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유영미 옮김 / 한길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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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알겠으나 읽는 게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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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5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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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마이클 온다치는 1943년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태어난 캐나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대학교수 기타 등등인데, 부계 혈통이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다. 알코올 오남용으로 평생 고생하다 일찌감치 세상을 등진 아버지 머빈 온다치 Mervyn Ondaatje는 스리랑카 타밀족과 더치 브루거Dutch Brugher의 결합으로 태어났는데, 더치 브루거는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스리랑카 싱할라인이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독후감이 길어지는 위험이 있어도 스리랑카에 대해 좀 알아보자.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스리랑카에는 산 속에서 힌두교의 3억 마리가 넘는 숱한 신을 믿으며(신을 세는 단위로 ‘마리’를 써서 나는 지옥 갈 거 같다) 제일 큰 부족을 이루었던 싱할라 족과, 바닷가에 불교를 믿는 소수민족 타밀족이 사이좋게 살았다. 이후 마르코 폴로와 바스코 다 가마가 출몰하고, 섬 저 먼 바다에 앞을 가릴 만큼 큰 돛을 단 상선과 군함이 들이닥치더니 하늘 같은 흰 말을 타고 섬에 내린 하얀 피부의 서양 것들이 총을 쏘며 섬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해 제일 먼저 만난 원주민이 당연히 바닷가에 살던 타밀족. 서양인들은 타밀족에게 먼저 기독교를 전파하고 그들을 수하에 두고 온갖 잡일과 막일을 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다 개중에 똑똑한 사람도 눈에 띄어 조금씩 하찮은 권력을 쥐어 주었는데, 타밀족이 저 산 위의 싱할라 족보다 그나마 권력이 세지기 시작하고, 먹고 사는 것도 여유가 있어서, 싱할라 족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세월이 몇 백 년 흘러 이제 실론 섬에서 백인들이 떠나버리자, 여태 상대적 박탈감에 치를 떨며 불만이 고조된 다수부족 싱할라는 타밀족을 아예 거덜을 내기 위해, 차라리 학살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으로 탄압을 하면서, 나라의 이름도 실론에서 싱할라 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스리랑카로 했단다. 내가 뭐 아나, 셰한 카루나틸라카의 <말리의 일곱 개의 달> 독후감을 쓰기 위해 메모했던 것을 참고하면 이렇다는 거다. 그래서 정상적이면 타밀족과 싱할라족의 피가 합쳐지기 곤란하건만, 알코올 오남용자 머빈 온다치 씨는 싱할라족은 싱할라족이지만 포르투갈 또는 네덜란드의 피와 혼혈인 싱할라족이라서 출생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 도리스 그라티앤Doris Gratiaen은 하필이면 재수없게 오빠의 친구한테 시집간 거다. 20대 말에 과부가 되어 살기 팍팍했던 엄마 아래에서 배울 것 없이 커서, 알코올 사용장애가 심한 남편 머빈 온다치 소령과 결혼해 마이클과 질리언을 낳고 살다가 못살아, 못살아, 더 이상은 못살아 세 번 부르짖고 이혼을 감행해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아들이 11세가 되자 영국에서 마이클을 만나고 다시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했다. 결과적으로 참 잘했지. 그리하여 마이클 온다치는 스리랑카 캐나다인으로 비숍대학, 토론토대학, 퀸즈대학을 거치며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에 영국 요크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지금은(지금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데, 설마 2025년은 아니겠지, 사실이면 올해 여든두 살인데?

  왜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이의 대표작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를, 만일 영화만 보고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당신한테 원작을 꼭 읽어보라고, 그리고 영화가 왜, 어떤 방식으로 작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를 빼먹었는 지, 그게 고의였는지, 구성 상 어쩔 수 없어서였는지 한 번 판단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은데, 아뿔싸, <영국인 환자>의 우리말 번역문이 좋지 않아 차마 권하지 못하는 심정이 애달파서 그렇다. <영국인 환자> 독후감에도 썼던 것을 다시 인용한다면, 스리랑카인으로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온다치의 핵심 메시지(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였다.


