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후보와 자발적 선거운동


성인이 되어 선거권을 얻은 후로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 수많은 선거들에 투표하러 갔었지만, 대체로는 표를 줄 후보와 당이 없어서 일부러 기권표를 만들곤 했다. 경계선에만 골라서 여러 번 찍거나,표 바깥에 찍거나 어쨌거나 나는 표를 찍었다는 표시를 하고 투표함에 넣었다. 나는 반드시 투표는 했지만, 제대로 투표를 하지 않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위성정당이 되려는 녹색당을 탈당한 후에는 더욱 표를 줄 곳이 없어졌다. 진보당과 기본소득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이 되어 버렸고, 정의당은 그 어정쩡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녹색당은 탈당한 순간 지워버린 이름이다. 창당 시점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당 활동을 했었지만, 이제는 아웃이 되어 버렸다. 나의 표를 받을 수 있는 후보는 정말 제대로 된 후보 혹은 정당이라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 대선에서는 찍을 후보가 생겼다. 사회대전환 연대회의에서 경선을 통해 권영국 후보가 선출되었고, 짧은 기간안에 기탁금을 모아 무사히 등록했다. 그리고 선본을 꾸리기 위한 비용도 모금이 이뤄지고 있었다. 선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녹색당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전 국민에게 겨우 한 장짜리 흑백 공보물 한 장 보내기 위해서도 엄청난 돈이 든다. 동네마다 정해진 수량을 걸 수 있는 현수막 비용도 마찬가지다. 거대양당이야 어차피 선거운동 비용 전액을 돌려받을 것이고, 득표율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돈 걱정 없이 펑펑 쓰며 선거를 치를 수 있겠지만, 가난한 진보정당은 그 비용들을 다 감당하기 어렵다. 이번에 정의당이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바꾸는 과정이나, 권영국 후보 선거 운동에 오히려 정의당이 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여전히 정의당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쨌거나 유일하게 제대로 된 후보가 나왔으니, 이 기회를 잘 살여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우리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여러 단위에서 모여 공동 선본을 꾸렸다. 현수막도 공동으로 비용 부담을 해서 제작했고, 직접 동네 곳곳을 다니며 게시했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 시간을 내어 선전전을 하고 있다. 노동당, 녹색당 그리고 정의당이 주축이고 내가 속한 지역 정당인 은평민들레당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지역의 단위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중에는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활동가들도 있지만, 시국과 상황 때문에 더는 안 되겠다며 용기를 낸 평범한 시민들도 있었다. 쭈뼛쭈뼛 어색하게 나타나 선거운동에 참여하셨는데, 나중에는 열심히 구호도 외치고 적극적이었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보수 양당이 너무 싫어서 뭐라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아침 저녁으로 올라오는 선거운동 사진들을 보니 조끼 색깔도 각 당의 색으로 맞춰 입은 모습이 재미있었다. 노동당은 빨간색, 정의당은 노란색, 녹색당은 초록색. 신호등이다. 그 사진을 보며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노동당이 지역에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시절, 녹색당이 이제 막 창당하고 지역 활동을 시작하던 시절. 정의당은 아마 당시에는 국민참여당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지금도 국참당에서 이름을 바꾼 정의당은 당의 규모에 비해서는 지역 활동은 별로 없었다. 당의 규모에 비해 항상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노동당과 녹색당이었다. 이 적록연대 활동이 참 재미있고 좋았었다.


 


주로 온라인(그러니까 SNS)을 통해서 본 것이긴 하지만, 권영국 후보에게 가는 표가 사표가 될 거라며, 이번에는 꼭 이재명이 압도적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글들이 돌아다녔다. 매번 선거철이 되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강요하는 이 말. 그거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 매번 그렇게 이번에는 또 이번에는 이라고 말하고선,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했고, 국가보안법 하나 손보지 못했다. 


이번 대선후보 티비 토론회에 4명의 후보가 나온 것은 까다로운 조건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조건은 아래 세 가지다.

