의 현재형이나 과거형. 그러나 유럽인의 언어는 다양한 발음으로 문장이 끝나, 비슷한 발음으로 끝나는 구절을 묶은 것 가운데 일부를 흔히 “시”의 라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문장 말고 문장 종결부의 다양함 때문에 쉼표만 찍으면 얼마든지 길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말의 경우에 긴 문장은 절clause과 절을 잇기 위하여 역시 얼마 되지 않는 엇비슷한 접속사를 써야 하고, 이 접속사를 많이 쓰는 건 문장에 조종을 울리는 죽음의 길이라고들 한다. 여태 단 한 번도 긴 문장을 권하는 글이나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이면 백 다 짧은 문장을 쓰라고 권하기만 했지.

두번째는, 길고 길게 문장을 쓰는 행위, 심지어 한 문장이 완전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침표를 쓰지 않고 쉼표를 찍고 다른 문장을 시작하는 일을 작가가 굳이 왜 했을까? 나는 심지어 전 작품을 단 한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이 말이 심하다면, 권하는 독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적어도 마침표가 나올 때까지 한 번에 읽어 달라는 주장. 끊어서 읽으면 작가가 전하고 싶은 글의 의미가 바래거나 전도될 수 있다는 작가적 조바심이 마침표 대신에 수 없이 많은 쉼표를 찍게 만들었을 수 있다. 나는 이 두 번째 의문에 한 표.

결론. 좋은 단편집이 내게 걸려 좀 박하게 평을 받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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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9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3부작이 생각나네요.
말하는 건 철학이고 이야기하는 건 문학. 말은 에세이고 이야기는 소설.
굉장한 통찰 같습니다.
이 사람 작품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표지에서 선택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표지가 꽤 마음에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전 전작주의를 못하겠더라구요.
읽다가 비슷한 패턴이 보이면 좀 시들해지잖아요.
골드님도 이이의 책은 그만 읽으셔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

Falstaff 2023-03-09 21:50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책 읽으시려면 아무쪼록 <사탄 탱고> 부터 시작하시는 걸 권합니다.
근데 애초에 각오를 좀 하시고 읽는 게 좋을 듯하네요. ㅋㅋㅋㅋ
아, 말과 이야기에 관한 거, 좀 근사했습니까? ㅎㅎㅎ 으쓱으쓱 합니다. ^^;;
 
노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임말희 옮김 / NUN(임말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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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적인 아슈케나지.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아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가운데 한 시절엔 대다수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의 많은 인구가 홀리 로만 엠파이어, 신성로마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유럽인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엄연히 이방인, 외국인이었고, 유대인 스스로도 이를 충분히 자각하여, 여차하면 쫓겨날 것임을 기원 시절부터 이미 각오했다. 그들은 그리하여 토지를 구입하지 않았고, 이는 농경이나 목축 같은 일에 종사하지 않아 대부분 도시인이었다는 것과 연결이 된다. 세상 누구나 먹어야 사는 법. 이들은 대신 작은 규모의 제조업을 종사하다 워낙 장사에 소질이 있어서 그게 점점 커지면 또 원주민 귀족이나 유력자에게 시장을 약탈당해버린다. 그러나 세상에 시장이 멈추는 경우는 없어서. 이들은 다시 다른 업종에 종사해 해당 업종을 크게 융성시키기에 이르고, 그러면 또다시 약탈당하는 악순환을 연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유럽 전 지역에서 유대인으로 살기 위하여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리지 않거나 모르게 한 채 제조업을 하거나,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는 사업인 고리대금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19세기로 접어들면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는 다른 직업인 악기 연주까지 폭이 넓어지지만. 그리하여 이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과 제조업으로 큰 돈을 번 반면에,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과 전쟁의 징병에 종사하는 바람에 일만 허벌나게 하고 평생 가난에 찌든 유럽 본토인이 보기에 심하게 배가 아팠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조선으로 유입해 들어온 중국인들이 특유의 상술로 어중간한 부자가 되자 평소에 이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조선인들이 1931년 7월에 길림성에서 만보산(완바오 산) 사건이 나고, 이를 조선일보가 과장해 보도하자 한 달 만에 조선반도 안에서 중국인 127명을 때려죽이고 근 4백명에게 부상을 입힌 일이 있다. 이 당시 폭행에 관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변발을 한 청나라 사람 뒤에 가서 변발을 잡아 확 잡아 채버리니까 머리카락 뭉치가 그대로 쑥 빠져버리고 털구멍마다 몽글몽글하게 핏방울이 배 나오더란 것. 훗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던 분한테 아주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 적어도 그분은 자신이 당시의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반성은 하셨지만 반성 하나로 위안을 삼을 수는 없다. 모든 차별과 혐오는 없애거나 적어도 참아야 할 텐데, 쉽지 않은 거 같다.


​  이렇게 유럽 전역에서 미움을 받던 유대인. 미움이라는 건 전염성이 강하다. 그래서 함부로 사람을 미워하면 좋지 않다. 유럽인에게 미움을 받으니 유럽 근동에 있는 민족들도 유대인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되고, 심지어 지금 지명으로 우크라이나 혹은 그 동쪽에 분포해서 살던 난폭한 유목민 카자크 사람들도 그랬다. 때는 1649년, 이 카자크의 최고 지도자인 헤르만의 자리에 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51년까지 두 해 동안 폴란드를 침공해 나라를 거의 도륙을 냈는데, 유독 유대인들만 눈에 띄는 족족 갖은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을 했다. 야만인들이 유대인을 골라 죽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맞다. 유대인이 현금이나 귀금속, 보석 같은 것을 보통의 지역민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이스마일의 후손이라 여겨 무장을 하지 않는 유대인을 치는 것이 더 쉬우면서도 경제적이었을 터이니까. 그런데 최근까지도 약탈혼을 풍습으로 했던 카자크 사람들이 워낙 독해 학살을 해도 너무 많이, 너무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적어도 이 책에서 싱어가 묘사한 것이 진실이라면. 이 당시 카자크인의 학살이 가장 극렬하게 벌어졌던 요세포프 시에 학당 선생으로 일하던 야곱이란 지식층 유대인이 있었는데, 흐멜니츠키의 침공으로 아내 젤다 레아와 세 아이들을 잃고 자신은 황망하게 홀로 도망했다. 그러나 불운의 별은 폴란드 강도에게 붙잡히게 만들었고, 강도들은 유대인은 노예로 삼을 수 없다는 폴란드 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저 산골지역으로 끌어가 선량한 농부 얀 브직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문제는 더부룩한 머리와 수염, 무릎 아래에서 찢어져버린 바지와 맨발에도 불구하고 훤칠하고 잘 생긴 외모의 노예를, 남자들은 기회만 생기면 죽이려 했고, 여자들은 틈만 나면 그의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는 점. 하지만 야곱이 누군가. 노예 생활하는 야곱? 비슷한 누가 유대인 역사책에 있다. 책의 야곱보다 3천 살 가량 더 먹은 옛 야곱은 7년씩 두 번 하인 노릇을 한 대가로 자매 둘, 라헬과 레아를 얻어 혼인한다. 17세기 야곱은? 5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설마 그냥 거기서 죽겠는가? 그러면 소설이 안 되니 여인을 하나 등장시키는데, 폴란드 산골 이름으로 완다요, 나중 이름은 사라이고, 과부다. 고지 독일어 쓰는 지역의 여성 이름으로 완다, 반다가 자주 등장한다. <노예>의 여주인공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잘 생기고 신체 건강하고, 웬만한 남자 하나는 돌려차기 한 방으로 날려버릴 만큼 튼튼하고, 남자 주인공 야곱을 사랑한다. 야곱도 완다에게 욕정을 느낀다. 그러나 야곱을 덮쳐버리는 주인집 딸 완다를, 본인도 신체의 한 구석이 터져버릴 것 같이 팽팽해서, 엎어져 있을 때 누가 머리통을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걸 중심으로 한 바퀴 뺑 돌아버릴 것 같은 걸 불구하고 완곡하게 밀어낼 만큼 경건하고 지독한 유대교 원리주의자다. 십계명을 어기는 일. 정말? 이웃의 아내도 아니잖아? 간음하지 말라고? 그거 말고, 이교도하고 몸을 섞지 말란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이교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건 괜찮아도, 그리스도교인이 유대교로 바꾸면 사형이다. 유대인이 그리스도교도와 결혼하면 폴란드 법으로 유대인은 화형 그리스도교인은 교수형, 유대법으로는 결혼 자체가 무효이며 유대인 사형, 그리스도교인 추방. 그러니까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과만 혼인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 이름이 야곱이면 하나 더 남았다. 천사하고 씨름해서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는 일. 그것까지 따라 하느냐고? 안 알려줌. 또 하나 남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랑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어 묻혀야 한다. 나중에는 재상까지 해먹지만 아들을 애굽의 노예로 보내야 하는데, 그것도? 안 알려줌.