  “‘미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난 아무런 상관하지 않아요. 세계에서 피부가 갈색인 사람들에게 폭탄을 투하한다면, 영국인인 거죠.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이 있나 싶더니, 이제는 미국에 해리 트루먼이라는 빌어먹을 인간이 있는 거죠. 모두 그런 것을 영국인으로부터 배운 겁니다.’ (중략) 그는 젊은 군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백인 국가에는 그런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 사랑 줄리엣 비노쉬에 넋이 나가 내용은 뭐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온다치의 핵심 논점은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온다치는 하여튼 <영국인 환자>에서 아시아인으로 전쟁과 전쟁의 종결을 바라보는 비관적인 관점을 드러냈는데, 오늘 소개하는 <기억의 빛>은 조금 다르다. <기억의 빛>만 가지고 온다치를 판단한다면, 그를 유색인이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이이는 한 해에 한 번 정도 고국인 스리랑카를 방문한다고 하고, 이젠 다 늙어서 여전히 그러는 지는 내가 전화를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콜롬보 공항에 내릴 때마다 누이동생 질리언을 만나 쌓인 회포를 풀고, 동생 식구들과 함께 정을 돈독히 쌓는 데 게으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의 빛>에서 주인공 ‘나’ 엄마가 부르는 이름 스티치, 아빠가 부르는 주민등록상 이름 너새니얼과 누나 렌 또는 레이철을 백인이 아니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리지널 잉글랜드인. 마이클 온다치 자신이 세계인, 코스모폴리탄이니까 불만은 없다.


  <영국인 환자>가 2차대전 막바지와 종전 직후의 장면을 그렸다면, <기억의 빛 War Light>는 전후 끈질기게 이어지는 전쟁의 후유증에 관한 소묘라고 생각할 수 있다. 1945년에 주인공 ‘나’ 스티치가 열네 살, 곧 열여섯 살이 될 누나 렌. 어린 남매가 특별하게 전쟁의 후유증을 겪을 일은 없다. 다만 후유증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 그러면 누구? 부모겠지 뭐. <영국인 환자> 같이 전투에 나가 싸우다가 심각한 상이를 입었나? 아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도브 샴푸, 바셀린, 기타 생활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의 고위급 간부직원이었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그간의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을 의미하는 유니레버 아시아 사무소의 총 지배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는 아버지의 개인적 커리어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동시에 가정에서도 중산층에서 한 단계 도약해 어쩌면 남들이 부러워할 부르주아 끝자리 정도에 도달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아버지는 당연히 제안을 수락해야 했고, 아이들도 만날 일에만 열중해서 덤덤해진 아버지쯤이야 1년 정도 안 본다 해도 뭐 그렇게 서운해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문제는 이상한 데서 터졌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싱가폴에 가야 한다는 거다. 세상에. 세상에 어떤 어미가 남편 따라 가느라 런던에 의지가지 없는 십대 남매 둘만 달랑 남겨 놓겠느냐고? 그러나 아직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런 일도 있는가 보다 싶어, 그냥 그랬다. 부모는 3층에 세들어 사는 월터에게 남매의 후견을 부탁했단다. 평소에 그냥 그런 이웃인가 싶었는데 부모와는 일로 좀 친했던 모양이지?

  이래서 아버지는, 때는 바야흐로 1945년이라 랭커스터 폭격기의 후예인 신형 아브로 튜더1에 올라 시속 480킬로미터로 몇날 며칠을 날아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어머니는 런던에 남아 몇 주 아이들 뒷바라지를 마감한 다음에 작은 은색 트렁크에 자기 짐을 챙겨, 떠났다. 남매를, 남매가 별로 정을 느끼지 못하는 후견인 월터, 남매가 ‘나방’이라 불러 훗날 진짜 이름 월터를 기억하지 못할 거구의 남자에게 맡긴 채.

  이쯤 해서 원래 제목 War Light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War Light, 전시에 적기의 폭격에 방어하는 동시에 아군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당연히 수송도 이에 포함되고. 이 책에서 수송이라 함은 나중에 밝혀지기를 런던 모 성당에서 제조한 니트로그리셀린과 폭탄을 런던 시내에 있는, 기상천외해서 누구도 그곳에 화약을 집결시킬 줄은 꿈에도 모를 장소까지 트럭에 싣고 야밤에 운송하는 일이었는데,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을까봐 헤드라이트를 켤 수 없어서, 아주 미미한 광도의 빛만 비추고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길을 헤쳐가야 했다. 이때 이 ‘아주 미미한 광도의 빛’을 War Light라고 한다. 다른 뜻도 있지만 하여간 책에서 말하는 War Light는 그렇다. 사전 찾지 마시라. 아예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찾아보시는 분 꼭 한 명은 있다. 누군지도 안다. 흐흐)


  한 눈에 보기에도 범죄자 비슷한 남자인 나방. 시간이 조금 지나 그나마 친해지자, 자신이 어떻게 어머니를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준다. 나방은 전시에 어머니와 함께 그로스브너 하우스 호텔 옥상에 있었다는 “새둥지” 참호에서 화재 감시원으로 일했단다.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공습하면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화재가 집중된 곳을 소방서에 알려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

