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다시 총선 정국에 들어갔다. 브렉싯을 관리할 강력한 리더십을 주장하면서 집권 보수당이 총선을 제안했고, 노동당은, 많은 사람들이 노동당의 뻔한 참패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이를 망설임없이 받아들였다.


메이 수상은 토론회 참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 하나의 이슈, 브렉싯 협상에 자신이 적임자냐, 노동당 당수 코벵이 적임자냐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것이 보수당의 이번 선거 전략인 것이다. 노동당은 브렉싯 뿐 아니라 교육, 환경 등 집권 보수당이 방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대안 정책을 내놓고 있다. 결국 영국 국민들의 선택의 몫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 메이가 이길 것 같다. 노년의 사람들이 메이 수상을 너무 좋아한다. 아마 그에게서 대처를 보나보다.


트럼프가 되고 나서 이코노미스트지는 세계화의 퇴조에 대해 썼다. 자유무역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인 이코노미스트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에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흐름은 바꼈고 트럼프의 등장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국적 기업은 현지 기업과의 경쟁에서 별 우위를 보이지 못한다. 자유무역이 꼭이 선진국에게 이득이 되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은 문을 닫아 걸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국가주의적 테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서구 선진국들은 바로 이 흐름 위에 있다. 서구 국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들은 역사에서 배운 것이 있을까? 나는 이 점을 못미덥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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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런던 한국 영사관에 가서 투표를 했다. 대선, 총선 등 영국에 온 뒤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선거에 참여했었는데, 입구서부터 줄을 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20, 30, 4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면 무조건 민주당일 거라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문재인에, 아내는 심상정에 표를 주었다. 나는 애초 심상정을 뽑으려 했었다. 대통령은 어짜피 문재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진보 세력의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철수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면서 문재인을 찍기로 마음을 바꿨다. BW 논란 등은 안철수에게, 법적인 논란거리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치명적인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재인의 아들 논란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서, 나는 문제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문재인이 그동안 이만큼이나 자기 관리를 잘 해왔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에게 표를 주기로 했다. 아내는 그동안 나에게 문재인을 뽑으라고 강력하게 협박을 했었다. 그런데, 토론을 보면서 문재인이 토론을 너무 못하고, 동성애 관련 발언 등에서 보듯 너무 보수적이라는 점에 답답해 했다. 특히, JTBC 토론에서인가, 문재인이 너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서, 지난 대선 토론회 때 이정희가 사퇴하고나서 긴장이 풀린 박근혜가 의자에 기대앉아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것이 연상된다면서, 그 꼴을 보고도 문재인을 찍으면 그때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니냐며, 결국 토론을 가장 잘한 심상정에 표를 주기로 한 것이다. 혹시 정권 교체가 되지 않을까 지금 두려워 하고 있다...:)


지난 해부터 올해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참으로 경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전진의 한 단계를 5월9일날 잘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강력하게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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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영국은 지금 저녁이라 내일 아침에 일어나 보면 탄핵 심판 결과가 나와 있을 것 같다. 탄핵 사유도 많고 관련 증거들도 많기 때문에 재판관들이 그 모든 사실 확인에도 불구하고 기각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들 한다. 게다가 국민의 80% 가까이가 꾸준히 탄핵 인용을 요구하고 있으니...

국외에서 바라봤을 때 이번 탄핵 사태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국민의 수가 고정적으로 80%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고영태 녹취 파일 문제도 있었고, 한 재판관의 퇴임 날 전에 선고 기일을 잡느라 일정상 무리한다는 주장이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도 놀라운 규모의 반 탄핵 시위가 연일 벌어졌었기 때문에 탄핵 찬성의 세가 어느 정도는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었다. 아내의 말로는 친박 세력들이 워낙 진상 짓을 해서 사람들이 아주 질려 버렸을 것이란다. 좀 진솔한 척, 좀 죄송한 척, 좀 불쌍한 척을 했었더라면, 탄핵 인용이야 피할 수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살 수는 있었을 텐데 박근혜는 끝까지 바보짓을 하고 만 셈이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과목을 더 철저하게 공부할 기회가 된 것 같다. 

(여기 살고 있는 어떤 분의, 한국 사는 부모님도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그 분이 "집회 가는 건 좋은데 몸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적어도 한국의 노인 세대의 반은 반 탄핵 입장일 줄 알았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60대 이상에서도 탄핵 찬성이 과반 이상이라고 하더라. 20, 30대의 90% 이상의 찬성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희망을 보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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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히 즐겨 듣는 곡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밴드이고 곡이지만 그때는 밴드 멤버들이 이렇게 잘 생겼는지 몰랐다.


저 멤버들 중 키보디스트와 베이시스트가 작년에 타계하였다 한다. 팝음악의 일, 이 세대에 속하는 뮤지션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인가 Yes가 자신들의 명반 Fragile의 전곡 공연을 했었다. 나는 시간과 돈 계산을 하다가 나중을 기약하자고 미뤘었는데 그만 밴드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크리스 스콰이어는 Yes의 상징적인 멤버이어서 이제 더 이상 Yes라는 이름의 밴드 활동은 없을 듯 하다. 올해 Yes의 오리지널 보컬리스트 존 앤더슨과 키보디스트 웨이크맨이 다른 세션과 함께 그들의 이름 머리자를 딴 밴드 명으로 공연을 한다고 하는데 Yes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가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재작년 피터 가브리엘 공연도 놓쳤었는데, 작년에는 스팅과 조인한 미국 공연만 있었다. 올해는 아직 투어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또 작년에 로버트 플랜트가 참여한다고 해서 콘서트 하나를 예약했었다. 그런데 로버트 플랜트가 스테어웨이 투 헤븐 표절 재판 때문에 로스 엔젤레스 법원에 가야 해서 그를 보지 못했었다. 한 시대의 증인들의 일몰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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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씨어터에서 연극 LOVE를 봤다. 아마 초연일 것이다. 소극장 규모의 작은 무대였고 상연시간도 100분 정도로 짧은 편이었다. 내셔널 씨어터가 이런 작은 연극에 플랫폼을 제공해 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셔널 씨어터를 거쳐 상업 무대로 진출하는 연극들도 꽤 있다. 예매를 제 때 못해 놓친 연극이 하나 있었는 데 상업 무대로 가더니 티켓 값이 몇 배로 뛰더라. 나같은 서민이 감당하기엔 벅찬 가격...

LOVE는 식당, 화장실 등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잔잔하게 묘사하는 연극이다. 아침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한 눈치 싸움, 또 이 컵이 내 것이니 네 것이니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 등등 작은 갈등들을 긴장을 극대화하지 않고, 또 상징적 장치들을 난발하지 않고, 다분히 건조한 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눈물을 훔치는데 손가락에 굵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눈물을 훔쳐서, 극이 끝나고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순간에는 나도 아랫 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LOVE라는 제목을 '희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연극의 유일한 상징적 장치는, 삶에 철저하게 실패해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예를 들면 거동도 힘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배불뚝이에, 그저 멍한 남자)이 멋모르고 그 공용 주택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그것은 아이로 돌아가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그들에게 순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대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거기에 하나를 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아이들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센터와 푸드 뱅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부모와 비좁은 공용 주택에서 사는 아이의 미래란, 즉 가능성이란 이미 아이 외재적으로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희망이란, 사랑이란 그 닫혀진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든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 점이 그 공동 주택에 모인 모든 사람들(수단에서 온 여인, 시리아 난민, 화이트 워킹 클라스 실업자 등등)에게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곧 윤리성을 정의하고 정치성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LOVE는 다분히 정치적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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