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시작하기 전 무대 전경. 백발이 많이 보이는 것은 영국 관객의 많은 수가 노년이기 때문이다.)

 

마 레이니즈 블랙 보톰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인물로 실존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마 레이니의 녹음 세션 날 반나절을 그린 작품이라기에 반은 뮤지컬일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흑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이번 연극의 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퓨리처 상을 두 번이나 탄 대가라는 것도,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보고서야 알았다.

 

연극은 마 레이니의 세션에 모인 흑인 연주자들의 옥씬각씬이 대부분의 장면을 차지한다. 이날 이들에게 있었던 일을 신문 기사식으로 처리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새로 산 신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흑인들끼리 다투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진실은 저 짤막한 문장 너머에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는데, 혼자 오신 어느 흑인 할머니, 친구들과 같이 온 어느 백인 할머니가 눈시울을 훔치시더라. 나도 가슴이 먹먹해 졌다.

 

사실 흑인 문제, 혹은 중동 문제, 이슬람 문제...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인 문제, 혹은 유럽(미국을 포함하여)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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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읽어 본 철학책 중 가장 어려운 책인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참으로 감탄할 만한 책이다. 이 점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나는 항상 난해함을 의심한다. 이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고. <존재와 무>의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존재와 무>의 기본 아이디어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언어를 회피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의 기교적인 언어 사용을 이해해 주고 싶다. <존재와 무>를 난해하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의 심원함, 그리고 문제를 백과사전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존재와 무>는 전통 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 백과사전이다.(물론, <존재와 무>의 사상을 꼭 지금의 형태로 기술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저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저자에게 문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존재와 무>는 유럽 내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실존주의 운동의 기본 저작쯤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당시 사람들이 <존재와 무>를 읽고 제대로 소화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존재와 무>가 실존주의라 칭해지는 유행과 사상적으로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자유나 책임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의, 심지어는 사르트르의 입을 통해 전파된, 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는 저작인 것이다.

<존재와 무>는 휴머니즘적인 전통에 속하는 저작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존재와 무>를 가장 안전하게 규정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때 휴머니즘은 물론 실증주의나 자연주의적 태도에 반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고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키에르케고르나 후설, 하이데거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온다. 사실 인간 존재, 혹은 인간 현상에 대한 가지성은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현대에도 <존재와 무>가 의의를 갖는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가 인간 존재의 가지성 문제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한 드문 저작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존재와 무>는 아직 충분히 탐구 되지 않은(!) 광맥이다. (그것이 진정 광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탐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거의 확신한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이후에 철학 저술을 멈추었다면 <존재와 무>는 한계를 갖는 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는 무의식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후기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써냈기 때문에, <존재와 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와 무>의 존재론은 정적 모델만을 다룬 것이고, <비판>을 통해 그 정적 모델이 변증법 안에서 총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존재와 무> 안에는 이러한 확장에 저항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사르트르가 처음부터 이런 총체적 기획 안에서 <존재와 무>를 저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의 유일한 기획은, 구체적인 것(요컨대 구체적 체험)을 구체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건전하다. 만일 그것에서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초기 기획의 건전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존재와 무>의 한국어 표준판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유일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동서문화사판인데, 내 생각에 꽤 좋은 번역인 것 같다. 물론 아쉬운 점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영역판처럼 대놓고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체제가 좀 허술해 보여도 엄청난 공력을 들여 번역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긴 이 정도로 두텁고 밀도 높은 책을 번역해 내는 분에게는 무조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영어판 역자도 그만 미워하기로 했다. 새로운 영역판이 준비 중에 있다는 소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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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기사와 알파고와의 대국.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의견을 기록해 두려 한다.

(총 5국 중 3승1패로 알파고가 승리를 확정한 상태란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는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바둑의 최고급 수준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었다가, 알파고가 3연승을 하는 와중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가 거의 바둑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세돌 기사가 한 판을 이긴 후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도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이번 대국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아마도 이세돌은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1). 인공지능 바둑 기계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혹은 장래의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될 수 있을까? 이는 물론 사고나 감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에 따라서는 주판도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의식의 현상으로서의 사고와 감정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알파고는 학습형 기계라고 한다. 승리라는 목표(미래)가 주어져 있고, 학습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거)이 있고, 대국의 각 순간은 이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개입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알파고가 학습형 기계라는 것은 과거가 미래를 일의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파고의 이러한 모습은, 몇몇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에 고유한 것으로 이야기하던 탈자적 특성과 유사하다. 즉, 자신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양상. 요컨대, 알파고는 자신의 과거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를 갖고 있다.

생명체의 어느 수준에까지 의식적 특성을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등 수준의 생명체에 대해 의식적 특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알파고도 의식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인간 수준에서의 의식적 특성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의식의 한 현상으로서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 자아의 문제가 개입할 것이다. 즉, 알파고는 자신에 대한 어떤 상을 갖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파고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아는 타자를 전제한다. 즉, 자아는 타자에 대해 자신을 외면성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그 외면성이란 자신의 신체를 말한다. 알파고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의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분명 부정적인 답을 줄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알파고는 아직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래에는? Who knows?

2). 아마 이번 대국은 미래의 역사학자에 의해 프로페셔널리즘의 종말의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바둑을 더 잘 둘 수 있는 한에서 최고의 인간 기사를 가리는 이벤트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아주 멀지 않은 장래에 이족 로봇이 축구나 야구 등의 프로 스포츠 경기에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도 그렇다.

