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지 마, 불결해!"


  미카(히로스에 료코 분)는 남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뜬다. 도대체 이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영문 제목 Departures, 2008)'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첼리스트에서 졸지에 납관사(우리나라의 장례지도사에 해당함)가 된 다이고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아내 미카는 이제 막 남편이 새로 얻은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소리친다.


  자신이 단원으로 있던 교향악단이 해산되자 다이고는 첼로를 팔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새 직업을 찾던 다이고는 여행 가이드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간 사무실에서 엉겁결에 채용된다. 그곳은 장의사들에게 일감을 받아 납관일을 하는 곳이다. 다이고의 새 직장 'NK에이전트'는 어떤 의미에서 여행사가 맞기는 맞다. 사장 이쿠에이(야마자키 츠토무 분)는 '영원으로 향하는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라고 말한다.  


  다이고는 납관사 일을 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배워나간다. 물론 그가 맞부닥치는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기껏해야 시체 닦아주는 천한 일이라는 세간의 편견은 아내를 비롯해 그의 고향 친구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일하러 간 상갓집에서도 다이고와 사장은 때로 대놓고 하대를 받기도 한다. 


  "당신들 말야, 죽은 사람이나 팔아먹고 살면서."


  약속 시간이 5분이나 늦었다는 이유로 상주는 대놓고 성질을 부린다. 일본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잡은 '고독사' 이야기도 나온다. 다이고는 여러 죽음을 접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의 소중한 의미와 보람을 찾아가지만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난다. 과연 다이고는 납관사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굿바이'는 일견 무거워 보이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균형 감각이말로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다이고 역을 맡은 모토키 마사히로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럽고 지나침이 없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첼로는 물론 납관사 일도 열심히 배웠다. 특히 그가 영화 속에서 직접 연주하는 첼로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히사이시 조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그렇게 관객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다이고의 아내 역으로 나온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도 좋다. 사생활로 이런 저런 말이 끊이질 않는 배우이지만, 료코는 카메라만 돌아가면 배역 그 자체가 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히로스에 료코가 나온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기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영화 '비밀(1999)', 드라마 '썸머 스노우(2000)',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2002)'의 눈부신 연기를 기억한다. 사장으로 나온 야마자키 츠토무의 연기는 이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 준다. 이 영화는 시신으로 나오는 단역 배우들까지도 눈길을 끌게 만든다. 결코 움직여서는 안되는 '시신 역할'을 위해서 제작사는 오디션까지 보고 뽑았다. 무려 200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 'おくりびと'는 '보내주는 사람'을 뜻한다. 영화 속의 납관사를 뜻한다. 영어 제목은 'Departures',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을 의미한다. 한글 제목은 좀 뭔가 뜬금없기는 하다. 굿'바이, 안녕이란 뜻 자체 보다는 'Good and Bye'로 산자와 망자 사이의 좋은 이별을 뜻하는 의미로 지은듯 하다. 각각의 다른 언어의 제목들은 결국 죽음이 가리키는 것들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냥 비통해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기 보다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마지막 과정이며 언젠가 우리 모두 마주해야할 미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영어 제목의 '떠남'이란 의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의 새로운 여행일런지도 모른다. 왜 단수가 아닌 복수 형태의 'Departures'가 된 것일까? 그건 영화 속에서 다이고가 마주한 여러 죽음들을 뜻하기도 하고, 모든 죽음의 모습은 각각이 가진 사연과 그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주기에 그리 된 것이리라.


  영화의 마지막에 다이고는 어릴 때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조우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다이고는 자신이 직접 납관 의식을 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망자는 산자의 기억 속에 남는다. '납관사'라는 직업을 통해 죽음의 의미뿐만 아니라, 살아있음의 의미까지 되새겨 보게 만드는 '굿바이'는 꽤 괜찮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의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찬히,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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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EBS '세계의 명화'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을 방영해 주었다. 이 영화에서 주걸륜이 피아노 배틀을 할 때 나왔던 곡들은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매우 인기있는 신청곡이다. 그동안 음악으로만 듣다가, 그걸 영화에서 직접 보았다. 이 영화를 만든 주걸륜은 자신이 주연 배우를 맡아서 피아노도 직접 친다. 아주 잘 친다. 그냥 그 뿐이다.


