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40분차로 빈을 떠난 일행은 12시 20분경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2시간 40분 소요. 여기까지는 예상과 다르지 않은데 함정은 부다페스트역이 몇개 더 있다는 것. 부다페스트-켈레치가 종착역이자 목적지였는데 부다페스트-켈렌푈드에서 하차했다. 두 역 사이는 20분 거리. 종착지에서 대기하던 픽업차량이 바뀐 장소로 오기까지 역전 대형 쇼핑몰(한번더 확인하지만 쇼핑몰은 무국적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중이다(스타벅스 커피맛도 무국적이다).

짐작엔 부다페스트 외곽이어서 사진으로 보던 부다페스트와는 풍경이 많이 다르다. 그래도 어쨌든 여기는 부다페스트. 맨처음 부다페스트란 말을 접한 건 언제였을까.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시는 있다.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7). 짐작할 수 있지만 1956년 헝가리혁명(부다페스트 봉기)을 소재로 쓰인 시이다. 대학 1학년 때 읽었을 것 같다. 48년에 데뷔했으니 김춘수의 초기시. 나중에 무의미시를 주창하는 김춘수의 시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앙가주망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다(두 명의 김춘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전문은 이렇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製)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기야서 감방에 불령 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부다페스트 켈렌푈드에 1956년 봉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부다페스트 소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인다. 기다리던 사이 버스가 왔다. 부다페스트 소녀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더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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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문학기행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빈에서의 일정이 어제로 마무리되었고 오늘아침은 마지막 도시 부타페스트로 향한다. 오전에 떠나기에 오늘은 비엔나의 아침을 절반만 누리게 된다.

카프카문학기행차 방문했던 2017년에는 버스로 이동했기에(멜크를 거쳐서 프라하로 갔다)빈의 지하철과 기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짧은 기간이어도 전보다는 많은 걸 기억에 담게 되었다.

어제 레오폴드미술관의 ‘비엔나 1900‘ 전시에는 세기말을 수늫았던 빈의 학자와 예술가의 사진도 한꺼번에 전시돼 있었다. 면면으로 보면 (17세기를 일컫는 ‘천재들의 세기‘에 견주어) ‘천재들의 세기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치독일하에서 이 천재들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전후 미국의 패권을 가능하게 한 인적 밑바탕이자 미국사에 대한 히틀러의 기여다.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에서는 예술에 대한 유대인들의 후원과 학문열(집안에 박사학위자가 한명씩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원인으로 든다. 다른 원인으로는 창조적 에너지가 정치(운동)로 빠져나갈 수 없었던 사회적 조건도 고려해야겠다. 1848년, 18세의 나이에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세기말이 되면 유럽의 최장수, 최고령 황제가 된다. 그와 함께 오스트리아는 가장 젊은 황제의 제국에서 가장 늙은 황제의 제국이 된다(황제는 1914년 1차세계대전의 선전포고를 하고 1916년에 사망한다. 그의 제국은 1918년 패전과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세기말은 이 제국의 황혼이었다.

제국의 황혼을 느껴보려는 것도 문학기행의 취지였는데, 아침햇살을 맞는 빈의 모습에서 이제 그런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은 때늦은 겨울추위가 덥쳤다지만 빈은 낮기온이 어느덧 20도까지 올라가고 있다. 이제 빈과는 작별해야 할 시간이다. 언제 다시 찾을지 기약할 수 없지만 빈의 아침햇살을 기억에 담기로 한다. 비엔나의 아침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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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중앙묘지 방문 이후에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문학박물관을 찾았다. 최종일정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작가 관련 방문지로 적합한 곳을 물색하다가 방문해보기로 결정한 곳이다. 이름은 문학박물관이라 돼 있지만 전시내용상 오스트리아문학박물관이라고 해야겠다. 문학 일반이 아닌 오스트리아문학사 전반에 대한, 그리고 대표 작가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어서다.

사실 전시의 범위나 내용에 대해 개괄적인 정보만 갖고 있었기에 조심스러웠는데 오스트리아문학에 관한 요긴한 정보와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서(설명이 독어로만 돼 있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번역 앱을 활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행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 두 가지. 첫째는 오스트리아문학의 계보를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점.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1791-1872)와 소설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1805-1863)가 오스트리아 문학의 두 기둥쯤 된다. 그릴파르처의 작품은 <메데이아>를 포함해 여러 편이 번역돼 있고, 슈티프터의 대표작 <늦여름>도 번역돼 있으니 (독문학이 아닌) 오스트리아문학에 초점을 맞춰 읽어봐도 좋겠다(오스트리아문학을 강의에서 따로 다루는 건 미래의 과제 중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카프카에 관해서 ‘진심‘이라는 점. 가장 많은 전시공간이 카프카에게 할애돼 있었다(한트케와 미국에 관한 전시항목도 있었다). 카프카 자신이 빈에 대해선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를 오스트리아문학의 중요 작가로 호명하고 있었다. 카프카의 소속이 새삼 관심사가 되는데, 과연 그는 독일 작가인가? 아니면 오스트리아 작가일까? 혹은 체코 작가일까? 유대인 작가? 아니면 유럽인?(유럽인이란 정체성 내지 정체성의 지양은 관심을 가져볼 만한 주제다.)