① 국회에 5인이상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이 추천한 후보자

② 직전 대통령선거,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 비례대표시.도의원선거 또는 비례대표자치구.시.군의원선거에서 전국 유효투표총수의 3/100 이상을 득표한 정당이 추천한 후보자

③ 「선거방송토론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칙」 제22조(언론기관의 범위) 규정에 의한 언론기관이 선거기간개시일전 30일부터 선거기간개시일전일까지의 사이에 실시하여 공표한 여론조사 결과 평균 지지율이 5/100 이상인 후보자

권영국 후보는 과거 정의당이 3% 이상 득표한 자격을 바탕으로 티비 토론회에 나갔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실속은 없는 뻔한 내용의 이재명과 내용이 없는 김문수와 어떻게든 튀어보려고 발버둥치는 이준석 사이에서 꼭 필요한 내용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하는 권영국 후보 덕분에 티비 토론 다운 토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권영국을 찍어봐야 사표가 된다고? 그렇지 않다. 권영국 후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표를 받아야 보수 양당이 가리고 싶은 진짜 문제들을 드러낼 수 있다.


SPC 불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SPC 공장에서 또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권영국 후보에 의하면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가 매일 6명에 이른다고 했다. 아니 하나의 기업에서 이렇게 여러번 같은 형태로 기계에 끼어 돌아가시는 노동자가 연달아 나온다는 것이 말이 되나? 지난 2022년과 2023년에도 계열사에서 사망 사고가 있었고, 손가락 절단 사고는 훨씬 더 많았다. 매번 재발 방지 약속을 했지만, 이번에도 또 사고가 났다. 그리고 매번 기업은 처벌 받지 않았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이게 지금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나?


원래 빵을 거의 먹지 않고, 사는 일도 거의 없는데, 지난 22년 사고 이후로 불매는 해왔다. 만약 빵을 살 일이 생기면, 동네 작은 빵집을 이용하곤 했다. 어차피 먹을 일이 거의 없어서 불매를 하려고 해도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뭔 계열사가 이렇게 많나? 모르는 브랜드가 거의 대부분인데, 혹시 나도 모르게 가는 일이 생길지 몰라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제는 시민들이 불매를 한다고 해도 기업에 타격이 가기 보다는 가맹점주들에게 타격이 갈 거라는 것이다. 


사실 최근에 딱 한 번 파리바게뜨를 간 적이 있었다. 무슨 앱에서 적립금을 네이버 페이 상품권으로 바꿨는데, 근처에 네이버 페이로 결제가 가능한 가맹점 중에 가장 가까운 곳이 파리바게뜨였다. 해당 상품권은 사용 기한이 정해져있었고, 그냥 없어지기 전에 쓰려다보니 가까운 곳에서 써야 했다. 샌드위치 두 개를 사서 매니저님과 나눠 먹었는데, 이번에 노동자 사망 사고를 보면서 몇 년째 안 갔던 파리바게뜨를 하필 최근에 딱 한 번 갔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 프로야구는 역대 유래없는 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한화 이글스의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18경기 연속 매진은 KBO 역사상 신기록이라고 했다. 프로야구의 흥행과 함께 없어서 못 판다고 소문난 것이 바로 크보빵이라고 불리는 각 구단의 이름을 달고 나온 빵이었다. 안에 포토카드인가 뭔가가 들어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포켓몬 빵이 그렇게 인기가 있어서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고 하는 얘길 듣곤 했었다. 실제로 가끔 SNS 에서 크보빵을 잔뜩 사서 카드를 모은다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번 사고로 크보빵 불매를 하자는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이 크보빵에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 별도로 카드를 넣은 제품들을 출시했다. 빵을 좋아하지 않으니, 크보빵도 살 일이 없고, 롯데가 별도로 낸 다른 빵과 과자류도 살 일이 없는데, 야구팬으로서 이런 움직임은 꼭 참여해야 할 것 같아서 서명에 동참했다. 


사람 목숨은 소중하다. 노동자의 목숨을 지켜주지 않는 기업에서 누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당장 생활하기 위해 위험한 일터에 출근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 노동자가 당신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의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본인상


지난 주 금요일 저녁에 태양광 강의를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강의 요청은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해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 강의였다. 기후위기, 재생에너지, 탈핵, 자원순환, 협동조합 등 다방면에서 강의를 해왔지만,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고 제일 잘 할 수 있는 주제는 역시 태양광이다. 이번에는 3회 연속 강의로 10년 이상 이 분야에서 일하며 알게 된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었다. 옛날에 컴퓨터 교재 중에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사보지는 않았지만, 전유성이라는 유명인이 얼마나 컴퓨터를 잘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제목은 한번 듣는 순간 기억에 오래 남는 제목이라 생각했었다. 이번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3회차 강의를 듣고 나면 누구나 태양광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내용을 알차게 준비했다. 


