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서 이모는 조만간 다시 와서 수다도 떨고 의상도 입어보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모가 나가자마자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따귀를 때렸다. 딱 한 대. 내 버릇을 고쳐주기 위한 체벌이라는 걸 알게 하려는,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려는한 때였다. 얼마 뒤,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며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날 사랑해서 때린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을, 삐걱거리는 침대의 따뜻함을, 피곤함을 이기고 호수 물에 담기는 노처럼쉼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을 믿었다. 눈 뜬채 잠드는 날도 있을 만큼 바쁘고 피로한 일상에 절어 있으면서도엄마는 몇 시간이고 내 머리칼을 만져주었고, 그러면 나는 엄마가그 손으로 나를 때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용서. 그것이 내가 아는사랑이었다. 그러나 그게 행복은 아니었다. - P36

다행히 엄마는 광장에서 눈물을 터뜨리지 않았다. 정직하고 자비롭게 대답해 줘 고맙다고 파벨에게 꼿꼿이 인사했다. 파벨도 뜻밖의 선심을 베풀었고, 수년 전 처음 만나 겨우 며칠 본게 전부인 엄마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아내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분장사로 일하는 지인을 알고 있었고, 그 연줄로 엄마에게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재봉사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불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누가 곁에남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면 나는 다른 여자애들처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상상 대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내가 꾸었던 꿈은 니콜라이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신문과 사진에서만 내 얼굴을 볼 수 있을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 P40

니나를 만나기 전까지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늘 혼자였다. 친구를 사귀기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어딘가 다르다는 걸 다른 여자애들이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그 아이들은 새끼 양 같았다. 나긋나긋하고 예쁘고 명랑했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만족했으며, 무리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런 사랑스러운 자질이 없었다. 나는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쾌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게 똑똑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도 나는 진지하고 우울했다. 타고난 강박을 쏟아부을 대상을 아직 찾지 못해 늘 초조해하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그 덕을 보긴 했지만, 초등학생 땐 그런 성격이 친구를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난 점심을 혼자 먹지 않으려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조명을 조절하듯 내 눈의 조도를 낮추었고, 아이들이 농담을 하면 그냥 웃었다. 때로는 잔불처럼, 때로는 마그마처럼 내 안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를그렇게 꼭꼭 숨기고 지냈다. - P47

그 순간 나는 레즈니코프 부부가 세료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를 알아챘다. 세료자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그리고 재능만 있으면 아버지가 우체부는 어머니가 실팍한 몸집에유행에 뒤떨어지는 차림을 하든, 부자들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부자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가 뭘 먹고 마시긴 했는지신경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내 가슴에 큰불을 지핀 건 바로 빙글빙글 회전할 때 세료자의 얼굴에 비친 표정이었다. 그를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내 내면의 화염은 세료자의 재능 같은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내 불꽃은 한낱 욕망이었다. - P54

"엄마, 나 할 수 있어. ‘오데트‘‘도 출 수 있고, 난 다 할 수 있어."
나는 조용히 말했지만,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 나타슈카 프리마 발레리나는 10년에한 번 태어난단다." 그 말이 주는 쓴맛을 중화하려는 듯 엄마는 찻잔에 잼을 한 숟가락 더 넣고 휘휘 저었다. 씁쓸한 건 엄마의 말뿐이 아니었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시선이 쓰디썼다.
그날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같은 학교 아이들, 선생님들, 심지어 엄마까지도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주의 광활하고 검은 공허처럼 무한하고 중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는고양이, 빗, 주전자처럼 아주 하찮고 평범한 존재였고, 그런 내가 다른 것이 되려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 P55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머리와 가슴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 P77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미 경험한 일 같은 건 없네." 내가 캐머마일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모든 게 새로우니까. 그냥 순간순간 다가오는 대로 살아가야 할 뿐이지."
소피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굳이 마음을 다잡기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 없어. 넌 그냥 타고난 대로 하면 돼. 언제나 뛰어나잖아. 항상 다른 사람의 기대,
아니 스스로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몰라."
인생의 아이러니. 소피야는 이상적인 몸을 타고난 데다가 전직무용수의 딸이었다. 소피야의 어머니는 코르 드 발레까지밖에 못갔다고 하더라도 볼쇼이 발레학교에서는 손꼽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소피야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소피야에게 주어진 조건에 그가 부응해 주길 기대했다. 반면 나는 늘 모든이에게 과소평가되었고,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 결과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너무도잦아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내 확신은 오히려 한층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서 빙긋 미소 짓게 되었다. 우리 친구 무리 외에는 특별히 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 P97