​  이 책은 참 드러운 책이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다시는 읽지 않으리라. 그의 전작으로 미루어 나는 이이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었다. 골수 유대 원리주의자. 물론 폴란드 국민, 그것도 두메에 살고 있는 농노 계급에 국한해 말하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보면 그들 뿐만 아니라 유럽인 전체에 대고 하는 말이란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여자는 열두어 살에 결혼을 해서 남편의 아이 하나와 사생아 두엇을 낳고, 열한 살에 친오빠에게 강간을 당한다. 친아빠하고는 서로 좋아 애인 관계가 되기도 하고. 귀족이라고 다르지 않아서 남편이 여편에게 여편의 애인을 조달해주고 아내로부터 그들이 관계를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 촌놈들은 결국 천국으로 갈 선량한 농부 얀 브직 한 명을 빼고 나머지는 몽땅 술주정뱅이에 가정폭력을 취미생활처럼 한다. 반면에 유대인은 비록 이들 사이에도 사기꾼도 있고, 협잡꾼도 있고 뭐 그렇지만 폭력은 절대 쓰지 않으며, 진심으로 주님을 모시고, 삼강오륜 알기를 신주단지처럼 귀하게 품고 다니는 인종들이다. 그야말로 유럽 강아지들과 씨앗 자체가 다르니, 유대는 이스마일의 후손이요, 이교도라고 불리는 유럽 강아지들은 아즈라일의 후손이다. 그리하여 유대인 대장장이가 만든 칼로 얻어 맞고 베이고 잘릴지언정 그들은 칼을 쥐지 않는단다.

  특히 산악에 사는 목동들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소개하면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패륜과 패역 등을 나열한 후, “이 야만인들은 수천 년 전 우상숭배의 뿌리가 남아 있다.”면서 “주님이 모세에게 죄 없는 어린 애굽 아이들까지 멸절시키라고 한 의문”이 풀린다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산골 목동들을 향해 이렇게 주장한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이 유대 나치, 더럽게 늙은 자는.

  “이것들은 불로 사르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종족이 가스를 마시고 태워져 연기로 굴뚝을 타고 천국에 들어갔다고, 그게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자기 입이 뚫렸다고, 사람이 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이건 미친놈 아닌가 말이지. 싱어, 이 인간이 거대 권력을 쥐었다면 독일 아리안 족들을 몰살 해버렸을지 어떻게 아는가? 히틀러하고 사고방식이 비슷한 도라이 아냐 이거? 여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를 좋아한 내 자신이 싫다. 이런 작자에게 문학상을 준 스웨덴 한림원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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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07 0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작 싱어를 전 읽어보진 않았고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런 작품을 썼는데 노벨문학상을 받다니 정말 놀랍네요. 당시 유대인의 영향력이 어마어마 했군요. 나라도 만들어냈으니 뭐..

몰입해서 읽느라 잠이 깼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골드문트님 ^^

Falstaff 2023-03-07 07:28   좋아요 1 | URL
여러 작품 가운데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겠지요. 근데 <노예>는 도가 지나쳤습니다. 62년 작품이고 분명히 읽어봤을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87년에 문학상을 주었다고 생각하니까 그것도 참 곤란하더군요. 이이는 <적들, 사랑이야기>하고 <쇼샤> 정도에서 그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셔요. ^^

잠자냥 2023-03-07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사>나 <원수들 사랑이야기>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유대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좀 과한 거 아닌가(그들 입장에선 절대 과하지 않겠으나 전 좀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 너무 징징대는 느낌? 예컨대 다른 유대 작가들 -심지어 홀로코스트를 직접 겪은- 중엔 아무리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다하더라도 나름 감정 절제 같은 게 느껴지는데 이이는 좀…. 음 그런데 결국 이런 작품도 있군요?!


Falstaff 2023-03-07 16:57   좋아요 0 | URL
두 작품에선 그래도 유머 소스가 감칠맛나게 뿌려져 있기나 하지요. 아휴, <노예>는 그런 것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완전히 유대 찬양의 극점에 가 있습니다. 아주 불편했습니다.

coolcat329 2023-03-07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들이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정말 불편한 책이네요. <원수들, 사랑 이야기>는 재밌게 읽었는데요...전미도서상, 노벨문학상 수상도 유대인의 힘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도 싶네요.

Falstaff 2023-03-07 17:01   좋아요 1 | URL
누군가 그랬습니다. 미국 유대인 작가가 쓴 작품 속에서 그랬는데, 유대인 작가를 밀어주는 유대 그룹 덕택에 실제 실력보다 과장된 평가를 받는 유대 작가 그룹이 있다고요. 아쉽게 어떤 책인지 잊었습니다. 저보고 그거 누가 그랬냐, 어떤 책이냐 물어보시면 안 됩니다. 하긴 기억도 못하면서 이런 얘기 하면 안 되지요. 지울까요? ㅜㅜ

coolcat329 2023-03-07 17:09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지우지 마셔요~^^ 앞으로 작가의 민족성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쪽은 더욱요.

