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강물
마광수 지음 / 책마루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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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교수이자 작가 마광수,

그는 정말 법이 나서야 할 만큼 혹은 타인에게 명백하게 피해를 주었다고 인정될 만한 나쁜짓을 했던걸까?

외증조할머니부터 내려온 죽음에 그늘이 그로 하여금 보통사람들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어 어찌보면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할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는 태어나 단 한번도 종교,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 신앙이라는 것, 혹은 믿음의 발원지가 있다면 아마도 자연일거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흥미롭고 즐거운 꺼리는 존재할 지 몰라도 목표지향적이라거나 계획을 갖고 실천하며 살아온적이 없는 사람이다. 교수라는 직업 역시 게으르고 초,중,고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방학이 맘에 들어 택한 격이니 엄연한 의미에서의 이상추구는 아니긴 하다. 한 없이 자유롭길 원했고 그렇게 되기 위한 일정의 책임을 갖고 살아온 그에게 '즐거운 사라'사건은 여러모로 스스로를 상처입은 존재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마광수의 장편소설 세월과 강물은 자전적 이야기가 많다고 해도 픽션의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만큼 그의 삶과 닮아있다. 등장 인물이며 사건까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독자로서는 알길이 없다. 나중에는 이 것은 픽션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사라지고 차라리 맘편히 주인공이 이름도 마광수요, 그가 하는 말은 마광수가 아닌 '인물 마광수'의 이야기라고 남은 의심마저 버려지게 된다. 우습게도 이렇게 다 놓은 상태에서야 비로소 소설로서의 세월과 강물의 맛이 느껴졌다. 기자도 아닌 내가 왜 픽션여부를 논하며 힘겹게 읽으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읽다보니 저자의 생각처럼 독자인 나 역시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사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기왕이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충실한 상태로 마음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구분짓지 않는 그 상태가 되어갔다.


어린 시절 부터 최근에 세월과 강물을 쓰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책의 결말에 해당되는 판타지로 도피하여에서의 공주 '사라'와의 만남을 통해 아직까지도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헷갈려하던 독자들마저 미련을 늦추거나 오히려 이전의 이야기 모두가 사실이고 이 사실을 소설인척 하기 위해 심어둔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즐거운 사라를 난 읽어본적이없다. 마광수의 작품은 전부 법이 단죄할 정도로 저속하고 야하다고만 생각해왔다. 어느정도 수위가 조절 되었겠지만 이전에 읽었던 책들과 비교했을 때 어떻다고 말하자니 조심스러워진다. 왜냐면 마광수 소설을 좋게 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짜피 타인의 평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더이상 즐거운사라 안에 마광수라는 작가가 갇혀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 갇혀 있기에 그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담백하고 겸손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p.47
여러 시련을 겪을 때마다 내가 다행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도 어쨌든 세월은 강물과같이 쉼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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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이에게 배운다 - 부모와 아이가 모두 행복한 엄마 성장 에세이
김혜형 글 그림 / 걷는나무 / 2011년 10월
품절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속에서 의젓하게 철없는 부모를 챙겨주는 아이의 모습은 언제봐도 대견스럽고 기특하다. 때로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에는 또래의 어리숙함과 천진함을 상실한 것 같아 불편한 맘이 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픈 엄마를 위해 죽을 끓여보겠다고 생쌀을 물에 넣고 휘적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그런 아이가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역시 아이를 선택할 수 없기에 한참 귀여울 때는 이내 잊고 미운 일곱살 이라는 둥,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자주 꺼내는 엄마들을 자주 만난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배운다는 사실을.



책, 엄마는 아이에게 배운다는 출판업계에서 오랜 기간 몸담고 있는 김혜영씨의 엄마 성장 에세이다. 육아 에세이라고 명명하지 않고 엄마 성장 에세이라고 이름붙인 것만 봐도 벌써 한 수 배워가는 기분이다. 책을 막상 받아보기 전까지는 이미 귀한 아이를 기르거나 다가올 겨울 엄마가 되는 친구들과 만나서 유연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사전정보를 얻기 위한 마음이 컸었다. 하지만 읽다보니 아이의 천진함이 늘 그렇듯 못난 어른, 이미 때가 많이 묻은 나이든 나에게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일깨워주고 있었다. 어찌보면 억지인 것도 같은 아이와의 수수께기는 웃음이 나면서도 지나치게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게 한다. 싸움을 거는 친구의 도전에 응하기 보다는 자신을 때릴 이유가 없으니 그저 맞고만 있겠다며 상대의 맘을 상하지 않고 그만두게 만드는 현명한 아이의 모습에서는 거절이라는 것이 무조건 직설적이고 상대의 맘을 얹짢게 만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오해를 풀리게 해줬다. 아이가 크기 싫은 이유가 뭘까? 만약 내게 넌 왜 어른이 되기 싫으냐고 물었다면 일단 돈벌기가 싫어서라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말한다. 자기가 자꾸 자라 나이가 들면 할머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엄마도 할머니가 되기 때문이라고. 나의 불편함 때문에 나이먹기 싫은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과 그들이 마주하게 될 불편함을 생각하는 그 마음씨가 그 어떤 성인보다 바르고 곱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런저런 이치를 따지며 그렇게 말했을리 없겠지만 왜 자꾸 아이의 일기에, 엄마의 에세이에 자꾸만 뜨끔거리는 걸까.



