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몇 시즌 동안 내게 위안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는 흔들림없이 나를 지지해 준 사샤였다. 발레단 클래스에 들어갈 때면 사샤는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는 동시에 나를 공격하면 가만 있지않겠다는 표시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들 사샤를 좋아했고 포용했기에 나를 향한 비웃음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사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사샤는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까지 대가를 치르게 될 일을단행했다. 바로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와 절교하는 일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 춤에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성함이 있다고, 남은 평생 오로지 나하고만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 P286
사샤 덕분에 나는 분노도 절망도 내려놓고 냉철한 거리를 두며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를 냉소주의라고 말하긴 무엇하지만, 어든 나는 계산적으로 변했다. 더는 이상주의적이거나 순진하지않았다. 예전에 나는 내 할 일이 예술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용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술 너머의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노력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면에서 기민하고 조심스럽고 자기보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 발레를 할때도 그렇게 변했다. 나 스스로는 이런 변화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으나, 감독이나 평론가들은 내가 몸과 영혼을, 내 전부를 온전히바칠 때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춤을 췄다. - P287
그들은 내가 자신감 없이 온순하게, 여리고 순정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약간 우울하게 춤추기를 바랐고, 그런 연기를 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샤는 아무리오만하게 굴어도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백이 넘치고 카•리스마 있다고 호평받았다. 그러나 나는 철분 부족인 양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만 야망으로 가득 찼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를 나는 점점 더 완벽하게 구현하여, 결국 러시아의 혼을 보여주는 새로운 갈리나 울라노바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내 점프는 천사의 날아오름에 비유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나만큼 가뿐하게, 높이 점프하는 발레리나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리스인의 발은 내 춤이 숭고한 이유이자 비극적 결점을 극복하고 얻어낸 고결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매 시즌 새로운 주역으로 데뷔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호두까기인형>의 ‘마리‘, <레이몬다>의 ‘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 역까지. 라이벌 극단들에게 돌진해서 처부수는 옛 볼쇼이의 거대한 군마들, <스파르타쿠스>의 ‘에이기나‘와 <파리의 불꽃>의 ‘잔느‘도 내차지였다. 소비에트 발레의 노골적인 애국주의에 감동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들의 열광적인 분위기만큼은 좋았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작품처럼 유유한 고명함이 아니라 고된 희생을 나타내야 했는데, 그런 면이 무대 위 내 현실과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공연이 있는 밤이면 관객의 환호가 전장의 함성처럼 메아리쳤다. - P288
사랑은 고집스러운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지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한번 싫다면 싫은 거야 (......)
사랑은 집시 어린아이 법이라고는 알지도 지키지도 않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널 사랑하겠어 내가 널 사랑하면, 조심해야 할걸!
앙리 메이야크, 뤼도비크 알레비, <카르멘>
1961년 파리, 누레예프가 망명한 후 처음 공연한 날, 관객들은 수천프랑을 꽁꽁 묶은 돈다발부터 방금 벗은 속옷, 코카인이 담긴 작은 봉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헌사를 무대에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쌓이고 쌓이고 쌓인 꽃다발은 매일 밤, 무대 위에 향긋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정확히 50년 후, 사샤와 내가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히 여느 때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리라 예상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만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이었다. 늘 일만 하며 살았고, 퇴근하면 나는 포인트 슈즈를 꿰매고, 스트레칭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세관과 도착 터미널을 가르는 유리문 너머로 꽃다발과 포인트 슈즈를 들고서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수백 명의 인파, 그리고 목에 언론사 배지를 두른 사진 기자들을 마 - P297
주했을 때 나는 어떤 유명인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경계선을 통과한 순간, 열광하는 그들의함성이 폭포수처럼 내 귀를 채웠다. 나탈리-아! 나탈리아! 사샤! 이것이 무언가의 시작이자 다른 무언가의 끝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예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맞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계약 조건의 일환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마레 지구의 2층 아파트를 제공했다. 19세기에 지어진 상아색 고급 주택은 버터크림 아이싱처럼 단단하지만 사분사분 가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예쁜 문을 열고 들어가 층계를 오르면 우리 아파트였다. 내부에는 벽난로가 침실과 거실에 하나씩 있었다. 사샤가 짐을 풀자마자 제일 먼저 두 벽난로 선반에 우리 사진을 진열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무척 감동했다. 거실과 연결된넉넉한 테라스는 담쟁이덩굴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너무 매혹적인 정경이었던지라 분명 에펠탑이 보일 것이라 믿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그렇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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