  그러다가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진짜 했던 일은 새둥지에 세워진 고성능 안테나를 이용해 독일에서 발신한 모스 부호를, 놀라운 재능으로 누구보다 쉽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어머니가 이를 다시 대륙의 대 독일 저항투쟁 단체에 알리는 일을 담당했다는 거다. 쉽게 얘기해서 렌과 스티치의 엄마는 전직 정보원. 이를 알게 된 건, 엄마가 집을 떠난 얼마 후, 렌이 엄마가 가지고 가려했던 트렁크를 집에서 발견하고, 트렁크 속에 든 모든 물건 역시 그대로 있는 걸 알게 된 이후이다. 엄마는 결코 싱가포르에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모르지. 엄마는 여전히 영국 외교부 소속 정보부원이었으니까. 그래도 골든 부커상을 수상한 마이클 온다치가 주인공의 엄마로 상정한 인물이니 정보부 요원이라도 그냥 정보부 요원이면 좀 그렇지?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때에 따라서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이었다. 이런 요원은 같은 정보원 사회에서 당연히 적들이 비일비재하고, 언제 그들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을 지 늘 각오를 해야 하는 법. 저 위에서 말한 전후 후유증은 이걸 말하는 것이었고, 때에 따라 후유증은 간혹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집단의 학살의 시발을 만들기도 했었으니, 이런 요원의 자식 역시 후유증 또는 복수의 대상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건 너무 안이한 판단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방과 훗날 화살이라 불리는 요원에게 딸과 아들의 보호를 요청하고 잉글랜드 외무부의 새로운 지령을 수행하러 저 멀리, 발칸으로 숨어들어갔던 거였다. 어떠셔, 흥미진진하겠지? 그렇지는 않고, ‘나’ 스티치, 너새니얼의 성장기와 경험이 더 많거나 비슷한 분량이어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기대하지 말고 읽는 편이 훨씬 좋을 듯하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 455번으로 중판을 찍었다. 초판은 1만9천원, 중판은 1만8천원. 천원 차이라도 이런 시도는 칭찬받아야 한다. 박수 세 번, 짝, 짝, 짝! 초판 번역은 아밀, 중판은 김지현.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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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5-02-27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 매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는 사전 찾지 않았습니다 ㅎㅎ)

Falstaff 2025-02-27 15:59   좋아요 1 | URL
ㅎㅎ 고맙습니다. ^^

은하수 2025-02-27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재밌는데요~~^^
근데 1945년에 발칸으로 숨어들었다니.. 설정도 참으로 위험할진데 흥미진진 합니다~~

Falstaff 2025-02-27 16:00   좋아요 1 | URL
엄마의 첩보 활동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정말 스릴러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

stella.K 2025-02-27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의 뮤즈가 비노쉬라는 건 오늘 첨 알았네요. ㅋㅋ
요즘 뭐하며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그 시절 여배우들 그립네요.ㅠ
근데 책값을 내리는 경우도 있군요.

Falstaff 2025-02-27 16:02   좋아요 1 | URL
비노쉬, ㅎㅎㅎ 좋잖아요. 꿈 속에서야 뭔들 못하겠습니까. ㅋㅋㅋㅋ
아마 초판이 하드커버였을 겁니다. 그래서 포장비에서 천원 빠졌나 싶기도 하고요.
 
마지막 섬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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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세레나데>를 쓴 쥴퓌 리바넬리? 헛참, 그거…

  책을 열면 O.Z. Livaneli가 쓴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한국에서 출판한다니 기쁘다는 얘기다.  문제는 다음 장에 실린 소설가 장강명의 “추천사”.


  “낙원과도 같았던 작은 공동체에 탐욕스러운 외부인이 들어오고, 마을은 점점 망가져 마침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2008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독재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하지만 2022년 한국 독자들에게도 울림이 크다.”


  출판사 호밀밭의 편집부장과 장강명은 몰랐을 걸? 이 추천사로 인하여 <마지막 섬>은 첫 두 페이지, 딱 두 페이지만 읽고도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개할 지 눈에 훤히 보이고 말게 될 것임을.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정말로 소설 초반부터 작가가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든 읽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지루해 어쩔 줄 몰랐다. 지루한 책을 읽을 때는 유독 허리와 무릎이 조근조근 쑤셔, 읽다가 벌떡 일어나 도서관 열람실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잦았다. 이게 뭐야, 마치 1980년대 의식화 교재, 의식화 교재이기는 한데 그것도 성인용도 아니고 고등학생용도 아닌, 초등생이나 중학생을 위한 생 기초 교재 수준에 그친다. 그런 거 있잖아. “아름답고 평화로운 다람쥐 나라에 너구리가 신발을 팔러 왔어요. 너구리는 늘 맨발로 사는 다람쥐한테 무료로 신발을 나누어 주었어요. 다람쥐들은 몇 년 동안 신발을 신고 다녀서 발의 굳은 살이 다 풀려 이제는 맨발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자마자 너구리는 갑자기 신발을 돈 주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신발 값을 받지 않아 많이 밑졌다고 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신발을 팔았답니다. 다람쥐들은 신발을 사기 위해 다 가난해졌고, 돈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자기 땅을 팔기 시작했어요. 다람쥐들의 땅도 다 팔 수밖에 없게 되자 너구리는 다람쥐들을 다람쥐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답니다.” 대충 어떤 식인지 기억날 거다.

