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가모의 페스트 외 - 옌스 페테르 야콥센 중단편 전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249
옌스 페테르 야콥센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 때 '페스트' 제목이 들어가 있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생각만 하다가 지나갔고, 이 책은 얇고 표지가 멋있는 세계문학전집을 사려고 아무 배경지식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던 책이었던 것 같다. 


옌스 페테르 야콥센은 19세기 덴마크 사람이다.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식물학을 전공했고, 다윈을 좋아해서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덴마크어로 번역하며 북유럽에 그를 최초로 소개한 인물로 과학사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여행중이던 20대에 결핵에 걸려 학문적 인생은 포기했으나 소설가로서의 인생을 이어가게 된다. 

악화되는 병마와 싸우며 서른 여덟이라는 이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저자의 이런 배경들을 알고 보면, 이 책에 나오는 많은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 

식물학자를 꿈꾸었던 저자가 묘사하는 자연은 아름다운 묘사에 그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신념이라고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표제작이기도 한 <베르가모의 페스트>에서는 신을 믿는 것과 신을 믿지 못하게 된 것, 광신도와 신을 저버린 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음을 옆에 두고 글을 쓴 저자가 천착해오던 주제이지 않았을까. 


모든 단편의 시작과 마지막이 인상적이고, '죄책감'이라는 주제 또한 자주 보인다. 


다른 세계문학 단편집에 많이 들어간다는 '안개 속의 총성'과 '두 세계'의 결말의 여운이 길다. 여기 나온 작품들 중 한 작품 꼽는다면 '두 세계' 


'푄스 부인'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근대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쓰면서도 맞나 싶긴 하다. 현대에도 보기 힘든 여성상이지 싶다. 남편이 죽고, 딸의 실연을 달래는 여행 중에 첫 사랑을 만나게 된 푄스 부인이 자신들만 사랑하라며 반대하고 저주하는 다 큰 아들, 딸 대신 첫 사랑을 선택하는데,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아닌, 굳건한 푄스 부인을 볼 수 있고, 결말 또한 예상 밖이어서 좋았다. 


마지막 단편인 '모겐스' 도 신기한 이야기였다. 흔한 이야기 같은데, 흔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저자가 자연과학을 공부했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관찰하고 펼쳐내는 자연과 인간의 마음 구석구석에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었다. 다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오랜만에 읽기 시작한 세계 문학 전집 책은 스마트폰으로 박살난 주의력과 집중력을 이어 붙이기 위한 딱풀이자 나의 안간힘이었다. 얇다는 이유만으로 고른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어제 저녁부터 읽어서 오늘 다 읽었다. 성공적이었다. 


책 읽는 한 시간, 달리기 하는 한 시간은 스마트폰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딸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무엇이건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은밀하게 소멸되어야 하고, 말로 드러내서는 안될 아픔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 말은 어느 날 다시 즐겁고 행복한 일상을 구축하려는 새로운 상황에서는 장애가 될 수 있고,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타자의 입장에서 말할 수밖에 없고, 타자의 생각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57) - 푄스 부인


"사람들은 저 안쪽에 대리석 계단과 거친 실로 짠 태피스트리가 있는 웅장한 옛 저택을 싫어했다. 시커멓고 우람한 우듬지를 자랑하는 아주 오래된 나무들도 싫어했다. 우산소나무, 월계수, 물푸레나무, 측백나무, 떡갈나무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것들은 성장기 내내 미움을 받았다. 마치 늘 불안에 떠는 사람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적인 것과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 반항적으로 비치는 것들을 미워하듯이." (91) - 여기 장미가 있었네


"인생 전체가 참 슬펐다. 지나온 삶은 공허했고, 남은 삶은 음울했다. 단 한 번뿐이라는 삶이 그랬다. 행복한 이들은 눈먼 인간들이었다. 그는 불행을 통해 세상 보는 법을 배웠다." (162) - 모겐스


"야콥센은 <닐스 뤼네>에서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무척 슬픈 일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 영혼과 영혼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우리를 안아 주는 어머니도, 우리가 사랑하는 친구나 아내도 결코 우리 자신과 하나 될 수 없다.> 인간은 결국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외로운 나그네다. 타자와 하나 될 수 없다면 마음의 안식은 자기와의 하나 됨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찾고, 대상 속에 숨겨진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해 내야 한다." (189) - 역자 해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