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도 그랬다. 엄마는 내가 한자를 쓴다거나수학 문제를 풀 때, 반복한 횟수만큼 동그라미를 공책에 그리게 하곤 그가운데 빗금을 치도록 시켰다.
헤아려보니 빗금 친 동그라미가 50개에서 60개다. 한 곡을 50회에서 60회씩 매일 불며 연습한 것이다.


하루 반짝 글을 잘 쓴다고 장편작가가 되진 않는다. 꾸준히 수준 이상을 매일 써낼 때 비로소 장편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다. 계획도를그리고 목표량을 정한 뒤 매일 채워나가는 일상을 나는 엄마에게서 배웠다. - P53

"어떤 잡음이었어?"
"읽는 인간이 아니라 쓰는 인간이 되자는 잡음. 남의 작품을 평하는 인간이 아니라 내 작품을 쓰는 인간이 되자는 잡음."
"그전에는 그런 잡음을 들은 적 없어?"
"잡음이야 늘 들렸죠. 하지만 예전엔 대부분 무시했어요. 잡음은 그냥잡스러운 소리에 불과하니까요. 그 가을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오래듣고 또 들은 잡음은 달랐어요. 잡스럽게 끊기고 딴 소리가 섞여들수록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비 내리는 바다가 바로 제 앞에 아침 7시 30분부터 펼쳐져 있어서 그랬던가봐요. 요즘도 독자들이 어떻게 소설가가되었느냐고 물으면, 바다가 저를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답해요. 독자들은 문학적인 비유로 받아들이겠지만, 이건 비유가 아니라 완전한 사실입니다. 바다가 저를 소설가로 만들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처럼비 내리는 가을 아침 바다가 저를 유혹한 거죠."
"바다의 유혹에 걸려들어 독자를 유혹하는 작가가 된 셈이네."
"네. 저 바다처럼 독자들을 유혹하고 싶어요." - P67

"소설을 쓰며 단련된 거니?"
"왜요?"
"시를 쓸 때 기억나? 스물여섯 살까지는 내가 아무리 네 두 발을 땅에붙여두려고 해도 훨훨 날아가려고만 들었어. 내 집에서 잠자고 일어나고 먹고 공부했지만, 네 눈동자는 늘 그 너머 어딘가를 향했단다."
"시인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그건 차라리 새 풍경을 찾아 떠도는 여행자의 마음이죠,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과연 치숙이 만든 ‘단추의 공간‘을 몇 개나 확인할 수 있을까. 치숙은 그 공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렸을지도모른다. 그렇지만 소설가인 나는, 힘닿는 데까지 확인하고 싶다. 그런데치숙과 나 사이의 매개는 엄마뿐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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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추는 건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춤추고 싶어서다.

나는 더 춤추고 싶었으나, 신은 내게 "이제 그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만두었다.

나는 삶이고, 삶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신이다.
신은 감정이 깃든 아름다움이다.

바츨라프 니진스키

내가 말했듯이,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 최대 수년간 땅에 발 한 번 딛지 않고 공중에서 잠자며, 같은종을 한 번도 보지 않으면서 홀로 바다 위를 나는 앨버트로스도 결국은 영겁의 서식지, 이들 모두가 태어난 바로 그곳으로 돌아온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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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거운 장롱과 서랍장을 뒤지러 침실로 향한다. 이 두 군데속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장롱 안에는 낡고해진 티셔츠와 하도 많이 빨아서 형태를 잃어버린 바지들이 잔뜩들어 있다. 거의 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집을 떠난 이후로 엄마를 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나에게 익숙한 건 옷에 밴 냄새다. 눈을 감고 옷감을 어루만지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엄마가 내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다. 엄마를 향한 깊은 두려움, 그리고 똑같이 깊은, 엄마를 기쁘게 하려는 결의가 나를 채운다. 별들 사이를 오가는 빛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또 내게서 엄마에게로 흐르는, 너무 절대적이라 숨 막히는 우리의 사랑이. 엄마의 좀먹은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로 적신다. 수년간 기억조차 나지 않던 숱한 추억이 순식간에 생생히 아른거린다. 바가노바 오디션을 봤던날, 스베타 이모가 합격 소식을 발표하자마자 나는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쌩쌩 내리쬐는 햇볕 아래 키 작고 통통한 엄마가 서 있었다. 그날 엄마는 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왠지 흑곰처럼 어두워 보였고, 벌겋고 땀에 젖은 얼굴이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더 - P400