홍보를 시작하자 누군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태양광 전문가라고 나를 소개했다. 절반만 맞는 말일 것이다. 전국 조직인 시민발전협동조합 연합회에서는 나름 유명했었다. 그러니 저 '전국적'이란 단어는 그냥 전국이 아닌 해당 전국 조직 안에서만 해당되는 말이다. 지난 금요일은 이례적으로 국지성 호우가 심했다. 누군가가 열대 우림의 스콜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리치기도 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져 신청하신 분들이 많이 안 오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강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하나 둘씩 참가자들이 오셨다. 궂은 날씨에 비해서는 오시기로 하신 분들 대부분 오셨고, 사전 신청을 안 하고 오신 분들도 계셨다.


강의는 재미있었다. 나는 원래 강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가 제일 잘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이라 신나서 열심히 떠들었다. 참여자들의 진지한 태도와 열의가 느껴져서 더 신이 났다. 중간중간에 질문도 많이 나왔다.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폰을 들여다 봤는데, 부고 소식이 와있었다. 오늘 강의에 꼭 오고 싶었는데, 갑자기 부고 소식이 와서 장례식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나도 몇 차례 뵈었던 분이었다. 노동·정치·사람 집행위원장이자,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IT노조) 위원장인 김태식 동지 본인상이었다. 불과 한 달 전쯤에도 우리 지역정당 총회에 오셨던 분이어서 왜 갑자기 이렇게 돌아가셨나 궁금했다. 작은 조직에서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하느라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목요일에도 집에 못 가고 야근을 했고, 금요일 아침 회의를 하고 나서 잠깐 같이 낮잠을 자려 눈을 붙였는데, 같이 잠든 분이 깨보니 그렇게 되셨다고. 일종의 돌연사인 것 같다고 들었다. 그 와중에 잠든 상테에서 돌아가셨다면 고통 없이 가셨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부고 소식에서 부모님 상이 아닌 '본인상' 이라는 단어가 점점 많아진다. 익숙해질 수 없는 단어, 아니 익숙해지면 안 될 단어.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단어. 이번에 노동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조문객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 운동판의 여러 분야에서 오래 활동한 사람들이어서 이 분이 어떤 삶을 살다 가신 것인지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한편으로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갔음에도 장례비용을 모두 정산하기에는 조의금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역시 이 분이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일 것이다. 늘 낮은 곳에서 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신 분이셔서 그랬으리라. 나는 청소년인 자녀를 비롯해 남은 가족들에 대해 떠올렸다. 돌아가신 분께는 잘 가시라고 인사 드릴 수 있지만,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혹시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생가면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 생각은 없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내가 아빠로서 역할을 해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서 아픈 아빠로 아이들의 물질적 정신적 부담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리기 후원회


최근에 나의 달리기를 응원하는 지인들이 다음 대회는 언제냐고 묻길래, 여러 마라톤 대회의 참가비가 점점 오르고 있어서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는 2~3만원 선이었던 참가비가 요즘은 대체로 5만원으로 오른 것 같다고. 큰 대회들이 참가비를 올려서 작은 대회들도 덩달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던 지인 중 한 명이 나를 마라톤 대회에 보내기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자는 제안을 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다음 마라톤 대회 참가비를 마련해주자는 이야기였다. 설마 그 제안이 실현되어 후원회가 만들어지지는 않겟지만, 그런 제안을 떠올린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나 라는 사람, 그래도 나쁘지 않게 살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SNS 를 비롯해 주위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너무나도 다행이다 싶었다. 내 주위엔 다들 권영국 지지자들 밖에 안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꼰대 보수가 되지 않도록 늘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고 살아야겠다. 달리기 이야기와 프로야구 이야기를 더 쓰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서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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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5-21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티비 토론회의 승자는 권영국 후보입니다. 단순히 토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항상 고민하고 살아온 철학이 느껴지더군요. 이재명은 평소의 이미지와 달리 뭔가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었고 김문수는 이재명 반대급부 외에는 어떤 비전도 없고 이준석은 토론이 아니라 그냥 상대방 성질긁기와 깍아내리기만 하는 양아치의 모습이더군요.
 


멀다. 멀어.