책의 내용도 내용지만 레이아웃이나 함께 실린 사진, 일러스트 등도 아기자기 하니 마음에 든다. 마치 한 권의 어른을 위한 동화나 우화집을 읽는 듯한 느낌이 처음 부터 끝까지 지속되었다. 뿐인가. 홈스쿨링에 대한 정보와 미리 경험한 선배 엄마의 조언도 함께 들을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아이가 없는 미혼들에게 이 책은 타이틀 때문에 다소 겁이 날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난 아직 아이도 없고, 자녀 계획을 세우기에도 너무 먼 이야기라 지나치지 말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딱 10페이지만 읽어봐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당신도 이렇게 말하게 될 것 같다.

"아이야, 가르쳐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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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 세계인의 영적 스승 바이런 케이티의 혁명적 가르침
바이런 케이티 지음, 유영일 옮김 / 쌤앤파커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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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내 생각일 뿐, 내 삶이 아닙니다.







 

서문을 읽고 이 책이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는 나의 사고에서 시작되고 그 해결방법 또한 내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은 그 어떤 해결방법보다 간단하면서도 실로 정확한 말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이 책에서 저자가 하는 말도 전부 믿지 말며 이미 대부분의 지혜를 독자 스스로가 가지고 있고, 더 나은 지혜 역시 내면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 있었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 저술가들은 이미 성공한 누군가를 빗대거나 스스로와 견주어 독자로 하여금 무지하며 늘 실패하고, 작심삼일을 반복하며 심지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군지도 깨닫지못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몰랐던 바보인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와 전혀 반대로 나를 상대하는 '그 혹은 그녀'가 잘못된 인격을 가졌거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보편적 현상인 것처럼 포장하며 제대로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점에서 바이런 케이티의 주장은 지친 독자로 하여금 힘을 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이상의 깨달음이나 감동은 없었다. 내가 괴로워 하는 과거의 일들이나 나를 괴롭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만들고 그 것이 사실인지를 판단하라는 등의 자문자답을 만드는 것 까지가 더이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섣불리 스스로를 판단내리지 말라는 충고까지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그를 사랑하며 앞으로 일어날 혹은 일어나길 바라는 일들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깨닫는 것 만으로도 상대에 짐지우던 기대를 어느정도 덜어낼 수 있고 그로인해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애착도 다룬다. 언젠가서부터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불안해하고 두려워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죽음을 주제로 한 심리학 혹은 치유서적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당장 일어나지 않을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것을 납득시켜주는 방법이 달랐다고 본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섣부른 두려움 역시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그저 삶의 또다른 모습, 삶의 연장으로 여기면 오히려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해준다. 별개의 것이며 일단 접어두고 살자라는 겉도는 식의 위로가 아닌 점이 맘에 들었다. 삶과 죽음다음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직접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떼어둘 수 없는 것이 직업과 돈 그리고 가족이다. 대담하게 엄마가 딸을 반드시 사랑해야하느냐고 묻는 챕터는 이전에 읽었던 착한 딸 콤플렉스라는 책을 생각하게 한다. 이전까지의 우리의 사고는 당연히 부모는 우리를 사랑해야 했다. 문제는 우리도 언젠가는 내 아이의 엄마 혹은 아빠가된다. 그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부모가 그러햇듯 헌신적으로 내 이상보다는 자녀의 이상을 쫓아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주고 지금껏 우리가 당연히 해왔던 '내리사랑'에 대한 비합리점을 상기시킨다.


