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 아이가 지난 주 수요일에 제대하였는데 이번 주 화요일에 출국하여 50일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한다. 11월 말경 영국에 오는데 우리 집에도 몇 칠 묵게 될 것 같다.


이 얘기를 듣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제대하자마자 집을 떠나 50일간 유럽 여행이라니! 젊음이란 대단허다! 


낯설고 긴 여백을 채우는 것을 우리는 열정이라 부른다. 예컨대, 시스타나 성당 천정의 광막한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미켈란젤로의 열정이었다. 기획, 상상력, 육체적 고투, 성당 당국자들을 적절히 다루는 정치, 스스로를 새로움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 등등... - 그래서 열정이란 말은 요즘 말로 역량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암튼 요즘 세상에 열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열정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다.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는다느니, 나대지 말라라든지, 잠자코 있으면 중간은 간다든지, 특히 인성이나 윤리적 평가에 대한 광적이고 집단적인 집착을 보면 그렇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의 코로나 백신 정책 얘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백신 접종 결과를 보고 문제가 없으면 백신 접종을 시작하겠다니 국가 정책의 기준이 이래도 되는건가? 불확실성의 사실성을 전제하고 스스로의 기준과 필요에 의해 주도적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것이 열정이고 열정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다. - 예컨대, 활기 있음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다.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논외로 하고 말한대도 현대의, 말하자면 사상적 분위기 역시 열정에 적대적이다. 현대적 사상가들의 눈에 주체란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성되고 구조화되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 구조의 결과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데 너무도 익숙하다. 그러면 현재의 나의 실존에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현재의 나의 실존의 상당 부분은 나의 행위들의 결과이다, 라는 자명한 명제가 울려나온다. 그러면 현대는 또 다른 처방을 제시해준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만연한 개념.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자기기만적이고 음울하다. 음울하다? 이니셔티브가 열정과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스스로에게서 이니셔티브를 제거한 사람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활기없음. 


이재명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란 장면이 있다. 한 2030 남성이 청년 실업 대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에 노동 유연화 정책을 시행하여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와 동류인 성별, 세대, 지역, 학연 등의 정체성 집단에서 하소연 겸 상식처럼 주고받던 얘기를 그 정체성 집단 밖에서 하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니셔티브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에 추종적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 그룹에 준거하여 사고하게 된다. 아니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무사고다. 그리하여 열정이 없는 사람은 지루하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출할 힘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 '내것'을 더 가져가는지에 매우 매우 민감하다. 그의 세계는 좁고 재미가 없다.


스피노자는 진리는 진리와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라 말했다. 활기있음과 활기없음을 나란히 놓고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인가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전자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드물어지는 것을 활기없음이라 한다. 활기없음을 근절하는 방법은 그 옆에 활기있음을 놓으면 된다. 열정 옆에 놓인 열정없음은 얼마나 초라해보이는가?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옆에서 남탓만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초라해보이는가? - 이것이 우리가 열정 넘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열정 넘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이유다. 열정 넘치는 사람은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도 열정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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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을 보았다. 조금은 이상한 경로로, 유튭에서 인터스텔라 리뷰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보게 된 영화다. 다행히 유튭에 전편이 올라와 있었다. 2시간이 훨씬 넘는 상영 시간에, 기존의 영화 문법과는 많이 다른 영화였기 때문에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기존의 문법에 지겨움을 느끼는 사람이나 그런 문법을 깨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영화는 많은 여운을 남겼다. 모든 좋은 예술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근원 조건을 되사유케 하는 것 같다. 사유란 일종의 외적 타격에 의해 촉발된다. 익숙함에 익숙해 있는 한 사유는 여름날의 동물원 곰처럼 비비적거릴 뿐이다. 내 생각에는, 사유를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본원적 의미인 것 같다. 즉, 예술은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깨우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근원 조건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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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에서는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잘 시간 등의 방해만 없다면 한없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책과 몇 십분 지나지 않아 엉덩이가 들썩들썩해지는 책. 첫 번째 종류의 책은 약간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두 번째 종류의 책은 어렵게 해독된 단 몇 문장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지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치란, 전통에 따르면, 얼마나 얻기 힘드냐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니스 시절의 스필버그는, 사람들이 자기 영화를 보러와서 실컷 즐긴 후 극장을 나가서는 우디 앨런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더 만들기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건 더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옛날의 스필버그에 동정이 간다. 여튼 이 또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마치 도통한 사람인냥... 정작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을 읽으면서 한 숨 돌리고자 딴 짓을 하는 것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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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9-1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없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책...이런 책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점점 줄어드는 거 같아요. 어쩔 때는 읽어두 재미가 없어 죄다 덮고 드라마만 본 적도 있어요. 요상하게 어떤 드라마를 봐도 재미가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 책을 보면 다 재밌어 지는 게...참 요상하더라구요..ㅎㅎ

그레드릭 제임슨의 책...지루하긴 하죠..ㅎㅎ

weekly 2025-09-11 04:1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요즘은 이경규씨가 자꾸 생각나는 계절이네요.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경규씨는, 독서를 많이 하고 싶다고 했죠. 희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었어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에서 나온 얘기일 것입니다. 저랑 처지가 같네요...
 