평소 집에서 일터까지는 걸어서 15~20분 가량 걸린다.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걸으면 20분. 조금 서둘러 걸으면 15분. 뛰어오면 10분 정도 걸린다. 오늘 아침에는 파주에서 출발했는데, GTX 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왔는데, 40분 조금 넘게 걸렸다. 아, GTX 역까지 걸어간 시간을 포함하면 50분이 넘겠구나. GTX 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서 종점인 운정중앙역에서 연신내역까지 15분 밖에 안 걸리는데, 그럼에도 6호선으로 갈아타고 오다 보니 이 정도 걸렸다. 딱 연신내 근처에서는 시간 상으로 큰 이점이 생기겠지만, 연신내를 벗어나면 체감상 크게 좋은 줄 모르겠다. 물론 당연히 GTX 가 없었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전체 시간이 줄어든 것은 분명 편해졌다.


하지만 GTX 가격이 너무 비싼 것도 문제다. 빨리 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이걸 매일 타는 것은 큰 부담이다. 나는 후불 교통카드를 쓰기 때문에 평소에 버스나 전철요금을 확인하지 않는 편인데, GTX 의 경우에는 궁금해서 확인해봤다. 연신내에서 개찰구를 지나며 찍으면 처음에 1,500원을 결제하고, 운정중앙역에 내리면 다시 2,400원을 결제한다. 즉, 연신내에서 운정중앙역까지 편도 3,900원이 나온다는 이야기. 이걸 왕복하면 하루에 7,800원이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아마 더 나오겠지. 연신내에서 전철을 갈아타거나, 다른 버스를 갈아타면 또 요금은 더 나올 것이다. 8,000원이 넘을 거라는 이야기. 하루 8,000원에 20일을 곱하면 16만원. 한 달 교통비가 어마어마하다. 나는 평소 5만원도 나오지 않는데, 3배가 넘는구나.


일터를 비롯해 주로 회의를 다니는 곳들, 일터 외에 내가 활동하는 다른 협동조합이나 단체의 사무실들이 모두 동네에 있기 때문에 나는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주로 걸어 다닌다. 일부러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서 버스로 한번에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다. 연신내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번에 편하게 가는 버스가 하나 있는데 배차간격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그걸 바로 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꽤 긴 시간동안 이렇게 걸어 다닌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이젠 어디를 갈 때마다 버스나 전철 시간을 본 후에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도 생각해본다. 지도 앱에서 나오는 도보 추정 시간은 너무 길게 나와서 그걸 바로 믿기는 어렵고, 내가 실제로 걸어본 거리를 대입해서 적절한 시간을 유추해 봐야 한다.


과거 오늘


오늘 북플에서 확인한 과거 오늘 올린 글은 하나였다. 3년 전 오늘 쓴 글이고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체스를 배워와서 아이에게 체스를 배워 함께 두곤 했던 이야기들과 [퀸스 갬빗]이란 드라마,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 책까지 다룬 글이었다. 처음 체스를 배워서 한창 흥미를 가졌던 아이는 시간이 지나 이젠 체스를 두지 않는다. 아예 관심이 없어진 듯하다. 당시에 내가 져주지 않고 계속 이겨버려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 글에도 썼던데, 나는 어떤 일이든 일부러 아이들에게 져 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잘 배우고 익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려고 일부러 져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아마 작은 아이는 당시에 내가 일부러 져 주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2015년, 그러니까 10년 전 오늘 올렸던 게시물이었다. 당시 나는 지역 시민신문에 책 소개 꼭지를 맡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던 출판계 선배가 운영하는 출판사 따비에서 낸 신간 [밥의 인문학]을 소개하는 원고를 써서 보냈고, 발행된 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사진 찍어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따비 출판사 대표인 선배를 태그 했었다. 해당 신간 소개 기사에 나는 꼭 동네 서점인 불광문고에서 책을 찾아보라고 권했었다. 내가 올린 게시물을 본 따비 대표님은 나하고도 잘 알고 지냈던, 불광문고 점장을 댓글에 태그하며 잘 부탁드린다고 했고, 점장님은 답글로 잘 보이도록 진열해놓았다고 했다.


구독자가 많지 않은 지역의 시민신문이었기 때문에 내 기사를 읽고 실제로 불광문고에 가서 해당 책을 찾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달 나름의 기준으로 좋은 책을 선정해서 읽고 공들여 소개 기사를 썼었다. 짧은 글이라 더 쓰기가 어려운 글이었지만, 잘 소개하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선정한 책이 내가 아는 사람의 출판사에서 나온 경우라면 그걸 꼭 티를 내곤 했었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올린 게시글을 통해 출판사 대표와 동네서점 점장이 서로 소통하면서, 내 SNS 가 좋은 책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 재미있었다. 이번 기회에 다시 내가 쓴 짧은 글을 읽어본 것도 재밌다. 해당 기사를 아래 붙여본다.


