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서 이모는 조만간 다시 와서 수다도 떨고 의상도 입어보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모가 나가자마자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따귀를 때렸다. 딱 한 대. 내 버릇을 고쳐주기 위한 체벌이라는 걸 알게 하려는,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려는한 때였다. 얼마 뒤,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며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날 사랑해서 때린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을, 삐걱거리는 침대의 따뜻함을, 피곤함을 이기고 호수 물에 담기는 노처럼쉼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을 믿었다. 눈 뜬채 잠드는 날도 있을 만큼 바쁘고 피로한 일상에 절어 있으면서도엄마는 몇 시간이고 내 머리칼을 만져주었고, 그러면 나는 엄마가그 손으로 나를 때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용서. 그것이 내가 아는사랑이었다. 그러나 그게 행복은 아니었다. - P36
다행히 엄마는 광장에서 눈물을 터뜨리지 않았다. 정직하고 자비롭게 대답해 줘 고맙다고 파벨에게 꼿꼿이 인사했다. 파벨도 뜻밖의 선심을 베풀었고, 수년 전 처음 만나 겨우 며칠 본게 전부인 엄마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아내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분장사로 일하는 지인을 알고 있었고, 그 연줄로 엄마에게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재봉사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불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누가 곁에남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면 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상상 대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내가 꾸었던 꿈은 니콜라이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신문과 사진에서만 내 얼굴을 볼 수 있을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 P40
니나를 만나기 전까지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늘 혼자였다. 친구를 사귀기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어딘가 다르다는 걸 다른 여자애들이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그 아이들은 새끼 양 같았다. 나긋나긋하고 예쁘고 명랑했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만족했으며, 무리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런 사랑스러운 자질이 없었다. 나는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쾌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게 똑똑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도 나는 진지하고 우울했다. 타고난 강박을 쏟아부을 대상을 아직 찾지 못해 늘 초조해하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그 덕을 보긴 했지만, 초등학생 땐 그런 성격이 친구를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난 점심을 혼자 먹지 않으려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조명을 조절하듯 내 눈의 조도를 낮추었고, 아이들이 농담을 하면 그냥 웃었다. 때로는 잔불처럼, 때로는 마그마처럼 내 안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를그렇게 꼭꼭 숨기고 지냈다. - P47
그 순간 나는 레즈니코프 부부가 세료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를 알아챘다. 세료자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그리고 재능만 있으면 아버지가 우체부는 어머니가 실팍한 몸집에유행에 뒤떨어지는 차림을 하든, 부자들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부자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가 뭘 먹고 마시긴 했는지신경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내 가슴에 큰불을 지핀 건 바로 빙글빙글 회전할 때 세료자의 얼굴에 비친 표정이었다. 그를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내 내면의 화염은 세료자의 재능 같은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 불꽃은 한낱 욕망이었다. - P54
"엄마, 나 할 수 있어. ‘오데트‘‘도 출 수 있고, 난 다 할 수 있어." 나는 조용히 말했지만,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 나타슈카 프리마 발레리나는 10년에한 번 태어난단다." 그 말이 주는 쓴맛을 중화하려는 듯 엄마는 찻잔에 잼을 한 숟가락 더 넣고 휘휘 저었다. 씁쓸한 건 엄마의 말뿐이 아니었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시선이 쓰디썼다. 그날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같은 학교 아이들, 선생님들, 심지어 엄마까지도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주의 광활하고 검은 공허처럼 무한하고 중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는고양이, 빗, 주전자처럼 아주 하찮고 평범한 존재였고, 그런 내가 다른 것이 되려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 P55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머리와 가슴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 P77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미 경험한 일 같은 건 없네." 내가 캐머마일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모든 게 새로우니까. 그냥 순간순간 다가오는 대로 살아가야 할 뿐이지." 소피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굳이 마음을 다잡기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 없어. 넌 그냥 타고난 대로 하면 돼. 언제나 뛰어나잖아. 항상 다른 사람의 기대, 아니 스스로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몰라." 인생의 아이러니. 소피야는 이상적인 몸을 타고난 데다가 전직무용수의 딸이었다. 소피야의 어머니는 코르 드 발레까지밖에 못갔다고 하더라도 볼쇼이 발레학교에서는 손꼽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소피야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소피야에게 주어진 조건에 그가 부응해 주길 기대했다. 반면 나는 늘 모든이에게 과소평가되었고,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 결과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너무도잦아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내 확신은 오히려 한층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서 빙긋 미소 짓게 되었다. 우리 친구 무리 외에는 특별히 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 P97
수업 시작 전에 해변에 다녀오자고 내가 제안했지만, 니나는 싫다고 했다. 결국 니나는 방에서 낮잠을 자며 쉬기로 했고, 세료자와나만 나가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강한 햇빛이었다. 태양은 울창한 수림이 드리운 그늘 밖의 모든 곳과 우리 발밑의 돌길을 하얗게 표백했다. 남쪽 나라의 눈부심에 익숙해지고 나자, 바르나가 피터보다 수천 년이나 더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에 탄복했다. 이 도시의 담장, 길, 성당 모두 고대에 지어진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창턱에서 벽을 타고 흐드러진 붉은 꽃처럼 여유 있었다. 바르나에서는 돌, 종소리, 시간의 무게처럼 무거운 것들은 더 무겁게느껴졌고 나무 그늘, 장미 향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발처럼 가벼운 것들은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니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했다.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지니, 내 세상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예감을 받았다. - P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