  아, 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그래도 리바넬리인데 혹시 알아? 마지막에 신묘한 뒤집기 결말이 놓여 있을 지? 결국 혹시 했다가 역시로 끝났지만.


  작품은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 비밀’로 지켜왔던 그 지상 낙원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외딴 섬.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밤이면 자스민 향기에 뒤덮이는 숲 속에 자리한 낡고 오래된 집과 함께 세월에 맡겨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독립된 세상. 쥴퓌 리바넬리의 이 섬에 관한 묘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섬의 평화로운 자연환경은 마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해수면에 드리우는 우윳빛 안개와 저녁 무렵에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을, 그리고 갈매기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바람의 속삭임과 라벤더 향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일 동이 떠오를 무렵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해무에 휘감겨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쌍둥이 섬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다 나오며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은? 집마다 피어있는 보라색 부겐빌레아꽃은? 그리고, 한밤의 린덴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말 한 마디로 하자면 율도국이요, 결국 목이 잘려 죽은 토마스 모어 경의 말에 의하면 유토피아 자체인 섬, 마지막 남은 지상 낙원으로, 마지막 섬이다. 오래전에 대단한 자산가가 섬 전체를 매입해 자산가 수준으로 봐서 매우 소박한 별장을 짓고 살다가, 혼자 살기 적적했는지 지인 몇을 불러 자기 집 근처에 크지 않은 별장을 짓고 함께 살게 배려했다. 이렇게 해서 딱 40개의 별장, 절대로 40호를 넘지 않는 작은 촌을 이루어 그들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바지 차림에 매우 간소한 웃옷만 입은 채 수영을 하든지, 그늘에 매인 해먹에 누워 잠을 자든지, 낚시를 하든지, 하여간 무슨 수를 써서 매일의 권태만 벗어나면 그걸로 만족하다가, 드디어 해가 넘어가면 뜻 맞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얇고 긴 화이트와인 잔을 기울이며 살던, 율도국이요 유토피아였던 섬. 며칠에 한 번 육지에서 연락선이 도착하지만 접안 시설이 큰 배를 맞이할 수 없어 작은 보트를 타고 짐을 가져와 판매를 하는 구멍가게가 하나 더 있을 뿐. 그런데 잘 보시라. 처음부터 섬에는 문제가 있었으니, 건물, 즉 39개의 별장은 자산가(의 아들) 말고 초대에 응한 이들이 지어 그들 소유이지만, 섬, 즉 토지는 전부 죽은 자산가에게 상속을 받은 아들, 작품 속 40호 가운데 1호 별장 주인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건 언제나 작지 않은 문제가 될 것임을 독자는 애초부터 짐작하고 있을 수밖에.

  그리고 나의 끈질긴 고질인 계급의식. 이 율도국 거주민 40가구는 도대체 무얼 해서 먹고 살지? 해가 뉘엿뉘엿 지면 아무렇게 막 우려낸 포도주가 아니라 육지에서 수송해온 질 좋고 비싼 화이트와인을 홀짝일 수 있으려면 그만한 수입이 있어야 할 터. 나중에 알려지지만 섬에서 유일한 소득원은 주민들 스스로 저 높은 나무에 기어 올라가 따서 껍질을 벗겨 내다 팔아 돈과 바꾸는 잣 수확밖에 없다. 그것도 사실 모두 1호 소유이기는 하지만 마음씨 좋고, 마음이 좋은 만큼 돈도 많은 1호가 눈 감아 주어 여태 팔아먹은 것인데, 잣이 아무리 겁나 많이 달린다고 해도 오직 그거 하나 따서 팔아 날마다 화이트와인 음용이 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기를, 원래 출신이 대단한 자산가 1호가 초청한 1호의 지인이었으니 1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인간들이었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육지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자가증식하여 꼬박꼬박 통장에 새로운 돈이 입금되는 인간일 것이라는 짐작. 이거 틀렸어? 율도국, 또는 유토피아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런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저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잣을 따온다고? 왜? 차라리 염병을 하지.