2023-03-07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03-07 1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제가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책 한권 내시면 좋겠습니다.
어쩜 이리 구수하게 글을 잘 쓰시는지요!
별 세개라도 읽어보게 만드십니다요~~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참 무궁무진한데,
그들의 핍박당한 삶도 그렇지만
끝내 동화되지 않겠다는 그 신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도 같아요.
우리나라가 계속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서 그렇지 혐오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 민족같습니다^^

Falstaff 2023-03-07 17:05   좋아요 3 | URL
에휴, 누가 저 같은 무명씨한테 책을 내주겠습니까. ㅋㅋㅋㅋ
자연보호 입장에서 종이라도 절약해야지요.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 ^^
우리나라의 혐오는,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여러가지로 다양하기도 하더군요. ^^

coolcat329 2023-03-07 17:10   좋아요 3 | URL
그쵸? 참 구수하면서도 지적하실 땐 가차없고 오랜 세월 책과 함께 하신 그 연륜이 저는 참 멋져서 좋아요.

Falstaff 2023-03-07 18:1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쪽팔리긴 한데요, 투비에 노트 두 개 올렸습니다. 조회수의 대부분은 제가 클릭한 거라서 더 심하게 그런데요.... 쓴 사람이 본 건 카운트가 안 되는 줄 알았지 뭡니까... 시간이 지났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자꾸 비슷한 말씀으로 격려해주시는 건 정말 고맙지만 ㅋㅋㅋㅋㅋ
 
해류 속의 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동훈 옮김 / 고유명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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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천재인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굵은 스토리 라인 하나로 밀고 나가는 힘찬 전개 방식이 간결한 문장 속의 다중 함의와 더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소설 읽는 재미가 대단하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성향이 나하고 맞지 않는다. 현대 세계 소설사에서 큰 나무로 우뚝 선 존재감을 자랑하는 작품(들)에서 과도한 마초 성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들지 않는 것이라도, 좋은 작품은 좋은 작품이니까.

<해류 속의 섬들>, 이 책 뒷면에는 출판사 ‘고유명사’의 광고글이 쓰여 있다.

“#노인과바다와 함께_바다3부작의완성”

해시태그 형식으로 쓴 짧은 광고글을 읽는다면, <해류 속의 섬들>이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 그리고 또 한 편의 바다를 주제로 한 작품과 더불어 헤밍웨이가 만년에 쓴 세 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겠구나, 라고 여기게 만든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니, 위키피디아에는 이 작품 <해류 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이 “젊은 시절의 바다 Sea When Young”, “상실의 바다 Sea When Absent” 그리고 “존재의 바다 Sea in Being”으로 된 삼부작 <바다-추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삼부는 나중에, 헤밍웨이가 죽은 이후 네번째 아내 매리 헤밍웨이에 의하여 소제목을 각각 “비미니”, “쿠바”와 “바다에서”로 바꾼 <해류 속의 섬들>로 출판했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위키피디아가 사실이 아니겠는가 싶다. 출판사가 광고 글의 태그에도 <노인과 바다>와 “함께”라고 했다, 즉 “더불어 꼽는” 3부작이라고는 확실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도 없거니와. 게다가 본문만 506쪽 실려 있지 흔한 역자 해설이나 하다못해 작품론 같은 것도 첨부되어 있지 않아 그냥 소설만 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지.

궁금한 게 또 있는데, 이 작품은 헤밍웨이가 1950년에서 51년까지 1년에 걸쳐 작업을 했지만 출판하지 않고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문 다음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밀어 자살한 후, 1970년에야 첫 출판을 했는데(초판을 번역했다 쳐도 아직 저작권이 살아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한 <해류 속의 섬들>은 어떤 책을 번역의 원전으로 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불하는지 역시 독자들은 알 수 없다. 물론 이런 것들을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불법이라 단정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책에 저작권 등에 관한 정보가 없으면 독자들이 초장부터 왜가리 눈알을 해 째려보기 시작하는 것이 요즘 세태인 걸 정말 몰라서 밝히지 않았을까. 출판사 “고유명사”가 2021년에 시작한 신규 진입 회사라서 이렇게 모질게 이야기하기 미안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우리의 주인공 토머스 허드슨. 할아버지로부터 황무지만 유산으로 받은 가난한 화가지망생 시절, 아름다운 배우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아이 톰을 낳고, 톰이 백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파리에 오래 머무른다. 톰은 유아기부터 영어가 아니라 불어에 익숙해 다시 미국으로 귀국할 당시엔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파리에서 배고픈 젊은 시절을 보내던 허드슨 부부는 너무 배가 고파 광장의 비둘기를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이건 젊은 시절의 헤밍웨이가 진짜로 저지른 적이 있던 행위다. 그러다가 토머스는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이혼을 하고, 아들 톰과 지내다가 여전히 진심으로, 유일하게 사랑하는 전 아내와 다시 만날까 싶기도 했지만 세상살이, 특히 애정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서 다른 여성과 혼인을 하고 둘째 데이비드, 셋째이자 막내 앤드루를 낳는다. 아들 셋을 미국으로 데려와 키우다가 두번째 아내와 이혼하지만 이제 훌륭한 화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아들들을 전처(두번째 아내)에게 보내 키우게 하고 자신은 플로리다에서 5백 마일 떨어진 비미니 제도에 박혀 작업에만 몰두하게 된다.

잘 되는 집은 비슷하게 잘 된다는 것이 톨스토이 백작이 주장한 진리인지라, 토머스 역시, 할아버지가 물려준 황무지에서 난데없이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와 석유채굴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토지만 판매해 매년 권리금으로 나오는 돈만 가지고도, 절반은 아내들의 위자료로 지불하고, 절반만 가지고도 평생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좋은 위스키와 디저트를 포함한 안주까지 포식할 수 있는 상태다. 사회적으로는 성공을 넘어 존경받는 화가로 인정받아서,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돈다발이 든 가방을 든 채 뉴욕의 대리인 현관 앞에 줄 서 있는 백만장자들이 정식간격 일렬종대로 화곡동에서 천호동까지 줄 서 있고, 자신은 걸프만의 비미니 제도에서 따뜻한 날씨와 거친 허리케인을 즐기면서도 섬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이루며 살고 있으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상팔자다. 인격도 그리 까탈스럽지 않아서 선술집 폰세 데 레온의 주인장 바비 손더스가 투정을 겸해 토머스에게 용오름 현상을 맛있게 이야기해주고 용오름이 동시에 세 개가 솟는 그림을 크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더니 기꺼이 돈도 안 받고 그려주기도 했다는 거 아닌가. 이러니 이 작은 섬에서 누가 돈 많고, 정 많고, 술 잘 마시는 토머스 허드슨과 척을 지고 싶겠냐고.

그러다가, 1930년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여름을 맞아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각처에서 공부를 하던 형제들이 뉴욕에서 만나 기차로 며칠에 걸쳐 남쪽으로 달려와 플로리다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섬에 와서 5주 동안 지내기로 결정이 났다. 이래서 벌어지는 5주간의 이야기가 책의 1부인 “비미니 제도”.