  이 영화의 만듦새는 나름대로 괜찮다. 로맨스 영화의 일반적 공식을 따라가는 듯하다가 중간 부분부터 확 틀어버린다. 시간대를 비틀어 버림으로써 영화는 긴장감과 활력을 띄게 된다. '비밀(Secret)'이라고 적혀진 마법의 악보가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배우들의 연기, 특히 샤오위 역을 맡은 계륜미의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청순한 매력도 빛난다. 예상륜 역의 주걸륜은 솔직히 복학생이 고등학생 교복입고 연기한다는 느낌이다. 뭔가 어색한 주걸륜의 대사 처리는 영화의 음악이 그럭저럭 메꿔준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대만의 대중가요도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음악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예술 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주걸륜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 보인다. 영화의 촬영 장소도 그의 모교를 택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팬들은 그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그렇다. 과연 이 영화는 '명화()'인가? EBS에서 '세계의 명화'로 방영하는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괜찮은 줄거리, 적당한 감동이 있으면 '명화'의 요건을 갖추는 것인가? 그런 일련의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았다. 만약 다른 공중파 방송에서 '명화 극장'이란 프로그램으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방영했다면 그다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오래전의 EBS '세계의 명화'는 영화를 보는 눈을 열어 준 좋은 안내자였다. 친절하고 유능한 그 안내자를 따라 나는 명화의 세계를 탐험했다. 정말로 많은 명화들을 '세계의 명화'를 통해서 만났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를 영화 교과서에 제목으로만 볼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금지 목록에 올라 있었다. 조악한 화질의 복제 비디오테이프로 떠돌아 다니며, 알음알이로 보던 시절이었다. 그걸 EBS에서 1994년 3월에 방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공중파로 이 영화가 처음 방영된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할 정도로 화제였다. 그러나 '모종의 입김'에 의해 방영은 불발되었다. 좀 시간이 지난 후에 어쨌든 EBS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나는 '전함 포템킨'을 보았다.


  EBS에는 다양하고 깊이있는 세계의 명화들을 소개하는 '세계의 명화'와 함께 일요일 낮에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방영하는 '일요 시네마' 프로그램도 있다. '한국 영화 특선'도 오래된 흑백 한국 영화들을 방영함으로써 한국 영화가 가진 역사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나는 그 세 개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EBS는 나에게 진정한 영화의 보고였던 셈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 EBS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그 빛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방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에 나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 영화들의 목록은 비디오 테이프가 사라져 가던 시절,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그나마 볼만한 테이프들을 골라서 담아놓은 것 같다. 그저 그런 영화들의 나열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좋은 영화를 가려내는 선구안의 부재가 심각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다지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영화이지, 좋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한마디로 '명화'의 범주에 넣기에는 영화적 힘이 상당히 딸린다. 심심할 때 보기 좋은 영화 추천해 달라고 누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명화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영화의 만들어진 시대적 의미와 함께 영화적 성취도 고려해 봐야 한다. 무조건 '예술 영화'를 틀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적 재미와 함께 영화의 내적 완성도가 높은 영화들, 예를 들어 스필버그의 '레이더스' 시리즈를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한다면 나는 충분히 수긍할 것이다.


  지금의 EBS에서 방영하는 '세계의 명화' 라인업은 방영권을 사오는 배급사에서 그냥 떠넘긴 영화 목록들 같다. 한물간 1990년대와 2000년대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의 영화 목록들이다. 그렇다고 다른 유럽이나 제 3세계의 영화들을 열심히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국회방송(NATV)의 '명화 극장'은 더 나은 면모를 보인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크림슨 리버(2000)', 라세 할스트롬의 '개 같은 내 인생(1985)'이 '명화 극장'의 방영 목록에 들어 있다. 진정한 '세계의 명화'를 선정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특정 감독 특집이나, 영화제 수상작들을 선별해서 방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코폴라의 '컨버세이션(Conversation, 1974)'와 데이비드 헤어의 '웨더비(Wetherby, 1985)'를 본 것도 EBS의 '세계의 명화'에서였다. 오로지 영화관, 공중파 방송, 비디오 테이프만이 영화를 보는 방식들이었던 시절에 EBS는 좋은 영화에 목마른 이들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물론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구태여 EBS가 예술 영화 소개의 첨단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EBS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다 알아서 영화를 찾아서 본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라는 아름다운 세상에 처음으로 들어선 이들에게 EBS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명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제작진의 몫이다.


  오늘 아침, 늘 듣던 라디오를 어떻게 하다가 떨어뜨렸다. 켜보니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에서 가전 제품이나 컴퓨터가 작동이 되지 않아요, 란 질문에 올라온 대답의 1위는 '우선 한 번 두드려 보세요'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시도한다. 나도 그렇게 했다. 몇 번을 가볍게,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두들겼다. 전원이 들어온다. 아마 내부 기판의 납땜이 떨어져 버린 것이라면 소용이 없는 방법이겠지만, 운좋게도 라디오는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어디까지나 이 방법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BS의 '세계의 명화'에는 그런 임시방편, 미봉책과 같은 대책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인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프로그램을 아끼고 사랑한 시청자가 남기는 조언이다.



