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간으로 토요일 저녁에 서울 시청앞에서 총파업 집회가 있을 거라고 해서 여기 영국에서 잠에서 깨자마자 다음 사이트를 찾아들어갔다. 그러나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기사도, 집회 전경을 찍은 사진도 쉽게 찾기 힘들었다.

코레일 자회사의 민영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이제 없는 것 같다. 민노총이 총파업을 결의하고 한국노총이 동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한국의 총리는 공기업들에 부채를 줄이기 위해 핵심 우량 자산을 팔아라 라고 말했다. 매각 과정에서 헐값 매각 논란이 나와도, 노조의 파업으로 곤란을 겪게 되어도 정부가 다 면책해 주고, 막아주겠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최장기 철도 파업이고, 민노총의 총파업이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기업들의 민영화를 강행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박근혜가 지지율 관리, 지방선거, 총선, 차기 대선을 통한 정권 연장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직 견고하긴 하지만 박근혜의 지지율은 하향 추세다. 앞으로 숱하게 불거질 민영화 논란, 정부 기관들의 불법 대선 개입으로 인한 정통성 시비 등등으로 박근혜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강공책은 무모해 보인다. 언론이 아무리 박근혜를 보호해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강공책으로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 박근혜는 분명 아니다. 새누리당도 아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정치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정부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는 새누리당이 여당으로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가장 커다란 수혜 집단은 온갖 이해 관계로 얽혀 있는 정부의 관료들일 것이다. 이들은 박근혜가 민영화 드라이브로 지지율이 떨어지든 말든, 혹 정권 연장에 실패하든 말든 별로 게의치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이런 정책들을 밀어 붙일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를 거의 바보라고 본다. 박근혜는 후보자 토론회 때 자신의 아주 상식적인 공약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기본적인 법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인 법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무조건 바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다선 의원 출신의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부패한 정부 관료들이 멍청하고 권위주의적인 대통령 뒤에서 정부 정책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이룩된 재산들을 다 팔아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미 FTA때문에 일단 민영화가 시행되면 FTA를 폐기하지 않는 한 이를 되돌릴 방법도 없다. 완벽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라는 화두로 돌아온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자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산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소통시킬 것인가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철도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철도 관련 정보를 혼자만 갖고 있으려고 한다. 그것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는 정보를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바탕에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토론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그 정보를 이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정보가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되는 상황은 정보를 독점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결국 이 세력과의 싸움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가능한 투명하게 퍼뜨리려는 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한사코 파괴하고자 한다. 국가 기관이 대거 동원되어 시민들의 이러 저러한 의견에 빨갱이, 종북, 전라도, 좌파... 등등의 표딱지를 붙이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심지어는 대학가에 붙은 대자보 한 장도, 함께 토론해 볼 "의견"이 아니라 찢어버려야할 "선동"이 되어 버린다. (선동이란 말은 대상을 상정한다. 즉, 대자보를 읽는 사람이 선동의 대상이 된다. 선동될 수 있으므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을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권위주의다. 권위주의 정권은 시민들이 믿어야 할 것, 옳다고 판단해야 할 것의 기준을 자신들이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네들의 말이야말로 선동이다.)

한국에서 권위주의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이 아직 이념성이 약하고 위계가 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이가 들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진세율을 완화하려는 정당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합리화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념성이 매우 희석되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내가 박근혜를 선택했을 때 나의 선택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이념이란 사실상 존재치 않는다. 정당화의 논리가 부재할 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화 자체를 단절하는 것 뿐이다. 한국에서 대화 단절의 논리는 대단히 풍부하게 개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늙은이에게 항변하는 젊은이는 아직 뭔가를 모르는 어린애거나 폐륜아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항변하는 사람은 빨갱이거나 선동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소통은 억제된다. 즉, 민주주의는 억제된다.