  그래도 치사하게 이렇게 미리 딴지 걸지 말고 읽기 시작하자.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마을에 찾아온 인간은, 이미자 노래가사처럼 총각 선생님이 아니라 장기집권한 후 어쩔 수 없이 사임한 대통령이었다. 소설 속 계속 ‘전 대통령’이라 불릴 전직 군인 장군 출신의 이 무지막지한 깡패는 피노체트나 전두환 같은 기질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이이가 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24호 별장의 변호사가 숲속에서 조깅 도중 심장발작으로 죽는 바람에 공실이 된 24호 건물이 매물로 나온 것을 전 대통령의 수하가 보고하여, “전 대통령의 조용한 은퇴생활을 하기 위해” 육지에서 멀고, 거리가 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 오래 계속된 철권통치 후에 국민에게 외면당해 혁명의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속으로는 거의 강제로 사임시켜, 될 수 있으면 국민의 입방정에 오르지 않기 위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36호 입주자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잠시 빈 상태로 있었는데 ‘나’가 이혼 후에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던 유부녀 라라와 야반도주를 해 떠나왔을 때의 ‘나’는 수많은 상처와 실망 그리고 큰 아픔을 경험한 후였다고 주장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주인공이니까. ‘나’와 라라는 7호에 사는 소설가와 친하게 지냈는데, 7호가 전 대통령이 섬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악과 함께 크게 걱정을 하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안에 섬 전체가 황폐화될 것이며, 불행이 온 섬을 뒤덮을 것이라고 신음한다.

  그리고? 당연히 7호 소설가의 예언대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전 대통령의 불 같은 성격과 폭압적인 의사결정과 결정의 집행. 어디까지나 주민투표를 통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민주적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전 대통령의 기만과 현혹과 유혹적인 선동으로 인해 섬은 급격하게 지옥으로 변해간다. 리바넬리가 그린 지옥도.

  리바넬리 씨, 미안하다. 나는 지옥처럼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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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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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로 아르헨티나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단다. 그러나 이이의 필모그래피가 2013년 이후로 기록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후 소설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인기있는 시나리오 작가라면 박스오피스를 위하여 범죄와 스릴, 서스펜스의 유혹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들 지 않을까 싶다. 이이의 소설 역시 주로 범죄와 미스터리물이 많다고 하는데 오늘 독후감을 쓰는 <엘레나는 알고 있다>도 엘레나의 딸 리타의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아직 중증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수준의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70대로 짐작할 수 있는) 노인 엘레나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행 아침 열 시 기차를 타기 전까지 1부, 기차를 타고 수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20년 전에 한 번 만나 은혜를 베푼 이사벨의 집에 도착하는 것까지가 2부, 이사벨의 집에서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며 작품 전체의 그림이 완결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독후감 쓰기가 난처하다. 앞 문단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 역시 한 명의 죽음, 딸 리타가 성당의 종탑 가로대에 종을 칠 때 쓰는 밧줄을 걸고 목을 맨 상태에서 자기가 딛고 선 의자를 발로 차 자살을 해버린 이후의 일을 그렸다. 리타의 엄마이기도 한 엘레나는 자기 딸이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무엇보다 천둥, 번개를 두려워해 비 오는 날엔 성당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이 큰 버릇이어서 그날 굳이 성당을 찾아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엘레나의 상태를 설명해야겠다. 엘레나는 파킨슨병 환자다. 파킨슨병이기는 한데 손과 발을 경련하지 않는다. 처음엔 이것이 좋은 징조인 줄 알았건만, 경련을 하지 않는 파킨슨병은 병의 진행속도가 경련하는 파킨슨병의 케이스보다 훨씬 더 빠르다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어 보통의 파킨슨병 환자의 증상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걷는 실조증, 혈압이 불안정한 자율신경장애, 기억장애, 환시, 심각한 요실금 등을 동반하는 파킨슨플러스에 걸려버린 상태다. 이미 약을 먹지 않으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걸을 수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에 내의를 치킬 수도 없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엘레나는 아무리 불편해도 여전히 살고 싶으며, 그것도 사람답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자기 집에서 근 50년간 살았던 것처럼, 결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딸 리타와 함께, 말이 함께지 내용상 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며, 간혹 딸한테 구박도 받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리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성당에서, 비가 우르릉쾅쾅 내리는 날에 성당까지 가서 목을 매달았다니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리타는 천둥과 번개를 두려워했다.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굳이 묘사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미 죽은 남편,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에서 교사는 아니고 직원으로 일하던 리타의 아버지가, 성당 종탑 꼭대기에는 피뢰침이 있어서 동네의 거의 모든 번개가 종탑에 떨어지고, 빗물은 굉장히 우량한 전도체라 강한 전기가 성당 마당의 젖은 땅을 타고 흘러 생명체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이후로, 리타는 비가 오는 날엔 결코 성당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던 거였다. 그런데도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을 골라 성당 종탑에서 목을 맸다니 엘레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허리도 기역(ㄱ)자처럼 휜 데다가 목의 근육마저 경직되어 머리도 들지 못해 땅만 바라보고 다녀 늘 침을 흘리는 늙은 환자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리타의 자살 사건을 수사한 형사도, 성당의 주임신부도,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 교장도.