위 아래 한참을 서서 나를 기다렸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소리쳤다. "제가 해냈어요, 엄마를 위해서!" 그런 다음,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간 우리 모녀는 가판대 앞에 서서 스타칸치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군것질을 할 돈이 없었고, 풍미 진하고 농염한 햇빛에 살짝 녹아 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은 내게 기적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내 평생 가장 순수한 행복을 바로 그때 누렸다. 과거와미래를 통틀어서 내 인생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해일처럼 나를 뒤덮으며 숨을 조른다. 어떻게 내가 엄마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입을 채 틀어막기도 전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내 목구멍을 타고 나온다. 나는스웨터를 비틀어 잡고서 엄마를 부르며 흐느끼고, 급히 들어온 스베타 이모가 나를 두 팔로 안아준다.  - P401

내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벅차게 삶은 이어졌다. ‘지젤‘로 데뷔한 후 나는 골절로 인해 파리에서 두 번째 시즌 대부분을 쉬어야 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나를 한 조각씩 제자리로 돌리는 과정은 길고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복귀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내 춤은 이전보다 더 나아졌고, 동시에 더 못해졌다. 전보다 나아진 부분은 명확했다. 나는더 이상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러자 내 존재감은 나만의 것이 되어 더욱 자유로워졌다. 정식 교육이 다듬고 망쳐놓기 전의 어린아이들이 이렇다. 전문 무용수 중에 그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실비 길렘이 그랬고, 남자무용수 중에는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가 떠오른다. 이런 태도를허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극도의 예술적 진정성이라고 볼 수도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런 자질은무용수에게 독특하고 대체 불가능한 특수성을 부여한다. 내가 무대에 복귀한 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월을 보내면서 얻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 P405

그러나 내 춤 실력은 예전 같지 않기도 했다. 거기에는 자유로운존재감 따위의 신비와는 거리가 먼 아주 간단하고 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끊어진 백금 반지를 다시 용접해 놓은 듯, 금이 갔던 내뼈도 겉으로는 멀쩡히 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약해져 있었다. 내 점프는 이제 믿기지 않게 가볍지도, 경이롭지도 않았다. 테크닉 면에서 나를 돋보이게 했던 폭발적인기교도 이미 잿빛으로 바래버린 뒤였다.  - P405

여기서 잠시 명품 쇼핑에 별 관심 없이 살았던 그간의 세월을 후회했다. 내가 입은 샤넬 드레스는 발레단 의상 협찬과 함께 받은 선물이었다. 처음 파리에 왔던 그 주에 녹색 핸드백을 산 다음부터는아름다운 물건으로 나를 입증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에는 사물이 나를 받치는 발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별것 아닌 머그잔이나 소파 같은 물건이 때로는 인간의마음보다 훨씬 굳건하고 의리 있고 믿음직스럽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칼라스처럼 내 상처를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감추고 대중 앞에 나섰을 텐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에게 계약 해지를당했던 그날 밤, 칼라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보석을 한꺼번에 휘감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값비싼 보석이라고는 달랑약혼반지 하나뿐이었다. 나는 몇 분 동안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끼고 가기로 했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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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에서 난 어떤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최고의 발리나들이 이 장면을 춤추는 영상을 빠짐없이 공부했다. 실비 길햄은 누구보다도 더 높이 다리를 든 아름다운 아티튀드 데리에르자세로 여덟 카운트 동안 회전했다. 그런 다음 앙 푸앵트 부레로 전환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프랑스 전형이자 파리 오페라 특유의무척 차분하고 세련된 느낌이 연출되었지만, 민감하고 투명하며 순수한 소녀 유령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홉 카운트 또는 열 카운트 동안 회전한 뒤 드미 푸앵트 셰네로 빠져나오는 무용수들도 있었다. 위험 부담도, 광적인 효과도 훨씬 덜한 전환이었다. 나는 아티튀드 데리에르에서 열두 카운트 동안 회전하고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바로 풀 푸앵트 셰네로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달빛 아래서 마법에 걸린 채 무아경에 빠져 정신없이 발을 놀리는정령의 모습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내 도전은 브라뷰라 그 자체였는데, 여태 이 배역은 브라뷰라보다 서정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건 지금껏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테크닉의 극치였다.
마음속엔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서고 싶다는 익숙하고 - P317