밥은 하늘입니다.

밥의 인문학/ 정혜경 지음/ 따비/ 16,000원



매일 점심시간마다 뭘 먹을지 고민이다. 일터 근처에는 식당이 많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다. 예전 직장 동료는 매일 점심 메뉴 고민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가서 앉아있으면 알아서 차려주는 백반집이 제일 좋다고 했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한편 예전에 비해 밥과 반찬이 나오는 한식류의 식사보다는 면 종류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맨날 먹는 밥인데, 밖에선 좀 다른 거 먹어보자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주머니 사정과 입맛을 고려해 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한편 요즘은 ‘구석기 식단’이라는 것이 유행해서 밥을 자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밥을 많이 먹는 우리 식단 덕분에 탄소화물을 과다섭취하고, 그 때문에 배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점점 쌀의 소비는 줄어들고, 오랫동안 이 땅의 식단에서 중심이었던 밥이 이제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한번 밥의 의미를 되새겨 우리 민족에게 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 속에서 밥을 조명한다. 우리나라의 밥의 역사(즉 농경의 역사와 음식의 역사)를 살펴보고, 쌀밥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사도 다룬다. 또 과학적으로 쌀밥이 가진 영양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짓는 밥을 소개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저자는 쌀이 다른 곡식보다 뒤늦게 한반도에 들어왔을 거라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쌀이 밥상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맛과 영양 면에서 단연 돋보였기 때문이다. 쌀이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전까지(그러니까 농경시대 이전의 구석기 시대에) 주식이었던 육류나 어패류가 자연스럽게 부식(즉 반찬)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쌀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누구나 마음껏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수의 지배 계급만이 늘 밥을 먹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쌀이 모자라서 다른 곡식들로 끼니를 이어가야 했고, 그마저도 없을 때가 많아 풀뿌리와 나무 껍질을 먹었다. 흔히 말하는 하얀 쌀밥은 평생 꿈도 못 꿀 음식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 시대 요리책에 나오는 다양한 밥에 대한 이야기다. 몇 권의 책에 나오는 목맥반, 소맥반, 청량미밥, 좁쌀밥, 멥쌀밥, 피밥, 율무밥, 백미반, 조밥, 현미밥, 제밥, 빙침반, 황반 등 다양한 밥 이름을 보면서 과연 어떤 맛이었을지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다. 한편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맛있는 밥을 짓는 법을 알려주고, 또 색색가지 밥 짓는 요리법도 알려준다.



아, 이 책을 읽기 전에 밥을 배불리 먹어둘 것을 권한다. 읽다 보면 자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윤기가 도는 맛있는 밥 생각이 간절해진다.

















사실 이때만해도 밥 먹는 양을 줄이는 중이기는 했어도 밥을 거의 안 먹고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위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평소에 거의 밥과 면을 먹지 않는 방식으로 한동안 살았었다. 지금은 다시 또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하고. 그냥 정해진 틀 없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먹는데, 1일 1식도 마찬가지다. 대개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하루 1끼만 먹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움직일 일이 많은 날이나, 강의를 했다거나, 머리를 많이 써야했던 날에는 점심을 먹기도 한다. 가끔 점심 약속이 생기는 날에도 크게 부담 없이 그냥 점심을 먹는다. 1일 1식이라는 틀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그냥 기분과 상황에 따른다.


암튼 밥을 거의 먹지 않고 살다 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기도 했었다. 지금도 가끔 하루 한 끼만 먹고 배가 고프지 않냐? 괜찮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저 기사를 봤다면 밥도 안 먹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가 나를 비난했을 것 같다.


일부러 밥을 안 먹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밥만 엄청나게 좋아했고,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식습관이 내 몸에 좋지 않다고 여겨 식습관을 바꾼 것이다. 밥을 자주 많이 먹지는 않지만, 여전히 밥을 좋아한다. 그리고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다른 먹거리를 잘 찾아서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아져서 이젠 그냥 먹는 편이다. 많이 먹고, 많이 달리고, 더 많이 운동하면 된다고 생각을 바꿨다.


오늘은 수요일, 저녁 8시까지 매장을 본 후에 달리기를 하러 갈 예정이다. 달리기의 즐거움을 기대하며 지금은 다시 열심히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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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15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달리셨나요?