  시신 확인을 위해 시체 안치실에 가서 리타를 보니, 리타의 목 주변에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살갗은 자주색으로 변한 데다 올이 풀어진 황마 밧줄에 긁혀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져 있었으며 혀도 빼물고 얼굴도 퉁퉁 부어 오른데다가 몸에는 똥냄새가 심했다. 검시관 말에 의하면 운이 없었다고. 그나마 운이 따라주면 목뼈가 부러져 곧장 숨이 끊어지는데 리타는 목뼈가 버티는 바람에 질식으로 천천히(고통스럽게) 죽었을 거라 한다. 목을 매고 질식으로 죽는 사람들은 보통 발작을 일으키다가 똥을 누는 바람에 시신에서 냄새가 심하다면서. 리타의 주검을 보며 엘레나는 리타가 결코 자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누군가 리타를 비가 오는 밤에 성당 종탑까지 유인해 목을 걸어 자살로 위장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엘레나가 그렇게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심각한 파킨슨병 때문에 운신을 할 수 없어 20년 전에 리타와 엘레나에게 큰 신세를 진 이사벨을 찾아가 그이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한 거였다.


  20년 전인 1981년, 그때는 엘레나도 파킨슨병 이전이라 신체 건강한 시절이었는데, 리타가 출근하는 길에 평소 경멸해 마지않는 산파의 집 근처에서 땅바닥에 앉아 구토를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사벨을 발견했다. 이사벨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구토를 하고 또 구토를 하는 것이 한눈에 봐도 심한 입덧이었다. 시간에 맞춰 학업 시작 종을 쳐야 하는 리타는 그런 이사벨을 두고 직장인 가톨릭학교로 바삐 갈 수 없었다. 이사벨이 입구에 막 도착한 산파의 집에서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보다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찾는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타는 이사벨에게 다가가 몸을 닦아주고, 위로해주다가 어떻게 이사벨의 손에 든 메모를 보았는데, 산파의 이름 ‘올가’와 집 주소를 적은 것이었다. 단번에 임신중단을 위해 산파의 집에 온 것을 알아차린 리타는 이사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 돼요. 절대 하지 말아요.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건 대죄예요. 당신의 아이를 생각해봐요. 지금 당신의 몸 속에는 생명이 꿈틀대고 있어요. 어린 생명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도 생각이 바뀔 거예요. 당신도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요. 절대로 아이를 죽이지 말아요. 안 그러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보내게 될 거예요. 수술을 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요. 낙태 당한 아기들이 여자들 머릿속에서 계속 운다고요.

  리타는 이때 이사벨의 약지에 낀 반지를 발견한다. 결혼한 유부녀였던 거고,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낙태를 위해 수도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온 거였다. 리타는 이사벨을 거의 반강제로 자기 집으로 데려왔고, 엘레나와 함께 이사벨을 다시 추슬러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사벨 부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이후 엘레나는 딸 훌리에타를 낳아 이제 벌써 열아홉 살이 되었다. 엘레나도 알고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부부와 훌리에타, 이렇게 셋이 웃으며 찍은 사진을 동봉한 연하장을 보내왔으니. 결국 엘레나 모녀가 훌리에타라고 하는 큰 축복을 이 부부에게 베푼 것이니, 리타의 억울한 죽음을 엘레나 대신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찌 빚을 갚는 일이 아닐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날, 21세기 초입의 어느 날, 엘레나는 힘겹게 일어나 허리와 목을 펼 수 없기 때문에 극도로 어려운 일인 처방약 레보도파를 물과 함께 삼키고,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오른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왼발을 어느 정도 지났다 싶으면 거기에 발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이번엔 왼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리면서… 짧은 장편소설 한 권의 시간적 배경이 될 하루를 시작한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함께 2022년 부커-인터내셔널 상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저주토끼>와 나란히 미역국을 먹었다. 며칠 전에 읽은 예니 에르펜베크도 <카이로스>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불가리아어로 쓴 <타임 셸터>도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는데, 부커-인터내셔널 상은 영어로 번역한 외국소설, 즉 비영어소설의 영어 번역 책에 주는 상이다. 이런 경우에,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스페인-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스페인-영국-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큰 문제는 아니지만 궁금하다.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은 원본과 달라도 너무 달라 차라리 다른 작품일 정도라고 한 소설가(든가 평론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이후에 좀 헛갈린다.