전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통의 억압 현상은 한국에게 극히 불행한 일이다. 한국은 급격하게 늙어가는 나라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변환해야 할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손학규가 말한 "저녁이 있는 삶"은 우리의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이 패러다임은 사회의 압착을 의미한다. 이 패러다임은 중산층을 늘리는 정책들을 의미하고, 그것은 기득권층의 양보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권의 대단한 역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현실은, 희소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일부 세력들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 사대강이 그렇고, 각종 민영화 정책들이 그렇다. 고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매력적인 투자처가 다 말라 버린 상태에서 이들은 영원토록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채가고 있다. 사회는 압착이 아니라 모래시계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포함하여, 이 역사의 역류를 돌이킬 무슨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한다. 지금 정부는 앞뒤 재지 않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기를 써가며 각종 민영화 정책(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의료 민영화를 포함하여)들을 추진하고 있다. 어떤 반대도 통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기 전에 어서 빨리 해치우려 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책들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은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것 뿐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 박근혜를 하야시키는 것은 마음이야 즐겁겠지만 그저 공상일 뿐이이다. 총선에서 야당이 절대 과반수를 점해 박근혜를 탄핵시키는 것도 흐뭇한 공상일 뿐이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겠지만 박근혜 퇴진이 박근혜 반대 운동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답은, 매우 상식적이게도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를 들면, 첫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을 총파업 시국에 너무 무리하게 관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좀 더 장기적으로 야당들의 지지도를 높이는 구도 속에서 야당들이 움직여야 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은 여당에게 어부지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경쟁과 연대를 해나가야 하리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어떻게가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셋째, 야당들은 총선과 대선이 공정선거가 될 수 있도록 재발방지대책을 확실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안철수가 이 문제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고무적인 부분도 많다. 첫째는, 이제 국민 모두가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대선의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과정을 통해 박근혜를 부정선거당선자라는 프레임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박근혜는 임기 내내 적자재정을 해야 하고, 그러므로 만성적인 세수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것이다. 박근혜는 기득권층의 허수아비 정권이므로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서민 증세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체감 경기 침체 속에서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정권은 없을 것이다. 셋째는, 박근혜 정권은 깜짝쇼 카드를 이미 다 썼다는 것이다. 해외 순방 퍼레이드도 이제 끝났고 노무현 NLL 카드도 다 끝났고, 등등. 아직 4년이나 임기가 남은 박근혜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강권 통치뿐일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공안 강권 통치를 4년이나 지속하는 정권이 21세기에 정권재창출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내 얘기를 하자면, 얼마 전에 한인 신문에 난 한국의 상황을 읽고 나는 굉장히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만약 박근혜 다음에 한국 국민들이 또다시 새누리당에 정권을 주면 나는 차라리 영국에서 시민권이나 따고 말아야 겠다고, 맘에 없는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나는 영국에 앞으로도 오래 체류할 예정인데 시민권을 신청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한국의 날씨보다는 차라리 영국의 날씨를 좋아하고 한국의 음식보다는 차라리 영국의 음식(!)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 문화에 대한 나의 자부심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영국의 조그마한 마을들에 가보면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그런 가게들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일본의 민화들이 많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그저 콧웃음을 친다. 한국의 작품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한국처럼 자연스러움을 미의 궁극의 기준으로 삼아 이룩된 문화가 또 있을까? 나는 내가 반가사유상의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가사유상이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인류에 제공하고 있는 문화권이 또 있을까? 나는 내가 한국 문화의 일부로서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간직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신에게 간곡하게 빈다.