감은빛 2025-05-21 13:45   좋아요 0 | URL
이날은 저녁에 갑자기 친구가 찾아와서 달리지 못했네요.
대신 다른 날 달렸어요.
이젠 꾸준히 달리다보니, 한 며칠 안 달리면, 마음이 불편하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5-05-18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고하신 책 소개의 글, 엄청 잘 쓰셨네요. 프로 냄새가 납니다.ㅋㅋ
한 끼를 드신 날도 있다니 저처럼 세 끼 식사를 다하는 사람으로선 놀랄 일입니다. 아 그런데 저는 아침엔 탄수화물을 먹지 않고 찐 계란과 견과류 등을 먹어요. 빨리 커피 마시려고요.^^

감은빛 2025-05-21 13:49   좋아요 1 | URL
당시 책 소개 기사는 분량이 너무 적어서 매번 힘들었어요.
저는 짧은 글을 지독히도 못 써서요. ㅎㅎ

하루 한 끼 저녁만 먹는 습관은 제법 오래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걱정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요.
하루 한 끼만 먹으면 무엇을 먹든 맛있게 먹을 수 있고,
평소 몸이 가볍습니다.

다만 몸을 많이 쓰는 날이나 일정이 많은 날에는 점심을 먹습니다.
몸에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신호가 오거든요.

견과류와 계란 좋죠. 두부도 참 좋구요.
 

소년공 대 노동운동가


소년공 출신 이재명과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의 대결 구도라는 농담이 돌아다니고 있다. 김문수 30년 언더커버라는 농담은 정말 웃겼다. 일터에서 읽다가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 갑자기 무간도 시리즈도 생각나고, 신세계도 생각나고 말이지. 김문수와 한덕수 그리고 두 권씨의 해프닝은 그리 궁금하지 않고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기고 있다. 윤석열이 김문수를 지지해달라고 썼다는 것도 굳이 읽고 싶지 않아 지나친다. 말들이 많은 시국이다. 이 와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각 후보의 주요 공약일텐데,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훑어보니 어느 후보도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 공약이 없다. 이준석의 공약은 그냥 짜깁기에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이고, 김문수도 그냥 이딴 걸 공약이라고 내놓았나 싶다. 이재명도 마찬가지. 권영국 후보의 공약은 시의적절하고 괜찮은 공약이라 느낀다. 기후위기에 대한 내용도 중간 정도에 들어가 있다. 문제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계 했느냐 하는 부분일텐데, 이 점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거두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와중에 권영국 후보가 어느 공식 자리에서 합의되지 않은 에너지 정책을 언급했다가 문제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그리고 진보당 후보의 사퇴 이야기도 돌더라. 진보당이야 벌써부터 민주당을 모시고 사는 똘마니가 된 지 오래일텐데, 오히려 대선 후보를 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것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완주할 생각은 없었겠지.


점심 시간에 이런 저런 뉴스들을 주욱 살펴보다가 다시 일에 집중했고, 여러가지 일 중에 큰 덩어리의 일들을 대충 쳐내고 아까 잠시 숨 돌리러 SNS 에 접속했다가 박권일 씨가 쓴 글을 봤다. "이제는 부자/주식 보유자 세금을 너무 깎아주고 싶어진 소년공 출신 변호사. (+그런 자를 위해 후보 사퇴한 기생적 진보정당) 노동자 배반하고 내란범 옹호한 노동운동가 출신 도지사 호소인.

vs 철강 노동자 출신으로 평생 노동자/약자/소수자 편에 선 거리의 변호사" 이 내용 중에 '도지사 호소인' 이란 표현이 너무 재미있어서 또 한참 웃었다.