*사진 출처: 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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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크맨(Pac-Man)을 해보았던 때가 생각난다. 가정용 컴퓨터가 처음으로 나왔던 때가 198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는데, 그걸 친구네 집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연초록색 화면에 동글뱅이 녀석이 과일이며 이것저것 먹으며 점수를 쌓는 게임. 동네 오락실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갤러그는 아주 인기가 많은 게임이었다. 그 시절의 오락실 기계들은 아이들의 용돈을 미친듯이 먹어치웠더랬다.


  제임스 스월스키와 리잔 패조의 다큐 '인디 게임(Indie Game: The Movie, 2012)'은 게임 개발자의 일상과 삶에 대해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 이 다큐는 'Braid', 'Fez', 'Super Meat Boy'의 게임이 발매되기까지의 과정을 주로 다룬다. 그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거대 게임 회사가 아닌 독립적인 개발자로 자금난과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히는데, 다큐의 제목 '인디 게임'은 그런 그들이 개발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화계에서도 인디 영화가 있듯, 게임의 세계에서도 인디 개발자들이 있다. 어디서나 자본과 설비가 우세한 거대 기업 보다 개인이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게임 개발자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룬다.


  'Fez'를 만드는 필 피쉬는 4년째 게임 개발에 매달리는 중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동업자가 떠났고, 재정적으로도 파산 직전이며, 개인적으로는 여자친구와도 결별한다. 결국 모든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게임을 발매하고, 게임은 큰 성공을 거둔다. 'Super Meat Boy'의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의 일상은 밤낮이 따로 없다. 모니터 화면에 늘 고정되어 있는 붙박이로, 에드먼드의 아내는 남편의 등만 보고 산다며 푸념을 하기도 한다.


  "난 일상을 잃어버렸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외출을 하지 않아요. 사회활동이랄게 없죠. 가진 돈이 없으니 쓸 돈도 없거든요.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태워줄 차도 없고 식사할 돈도 없어요. 혼자 먹을 밥은 살 수 있겠지만... 내가 희생한 건 인간 관계에요."


  토미는 저녁의 동네 식당에서 혼자 그런 넋두리를 한다. 인디 게임 개발자의 자조적인 독백은 뭔가 짠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다 보면 그렇다. 저것이 과연 인디 게임 개발자만의 고민이고 궁상맞은 삶인가? 예술의 다른 분야에서 창작을 하는 이들은 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글을 쓰는 작가, 영화 만드는 이들, 음악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화가, 각양각색의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의 고민은 거의 엇비슷하다.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가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토미의 독백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는 그에 대해 '징징거리지 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 다큐에서 아주 불편한 부분이다.   


  일상과 인간 관계를 희생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게임으로 현실의 유저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다큐에 나온 인디 개발자들은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는다. 천신만고 끝에 발매된 게임은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토미와 에드먼드는 집도 장만한다. 토미의 '징징거림'은 그야말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게임이 대박을 치면서, 인생도 순풍을 타고 나아간다. '인디 게임'에 나온 개발자들은 현재도 잘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인디 게임'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게임 개발자의 고충과 삶의 단면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다큐는 미시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거대 게임 산업 뒤에 가려진 불합리한 면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인디 게임과 그 유통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서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데도, '스팀(Steam)'은 새로운 판매 방식이라는 그냥 짤막한 말 한마디로 퉁치고 넘어간다.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무수히 많은 창들이라고 본다면, 인디 게임이란 세계를 처음 들여다 보는 관객들을 위한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했다.


  그런 문제점 이외에도 이 다큐는 객관성 면에서도 실패한 지점이 있었다. 다큐에 나온 'Fez'의 개발자 필 피쉬가 동업자와의 결별에 대해 불만과 악감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는데, 막상 그 당사자인 동업자 디그루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다큐의 개봉 초기에는 동업자가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엔딩 크레딧에 올라갔는데, 그걸 보고 격분한 디그루트가 항의하자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나중에 고쳤다. 뭔가 실수라고 보기에는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인디 게임'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게임을 통해 실현하려는 게임 개발자의 인간적 목소리를 잘 담아냈다. 그들은 단순히 큰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것들을 게임의 세계에 펼쳐놓고, 유저들이 그 게임의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이들이다. 창작자로서 그들에게 게임이란 세상을 향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희망인 셈이다.