지지난주 주말에 웨이브리지라는 동네에 놀러갔다. 영국에 처음 와서 살던 동네다. 이 동네 하이스트릿에는 워터스톤스라는 영국 서점 체인에서 운영하는 서점과, 그 바로 맞은 편에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 서점이 있다. 전자는 언제나 파리를 날리고 후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는 언제나 북적이는 가게로 향한다.


사고 싶은 책이 많았는데 아내가 쿼터를 두 권으로 정했기 때문에 세 권으로 만족해야 했다. 모비딕, 키에르케고르의 일기, 에코의 칸트에 대한 책. 모비딕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 유명한 첫 문장과 이어지는 문장들이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과연 언제 읽을 수 있으려나...? 에코의 책은 집에 돌아와 열어 보았다. 나는 이탈리아 출신의 박학자들에 대한, 아마도 열등감에서 오는 미심쩍음을 갖고 있다. 저렇게 넓게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깊게는 알 수 없을 거야, 깊이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되새기면서, 휴지를 갖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것의 부산물일 테니까... 박학자들이란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쉼 없이 넘어가는 사람들 아니냐... 이번 에코의 책 첫 몇 페이지에서도 나는 표면에서 표면으로 건너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책은 당장 읽지 않아도 되겠군... 


중고 서점에서 책을 다섯 권이나 샀기 때문에 양심에 걸려 새책방에서도 몇 권 사려 길을 건넜다. 그러나 새책방에서는 사고 싶은 책이 없었다. 카운터에 외롭게 서 있는 점원의 눈을 피하며 들어온 모습 그대로 나가야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내게 문제적 철학자다. 케이르케고르는 일부 철학자들에게 철학자의 철학자로 대우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은 키에르케고르를 가리켜 "내게는 너무도 심오한 철학자" 라고 말했다. 이보다 더 잘 된 광고를 본 적이 있는가? 사르트르 역시 키에르케고르를 마치 자신의 철학의 원천이자 지향점인 듯 말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키에르케고의 저작들에서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읽었고 전기도 하나 읽었지만 남는 게 없었다. 그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는 "비학문적 후서"는 그 수다스러움에 지쳐 서두를 뚫고 나가지 못했다. 과연 얻는 게 있을까 하는 미심쩍음이 한가득이었으니...


나는 아내에게 케에르케고르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구애해서 약혼까지 해놓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해버렸어. 처녀 아버지와 처녀 본인이 와서 사정 사정하면서 제발 결혼해 달라 했지만 거절했지. 약혼까지 해놓은 마당이라 이제 그 처녀의 혼사길은 막혀 버릴 판국이었는데도 말이야. 케에르케고르가 왜 파혼을 했는지에 대해 수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내 생각은 이래. 키에르케고르는 좋은 직업을 갖고 좋은 남편으로, 좋은 아버지로 관습적인 삶을 살아갈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 그게 자신의 숙명은 아니라고 본 것이지. 대신 그는 치열하게 사색하고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삶을 살았어. 그는 어마어마하게 썼지. 그런데 무엇을 위해? 이게 나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도 궁금한 점이었어. 그는 어떤 목사장에 반대하는 글들을 집요하게 써냈는데 키에르케고르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는 그 목사장도 이해못했다는 거야. 그 사람은 무응답으로 일관할 뿐이었어. 여튼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짓을 하느라 재산을 써댔고 건강을 해쳤어. 결국 산책 중에 쓰러져 죽었지. 어쩌면 그의 문필 활동 일체는 헛짓거리고 파혼에 대한 변명의 외관 이상이 아닌 것일 수도 있어. 뭐라도 하는 척 해야 했을테니까. 그러니 그 사람의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이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생기는 것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해서 말이야. 게다가 키에르케고르는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사람이야. 극보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 대해 하는 험담은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는 좋은 동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에스프레소 한 잔 하는 시간에 키에르케고르를 한 두 페이지 읽기로 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 아뿔싸, 나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키에르케고르가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작은 활자로 650 페이지 짜리 두터운 책만 아니었다면 당장 읽어내버려야지 하고 덤벼들었을 그런 재미있고, 깊고, 영감어린 책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외쳤다. "키에르케고르 안에 다 있어!" 최근에 우리가 했던 얘기들이 키에르케고르 안에 다 있다는 뜻이었다. 왕양명의 "전습록"의 어떤 귀절에 대해 했던 이야기, 궁극적 의미의 자유란 운명 혹은 성격의 변화 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는 U2의 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의 가사도...