잠시 야구 이야기


정치 뉴스가 보기 싫지만 안 볼 수 없어서 흐름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보고 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제일 열심히 보는 것은 야구 중계와 야구 소식들이다. 올해 초 (흔히 조류 동맹이라 불리는)롯데와 한화는 나란히 밑바닥 순위로 떨어져, 역시 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4월이 되자 갑자기 양팀 모두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화는 12연승을 올리며 92년 빙그레 시절의 연승 기록을 따라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한화는 시즌 초의 엘지처럼 어진간하면 질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발과 불펜 모두 국내 최상의 전력인 투수력을 기반으로, 타선은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득점권에서 보여주는 집중력과 꼭 필요할 때 놓치지 않고 터져주는 덕분에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다. 엘지는 절대 1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개막 이후 한번도 1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노린다는 말까지 돌았었는데, 꼭 필요할 때 타선이 침묵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며 패배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화에서 1위를 내줬다. 개막 시리즈에서 롯데를 압도했던 모습을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롯데는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이다. 믿었던 1선발 반즈는 첫 경기부터 부진했고, 계속 부진하다가 결국 부상으로 빠졌다. 다행히 박세웅 선수가 작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고, 데이비슨 선수도 좋은 피칭으로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명을 제외하면 선발 투수가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대체 선발이 제대로 버텨주지 못하는 경기들에서 불펜 투수들이 무리하고 혹사를 당하고 연속으로 등판하다 보니, 초기에 괜찮았던 정철원 투수마저 요즘은 불안한 느낌이다. 구승민이 뒤늦게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김상수도 노장의 투혼을 보이고 있지만 부족한 느낌이다. 박진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고군분투 중인데, 여전히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송재영, 정현수 이 두 명의 좌투수는 잠깐씩 등판해 좌타자를 상대하는 용도로만 이용되고 있는데, 그 이상으로 성장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어제 등판한 이민석 투수. 신인이고 아직 등판 횟수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엄청난 투구를 보여줬다. 6회까지 케이티 타선을 1실점으로 잘 막아내었고, 투구 내용도 무척 좋았다. 무엇보다 150킬로 중반대의 강속구를 6이닝 동안 꾸준히 던지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롯데는 한화와 비슷하게 긴 시간 꼴찌 근처를 맴돌며 신인 지명권을 앞 자리에서 잘 받아왔을텐데, 한화와 달리 괜찮은 투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롯데의 투수 운은 90년대 중반부터 계속 안 좋았던 것 같다. 프로야구 개막 초기의 최동원이라는 걸출한 투수를 보유했던 것과 92년 우승 당시에 마운드를 책임졌던 박동희, 염종석, 윤학길 정도가 괜찮은 활약을 했던 것 같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야구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얼마나 괜찮은 투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간에 외국인 투수들 중에 꽤 활약한 투수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투수 이야기의 마무리는 이제 확실한 롯데 클로저가 된 김원중으로 해야지. 이번에 6년 연속 두자리 수 세이브를 올렸고, 이는 케이비오 역사상 5번째라고 한다. 작년에는 블론 세이브도 좀 있었고, 어이없는 역전패도 있었는데, 올해 피치클락 도입과 함께 탭댄스를 추는 듯한 루틴을 없애고 오히려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롯데의 최근 타선은 뜨겁다. 팀 타율 1위다. 장타율과 출루율 모두 선두권이다. 작년에 유행했던 윤고나황 중 윤동희는 중간에 2군으로 내려갔다 돌아와서 서서히 페이스를 되찾고 있고, 최근 황성빈이 손가락 골절로 이탈한 후 1번 타자로 아주 오랜만에 돌아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승민도 올해는 작년에 비해 많이 저조했다. 가끔 잊을만하면 제대로 활약을 하기는 하는데, 아직은 작년만큼은 아니다. 조금씩 돌아오리라 믿는다. 나승엽은 기대하지 않았던 홈런 7개를 때려내며 이대호 은퇴 이후로 볼 수 없었던 거포의 귀한을 보여주는 듯하다. 득점권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올해 가장 큰 성장을 이룬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황성빈도 올해 초에는 부진했으나 4월에는 엄청난 타격감과 주루 플레이로 팬들을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일단 황성빈이 뛰기 시작하면 롯데가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무리하게 1루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가 손가락 골절을 당해 장기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작년 롯데 타선은 윤고나황 외에도 레이예스와 전준우 그리고 손호영의 활약을 빼고 말할 수 없다. 레이예스는 작년에 202 안타를 쳐서 한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을 갱신했다. 외국인 타자로서 장타력 특히 홈런은 좀 아쉽지만, 안타를 쳐내는 감각은 탁월하다. 전준우는 롯데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길을 묵묵히 잘 가고 있다. 베테랑으로서 적소에 적절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올해 좀 저조했으나 이젠 확실히 타격감이 살아난 것으로 보인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손호영이 연속경기 안타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엘지에서 이적해 왔는데, 이 정도로 활약을 펼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 손호영은 아직도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손호영이 좀 더 살아나고 좀 더 장타력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에 손호영이 있었다면, 올해는 전민재가 있었다. 두산에서 온 전민재는 롯데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유격수 자리를 훌륭하게 채워줬다. 수비도 훌륭했지만, 타석에서의 활약도 그에 못지 않았다. 시즌 초에는 긴 시간 타율 1위였고, 꽤 오랫동안 혼자 4할대를 유지해왔다. 두산에서 백업 선수였던 그는 롯데에 와서 그야말로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투수가 던진 공을 얼굴에 맞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해 지금은 엔트리에서 빠져있다. 다시 돌아와 활약을 펼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민재가 빠진 자리를 신인 이호준이 다시 든든하게 맡아주었다. 아직 조금은 경험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는데, 신인 치고는 훌륭한 수비와 타격 실력을 가졌다. 전민재 부상 직후 경기였던가 3루타와 2루타 그리고 단타를 연속으로 쳐내는 모습을 보며, 기회가 오면 붙잡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데 이호준 선수 마저 어제 경기에서 투수가 던진 공을 머리에 맞고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롯데 유격수 잔혹사라고 해야 하나? 아주 긴 시간 제대로 된 유격수가 없어서 고민이었던 롯데였는데, 올 시즌 갑자기 젊고 괜찮은 유격수가 둘이나 나타났는데, 왜 둘 다 투수에게 헤드샷을 맞냐고! 안그래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롯데인데, 반즈, 전민재, 황성빈 등 선수들의 부상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올해 롯데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지도 모르겠다 라고 기대를 품고 있는 중인데, 제발 다친 선수들이 잘 회복해서 돌아오고, 이제 더는 다치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투수진이 여러운 상황에서 고생하는 만큼 타선이 열심히 점수를 벌어다 주길 바란다. 호타준족이라고 90년대 롯데 타자들이 대체로 때리고 달리면 2루는 기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 것처럼 지금의 젊은 타자들이 대체로 2루타는 잘 치는 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후속타가 안 나와서 잔루가 남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제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는 만루 찬스만 몇 번을 놓친 것인지. 잘 하는 경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모습을 보이지만, 한번씩 보이는 무력한 모습을 보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난다. 