  "인디 게임을 만든다는 건, 제 안에 있는 약함(vulnerability)을 게임 안에 집어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Braid'의 개발자 조나단 블로우는 다큐의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다. 나는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비단 게임 개발에만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 창작의 과정은 예술가 자신이 가진 내면적 약함과 불완전성에 기대고 있다. 그것을 작품 속에 집어넣고 그 어떤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인내하는 사람. 그 과정에서 '약함'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면, 인디 게임 개발자들이 만드는 게임도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 작품이다. '인디 게임'은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갈아 넣어진'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다큐의 출연자들은 모두 성공했으나, 세상에는 그렇게 노력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음을 우리는 잘 안다.



*사진 출처: gameplanet.co.nz('Super Meat Boy'의 공동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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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을 보게 되었다. 보고 난 느낌은 그렇다. 아, 이 양반은 꽤나 성깔있는 사람이네, 하는 느낌이랄까... 어떤 감독의 영화 한 편을 보고서 그 영화 세계를 헤아려 보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야스조의 첫 작품으로 본 사람들은 아마도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 세계를 탐험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 한편에서 멈출 것인가에 대해서. 빠르고 명확한 이야기 전개, 독창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감독의 타협하지 않는 근성이 느껴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38년이다. 사관학교 학생으로 임관을 앞두고 있는 예비 장교인 지로(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뜻하지 않게 스파이 학교 학생이 된다. 그에게는 홀어머니와 약혼녀 유키코가 있는데,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소식을 끊은 채 스파이 훈련을 받는다.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부여된 임무는 영국군의 암호 코드 북을 입수하는 것. 동료들과 어렵게 코드 북을 입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영국군은 암호 체계를 바꾸어 버린다. 지로는 어디선가 기밀이 누설되었다고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약혼녀 유키코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육군 나카노 학교'는 1937년에 극비리에 설립된 스파이 학교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38년에 처음으로 뽑은 19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2차 대전 이후까지 2500명에 이르는 졸업생들이 나왔다. 그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첨병으로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각종 첩보 임무에서부터 일부 아시아 국가의 정보부 창설에 관여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최전선의 비밀 정예요원이었다.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스파이 학교 설립 초기의 모습을 영화적 가공을 통해 재현해 낸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매우 직설적이고 간결한 대사와 짜임새 있는 연출, 빠른 이야기 전개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러닝 타임 1시간 35분이 그야말로 후딱 지나가 버린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야스조는 스파이 학교나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시선은 애국심과 명예, 의리라는 허울 뿐인 대의명분에 함몰되어가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결국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은 아시아 국가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스파이 학교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설립자 쿠사나기(카토 다이스케 분)가 역설하는 일본이 가진 세계적 책무에 대해 그렇게 반문한다. 여기에서 당시의 일본 지배층과 군부가 가진 시각이 보이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서유럽 제국주의에 맞설 정의로운 전사로 여긴다. 그에 대해 나름의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은 서서히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지면서, 침략전쟁을 돕기 위한 냉혹한 인간 병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들의 모습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화되는 일본 국민들, 식민지 친일 부역자들의 모습과도 기이하게 겹친다.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회고가 아니라, 거기에 희생된 개인의 삶과 인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스파이가 된 지로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우수한 정예 요원을 얻은 것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지로 자신이 고백했듯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시의 일본에서 과거의 세대에게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들면서 크게 흥행했고, 속편까지 잇달아 제작되었다.


  주연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의 연기를 비롯해 쿠사나기 중위 역으로 나온 카토 다이스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이치카와 라이조의 절제된 표정연기와 지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캐릭터 재현은 이 배우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만든다. 명문 가부키 집안에 입양된 배경을 지닌 이 배우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무려 150여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한 명배우였다. 그러나 직장암으로 서른 일곱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 영화는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찍은 영화이다. 가토 다이스케는 일본 영화의 주요 조역으로 나왔는데, '7인의 사무라이(1954)'를 비롯해 온갖 역사물과 현대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이다. 다이스케는 특히 코믹적 면모에 강점을 갖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꽤나 흥미있는 스릴러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성 캐릭터들의 수동성과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선명한 틀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야스조의 영화 세계에 대한 초대장 같기도 하다. 그러한 점들이 그의 다른 작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확대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이들은 탐험을 나설 것이다. 나는 그 탐험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평범한 풍속 영화를 만들었다며 비판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가운데 아직 못본 것이 있다. 차라리 그걸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worldscienma.org (상단 사진: 이치카와 라이조, 하단 사진: 가토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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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시쳇말로 '믿고 보는'과 '믿고 거르는' 그 중간 지점에 있다.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지만, 또 어떤 작품들은 보고 나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아마도 '에이 아이'를 개봉 당시에 '걸렀던' 이유도 그 애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나서 보는 이 영화는 그렇게 참신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능(영어로는 'flair'라고 표현할 수 있는)이 돋보인다. 스필버그적 감성, 또는 각인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원안은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것이지만, 큐브릭은 자신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해서 넘겼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두 감독의 영화 세계가 충돌하는데,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스필버그의 융화력에 의해 그럭저럭 봉합되었음을 본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의 인류. 불치병에 걸려서 냉동 상태인 아들을 둔 모니카와 헨리 부부는 인공지능의 로봇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헤일리 조엘 오스몬트 분)는 그렇게 모니카의 아들이 되지만, 아픈 아들 마틴이 병이 나아 집에 오게 되면서 데이비드의 시련이 시작된다. 마틴의 질투와 그로 인해 생긴 오해들로 인해 데이비드는 모니카에 의해 버림받는다. 마틴의 슈퍼 토이(인공지능 곰인형) 테디와 함께 숲에 버려진 데이비드는 '엄마'라고 믿는 모니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길을 떠난다. 모니카가 읽어준 동화 '피노키오'에 나오는 푸른 요정을 만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이비드. 과연 데이비드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미안하다. 너에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처 알려주지 못했어."