  아울러, 이 책은 상당한 수준의 페미니즘 소설이다. 범죄,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어울릴 정도이다. 위에 쓴 전반적 스토리는 피녜이로 특유의 범죄-추리 기법 상 결론을 말할 수 없어 이 책이 왜 페미니즘 소설인지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다만 책 좀 읽는 독자는 1부와 2부를 읽는 동안 결말을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결말 부근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좀 아쉽다. 그래도 대단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 결말일 터이니 이 책을 선택하는데 주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스토리를 더 소개하는 건 좋지 않다. 즐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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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24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헛, 채식주의자가 번역본이 다르다고요? 그럼 번역자가 거의 뼈대만 남겨놓고 창작을 했다는 소린가요? 그 번역본 저도 읽고 싶은데 외쿡어는 거의 까막눈이니 AI한테 맡기면 친절하게 번역해 줄까요? ㅋ 암튼 궁금하네요.^^

Falstaff 2025-02-24 16:31   좋아요 1 | URL
헛!
그거 말고요, 당시 신문에서 어느 작가/평론가가 자기 사진 걸고 말하기를 번역을 통한 채식이 (자기가 읽어보니까) 한강의 채식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는 말입지요. 제가 뭐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른 언어로 번역한 문학작품에 관해 말할 주제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본문에 쓴 쇤네의 말 출처를 대라, 라고 하시면 워낙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근데 원본/번역본에 관해서 항상 있었던 일 아닙니까? 뭐 다 그렇다는 겁지요. ㅋㅋㅋ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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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나보코프는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세어보니까 얼마 안 된다. <롤리타>, <재능>, <사형장의로의 초대>, <절망>, <창백한 불꽃>, <프닌>. 이렇게 장편소설 여섯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근데도 무척, 꽤 읽은 듯한 기분이다. 아마 읽으면서 골치 깨나 썩이지 않은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읽다가 갑자기 오리무중의 벌판을 더듬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 읽다가, 읽다가 다시 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은 경험이 많아, 나부코프, 하면 아예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골치를 썩이면서도 읽을 때마다 색다른 재미를 발견한, 내게는 특별한 작가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골치 썩이면 썩일수록 엑스터시를 느끼는 피학적 취향은 없다. 나보코프를 고생고생하며 읽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나서, 거참 특별한 경험이었네, 이 비슷한 각성, 각성? 맞아, 각성 비슷한 희한한 경험을 갖게 한 듯하다. 참 별난 작가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이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어로 쓴 첫번째 작품인데, 책을 읽는 내내 이 책 읽기 이전에 어디서 좀 본 듯한 기분이 자꾸 들어서, 나보코프를 읽을 때 거의 예외 없이 탁, 꽂히는 특유의 색이랄까, 맛이랄까, 아니면 멋이랄까, 하는 기분이 좀 덜 든다. 그건 작품의 구성이 화자 V가 자신의 죽은 이복형 서배스천 나이트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생전에 관계했던 사람들과 사랑했던 여자 등을 추적하는 구성이라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좀 흔한 플롯, 맞지?


  서배스천 나이트와 그의 동생 V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근위병이었던 서배스천과 V의 공동 아버지는 1890년대 초에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여우사냥 행사에서 아름다운 버지니아 나이트 양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의 화염을 불살랐다. 버지니아는 재산 깨나 있는 영국 신사 에드워드 나이트 씨의 딸로 근위병 장교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위를 마땅하지 않게 여겼다. 장서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혼을 했고, 1899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맏아들 서배스천을 낳았다. 아버지는 1904년부터 05년까지 있었던 러일전쟁 이후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때는 버지니아와 갈라선 이후였다. 첫 아내 버지니아 나이트는 좀 이상하고 경박한 여자여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남편과 아들 서배스천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네 살배기 첫 아이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유모의 형편없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 데도.

  그럼 계산을 해보자. 서배스천이 1899년 말일, 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마지막 날 출생한 러시아인. 아버지는 1904년에 첫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다음해인 1905년 이후에 군인으로 성공을 해서, 1905년에 재혼을 하고 1906년에 둘째 아들 V가 태어난다. 맏아들과 이복동생 사이에 뭔가 있다. 한 세기가 바뀐 일이다. 서배스천은 생모 버지니아에게 침대차와 유럽횡단 급행열차에 대한 거의 낭만적일 정도의 기이한 열정을 물려 받았는데, 오랜 세월 유럽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던 반쯤 유럽국가이며 2등 유럽국가인 러시아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탈 러시아를 실행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역시 돈이다. 서배스천의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나이트 씨에게 버지니아가 무남독녀의 외동딸이라 그가 죽을 때 모든 재산을 전부 외동딸 버지니아에게 상속했고, 버지니아마저 일찍 죽어 그게 또 몽땅 서배스천에게 넘어왔던 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배스천은, 마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부르주아 러시아 가정의 영적인 우아함과 기품에 유럽문화의 가장 훌륭한 유산이 결합되어 지적으로 세련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적으로 매우 특출해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모든 시는 나중에 거의 폐기했지만, 각 시의 밑에 서명은 잉크로 그린 조그만 검은 색 체스 말 나이트Knight를 그렸다. 1912년 말에 아버지가 결투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 이후 회복하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1913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훌륭한 군인이자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모험가 기질의 아버지의 성향까지, 모든 좋은 것들을 물려받은 서배스천은 나이가 차자마자 계모와 이복동생 V를 떠나 어머니의 나라 잉글랜드로 가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시인, 소설가로 조금씩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근데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1912년에 팔친이라는 경박한 남자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첫번째 아내 버지니아에 대한 소문,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헛소문인 것이 틀림없는 이야기를 쓸데없이 퍼뜨리고 다녔다. 이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팔친을 찾아가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다. 피가 솟는 근위병 장교는 시절이 1912년 말, 이미 러시아에서 결투라는 단어가 사라졌건만, 자기 대리인을 보내 권총으로 결투하기로 정했다가, 그렇게 추운 날 아침, 눈 쌓인 숲 초입에서 가슴에 총알이 박혀 얼굴을 눈 속에 파묻은 채 쓰러져 버렸다. 자기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틀림없으니 아무리 자기한테 잘 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계모라도 낯짝이 있지 다 커서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같이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래, 잘 떠났다.