1부에서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아, 잠깐. 걸프해, 걸프만에 관하여. 헤밍웨이 또는 이 책에서 말하는 걸프해 또는 걸프만은 플로리다반도와 미국 남부 사이의 바다로 우리가 “멕시코만”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던 걸프만 아니다. 헤밍웨이 시대엔 걸프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멕시코만으로 부르니 참고하실 사.

클라이맥스는 둘째아들 데이비드가 1천 파운드, 그러니까 454kg이 넘는 초대형 황새치를 낚아 필생의 사투를 하는 장면이고, 이 전에 비록 조스 백상아리는 아닐지언정 그에 못지않게 난폭한 성질을 자랑하는 귀상어, 일명 망치상어가 잠수해서 작살 낚시를 즐기던 아이들을 공격하는 순간이다.

(이 책은 외국어, 특히 불어의 오식에 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다. 스펠링 틀린 것을 귀신같이 찾아서 그대로 내놓고 팔기 쪽팔리니까 새로 단어를 인쇄해 오식부분에 잘라 다시 붙인 경우가 두 번인가 세 번 있다. 근데 우리말 오식에 관해서는 또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하나 둘 정도면 내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 1편에서 나중에 살인 백상아리가 어떻게 죽나? 주인공 로이 샤이더가 가스통을 입에 물고 돌진하는 조스한테 소총으로 총을 쏴 정확하게 가스통을 맞혀 터뜨려 죽인다. <해류 속의 섬들>에서는? 여기서는 그냥 몸통을 소총으로 쏴서 죽인다. 근데 문제는 누가 죽였는지, 몇 번을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다. 한 번 보시라.

먼저 96 페이지.

“허드슨은 숨을 죽이고 침착하게 상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최후의 일발을 명중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놈의 아랫배 부분이 조금 전 제1탄을 맞았을 때보다 더욱 심하게 요동했다. 그러곤 ‘꾸루룩’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물길이 쭉 솟아올랐다. 허드슨이 마지막 한 발을 쏘자 이번에는 그놈의 뱃속에서 아까보다 더 세차게 ‘꾸루룩’ 소리가 나더니 지느러미가 서서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서서시”는 오타 아니다. 진짜 책에 그렇게 박여 있다.

당연하지 상어 주제에 감히 인간 청소년으로 점심식사를 꾀했으니 총맞아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멀리도 아니고 바로 다음 97 페이지를 보면 이렇다. 허드슨과 그의 하인 에디와의 대화다.

“잘 쏘더군.”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놈한테 던져 줄 고기를 얌전하게 들고 있는 우리 데이비드 도련님을 향해 녀석이 외람스럽게 덤벼드는 걸 보고 누군들 총을 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습니까? 상어가 쫓아오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이에요. 젠장, 제가 살면서 다른 빌어먹을 것들을 보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만은 반드시 봐야 한다니까요.”

즉 상어를 쏴죽인 사람은 토머스 허드슨이 아니라 그의 하인 에디로 돌변했다. 아직 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총은 허드슨 화백이 쐈는데 불과 한 페이지 넘어가니까, 애초에 총을 가지고 있지도 않던 그의 충실한 하인 에디가 사격의 주인공이고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에러인데 나는 이게 헤밍웨이의 에러인지, 아니면 번역을 한 이동훈의 에러인지 모르겠다.

만일 헤밍웨이의 에러라면 그건 글이 예전 같지 않아서 전혀 호평을 받지 못하던 알코올 의존증 시절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역자의 에러라면 아이고 이걸 어쩌나. 필자의 에러이건 역자의 에러이건 간에 어떻게 이게 데스크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참. 내가 십년만 더 젊었어도 침을 뽈뽈 튀기겠는데, 참겠다. 세상에 완벽한 작가나 역자가 있나? 그걸 보완하라고 편집부가 있고 교정도 보고 그러는 건데 말이지. 에휴, 이 정도만 하자.

2부, 3부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1부에 대하여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내보여야 하니 소개할 수 없다. 2부는 쿠바에서 첫 번째 아내를 다시 만나 침대에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으로 변죽을 울리고, 3부는 전형적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헤밍웨이라고 소개하고 독후감을 끝내겠다.



* 51년에 끝낸 소설을 발표도 하지 않았고, 죽은 다음인 70년에 출간했다. 작가는 작품을 아직 완성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런 에러가 아직 고쳐지지 않았을지도. 그랬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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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4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4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4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4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3-04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쵸. 그 마초이즘 땜에 헤밍웨이를 버거워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저는 뭐 노인과 바다만 읽은지라 읽는다면 무기여ᆢ와 누구를 위하여ᆢ만 읽고 땡칠것 같습니다. 어쩌면 헤밍웨이가 제 안에 남성성 을 일깨워 줄지도 모르겠네요. 😂 꼼꼼한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좋은 주말되십시오.^^

Falstaff 2023-03-04 17:20   좋아요 1 | URL
헤밍웨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독자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저 같은 경우엔 혹시 중2 때 영어교사가 헤밍웨이를 좋아한 반면, 저는 그 선생을 너무너무너무 싫어해서 혹시 헤밍웨이까지 (저도 모르게) 싫어하게 된 거 아닌가 지금도 의심이 많이 됩니다.
교사 한 사람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한 과목을 완전히 제껴놓게 만들 수 있다는 거, 아시죠? ㅎㅎㅎ 전 중2 때 영어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원망스럽습니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는데, 굳이 그 학교가 서울대 뺨친다는 주장을 하던 거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ㅋㅋㅋㅋㅋ
전 본고사를 봤는데요, 아마 수학 점수가 영어 점수보다 높은 인간은 저 말고 별로 없었을 거 같네요. ㅋㅋㅋㅋㅋㅋ (재수없게 합격했어요. 떨어지면 2차로 모 대학 약학과 가려고 했는데요. 흑흑흑... 인생이란)

stella.K 2023-03-04 17:24   좋아요 1 | URL
그 선생님 지방에 살다가 서울로 상경하셔서 그러셨나 봅니다. 재밌는데요? ㅎㅎ
저는 국어 빼놓고 골고루 못해서 아예 학교 자체를 싫어했죠. 다시 태어나면 학교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

잠자냥 2023-03-04 10:2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헤밍웨이는 1961년 사망으로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입니다. 현 기준은 작가 사후 70년까지 보호하는데요, 종전은 50년이었죠(2011년 개정). 헤밍웨이는 이 50년에서 70년으로 개정되던 시기에 종전법을 따르는 2년의 유예기간을 줬었는데! 고때 딱 걸린 작가였어요. 그래서 저작권이 소멸된 2012년에 국내에 헤밍웨이 작품이 봇물을 이루며 쏟아졌었지요. 비슷한 작가로 헤르만 헤세(1962년 사망), 포크너(1962년 사망)가 있습니다. 재미나게도 1년 뒤인 1963년에 사망한 올더스 헉슬리는 딱 고 유예기간 끝나고부터인 사후 70년까지 보호 기준의 적용을 따르는지라 아직 저작권이 살아있고요. 암튼 그래서 저 출판사도 저작권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3-03-04 17:18   좋아요 0 | URL
앗, 질문 있어요.
죽기는 61년에 죽었는데, 초판이 70년이면, 초판을 찍은 출판사한테 계약 기간 안에는 거의 모든 권리가 위임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그 출판사에서 찍은 책을 번역하려면 일종의 서브 계약을 해야 하는 거.....
진심 아주 오래된 의문이었거든요. 맞아요, ㅎㅎㅎ 자냥 님이 그쪽에 계신 거. 그걸 깜빡 했네요. 진작 물어볼 것을.