  데이비드의 '엄마'였던 모니카는 그 말과 함께 데이비드를 버린다. 데이비드는 그때부터 세상을 배워나간다. 어떤 면에서 '에이 아이'는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모험담(saga)인 동시에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인공 지능 로봇의 성장은 인간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데이터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데이비드는 애인 대행 로봇 지골로 조(주드 로 분)와 함께 푸른 요정을 찾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근원, 즉 정체성에 대한 지식을 배워간다. 사이버트로닉스 사의 하비 교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자신과 같은 자녀 로봇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전적으로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데이비드의 열망, 즉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의 사랑을 다시 받고 싶다는 그 강렬한 소원에 감정을 이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물론 관객들은 그 열망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데이비드의 슬픔 또한 같이 느낄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스필버그가 던진 매우 윤리적인 질문은 끊임없는 일렁임을 일으킨다. 과연 인간의 목적대로 로봇을 만들고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인간과 로봇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모방한 로봇과 인간은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1년에서 이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에이 아이'는 그러한 철학적 의문에 대한 탐구와 함께 영화적 재미도 보여주려고 열심히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시각 효과적인 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미래 세계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존 윌리엄스가 맡은 음악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에이 아이'의 내러티브는 매우 평면적이며, 무려 2시간 반에 이르는 러닝 타임은 너무 길다. 물론 스필버그의 재능은 그 시간마저도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지만, 데이비드의 여행은 지나치게 늘어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결말도 별다른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데이비드 역을 맡은 아역 배우 헤일리 조엘 오스몬트의 연기는 꽤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감동을 주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어느 한 부분이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오스몬트는 이른 나이에 받은 찬사 때문인지 그 이후 연기자로 성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드 로의 연기는 그다지 언급할 정도도 되지 못한다. 내게는 주드 로가 나왔던 영화 가운데 그나마 연기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클로저(2004)' 정도 뿐이다. '에이 아이'에서의 주드 로를 보고 있노라면, 저 때부터 탈모로 고생했나 보다, 하는 생각만 든달까...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요정 칼립소가 제안한 '영생'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데이비드는 로봇의 영생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가 있는 집으로 갈 수 있기를 꿈꾼다. 오디세우스에게는 긴 세월을 기다려준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엄마 모니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슈퍼 토이 테디가 보관하고 있었던 모니카의 머리카락으로 다시 되살려낸 모니카는 오직 하루만 살아있을 수 있다. 그 하루의 시간은 데이비드에게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의 기억을 되살려내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그 기억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 때, 데이비드는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는 영생을 포기하고 엄마 모니카와의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잠을 선택한다. 이건 마치 드라마 '겨울 연가(2002)'의 주인공 준상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시력을 잃는 것을 택하게 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이야말로 바로 인간됨,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스필버그가 보여준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오디세이아는 가슴 아픈 절절함이 가득하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여럿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의 결말부에 이르고 나면 밋밋한 감동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데이비드가 이천 년의 세월동안 잠겨있었던 물 속에 그대로 남아있고, 스탠리 큐브릭이 구현하고 싶어했던 암울한 미래 세계의 모습 또한 그렇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감독의 세계가 아름답게 조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필버그는 여러 개의 천조각들을 이어 붙인 멋진 조각보를 꿈꾸었겠지만, 내가 본 것은 '각설이 룩'이다. 그에게는 어렵고 난감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에이 아이'는 스필버그의 범작(作)으로 그렇게 남았다.



*사진 출처: theyoungfol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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