어제 몇 가지 희망의 메시지를 얻었다. 유튭에서 김용옥과 노무현의 대담을 봤는데, 영국의 정치 문화가 부럽지 않을 만큼 진솔하고 담백하고 날카로운 대담을 철학자 김용옥과 대통령 노무현이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이런 높은 수준의 정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문화가 다시 등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과연 과도한 것일까? 유튭에서 김대중의 노무현에 대한 추도사를 보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으로 하는 말이었다. 무자비한 억압의 시대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투쟁했던, 이제는 연로한 한 정치인이 속으로 울면서 하는 말을 들으며, 만약 우리가 여기서 희망을 버린다면 참 우스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유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어린 친구들, 아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친구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인 것 같았다. 아버지, 할아버지와의 정치적 갈등을 토로하는 글들을 나는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윗 세대가 한국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우리가 여기서 단념해 버릴 수 없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국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기성세대에 나도 속해 있다. 나도 반성을 하여야 한다. 이 존경스러운 어린 세대들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다수를 이룰 때 한국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린 세대들이 한국의 희망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서 나는 기뻤다. 

(물 위를 자꾸 들락 거리고 있으므로 이제 잠수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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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진고개라는 한국 음식점에 갈비탕을 먹으러 갔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한인 신문을 보다가 그만 입맛을 망치고 말았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는 정부의 여전한 방해 공작으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철도 민영화가 진행 중이고, 대학생들은 언론이 완전히 통제되던 시절의 고전적인 대사회 발언 방식인 대자보로 자신의 의견들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곧 2014년이다...

정부는 불법대선 문제를 은폐하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당은 정권을 잡는 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불법선거를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당은 지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대선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지으려 할 것이다.

이런 정치적 이슈는 먹고 살기 빡빡한 국민들에게 당장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민영화라는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건 경제적인 이슈다. 온갖 언론 매체들이 철도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겠지만 파업은 최장기 파업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만큼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싸움은 정부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본다. 

아마 지금 시점에서는, 박근혜 정부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받았고 박근혜가 사태를 개선시킬 추호의 의지도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박근혜가 사퇴하는 것이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일 거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박근혜 퇴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얼마만큼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허비하고 나서 박근혜가 물러나느냐만 남은 문제일 거라고 본다. 도대체 이 상태로 이 사람이 4년을 더 끌고 갈 수 있을까? 이번 파업의 끝에는 박근혜 정권의 완전한 레임덕, 또는 완전한 공안 정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으로 볼 때 후자는 불가능하다. 

(다시 잠수. 혹 댓글이 있어도 반응은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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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뉴포레스트라는, 영국 남부의 숲지를 다녀왔다.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블로그에 글을 올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침에 레드 제플린의 "The Rain Song"을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가까운 가게로 빵을 사러 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블로그에 대한 나의 열정이 완전히 사라졌구나...


한국에서 이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나는 공장 노동자였다. 나는 나 자신을 계속 계발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었다. 일하고 자는 기계적인 일상에서, 즉 생존을 위한 시간에서 나 자신에 관심을 기울일, 즉 생활을 위한 시간을 찾아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통근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네그리의 빨간 표지 소책자를 읽던 것을 기억한다. 동료가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빨간책이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나는 외면의 풍경과 다른 그림을 내 안에 그리려 했고, 그것을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우연찮게 영국에 와서 원하던 공부를 하게 되었고 학위도 하나 따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마다 나를 엄습해 오는 감정은 언제나 안스러움이다. 나는 그것들을 크나큰 실패의 흔적들이라고 인정한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을 본다면 나는 단연코 그 길은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나는 그때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최근 나의 블로그 글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벽을 보며 혼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가이폭스 데이에는 여럿이 함께 갔고, 이상문학상작품집에 대한 감상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한 것이다. 로마 여행도 물론 동반 여행이었다. 얼마전에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로마에서 만난 카라바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분도 로마를 갔었고 카라바조 그림의 우편엽서를 샀다고 하더라. 우리는 종교적 경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마 이런 것들이 블로그에서 흥미를 잃은 이유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내면에 풍경을 따로 만들어 놓고 싶지 않다. 


얼마 전에 비포 선셋을 봤다. 6개월 후에 만나자던 남녀가 9년 후에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9년은 너무 길다. 6개월은 너무 짧다. 한 3년 후면 어떨까? 3년 후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


3 YEARS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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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8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3-11-18 18:25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드립니다. 북마크해 놓았습니다. 건강하시구요~
 

영국에서는 11월 초가 되면 밤마다 불꽃 놀이를 벌인다. 400년 전에 가이 폭스라는 사람이 영국 국회 의사당을 폭약으로 날려 버리려다 미수에 그친 걸 기념하는 거라나...