도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공연 엿새 전까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전할 때의 어지러움, 발의 통증까지 모든 것이 나를화나게 했다. 한 시간 동안 홀로 힘겹게 연습한 끝에 나는 지쳐서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피곤하고 지친 얼굴을 한 사샤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지난밤그가 파티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자고 있었고, 내가 아침 일찍집을 나설 땐 그가 아직 자고 있었다.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지도, 웜업팬츠를 고쳐 입지도, 스테레오로 걸어가지도 않고 그는 곧장내게 와서 옆에 앉았다.
"나 이거 못 할 것 같아." 나는 팔뚝으로 두 눈을 덮으며 사샤에게 말했다. "내 마음대로 춤이 안 춰져. 이런 적은 처음이야. 필요한걸 다 갖게 되자마자 늘 가지고 있었던 하나를 잃어버렸어." - P318

"너 결혼했다고 얘기했지? 그래도 그래?"
"당연히 했지. 상관없대. 내가 받아야 하는 사랑을 안드류샤는준대 안드류샤에게 난 인생의 여러 요소 중 하나지만, 그에겐내가 전부래. 그는 내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너를 사랑하는 것 외에 인생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비꼬지 말라고 나무라는 듯 니나가 나를 어두운 눈초리로 쏘아본다. 그 표정이 니나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남자에게 더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내 니나가 찡그리던 눈썹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쉰다.
"정답이 ‘아니오‘라는 건 알겠어. 근데 왜 안 되는지도 모르겠단말이야."
"정답은 없지.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괜찮아." 내가 니나에게 몸을 기내자, 우리 몸무게를 떠받친 소파에서 끼익 소리가 난다. ‘내가 선택하고, 느낄 수 있는 걸 느끼고, 네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사랑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돼. 그게 인생의 전부니까." - P321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복귀 날짜를 정하지 않은 채 춤을 완전히 중단했다. 무용수들이며 스태프, 로랑, 물론 사샤까지 모두가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이런 벽에 부딪히게 될 날을 평생 두려위하며 살았는데, 막상 부딪히자 나도 모르게 은밀한 안도감이었다. 주당 40시간씩, 1년에 50주 동안 춤추는 대신 드디어 나에게도 휴식이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육체적으로만 지진 상태가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지젤>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여태 나는 내 인간성을 예술에 쏟아붓는 일에 익숙했다. 그래야만예술이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은 나 자신을 갈가리 찢어서 춤에 녹여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는 걸 몰랐다. 진정한 예술이라면 그예술이 내 안에 들어와 영원히 내 일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지젤>을 통해 내 안에 새로이 자리한 이 부분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그저 나타샤로서 인식할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었다.  - P323

"여기서 내가 아는 언어를 찾으면 좋더라. 꼭 누가 나한테 그 말을 건네는 것 같아서." 나와 눈을 맞추며 레옹이 말했다. ‘아버지한테저 말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내가 아버지에게 말해본 적도 없고"
"나도." 나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니콜라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 여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 자신 밖에 있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되씹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삶을 살았고, 그중 극소수가 자신의 삶을 직접 창조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세계‘를 창조했다.
"사실, 남자가 여자를 속이려고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오해야. 대다수의 사람은 그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거짓말을 하진 못하거든." 나는 말을 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하는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그만큼 고통스럽지. 사랑을 참으면, 정말 못 빠져나가게 한다면 마음이 산산조각 날 테니까." - P365

먼저 손가락을 하나 까딱 움직여 본다. 그런 다음, 눈꺼풀이 들리는지 시험해 본다. 하나하나 몸이 말을 듣는 걸 확인하고 게걸음으로 엉금엉금 욕실에 기어 들어간다.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물이 다시 한번 작은 기적을 일으킨다. 전보다 힘이 생긴 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로션을 바르고, 깨끗한 레오타드와 웜업 운동복을 입은 뒤 아침을 조금 먹고서 극장으로 향한다. 무용수들은 공과 사,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배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심하게 야단치며 평소처럼 틀리지 말고 완벽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드레스 리허설 도중 넘어졌는데 곧바로 공연 무대에 올라야할 때, 끔찍하게 싫은 파트너와 춤춰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신경이약한 사람, 춤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보다 춤을 우선시했다. 춤이 없으면 내 인생의 어느 감정도 의미 없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여태그렇게 믿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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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몇 시즌 동안 내게 위안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는 흔들림없이 나를 지지해 준 사샤였다. 발레단 클래스에 들어갈 때면 사샤는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는 동시에 나를 공격하면 가만 있지않겠다는 표시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들 사샤를 좋아했고 포용했기에 나를 향한 비웃음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사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사샤는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까지 대가를 치르게 될 일을단행했다. 바로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와 절교하는 일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 춤에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성함이 있다고, 남은 평생 오로지 나하고만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 P286