카프카는 1924년 6월, 오스트리아 근교 키얼링의 요양원에서 사망하고 프라하의 신유대인 묘지에 묻힌다. 이번겨울(내년 1월) 체코-폴란드 문학기행 때 다시 찾을 계획인데(개인적으론 세번째다) ‘프라하의 카프카‘가 단연 핵심주제이지만 ‘카프카와 빈‘이란 주제도 서브주제로 다뤄봄직하다.

문학박물관을 나와서 점심을 먹고 도보로 레오폴드미술관까지 이동했다(이동중에 부르크정원에 있는 가장 유명한 모차르트 동상을 지나갔다). 지하2층에서 4층까지 층별로 여러 주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핵심은 국내에서도 열렸던 ‘비엔나 1900‘과 ‘에곤 실레 후기작‘이었다. 빈 분리파의 대표작들과 함께, 2017년 문학기행 때는 일정이 짧아서 보지 못했던 에곤 실레의 그림들을 한껏 볼 수 있었다. 빈에서 이틀간 투어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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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둘째날 일정으로 중앙묘지를 찾았다. 매우 큰 규모의 묘지인데 우리가 알 만한 작가로는 슈니츨러와 장 아메리 정도가 묻혀 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음악가 묘역에 나란히 묻혀 있는 거장들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다.

모차르트의 가묘(가짜 무덤)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오른편으로 요한 스트라우스와 브람스의 묘지가 있었다. 조촐하긴 하지만 음악가 묘역으로 단연 첫손가락에 꼽을 만하다.

문학기행인지라 음악가의 무덤을 찾는 일은 드문데 보통은 작가들의 무덤과 깉이 있는 경우다. 러시아문학기행 때 찾은 넵스키 수도원묘지의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그리고 프랑스문학기행 때 본 페르라셰즈 묘지의 쇼팽의 무덤이 떠오른다.

일행은 준비한 카네이션 한송이씩을 좋아하는 작곡가의 무덤앞에 놓았다. 유대인 묘역에 있는 슈니츨러의 무덤은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일정상 음악가 묘역에서 걸음을 돌렸다. 다시 트램을 타고 문학박물관을 향하여 이동중이다. 거리가 좀 되는지라 오스트리아 트램 승차 경험은 확실하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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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박물관에서 눈길을 끈 것 가운데 하나는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와의 교분이다. ‘문학의 프로이트‘로 불리는 슈니츨러는 프로이트(1856-1939)와 동시대를 살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을 공유했다(특히 꿈, 그리고 성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슈니츨러는 자신의 분신인 양 생각했고 그래서 오히려 직접적인 대면을 두려워했다고도 전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꿈의 노벨레>만 하더라도 프로이트적 분석을 매우 강하게 자극하는 작품이잖은가.

츠바이크도 그렇지만 슈니츨러의 작품도 번역은 꽤 됐으나 잘 정돈돼 있지는 않다. 작품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시기별 대표작들을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겠다. 강의에서 주로 읽은 작품은 초기작 <라이겐>(<윤무>)과 중편 <꿈의 노벨레><카사노바의 귀환> 정도다.

프로이트와 슈니츨러 모두 현대인의 심리(마음)의 발견자로서 지분을 갖는데, 확대하면 ‘심리적 인간‘(호모 사이콜로지쿠스)에 대해 지분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심리적 인간에 대한 해명과 함께 오스트리아(특히 빈)가 이에 대해서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궁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설적 차원에서 신경증적 인간과 분열증적인 인간이 19세기와 20세기초 반동의 두 제국, 즉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수도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단지 우연일까. 18세기 독일이 ‘교양‘을 탄생시켰다면 19세기말 빈은 (신경증적) 마음(심리)을 발명했다고도 말하고 싶다(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오늘 문학박물관을 방문하기에 앞서 프로이트와 슈니츨러 문학의 의의, 그리고 세계문학지도에서 빈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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