지난 토요일에 집 근처 나대지에서 하는 불꽃 놀이 축제에 다녀 왔다. 캄캄하고 바람이 엄청 부는 저녁이었는데 사람이 많이도 왔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들(나대지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잔디로 덮여 있어서 장화가 정말 요긴하다), 그 추운 날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 그 추운 날 반바지 차림으로 나온 어떤 가족... 


한쪽에는 번쩍 번쩍 빛나는 놀이 기구들이 돌아가고 다른 쪽에는 햄버거나 칲스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또 다른 한쪽에는 목재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불을 붙인다. 


우리도 놀이기구를 하나 탔다. 한국보다 훨씬 오래 탈 수 있어서 좋았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놀이기구에 혼자 탔는데 안전바가 아이 가슴팍 정도에 오더라. 아슬아슬해 보였다. 부모가 도대체 누구길래... 하는 생각도 슬며시 들었는데, 놀이기구가 멈추고 나자 아저씨 하나가 아이를 데리러 들어왔다. 아이가 환하게 웃는데 앞니가 없더라. 아이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예전에 버지니아 워터라는 물 많은 공원에 갔었는데, 꽤나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아이 둘이 빤쓰만 입고 물에 들어가 있었다. 부모들은 지켜보고 있고...)


바람이 엄청 불어서 모닥불의 불길이 삼 사 미터 정도나 뻗어서 마치 태양의 표면을 보는 듯 했다. 친구 둘이 '모닥불 피워 놓고'를 불렀다. 사실 그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았다. 나중에 민박 하나 빌려서 진짜 모닥불 피워 놓고 놀자고 했다. 빈말 반 진말 반. -모닥불 피워 놓고 소주잔 기울이면서 밤새 두런 두번 나누는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면 아련하기도 하다.


불꽃 놀이도 참 화려했다. 음악에 맞추어 폭죽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갖가지 색깔을 내며 가까운 하늘을 수놓았다. 평지이기 때문에 멀리 다른 곳에서 하는 불꽃 놀이들도 다 보인다. 우리 것 말고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다섯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온 영국이 폭죽으로 뒤덮인다고 해도 빈말이 아닐 거 같다.


돌아가는 길. 그 많은 차들이 일시에 나대지를 벗어나 도로로 진입하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별 것 없다. 우리도 자동차 경적 소리 한번 들을 틈 없이 부드럽게 도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이탈리아를 다녀와서인지 이런 질서, 배려, 여유가 좀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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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날 친구한테 빌려온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두 권을 뒤적였다. 아래는 그 중 세 편에 대한 감상이다. 세 편은 찬찬히, 끝까지 다 읽었다. 적어도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면 이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게 될 것 같다.