잠자냥 2023-03-05 01:50   좋아요 2 | URL
계약 기간 안에서는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게 권리가 있겠지요. 그러나 작가 사후 70년 또는 종전 대로 50년 보호 기간이 지났다면 저작권의 보호를 받지 않는 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가능합니다. 예컨대 헤밍웨이의 저 작품도 사후 50년이 지나고 나서는 저 영문판 책이 무수히 쏟아져나왔을 가능성이 많고,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전문이 다 올라와서(구텐베르크 프로젝트 같은 사이트) 전 세계 곳곳에서 번역 출판 가능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셔서 이젠 작가 사후 70년이면 저작권 소멸! 누구나 번역 출판 가능하다고 아시면 될 거 같습니다.

coolcat329 2023-03-05 08:58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요~
골드문트님 헤밍웨이 책 한 권만 읽어봤는데 유명한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하면서 안 읽게 되네요. 마초만 아니었어도 팬들이 많이 늘었을텐데요. 글 잘 읽었습니다.
출판사 골드문트님 글 읽고 앞으로 좀 개선하면 좋겠어요.

꼬마요정 2023-03-04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무기여 잘 있거라랑 노인과 바다만 읽어서요. 단편 몇 개 읽은 거 같은데 가물가물…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경우 전쟁소설임에도 연애소설로 읽었습니다 ㅋㅋㅋ 서서시… 인상적이네요. 게다가 하인이 쏜 지 허드슨이 쏜 지 달라진다면 이건 sf소설이 되나요. 어쩌면 소설보다 더 재밌는 리뷰인 듯 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3-03-04 17:26   좋아요 1 | URL
헤밍웨이는..... 이하 답글 썼다가 지웠는데요, 전쟁을 낭만적으로 바라본 죄, 이게 안타깝습니다.
ㅎㅎㅎ 저는 누가 삽질을 했는지 알고 있는데요, 저 위에 비밀댓글 주신 분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당분간은 모른 척하고 있겠습니다.
이래서 신생 출판사에서 찍은 책은 믿지 못하겠다니까요. 인화의 <인도로 가는 길>, 아토북의 <윌라 캐더> 또 어디더라 하여튼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메디치의 딸> 기타 등등. 정말 아쉬워요. 잘 좀 하지.

꼬마요정 2023-03-05 19:19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무기여 잘 있거라 웃으면서 얘기 하면서 웃지만, 진짜 충격이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교양 수업 하나를 들었는데(전 대학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 때 알았어요. 무기여 잘 있거라가 이탈리아 전쟁을 그린 소설이었다는 것을요. 물론 전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이탈리아 전쟁인 줄도 몰랐구요, 전쟁보다는 사랑에 더 중점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 헤밍웨이 책을 멀리 한 것 같아요. 물론 저의 무지에서 비롯된 거지만 충격이었어요ㅠㅠ 이하 답글을 다시 써 주셔도 좋을 듯 합니다. 궁금합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주목하라는 표어가 있었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여기 쓰고 싶습니다. ㅎㅎㅎ <...메디치의 딸> 있는데... 번역이.. 음 그렇군요. 그래서 자꾸 안 읽히나 봅니다. 몇 장 못 읽고 일단 책장에...

전쟁을 낭만적으로 바라본 죄... 글자 그대로는 너무 멋지구요, 뜻은 너무 참혹하군요.

Falstaff 2023-03-06 05:33   좋아요 1 | URL
<무기여 잘 있거라>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헤밍웨이가 참전하려고 했는데 눈이 안 좋았던 모양이라서 퇴짜를 맞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민간인 신분으로 이탈리아에 가 적십자 소속의 운전원으로 일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파편을 맞아 입원을 했고요. 소설의 내용하고 딱 맞아 떨어집니다. 소설에서는 로맨스가 생기는데 실제로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모든 전쟁문학은 반전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족속입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도 그렇고 종을 울리나도 그렇고, 반전의식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자신이 보고, 남을 인터뷰한 내용 수준입니다. 전쟁은 절대로 낭만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입니다. 같은 1차 세계대전을 그린 작품이라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나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이 훨씬, 훨씬 더 좋습니다. 제 수준에서는요.

꼬마요정 2023-03-06 14:47   좋아요 1 | URL
1차세계대전 이탈리아 전선이었군요. 그럼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네요. 그 때는 전 1차세계대전인 줄 알았는데 이탈리아 전쟁이었다라고 해서 완전 놀랐구요. (근데 다시 읽어 볼 생각은 왜 안 했을까요??) 로맨스도 사실 문체가 너무 담담해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는데, 좀 짜증도 났거든요. 말씀 듣고 보니 로맨스도 그냥 인터뷰한 느낌입니다. 자신의 첫사랑에게 심하게 까여서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던데, 어쩌면 그게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요? 전쟁에서도 까이고, 첫사랑한테도 까여서 자신의 자격지심을 글로 나타낸 걸지도 모르겠네요. 전쟁문학은 반전문학이어야 한다는 말씀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아, 너무 많은 걸 얻은 댓글이라 기쁘네요.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3-03-04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 제일 유명한거 3작품 읽었는데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그래도 참 좋았던 기억만 남았네요. 이 소설은 번역이 문제일까? 아니면 헤밍웨이가 진짜 제대로 다 못쓰고 퇴고도 안된 상태인걸 그냥 내서 근런걸까 고민하게 하겠네요. ㅎㅎ

Falstaff 2023-03-04 17:32   좋아요 1 | URL
딱 꼬집어서 역자한테 큰 문제가 있었던 걸로......
그냥 대충한 거 같아요. 가끔 문장을 빼먹기도 하고요. 문장을 빼먹고 번역을 하니까 하인 에디가 어디(배의 객실? 창고)서 기관단총submachine gun을 가지고 나와 허드슨의 둘째 아들 데이비드를 공격하려는 귀상어를 향해 기총소사를 난사하는 장면을 빼버렸답니다.
사실 성체 귀상어가 소총 한두 발로 죽을 덩치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작품이 개판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지금 별점 하나를 더 뺄까 말까 잠깐 생각했는데, 뭐 좋은 게 좋다고 걍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기관단총의 소지 여부는 3부에서 중요한 소도구의 존재와 관련이 되는데 그걸 뺐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2023-03-07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프리즘 총서 29
조르주 캉길렘 지음, 여인석 옮김 / 그린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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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초에 존경하는 후배님한테 책 소개를 받았다. 과학사에 관심이 많은 그이는 줄곧 이 방면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 내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알고 있는 그이는 우정 전화를 해 프랑스 과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조르주 캉길렘의 저작 《캉길렘의 의학론》이 작년에 출판사 그린비에서 세브란스 출신의 여인석 번역으로 나왔으니 읽어보면 좋겠다고 권했다. 역자 여인석은 연세대에서 박사를 하고, 파리 7대학으로 유학해 서양고대의학에 관해 연구해서 과학사 인식론으로 박사 학위를 한 번 더 받은 인물이다.