수업 시작 전에 해변에 다녀오자고 내가 제안했지만, 니나는 싫다고 했다. 결국 니나는 방에서 낮잠을 자며 쉬기로 했고, 세료자와나만 나가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강한 햇빛이었다. 태양은 울창한 수림이 드리운 그늘 밖의 모든 곳과 우리 발밑의 돌길을 하얗게 표백했다. 남쪽 나라의 눈부심에 익숙해지고 나자, 바르나가 피터보다 수천 년이나 더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에 탄복했다. 이 도시의 담장, 길, 성당 모두 고대에 지어진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창턱에서 벽을 타고 흐드러진 붉은 꽃처럼 여유 있었다. 바르나에서는 돌, 종소리, 시간의 무게처럼 무거운 것들은 더 무겁게느껴졌고 나무 그늘, 장미 향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발처럼 가벼운 것들은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니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했다.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지니, 내 세상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예감을 받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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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JUHEA KIM「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2016년 문예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을 비롯해 수필과 비평 등을 <인디펜던트>를 포함한여러 매체에 기고했고,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인호의 단편소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1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을 펴냈다.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이 소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202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첫 소설에서 자신의 ‘뿌리(모국)‘를 다루었던 작가의 다음 주제는 ‘예술‘로 향한다. 2024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를 배경으로 천재적인 발레리나의 사랑과 욕망, 구원을 그린다. 출간 즉시 리즈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었고, <보그> <하퍼스 바자》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올랐다.
2025년에는 단편집 『세상끝의 사랑 이야기A Love Storyfrom the End of the World』를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20여년간 비건, 동물보호, 친환경 운동을 이끌어온 작가는 현재 비영리 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야생 호랑이와 표범의 한반도 복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악랄하게 조롱하라.
나는 너의 불면증이었고,
너의 슬픔이었으니.

안나 아흐마토바, <작은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그 불이 나를 둘러싼 듯하였네.
그리고 나는, 그 눈동자의 색깔을
끝내 보지 못했다네.
모든 것이 떨며 노래하고 있었지.
그대는 내 친구였나, 적이었나?
그때는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안나 아흐마토바, <파편>

보드카를 따른다. 그 맛은 한밤중에 옛 도시로 날아갈 때 느끼는 묘한 간절함과 같다.
동그스름한 비행기 창문 너머의 구름 사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불빛이 찬란히 어른거린다. 그렇지. 백야의 계절이다. 은색 상공에서 점점 낮아져 밤하늘보다 더 밤하늘 같은 육지로 향하다 어느 순간, 별밭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후, 천천히 다시 뜬다. 이 도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곳이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얼굴처럼.
옛사랑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치자. 공원에서, 아니면 공연장의 오케스트라석과 파테르석 사이 계단참에서 인터미션이 끝나 - P13

기 전에 서둘러 사 온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옛 연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이목구비는 달라졌는데, 변치 않은 표정 때문에 그를 알아본다. 순간, 그사람일 리 없다는 의구심이 손바닥에 가시처럼 박히지만, 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내 받아들인다. 그를 훑어보는 동시에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어떨지 곱씹는다. 화장은 잘되었는지, 머리는 잘 만져졌는지, 옷을 입고 나오기 직전에 생각나서 굵은 알반지와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참 다행이다. 눈을 맞출까,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갈까, 미소를 지을까,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사이 닳은 대리석 계단 위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인터미션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샴페인의 김이 빠지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에 다 끝나버렸다. - P14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10시 45분. 신발이 가득 담긴 가방을 챙겨 들고 마린스키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 차에 탈 때 시선이 간 하늘은 우윳빛 구름을 짙게 드리워,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주알 안에 있는 듯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이제 막 구름을 뚫은 한줄기 햇살이 피스타치오색의 웅장한 극장을 환하게 비춘다. 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져서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근육에 각인된 기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알고 싶다. 과연 내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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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소설가 이야기 수집가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신화전설 민담 소설을 즐겼다. 고향 진해로 돌아가 장편작가가 되었다. 해가 뜨면 파주와 목동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해가 지면 이야기를 모아 음미하며 살고 있다.
장편소설 『거짓말이다」 「목격자들」 「조선누아르」 「혁명」 「뱅크」「밀림무정」 「조선마술사」 「아편전쟁」, 산문집 『아비 그리울 때보라」 읽어가겠다」 「독서열전」 「원고지」 「천년습작 등을 썼다.
영화 <조선명탐정>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천둥소리>의 원작자이다. 문화잡지 1/n을 창간하여 주간을맡았고, 콘텐트기획사 ‘원탁‘의 대표 작가이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살에도, 마흔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뒤에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 P8