 

지금,정의,깨달음, 고요함 등은 모두 소멸하는 개념이다. 상황이라는 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가 결국은 사라지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에 집중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믿는, 혹은 하고픈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또다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상대가 존재하다가도 이내 자문하게 만드는  이책은 사고를 넓히거나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는 분명하나 어떤 하나의 이론이나 깨달음을 구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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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 - 지만지고전천줄 58
작자 미상,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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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장기왕에 이어 이번에도 가볍지만 깊은 사고를 갖게 하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프랑스 사제들과 어려웠던 당시시대를 풍자한 여우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대략의 작품 설명으로는 '여우'의 시각에서 혹은 꾀 많고 이기적인 여우를 빗대어 풍자한 이야기인줄로만 여겨졌는데 막상 읽어보니 서문에 밝힌 것 처럼 지나치게 외설스러운 부분이 많아 그런 적나라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던 독서시간이 다소 버겁기까지 했다. 상상하면 잔인한 장면도 꽤 많아 아동은 물론 나처럼 심리상태가 다소 불안정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독자분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대략의 내용은 '르나르'라는 여우가 벌이는 못된 짓에 대한 열거다. 처음에는 이웃 늑대 이장그랭을 괴롭히는 것으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에 사자노블을 밀어내고 황제에 자리에 오르기 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르나르만의 힘을 가능한것일까. 르나르에게 괴롭힘을 거듭 당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 눈먼 이장그랭과 남을 괴롭히고 탓하길 좋아하는 띠베르, 자신의 과오는 전혀 생각지 않고 타인의 잘못만 확대해석 하는 띠에슬랭 등이 르나르의 못된 짓을 도와준다. 물론 그들의 최후는 여지없이 목숨을 잃거나 차라리 죽음의 상태가 더 나을 정도의 불쾌한 결말을 낳는다.

처음에는 참 어리석게도 르나르에게 당하고만 있는 동물들이 만화 톰과 제리에서 제리에게 늘 당하는 톰을 떠올리게 해 안타까웠는데 책을 읽다보면 결국 제 욕심에 그리 되는 것을 보고 기가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이 작품의 저자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작품이 쓰여진 시기와 학파에 대해서는 대략의 짐작이 가능한데 그 오래전 기근시대의 프랑스사회가 물질만능이라고 버젓이 말하는 요즘에도 어찌 이렇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르나르를 욕하던 것에서 마지막에는 누가 누굴 욕할 수 있겠는가 싶은 생각만 들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지나치게 외설스럽거나 잔인한 묘사만 없다면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달리 생각해보면 그렇게 여과없이 쓸 수 있었기에 풍자소설이 아니였겠는가 싶기도 하다. 외설스럽다고, 잔인하다고 말하는 내가 지나치게 속세에 물들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탓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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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철학 이야기 100 - 무위자연의 철학
왕혜천 편저자, 송춘남.송종서 옮김 / 서책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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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9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자신을 외부 사물과 잘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아가 천지와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도를 깨칠 수 있다."  

 

동양철학 이야기 시리즈 4번째는 도가철학 이야기로 다른 때보다 짧은 기간에 읽고서도 대략의 흐름이 보이는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알던 도가철학이라고는 장자와 나비가 전부였다. 물론 유교의 경우도 공자 왈, 맹자 왈이 전부였고 불교나 선교 사상은 그저 종교로만 알고있던 것에 비해 미약하게 나마 앎의 깊이가 깊어졌지만 도가는 그보다 실로 '깨달음'이라는게 느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우선 100가지 이야기 중에 가장 와닿았던 것은 역시나 겁 많고 두려움 많은 나를 염두해 두고 고른 듯한 '땅과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여 걱정을 달고사는 이'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의 친구가 그를 안타깝게 여기고 달래주지만 열자의 의하면 결국 땅이든 하늘이든 우리의 권한 밖의 문제라 아에 근심치 아니 하는 것이 맞다고 말해준다. 이것은 바로 앞일은 모르는 우리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사서 걱정하는 것에 주의를 주고 해답을 제시하는 자기계발서나 심리학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에 생각지 말라에 가깝기에 도가는 '無'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셨던 장자와 완자의 경우도 그들이 죽음앞에서 마음을 상해하며 곡을 했다면 그동안 주장해왔던 것 과는 달리 속세에 인연과 속세의 일에 얽매였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천명을 받아들이고 속세의 일에서 벗어나 그들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해를 하면서도 참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말이 없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유교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효심 깊은 왕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속세에 의존하는 셈이 되는 듯 싶었다. 이런 비교자체가 도가 철학으로 판단하면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도가철학은 이전의 철학이야기에 비해 쉽게 읽혔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고개가 끄덕여지고 대략 깨달음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막상 덮고나니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다고 해야하는지 이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다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리지 않는 다는 점에서는 지금까지의 시리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다르긴 해도 동양철학의 핵심이 바로 자연에 있음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속 깨달아야 하며 배워야 하는 다소 인위적인 서양철학과 비교했을 때 그 시작과 과정이 다르고 깨달음의 이후가 달라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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