캉길렘은 1904년에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1924년 스무 살 때 고등사범에 입학해 사르트르 등과 동기생이 된다. 27년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여러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지내기도 했는데, 이 시기부터 캉길렘은 다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철학자로서 작가는 1941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출강해 55년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후임으로 소르본으로 옮겨 역사 인식론을 강의하다 나중엔 학과장까지 역임한다. 소르본에서 71년까지 16년간 후학을 가르치다 은퇴하고, 95년에 천국의 기쁨을 찾아 91세의 일기를 끝으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고, 라기 보다 후회없이 살다가 세상을 떴다. 의학자로의 캉길렘은 전시였던 1943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때 논문이 오늘 소개하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었다. 사회적으로의 저자는 또한 비시 괴뢰정부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40년 6월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고부터 43년 의학박사 학위를 얻을 때까지는 한편으로는 저항군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생으로 연구에 몰두했을 것이다. 참 난 사람이다, 난 사람.

역자 여인석이 프랑스에 유학할 당시 캉길렘을 읽고 자신은 의학자이며 철학자, 저자는 철학자이며 의학자라는 우연의 조우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캉길렘은, 내게 전화를 해주었던 후배님은 프랑스 학파와 영미학파의 차이점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런 거 같지는 않고, 유럽의 학자 대부분과 달리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은 저술만 남기고 갔다. 소개받은 《캉길렘의 의학론》은 작자가 잡지 이곳 저곳에 기고한 컬럼이나 소논문을 저자의 후배, 제자들이 추려 출간한 것으로 분량도 상대적으로 적고 이해하기도 수월한 편인 것 같다. 나는 캉길렘의 도서 목록을 화면에 올려놓고 어떤 것을 읽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소개받은 《캉길렘의 의학론》을 일단 책방 보관함에 저장을 한 후, 이왕 읽으려면 이이의 첫번째 저작, 그러니까 의학박사 학위논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싶어서 바로 다음날 도서관에 희망도서신청을 하고 2월 들어 읽었다가, 코피났다. 기껏 소개를 해주었으면 소개받은 바로 그 책을 골라야지 내가 과학사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잘난 척을 해 겁도 없이 박사학위 논문을 읽느냐는 말이지. 논문에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 심지어 이 책 말고 다른 책에도 손도 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술만 마셔서 취하면 자고, 또 취하면 다시 또 자고, 한 삼사일 취생몽사했다.

내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일반대중이 알아듣기 어렵게 서술할 수 있는지를 광고하는 공부”라는 거다. 아니라고? 좋다, 아니라고 치자. 그건 양보를 했다. 그럼 학위 논문이라는 거에 대하여. 학위 논문이라고 함은 ①같은 공부를 하고 있거나 ②이미 했거나, ③앞으로 할 예정으로 특정한 학문에 깊은 관심이 있는 심각한 딜레탕트, 이 세 부류를 위한 전문인만의 리그다. 이 리그 안에 들어 있거나 반쯤 발을 담근 사람들이 아니면 읽으면서 세종임금의 훈민정음 말씀대로 “제 뜨들 실어 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 아무리 철학과 의학과 역사를 합친 캉길렘의 논법이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되었다 하더라도. 이이의 책이 그나마 알기 쉽게 쓰였다는 건 이해하겠다. 근데 독자가 책을 읽으며 주장하는 것을 즉각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읽다가 죽을 똥을 쌌는데, 책의 결론을 소개해도, 정말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는 거의 없을 거 같아서,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론부 일부를 소개한다.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주기 바란다.

“생리적 상태는 정상 상태라기보다는 건강한 상태이다. 이것은 새로운 규범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다. 환경의 변동에 대해 규범을 정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건강하다. 생리적 상수들은 생명체에 가능한 다른 모든 상수들 가운데에서 추진적인 가치를 지닌다. 반대로 병리적 상태는 생명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 규범의 폭이 감소했음을, 즉 이미 성립된 정산이 질병에 의해 불안정해짐을 나타낸다. 병리적 항상성은 반발적이고 엄격하게 보수적인 가치를 지닌다.”

위 인용문은 이해하기 쉽다는 캉길렘답게 정말 이해할 수 있다. 단, 문장을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그게 맞다. “규범”과 “생리적 상수”, “추진적인 가치”, “이미 성립된 정산” 이런 단어나 구句의 정의는 이미 앞에 나와 있는 것들이지만 그걸 다, 온전히 정의해 머리속에 보관하고 있어야 인용문을 읽으면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평소에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정체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독자가, 과학사라는 벌판에 처음 서서, 감히 한 위대한 철학자이며 의학자가 쓴 박사학위 논문을 읽겠다고 덤볐으니, 꼴 좋게 됐다. 그저 추천해주면 추천해준 책을 읽지 뭐 잘났다고 책을 고르고 자시고 해서 말이지.

지금 책을 옆에 놓고 독후감을 쓰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서에게 반납을 해야 할지 답답하다. 언제나 반납하면서 “잘 읽었어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이 책에 관해서라면 감히 그렇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 에휴, 이 책도 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산 거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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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02 0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고생하셨습니다.ㅎㅎ
저는 저 인용문장도 와닿질 않네요.
철학에 대한 골드문트님 생각 정말 ㅋㅋ 맞네요. 넘 어려워요.
그래도 골드문트님 정도 되시니 이런 책도 도전하시고 역시 짱이세요!

Falstaff 2023-03-02 07:37   좋아요 1 | URL
아이그... 무슨 말씀을.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 걸요. 철학은 넘 어려워요.

다락방 2023-03-02 0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골드문트 님 ㅋㅋ 글 너무 재미있어요. 골드문트 님이 읽으셨다는 논문은 재미없을 것 같지만, 그 논문 읽은 골드문트 님의 리뷰는 재미있습니다 ㅎㅎ

Falstaff 2023-03-02 11:22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습니까! ㅎㅎㅎ 기분 좋습니다. 어깨가 으쓱으쓱.

바람돌이 2023-03-02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소개해준다고 이런 책도 읽어주는 골드문트님의 우정에 눈물이 납니다. 역시 골드문트님은 훌륭한 분이세요. 저는 얼마전에 소설 한권을 사랑하는 후배에게 소개받았는데 3분의 1 읽다가 취향 아니라고 집어던져버리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앞으로 골드문트님 살신성인의 자세를 본받도록 노력해야겠슴다. ^^

Falstaff 2023-03-02 12:49   좋아요 1 | URL
아휴, 살신성인이니 본받으시겠다니, 말씀이 무거워 어깨를 누릅니다. 흑흑....