기다린다는 말이 견딘다는 뜻임을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단편에서도 썼듯이, 그해 나는 창원시 웅남국민학교에서 마산시 봉덕국민학교로 전학을 했고 폐결핵에 걸렸다. 다행히 전염성은 아니라서 휴학하진 않았지만, 체육 시간엔 언제나 혼자 남아 빈 교실을 지켜야 했고, 달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느릿느릿 걸으며 병이 완쾌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렸다. 그때 나는 견뎌야 했다. 친구들처럼 운동장을 맘껏 달리고 싶은바람을 꾹꾹 눌러야 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친구들을 피해 미리 뒤뜰로 나가 걸었다. 나무와 벤치 사이를 서성거렸다. 기다린다는 것은 견딘다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견딘다는 뜻임을 그때 또 깨달았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내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완쾌 판정을 내렸다. 더이상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달리기를 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집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도 열두 정거장이넘는 먼 길이지만, 그날은 달리고 또 달려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을 구부리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작은 울음이 뒤통수에 닿았다. 돌아보니, 엄마가 오른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견디며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그런 나를 ‘혼자‘ 바라보며 견디고 기다렸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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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벌을 바깥에 버리고 창문을 닫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은 카헐은 아래층 화장실에서 소변을 한참 눴다. 변기뚜껑을 올릴 필요가 없어서, 다시 내리고 손을 씻거나 씻은척할 필요가 없어서 살짝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기쁨은금방 사라졌고, 그는 계단을 겨우겨우 올라갔다.
카헐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어느새 난간을 붙잡고 있었고, 뻣뻣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올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샴페인 탓이 아님을 알았지만 어느새 샴페인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서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를 벗고 누웠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으니 옷장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 예복 셔츠의 흰 소매가, 뜯지도 않고현관 탁자에 쌓아둔 축하카드 더미가, 사빈이 그에게 굳이 - P48

보여주었던 웨딩드레스가, 그가 결코 갖지 못할 아들들이, 반품할 수 없었던 탓에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상자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환불 불가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또다시 아주 또렷하게, 그렇게 뒤늦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너무 늦은 시간  - P49

저 앞에 작은 만灣이 있고 흰 절벽 아래에 깊고 깨끗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양 떼가 다니는 길을 따라서 만을 향해 걸어갔지만 길이 곧 사라졌고 가파르고 무서운 내리막이 나왔다. 그녀가 선 자리에서 전부 다 보였다.
완벽한 깊이의 웅덩이, 바위, 수면 아래 뒤얽힌 거무스름한해초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만 반대편으로 가서이탄지에서 흘러나오는 갈색 시냇물로 이어지는 다른 길을 찾아냈다. 평평한 갈색 돌을 조심조심 디디며 미끄러운길을 따라가자 하얀 햇살이 내리쬐는 만이 나왔다.
높은 파도에 쓰레기가 밀려들어 왔지만 그녀의 주변은 온통 표백된 돌들이 층층이 쌓여 반짝거렸다. 이렇게 예쁜 돌은 본 적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델프트 도자기처럼 덜걱거렸다. 그녀는 이 돌들이 얼마 동안 여기 있었을까, 어떤 종류일까 궁금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녀가 그러는 것처럼 이 돌들도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 아무도 보이지 않자 옷을 벗고 물가의 거칠고 축축한 돌에 어색하게 발을 내디뎠다. 물은 상 - P60

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곳까지 걸어가니 미끈거리는 해초가 허벅지에 닿아서 오싹했다. 물이 갈비뼈까지 올라오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뒤로 누워서 멀리 헤엄쳐 갔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느새 진정으로 믿지 않는무언가를 향해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제 웅덩이가 넓어져서 바다와 이어지는 곳에 다다랐다. 그녀는 이렇게 깊은 물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더 멀리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한동안 둥둥떠다니다가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와서 따뜻한 돌 위에 누웠다. 그때 저 높이 절벽 위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살갗이 마를 때까지 누워 있다가 얼른 옷을 입고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자동차로 돌아왔다. - P61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그녀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였다. - P78

뵐의 서재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또 하루가 거의 지나갔지만 그녀는 어느새 책상 앞에서 그 유명한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바깥에 넓은 바다와 높은 산, 벌거벗은 언덕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 조각들을 보고 거기 적힌 메모를 읽은 뒤 한쪽으로 치웠다. 만년필 뚜껑이 빡빡했지만 결국 열고서 공책을 펼쳤다. 크림색 종이 - P78

를 실로 엮어 만든 새 공책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만년필촉을 대고서야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애킬섬‘이라고 쓰고 날짜를 적었다. 그런 다음 잠시 멈추고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했다. 새벽 3시에 다리를 건넜던 것, 꽃이 지고 난잡하게 자란 진달래 덤불. 그녀는 절벽 너머로 몸을 던지던 통통한 암탉을 떠올리고 깔깔 웃은 다음 암탉이 어떻게 길을 건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흰 돌들과 따뜻한 물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을 쓰다가 분명 뜨거운 돌이 해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데웠음을 깨달았다. - P79