사샤 덕분에 나는 분노도 절망도 내려놓고 냉철한 거리를 두며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를 냉소주의라고 말하긴 무엇하지만, 어든 나는 계산적으로 변했다. 더는 이상주의적이거나 순진하지않았다. 예전에 나는 내 할 일이 예술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용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술 너머의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노력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면에서 기민하고 조심스럽고 자기보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 발레를 할때도 그렇게 변했다. 나 스스로는 이런 변화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으나, 감독이나 평론가들은 내가 몸과 영혼을, 내 전부를 온전히바칠 때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춤을 췄다. - P287

그들은 내가 자신감 없이 온순하게, 여리고 순정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약간 우울하게 춤추기를 바랐고, 그런 연기를 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샤는 아무리오만하게 굴어도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백이 넘치고 카•리스마 있다고 호평받았다. 그러나 나는 철분 부족인 양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만 야망으로 가득 찼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를 나는 점점 더 완벽하게 구현하여, 결국 러시아의 혼을 보여주는 새로운 갈리나 울라노바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내 점프는 천사의 날아오름에 비유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나만큼 가뿐하게, 높이 점프하는 발레리나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리스인의 발은 내 춤이 숭고한 이유이자 비극적 결점을 극복하고 얻어낸 고결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매 시즌 새로운 주역으로 데뷔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호두까기인형>의 ‘마리‘, <레이몬다>의 ‘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 역까지. 라이벌 극단들에게 돌진해서 처부수는 옛 볼쇼이의 거대한 군마들, <스파르타쿠스>의 ‘에이기나‘와 <파리의 불꽃>의 ‘잔느‘도 내차지였다. 소비에트 발레의 노골적인 애국주의에 감동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들의 열광적인 분위기만큼은 좋았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작품처럼 유유한 고명함이 아니라 고된 희생을 나타내야 했는데, 그런 면이 무대 위 내 현실과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공연이 있는 밤이면 관객의 환호가 전장의 함성처럼 메아리쳤다. - P288

사랑은 고집스러운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지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한번 싫다면 싫은 거야 (......)

사랑은 집시 어린아이
법이라고는 알지도 지키지도 않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널 사랑하겠어
내가 널 사랑하면, 조심해야 할걸!

앙리 메이야크, 뤼도비크 알레비, <카르멘>

1961년 파리, 누레예프가 망명한 후 처음 공연한 날, 관객들은 수천프랑을 꽁꽁 묶은 돈다발부터 방금 벗은 속옷, 코카인이 담긴 작은 봉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헌사를 무대에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쌓이고 쌓이고 쌓인 꽃다발은 매일 밤, 무대 위에 향긋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정확히 50년 후, 사샤와 내가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히 여느 때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리라 예상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만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이었다. 늘 일만 하며 살았고, 퇴근하면 나는 포인트 슈즈를 꿰매고, 스트레칭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세관과 도착 터미널을 가르는 유리문 너머로 꽃다발과 포인트 슈즈를 들고서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수백 명의 인파, 그리고 목에 언론사 배지를 두른 사진 기자들을 마 - P297

주했을 때 나는 어떤 유명인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경계선을 통과한 순간, 열광하는 그들의함성이 폭포수처럼 내 귀를 채웠다. 나탈리-아! 나탈리아! 사샤! 이것이 무언가의 시작이자 다른 무언가의 끝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예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맞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계약 조건의 일환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마레 지구의 2층 아파트를 제공했다. 19세기에 지어진 상아색 고급 주택은 버터크림 아이싱처럼 단단하지만 사분사분 가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예쁜 문을 열고 들어가 층계를 오르면 우리 아파트였다. 내부에는 벽난로가 침실과 거실에 하나씩 있었다. 사샤가 짐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두 벽난로 선반에 우리 사진을 진열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무척 감동했다. 거실과 연결된넉넉한 테라스는 담쟁이덩굴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너무 매혹적인 정경이었던지라 분명 에펠탑이 보일 것이라 믿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그렇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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