잠자냥 2023-03-02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친구는 나르치스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3-02 12:50   좋아요 2 | URL
무지하게 진지한 사람입지요.
대단한 술꾼이었습니다만 한 방에 술도 딱 끊어버린 놀라운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ㅎㅎ
그러고보니 나르치스와 비슷한 족이겠네요.

그레이스 2023-03-02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골드문트님 글 오랜간만에 읽는 것 같은데, 이 책 때문인가요?
아님 제가 못본 글이 있는지도...^^
암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약간은 취기가 느껴지네요^^

Falstaff 2023-03-03 05:44   좋아요 1 | URL
앗, 이 독후감은 대낮에 도서관에서 쓴 건데 취기가...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 점점 심각해지는 거 같습니다. 지금도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리 어질어질한데.... 흑흑흑...
 
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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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지 19일이 지났다. 그리고 열흘 넘어 “책읽기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캉길렘과 헤밍웨이를 그저 들춰봤을 뿐. 책에 몰두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이런 식으로 책을 읽을까. 숱한 선량한 사람들이 읽고 등장인물의 처지, 환경, 생활이라는 삶에 가슴 절절하게 공감해, 선량한 마음으로 주변인들에게 권하는 작품, 이것을, 작가가 말하는 의도대로 따라가지 못하거나 그렇게 안 하는 건 어쩌면 천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새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조각조각 뜯어보려는 건방진 마음에 사로잡혀버렸는지도. 하나하나 다 아픔과, 상처라는 아픔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보다 이야기들의 상투성을 먼저 발견하는 야박함이라니. <…루시 바턴>에서 벌써 “이야기의 상투성”을 말했고, 스트라우트를 그래도 읽는 건 문장 때문이라고 결론을 낸 적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역시 아픔 속의 아름다움(왜 아름다운 건 대개 아플까?) 이것을 발견하는 대신 누추한 추억(언제나 추억은 누추할 수밖에)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아름다움 쪽으로 끌고 가려는 것처럼 읽고, 그걸 구태여 남들이 다 보는 독후감에 그대로 썼다. 그리고 꼴난 독후감 이후 책 읽고 싶은 마음이 거의 사라졌고 읽히지도 않은, 이른바 슬럼프를 맞았다. 그게 19일 전이다.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독후감, 게다가 솔직히 말하건대, 남들이 좀 봐주었으면 바라기도 하는 독후감에 구태여 안 좋거나 덜 좋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 그것도 무수한 독자들이 바치는 찬사를 향유하는 책에 관하여. 아무리 잘 봐줘도, 내가 책,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 수준이 선량한 다중의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 좋은 독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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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우트는 2008년 발표한 <올리브 키터리지>로 2009년 퓰리처 상을 받는다. 상을 받고 10년 후인 2019년에 그동안 흐른 세월만큼의 나이를 더 먹은 올리브를 다시 등장시킨 후속작 <다시, 올리브>를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며칠 전에 읽은 2016년 작 <내 이름은 루시 바턴>도 예외가 아니라서 2017년에 이 책의 후속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내고, 2021년에는 심지어 다시 후속작으로 루시 바턴의 첫 남편인 윌리엄을 호출한 것처럼 보이는 <오, 윌리엄>까지 발표했으며, 이 삼부작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오, 윌리엄>이 삼부작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다시, 올리브>에서 볼 수 있듯이 제목에 쉼표가 하나 첨가되어 강조하고 있어 추측하는 것뿐이다. 스트라우트는 우리나라에서 벌써 만만치 않은 팬들을 지닌 인기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제일 처음 읽은 스트라우트인 <올리브 키터리치>를 제일 좋았다고 기억한다. 어떤 작가가 있어서 70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엄격하면서도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뜻한 눈길로 사물과 사람을 볼 줄 아는 ‘현명한 늙은이’를 그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집단 PTSD를 다룬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오늘 읽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보다 더 좋았다. <…루시 바턴>에서 PTSD 또는 이와 유사한 심정적 상처라는 주제를 설정했다. 그리고 후속작인 《무엇이든…》은 전작에 출연했던 등장인물들 주변의 사람들 역시, 그러니까 지금 숨쉬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누구나 심정적 내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이야말로 이의 해소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루시 바턴>에서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윌리엄>을 조만간에 읽을 예정이지만 그것 역시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1부와 마찬가지로 작중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바턴 가 구성원이지만 부모는 이미 하직하고 이제 삼남매, 차례로 피트, 비키, 루시 만 남았다. 피트는 앰개시 카운티의 변두리에서 전작에서 별로 개선이 되지 않은 상태로 부모가 남긴 집을 지키면서 독신으로 궁색하게 살고 있고, 비키의 딸 라일라 레인은 이모를 닮았는지 매우 총명해 학업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지만 전형적인 반항아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삐딱한 십대로 성장했으며, 비키 역시 과체중을 넘어 고도비만 정도로 요양원에서 일하며 ‘불쾌한 비키’라는 뜻의 ‘익키 비키’라 불리고 있다. 즉, 손위 두 남매는 부모세대에서 전혀 개선되지 않은 사회적 루저의 위치를 보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비키의 경우엔 딸 라일라가 대학에 진학하기만 하면 재수없는 앰개시를 떠나 대도시에서 (이모처럼)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비키 입장에서 대학에 보낼 수 없으니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장학금을 받은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루시는 이혼을 하고 재혼도 했으며, 작가로 이름이 나 이제는 회고록을 출간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도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인회 등을 개최하는데, 전작 <…루시 바턴>에서 루시와 함께 뒷골목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먹지 않은 스테이크와 케이크를 발견하고 기뻐했던 외가쪽 육촌형제, 지금은 에어컨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에이블을 만나 재회의 기쁨도 나누고, 아버지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앰개시 본가에 들러 오빠 피트로 하여금 십여 년 만에 집안 대청소도 하고 깨끗한 러그도 사오게 만든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삼남매가 언제나 반가왔던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라. 십여 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친할 수 있느냐는 것을. 그냥 잘 살았어? 잘 있었어? 잘 지내지? 이거 세 개만 물어보면 더 뭔 할 말이 있다고. 그저 사이가 좋으려면 (물론 나쁘려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가까이 또는 자주 얼굴 맞대야 한다.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다. PTSD는 이들 가족, 남매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이 다 그렇다. 친족 내 성폭행의 경험, 동성애를 딸에게 들키지 않을까 싶어 숲 속으로의 외출을 금지시키는 아버지,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PTSD에 시달리는 가난한 가장인 바턴 씨와 바턴 씨 부부의 (어린 남매가 생각하기에) 끔찍한 성생활, 계부가 어린 의붓아들에게 가한 성폭행,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고등학생 시절 위경련으로 조퇴를 하고 일찍 들어간 집에서 어머니와 스페인어 교사 딜레이니 선생이 벌이던 대낮의 불륜 라이브와 이어진 어머니의 가출 등등. 이것들 모두 PTSD이다.