그녀는 돌 위에 누웠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걸어갈 때발밑에서 돌이 무슨 소리를 냈는지 썼다. 그녀는 절벽 위의 독일인을, 아래의 광경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쾌활하고 복잡하며결혼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고 싶어 한다던 독일인 교수의 말을,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또 그의 성질을 생각했고, 교수의 아내가 그와 어 - P79

떻게 살았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땅 위로 흘러드는 빛이 보였다. 햇빛을 보니 자고 싶다는생각이 잠시 간절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그에게 이름과 암을 주었고, 그의 병에 대해서 고심하는중이었다.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태양이 떠올랐다. 거기 앉아서 아픈 남자를 묘사하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느끼자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또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새로이 솟구쳤다 해도 그녀는 그 갈망과 싸우면서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집중한 채 계속 써 내려갔다. 이미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절개하여 기후를, 그리고 갈망을 집어넣었다. 여기에는 흙과 불과 물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이 있었다. 이 작업은 왠지 자연의 힘이 느껴지고 단순했다. 이제 그녀의 주인공은 식욕을 잃었다. 그녀는 친척들을 등장시키고 그의 유언장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녀는아름다운 아내가 그에게 고깃국물을 주는 장면을 살펴보다가 문득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서일어나니 몸이 뻣뻣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흔들리는덤불 너머 도로에 내려앉는 아침을 내다보고 잘 시간이 왔 - P80

다가 가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P81

마지막 작품인 「남극에서는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가 오랜 호기심을 실행에 옮기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평소 남편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주인공은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계속 물어보고, 씻겨주고,
요리해주고, 설거지까지 혼자서 다 하는 낯선 남자를 만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작은 일탈은 주인공의 기대와 달리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둡고 심각하지만 키건은 오히려 엉뚱함과 유머를 더해 서술하고,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잉글랜드의 유서 깊은 소도 - P118

시를 누비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착지에, 눈과 얼음의 땅에 도착한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을 통해 남녀 관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불균형한 권력관계, 엉뚱한 결말에 도달하는 작은 호기심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 결말은 씁쓸하거나, 귀엽거나, 섬찟하면서도 왠지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끝까지 읽는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진다는 점은 아마 똑같을 것이다. 처음 읽을 때에는 작가가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짐작할 수 없어서 더듬더듬 길을파악하는 데 몰두하지만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이미 지났던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꽃을, 조그만 웅덩이를, 따끔거리는 가시덤불을 가만히 서서관찰할 수 있다. 키건과 함께하는 산책은 평탄하지만은 않지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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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처음에 적힌 필립 라킨의 시 한 줄을 끝으로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 실린 세 편의 소설을 끝으로 우리의일상은 계속된다. 그래 한쪽 눈을 뜨면 옷장만큼이나, 언제나, 굳건히, 눈앞에, 서 있는, 그것. 소설을 빌리자면 크게 그것은 흙과 불과 물일 것이고, 작게 그것은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일 것이다. "분필과 치즈만큼이나 전혀 딴판인 한쪽의 이야기. 한쪽이 사라져야 한쪽이 살아나는 이야기. 이거 너무 단순한 구조 아닌가 해도 클레어 키건의 터치는 그 컬러를 흑과 백이 아닌 회와 회로 붓칠하는 데 능숙함이 있고, 이거 너무 자명한 사실 아닌가 해도 키건의 필치는 그 사유를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는 데 탁월함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수신자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산더미 같은 편지를 쓰는 일"
이 삶이라고 지루한가, 따분한가 하여 온통 잿빛인가. 그럼에도 저기 매일같이출퇴근하는 사람이 있고 글쓰기의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고 밥과 빨래를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그들이 더없이 성실한 이유는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아는 사연일 터다. 그냥 너무현실적이라고? "우리 둘 다 앞으로 젊어질 것은 아니지 않는가!_김민정(시인)

클레어 키건이 간결하고 섬세한 문장을 쓴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문장 같지만, 그 속은 온갖 감정들이 요동치며 들끓고있다. 때로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도 많다. 얼음 속에서 끓고 있는 물처럼. 짧은 분량인데도 장편소설 못지않은 감정의 격랑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역시 문장 하나하나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클레어 키건은 문장을 꼼꼼하게 다듬고 날카롭게 벼린 다음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남성의 세계를 해체하려 한다. 클레어 키건은 문장으로 싸우는 사람이다. 그 싸움을 응원하고 싶다. 김중혁(소설가)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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