이런 판국에 170km를 던지는 인간 투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뽑아내는 천재 작곡가, 고도로 세련되고 정교한 색채 감각을 자랑하는 화가... 등등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하고, 그렇게 최고에 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시합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스런 일이다.

장래는 아마추어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3). 작년에, 중학교 다니는 동네 아이가 로봇이 대체하지 않는 직업이 뭘까 하며 고민하는 소리를 하기에 웃은 적이 있다. 이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테스코 계산대를 추천했었다. 얼마 전 씨엔엔에서도 로봇이 대체하지 않을 직업에 대해 방송하더라. 나는 또 웃었다.

그러나 이번 대국 관련 기사에서는 웃지 못하겠더라. 지금 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의 90%는 직업을 잃게 되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렇게 예상되는 장래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90%의 인류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공급이 무한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무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을 돈을 매개로 사고 팔아야 하는가? 자본주의식대로라면 90%의 인류가 실업자인데 그 무한한 공급에 대한 수요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 두 가지 극단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하나는, 에스에프 영화에서 많이 봤듯이 장래의 세계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사는 폐쇄된 도시와 그 밖의 빈민굴 영역으로 나눠지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물품을 구할 수 있는 공산주의식 사회가 되리라는 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이 두 극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첫번째에 가까울까? 내 생각에 첫번째 그림은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역사에서 운동에 어떤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동이란 첫 번째 그림을 옵션에서 지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나는 오래 살아서 미래의 사회를 보고 싶다. 내가 전사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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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주일 전에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를 보다가 각본상 후보에 오른 엑스 마키나란 영화에 끌렸다. 테스코에 갔다가 있길래 사 보았다. 아주 좋았다. 

에스에프 로봇 영화의 주제는 로봇의 정체성, 그러므로 역으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화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이 주제를 참신하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엑스 마키나는 대단히 성공적인 영화다. 스릴러가 있지만 정적이다. 영화의 균형을 깨뜨리는 과도한 연출도 없다. 좀 지루하다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감독이 적절히 절제력을 발휘했다고 본다. 

영화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튜링 테스트이지만 남자 칼렙과 여자 로봇 에이바에게 튜링 테스트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유리벽이 가로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제 유리벽이 상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즉, 섹슈얼리티.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에 대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는 섹슈얼리티가 없다고 불평을 한 적이 있는데, 영화는 바로 이 점을 상기케 한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의식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질문은 굉장히 날카롭다. "~인 척"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자아의 발생을 지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핵심적인 것은 '나'의 분리이다. 이제는 상식이 된 이야기이지만, 자아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배후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 대해 갖는 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와 '자아'는 다르다. 타인도 나에 대해 어떤 상을 갖는다. 자아와, 타인이 나에 대해 갖는 상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타인의 나에 대한 상이 나의 나에 대한 상에 앞선다.) 인간은 타인의 나에 대한 상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인 척"의 가능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식적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연기를 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로봇 에이바도, 사람의 시선 아래에서, 더우기나 남자의 시선 아래에서, 그리고 우연찮게도 자신이 여자의 몸으로 만들어졌으므로(사실성), 여자를 연기한다. 영화를 가득 채우며 울렁이는 섹슈얼리티의 분위기는 여기서 기인한다. 섹슈얼리티를 극대화시키는 영화들의 비결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엑스 마키나는 인간학적 비밀의 핵심을 성공적으로 폭로한 매우 진귀한 영화다. (사실 2001 오딧세이에도 이런 테마가 나온다.)

-추: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깊은 가능성도 있다. 인간의 경우 자신에 대해서도 "~인 척" 할 수 있다. 로봇도 이것이 가능할까? 예컨대, 자아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도 타자를 기만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이 동물들이 자기 자신도 기만할 수 있을까? 로봇은 자기를 기만할 수 있을까? 어떤 존재가 의식적인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 기준은, 이 자기 기만성에 있을 것 같다. (물론, 사르트르적인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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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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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자폐적 작가. 읽고 난 감상이다.

주인공은 세상과 아무런 접촉이 없다. 그러므로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것은 관념 뿐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여대생은 인천 남동공단의 노동자와 사귄다. 둘 사이에 어떤 정형화된 갈등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다. 즉, 그것은 둘 사이의 계급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온다는 것을.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것이 남자 노동자의 입을 통해서 온다. 그것이 남자 노동자의 입을 통해 나오기 전까지 주인공은 타자의 압박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백치인가? 그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한국에, 혹은 진공 속에?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주인공은 911 테러로 연기에 휩싸인 뉴욕 세계 무역 센터 빌딩 '사진'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읽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인 서머의 말, "그때 뉴욕에 가면 시체 타는 냄새가 났어"라는 말을 '회상'하고 있다. 직접 체험은 어디에도 없다. 남의 체험을 통해 편집된 자료 앞에서 주인공은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민. 이것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지한 작가라면 감히,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더라... 이런 식의 서술은 하지 못하리라.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썩는 냄새를 체험적으로 전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시체 썩는 냄새 이야기를 아예 언급하지도 말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지, 여기 저기서 보고 듣던 이야기를 잘라 붙여 엮어놓은 누더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을 미국 뉴욕의 어떤 지역에서 시작한 것은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 거기서부터 이미 실재는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놀랐었다.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원작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일 게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취재를 한 것이더라. (아주 단편적인 예지만) 한국 만화의 사정이 이렇다면, 한국 소설의 사정은 어떨까?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책상 머리에 앉아 관념만으로 쓴 것 같다. 이런 것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힘은 실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괴테가 말했듯이 작가는 대상 앞에 서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밖으로 나와야 한다. 자폐적인 소설들은 그만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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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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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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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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