그리고 그저 젊어서 또는 어려서 경험한 가난. 이것 역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PTSD인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은데, 가난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그냥 부족함이 어느 정도 있는 살림살이를 살고 자기가 한 시절 가난하게 살았다고 착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난의 기억 역시 한 인간의 평생을 따라다니며 극복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초래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의 역사적인 큰 사건을 통한 공통의 가난, 평등한 가난이 아닐 경우에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시기에 가난 때문에 어려웠다는 얘기를 쉽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릇 사람들은 널리 살펴 언행에 주의하시기를.

이것으로 네 권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읽었다. 앞으로 <오, 윌리엄> 한 권을 더 읽을 예정이다. 나는 스트라우트가 좋다. 그러나 이이의 이야기가 좋은 건 아니다. 문제를 꺼내놓고 딱 미국에서 권장하는 해결방식인 “그래도 가족”과 “사랑”에 충실한 결론이 이제는 식상한다. 내가 스트라우트에게 느끼는 매력은 단지 하나, 문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랑은 불완전해. 앤젤리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노랫말 같기도 하고 격언 같기도 한 반짝반짝한 문장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트가 좋은 것이지, 스토리는 이제 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쉽게도 고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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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2-2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토리가 질려서 더 이성 스트라우트는 읽기 싫다는 말은 스트라우트 애독자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인지라 신선해요. 저는 질릴 정도는 아직 아닌지라 더 읽어보고픈 마음입니다. 다만 골드문트님 하신 말씀은 다 구구절절 이해가 됩니다. 몇 권 읽어보지 않아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스트라우트 꽤나 완고한 거 같지 않나요? 전 그런 완고함이 느껴져서 좀 꺼려지더라구요. 좋은 작가라는 건 알지만. 책태기 얼른 벗어나시기를!

Falstaff 2023-02-28 16:10   좋아요 1 | URL
ㅎㅎ 탈 슬럼프는 한 거 같습니다. 조금씩 읽고 있으니까요.
저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도 드물지는 않군요. 근데 문장은 정말 좋지 않나요?
태그 달았다시피, 세월이 지나면 스토리는 낡아도 문장과 문체는 영원하니 그게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PTSD 시리즈 보다 올리브 연작에서 더 완고했던 거 같은데요, 주인공의 나이를 훌쩍 올려놓아서 조금은 의도를 갖고 그러지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청아 2023-02-28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트라우트의 책을 두 권 읽어봤는데 스트라우트에겐 오히려 골드문트님 같은 독자가 좋은 독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좋았다는 독후감을 너무 많이 써서 이제 좀 다른 시각을 갖고 싶거든요.^^

Falstaff 2023-02-28 16:1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설마 고마우려고요. 아무리 훌륭한 작가도 자기가 쓴 작품이 별로라고 하면 정말 드럽게 화딱지 내더군요. 동서양, 옛날옛적이나 요즘이나, 여자나 남자나 다 마찬가지더라고요. 다 인지상정입지요. ^^

청아 2023-02-28 16:23   좋아요 1 | URL
물감님이 경험자이신걸로 기억합니다. 여기에 써주셨는데 그거 읽고 급이 다른 작가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정희진 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구요. 백 마디 칭찬보다 뼈 있는 한 마디가 당사자에겐 (다른 독자들에게도)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죠. 골드문트님 그러니 앞으로도 솔직한 독후감 써주셨음 합니다. 저는 그런 시선이 부럽기만 합니다.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Falstaff 2023-02-28 21:09   좋아요 1 | URL
ㅎㅎㅎ 나름대로 무척 친하게 지낸 소설가와 역자가 있었거든요. 자신의 책에 솔직하게 평해달라고 해서 정말로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손절 당한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ㅋㅋㅋㅋ 근데도 왜 손절됐는지 몰랐다니까요. 그렇다고 안 좋은 걸 거짓으로 좋다고 하라는 얘긴 아니고, 현명하게 피해가면 될 것을 구태여 이렇게 쓰는 건, 미련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팔자일 수도 있고, 사주에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쩌겠습니까. 여태 그리 살아왔는 걸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2-28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오, 윌리엄이 시리즈 끝이 아닙니다. 후속작으로 Lucy by the Sea가 미국에서 이미 나왔어요. 조만간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겠죠. ㅎㅎ
저는 스트라우트의 문장도 좋지만 그가 사람들의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도 좋아합니다. 지켜야 할 선을 그어놓고 넘지않는 느낌이랄까? ㅎㅎ 특히나 소설은 호불호가 갈리는게 당연한데 무슨 좋지 않은 독자까지.... 이렇게 훌륭하게 깔 수 있는 골드문트님이야말로 진정 좋은 독자이십니다. ^^

Falstaff 2023-02-28 16:15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그럼 4부작이 되네요. 어휴....
물론 스트라우트의 시선은 그의 작품처럼 따뜻하지요. 그래서 가끔 사람 같지 않아 보여서 말이지요, 이런 제가 싫습니다. ㅎㅎㅎ
격려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stella.K 2023-02-28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세 권 읽으셨으면 좋은 독자죠.
저는 올리브 몇년 전에 읽기 시작해서
아직도 끝을 못 냈습니다. ㅋㅋㅋㅋ
재밌다고 난린데 뭐 나쁜 건 아니지만 막 열관할 정돈가...?
어리버리 벙쪄하고 있다가 언제나처럼 다른 책 읽느라
흐지부지가 되었죠. 미국문학은 저에겐 호불호가 큰 것이라
골드님 이리 쓰시면 전 뭐 올리브나 완독하면 다행이다 싶네요.
연작소설들은 표지가 맘에 들긴 하는데...ㅠ

Falstaff 2023-02-28 21:02   좋아요 1 | URL
음주 댓글은 달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저녁 먹으면서 한 잔 했으니 다섯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다 깼다고 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
같은 텍스트를 읽고 다 같은 감상을 한다면 참 재미는 없을 거 같습니다. 호불호가 큰 작품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지 않겠어요? 걍 즐겁게 사는 게 제일입니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요. 스트라우트도 작품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주장을 하고 있잖아요. 제발 서로 미워하지 마시라고..... ^^

반유행열반인 2023-02-28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오랜만에 제가 먼저 읽은 책! 저는 유일하게 읽은 스트라우트 책이고 올리브 책은 오래도록 꽂혀만 있어요. 곧바로 다시 읽지 않은 거 보니 역시 남들 좋다는 책도 취향이란 게 있나 봅니다. (그리고 골드문트님 입맛도 상당히 까다로우십니다….ㅋㅋㅋㅋ)

Falstaff 2023-02-28 21:0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옙. 제가 좀 까다로운가 봅니다. 당연히 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까다롭다는 얘기는 간혹 듣습니다. 원래 자기 눈의 들보는 알아채기 힘든 법이라서 말입죠.
열반인 님도 책 많이 읽으시잖아요. 제가 많이 배우고 있는 걸요. ^^

그레이스 2023-03-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 좋아해요^^

Falstaff 2023-03-03 05:43   좋아요 1 | URL
우리 열심히 읽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