글목. 나는 예전에 이 분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무소, 고등어, 예의. (여기까지다. 이후의 작품들은, 아마도 내가 삶에서 소설 읽을 여유를 찾지 못해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의 작품을 읽으며 화가 날 정도로 실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번째 문제는 이 분 글에 비문과 요령부득인 문장이 너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권리로 불평하자면 읽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리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란 한국어 산문의 수호자 아닌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인 동시에 의료 시스템의 신뢰성에 대한 수호자이듯이 말이다. 이 정도로 비문 범벅인 소설 앞에서 나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러한 문장들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가 수여되었다면 그건 이미 작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둘째는, 소설적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 감정과 사상을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글목'의  화자는 툭하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그런데 왜? 독자인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감히 왜? 라고 물을 수도 없다. 소리 죽여 가며 아프게 우는 사람 앞에서 왜 울어? 라고 물어 볼 수 있나? 그래서 독자로서의 나는 정말 불편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소설의 독자이고 싶지 않았다. '글목'의 화자는 H라는 사람과 정서적 공감을 갖는다. 이제 독자도 화자-H와 같은 편에 서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나는 H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작가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실제 세계에서 H를 직접 만나고 그에 대한 어떤 감정을 갖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나는 H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화자-H와 뭔가를 공유할 수 있나? 그게 뭔지 알아야 공감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글목'에는 이런 장치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세번째는 사상성의 문제다. 나는 작가란 자신에게 일어난 감정, 사상 등과 거리를 유지하도록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워낙에 탁월한 천재는 이를 무시해도 되겠지만... '글목'에는 이러한 노력이 철저하게 결핍된 흔적들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작가가 천재인 것 같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글목'에서는 분절되지 않은 별개의 사고들이 한데 뒤엉켜 급기야 폭탄으로 터져 버린다. 그 폭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글목'의 작가는 개인이 어떤 외적인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들어 삶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상황에서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이를 말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고 위험한 사고가 끼여들어 버렸고, 그 결과로 이 작품은 정말이지 철저하게 부정적 의미에서 끔찍해져 버렸다. 즉, 사상적으로 매우 저급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국수.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아름답고 좋은 작품이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분은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평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40 한국 여성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아마 작가의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누가 그런 얘기를 잔뜩 해 놓았다면?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그 이상의 스타일이 없다고 한다면?(정말?) 그렇다면 그런 스타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대신 누구 누구의 아류라는 딱지가 붙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군의 작가들을 보면서 한국 문학에 특징적인 매너리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갈한 문장들과 완벽한 구성을 갖춘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은 한국의 흔한 매너리즘 작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조용필을 모창하여 조용필 이상으로 잘 부른다 한들... (나는 국수의 작가가 풍금의 작가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쓴다고 느꼈다.)

옥수수. 역시 친구가 추천해 준 작품이다. 우화적 장치를 가진 작품으로 재미있다. 단 한가지 문제는,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옥수수'는 한국 문학에 흔하디 흔한, 슬럼프를 겪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다루고 있다. '가볍게' 라는 말에 주의하자. 예를 들어 '옥수수'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금융 전문가로 일하다가 한국의 작은, 문학 전문 출판사 사장으로 전직한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이 타이틀만 제껴놓고 보면 그 사장이란 사람은 문학 소년적 과거가 있는 졸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물의 사실성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이 작품은 우화니까 그냥 우화로 읽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볍게, 재미있게 읽고 던져버려도 작가가 섭섭해 하지 않을 작품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 한국어 산문에 관한 최고 권위의 상 중 하나가 주어졌다. 왜? 이 작품이 어떤 성취를 하였기에? 나는 도저히 모르겠더라... 

이 책을 빌려 준 친구는 천천히, 심심할 때 읽으라고, 숙제하듯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내 느낌을 말하자면 이제 숙제 끝이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더 읽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구태여 읽으면서 화내고 실망하고, 때로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라는 부커상이 뉴질랜드의 20대 작가에게 돌아갔다. 최연소 수상이자 역대 수상작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작품이라고 한다.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작가의 인터뷰를 조금 봤는데, 소설이 두꺼운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이고, 지금 뉴질랜드에는 자기와 같은 (비슷한 수준의) 젊은 작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젊은 작가들은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스타일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하고. 인터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파구는 각자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소설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니 하는 말들을 흔하게 듣는데 십중팔구는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의 자기변명이라고 본다. 그런 위기는 없다. 단언컨대 없다. 위기가 있다면 소설가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철학자의 위기일 뿐일 것이다. 이상문학상작품집을 보라. 거기엔 심지어 한국어 문장의 위기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어 문장도 제대로 못쓰는 소설가와 그에 대한 비평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현실이 그 위기라는 것의 실체다. 그 위기는 마치 숙제의 위기와 같을 것이다. 개학 전날 밤을 새가며 과제물을 해치우면서 중얼거리던 말. 큰일났다. 대충이라도 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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