  그러나, 십대 시절까지 러시아에서 러시아 말을 쓰던 서배스천이 영국으로 가서, 영어를 쓰는 시인, 소설가를 하자니 이게 쉽겠느냐고. 아무리 엄마가 영국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서배스천의 영어 속에 든 러시아 억양과 자모음 발음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을 터. 이렇게 지우려 해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러시아인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채 서배스천은 작가 생활을 유지하고, 책을 몇 권 내고, 당연히 젊었으니 풋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진짜 사랑을 했다고 믿었으나 상대방은 심각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이거 미리 이야기하면 안 좋은데 이왕 썼으니 지우지도 못하겠고, 하여간 그래서 좀 묘한 사랑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서배스천의 생모 버지니아 나이트는 1904년에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면서 저절로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1908년에 다시 나타나 자기 동서, 그러니까 서배스천의 계모이자 V의 생모에게 서배스천을 만나게 해달라고 무뚝뚝한 편지를 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객실에서 아들과 서먹서먹한 상봉을 하고 돌아가더니, 다음해인 1909년 여름에 남프랑스 로크브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심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희귀 유전질환인 레만병으로 죽어, 시신을 런던으로 옮겨 장례식을 하고 매장했다. 그러니 세바스찬 역시 많지 않은 나이에 정확한 병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심장병으로 거의 급사 수준으로 세상을 뜨는데, 이게 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거라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하여간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서배스천 나이트가 자기와 거의 비슷한 처지, 즉 러시아에서 낳고 십대까지 보낸 작가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써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며, 작중 서배스천이 출생한 1899년이라는 해도 한 세기를 마감하여 마지막 19세기 인간으로, 결국 평생을 20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사람일 수밖에 없는, 1899년, 아니면 1890년대 사람이 아니라면 수긍은 하되 그리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태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세대차이를 전제로 살아야 하는 팔자라면 말이 되나? 하여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초반에는 V. 나보코프답게 배 다른 형제와, 전처에 대한 헛소문 때문에 결투를 벌인 (다른 병과도 아니고) 근위병 장교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총알이라든지, 하여튼 참 나보코프다운 입심에 감탄을 하며 읽다가, 본격적으로 V가 서배스천의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피시식, 또는 푸시식, 열기가 식어가면서, 나보코프의 문장들도 급속하게 사변적으로 변해버린다. (물론 많이, 많이 다르지만) 마치 마르셀을 읽는 것 같은 기분, 마르셀은 소음을 없애기 위해 코르크로 벽을 둘러친 방에 누워 세상 만물과 만인과 한 명의 탄압받는 유대인 장교에 관해 사색을 했지만, 서배스천의 행적을 찾는 V는 오직 한 인간, 사실 많은 부분이 나보코프 자신이겠지만, 서배스천에 관한 사색과 추측과 명상적 추적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잡는다. 마르셀이 그러했듯이. 그나마 분량이 적어 다행이지 아주 골로 갈 뻔했다. 본문이 겨우 240쪽까지. 다른 책보다 시간을 두 배는 더 썼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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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2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엘레나는 알고 있다>
화요일. 쥴퓌 리바넬리, <마지막 섬>
목요일. 마이클 온다치, <기억의 빛>
금요일. 니콜 클라우스, <위대한 집>

은하수 2025-02-2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 많이 읽으신거 맞네요~~
전 롤리타 한 권 집에 있는데...
안읽혀요...
정말 재미 있는거 맞나요???^^







Falstaff 2025-02-21 16:23   좋아요 1 | URL
나보코프는 평생 어떻게 하면 독자의 수명을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작가 같습니다. 심할 때는 막 멀미, 근육떨림 현상을 넘어 위경련, 뇌경색의 위험이 있겠다 싶거든요. 재미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디가서, 나 이래 봬도 나보코프 읽은 인간이야, 비슷하게 잘난 척하기는 무척 좋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