"It is this my soul thirsts for as the African deserts thirst for water."(키에르케고르, 33페이지)


"Like a desert needs rain

Like a preacher needs pain

Like a needle needs a vein

Like someone to blame

I need your love"(U2, Hawkmoon 269)


내가 느끼기로는 심지어 내가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한 험담까지...


"Different ways of grasping life’s dialectic, e.g. in the legends and stories of the Middle Ages in struggles against wild animals and monsters; in China with an examination; in the Church with doubt."(48페이지)


쯕, 키에르케고르의 열정적인 문필 활동은 그의 파혼에 대한 변명, 정당화, 죄책감 등등과 내적 관계를 가지면서 마치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은 외관을 취한다는 것... 적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U2의 가사가 그런 정신의 빛에 의해 쓰여졌음이 명백하게 보이듯, 내가 보기에 키에르케고르는 변증법적 사유의 마술사다. 그러므로 그의 사유는 최소한 한 차원 더 들어가지 않고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도처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케에르케고르가 의의로운 이유는, 사유가 표면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즉,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나는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멜랑콜리함이라는 개념에 영감을 주는 귀절을 발견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번 포스트를 시작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 얘기는 아주 길 것이고 아마 다른 기회에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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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8-2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반갑게도 키에르케고에 대한 글이네요!! 키에르케고를 이해하려면 기독교에 심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키에르케고 철학의 요체는 <죽음에이르는병>, <두려움과 떨림>, <불안의 개념>에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을 찬양함에 대한 글을 보면 신앞에선 아브라함의 고뇌를 어떻게 키에르케고가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키에르케고 실존철학을 단번에 이해했어요. 그리고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이르는병>을 읽으니 그가 왜 실존철학의 시작점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때 열심히 읽었지만 지금은 소설과 과학책 읽느라 예전에 읽었던 철학책들은 거의 읽지 못하고 있어요. 그림 때문에 책 읽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어 언제 키에르케고 다시 읽나 싶습니다.ㅎㅎ

정말 오랜만에 위클리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반갑네요! 영국에서 여전히 건강하게 잘 지내시나 봅니다~ 알라딘에 자주 글좀 올려주세요~^^

weekly 2025-08-22 23: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하 야무님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말로 대문자 T여서 키에르케고르가 잘 안와닿는 것일 수 있겠군요?:) 이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 언제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혹은 정말 읽어야 할까... 등을 계속 되묻게 되는 것 같아요. 읽어야 할 책이라면 진작 읽었어야 하는 책일 테구요. 야무님은 키에르케고르를 이미 많이 읽으셨네요.:)

(야무님 댓글을 보니 글을 좀 자주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제 블로그가 좀 이상합니다. 방문자 수가 평소의 100배는 되는 것 같아요. 시스템 문제인지, 누가 크로울링을 잔뜩 돌리는 건지...?)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에서 "THE GENESIS EXHIBITION: DO HO SUH: WALK THE HOUSE" 라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고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가 가보고 알려주었다. 아내 말로는 자기가 본 한국 작가 전시회 중 가장 성공적인 전시회인 듯 하다고. 


나는 딱 한가지만 관심 있어 했다. "스케일이 어때?" "어마 어마해~" "좋네!" --- 예컨대, 잭슨 폴락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평소 작업하던 사이즈의 수 십배 크기의 작품을 주문받았을 때 그 막막한 캔버스를 결국 다 채워넣을 수 있었다는 것, 즉 그런 에너지와 영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혹은 김승옥이 결국 절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중편 이상의 작품을 쓸 때는 재주만으로 작품을 끌고 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등등...


그동안 런던에 나갈 일이 있었지만 서도호의 전시회에는 가보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 서도호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얘기가 들린다. 한국에서 온 창극단의 "리어왕" 런던 공연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꽤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 나는 작품에만 집중했고 한국에서 온 오리지널한 신파에 조금씩 물려하던 참이라... 그러고보니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서구 사람들에게도, 흔히 동양적이라 칭해지는(혹은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어떤 아련한 감성, 고향, 어머니, 가족 등등으로 형상화되는 그런 감성들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는, 혹은 직설적으로 말해 그런 감성이 억압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감성이 현재하고 있다면 거기가 또한 시장이기도 할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관점이다.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도호 작가가 광주에 대한 작품도 만든 모양이다. 영국 아줌마들이 이런 얘기를 나누더란다. "저게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래." "한강?" "응 이번에 노벨상 탄 작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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