작년에는 여러 차례 아이들과 야구장을 갔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나도 정말 좋았다. 하지만, 수도권에서 본 원정 경기는 모두 패배하여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나마 부산 사직에서 본 경기에서 롯데가 홈런과 함께 화끈하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줘서 아이들이 정말 기뻐했다. 올해는 바빠서 아직 야구장을 갈 여유가 없기도 하고, 작년보다 표를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약간 엄두가 안 나기도 한 상황이다. 그리고 사직을 한 번 다녀온 후로 원정 경기를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은 기분이기도 하다. 아이들도 저마다 작년 보다 더 바빠진 모습이고. 여름에 한 번 더 사직에 가보고 싶은데, 그때 좋은 자리에 표가 구해지기를 바란다.


장거리 출퇴근


애들 엄마가 1주일 정도 유럽으로 출장을 갔다. 아이들 어릴 때에는 혼자 두 녀석을 챙기며 출퇴근 하는 것이 참 힘들었는데, 이젠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 뭐 크게 신경쓸 일을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파주에 있는 아이들 집에서 한 동안 머무르려고 짐을 챙겨서 갔다. 성인이 된 큰 아이는 굳이 아빠가 안 오셔도 제가 동생 잘 챙길게요 라고 말을 해놓고는, 첫날 부터 조별 과제 분량이 갑자기 늘어났다며 친구 집에서 밤 늦게까지 과제하다가 그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즉, 내가 가지 않았다면 아직 사춘기인 작은 아이가 혼자 밤을 보내야 상황이 될 뻔했다.


오늘 아침에 파주에서 출근하면서 일찍 나선다고 나섰음에도 생각보다는 오래 걸리는 모습을 보고, 긴 시간 동네에서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는 삶을 살아왔던 내가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고 있었는가 생각했다. 오늘을 비롯해 밤늦게까지 회의가 있는 날에는 파주까지 퇴근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서 그런 경우에는 서울에서 잘 거라고 미리 말을 해뒀다.


오래 전에 아이들이 어렸을 당시에 애들 엄마가 유럽 출장을 갔을 때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단순히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을 준비시켜서 학교와 어린이집을 보내고, 다시 저녁에 퇴근하자마자 서둘러서 방과후 교실과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가는 것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는 상황 때문에 정말 힘들었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고 보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아이들은 최근에 부모 보다는 세 고양이를 훨씬 더 좋아한다. 


오늘은 저녁에 일정이 두 개나 있다. 밀린 일들을 좀 쳐내려면 하루 정도는 야근을 해야 할텐데, 파주까지 가려면 야근까지 하기가 어렵다. 바쁜 일주일이 될 것이다. 일정 조정을 잘 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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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13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아이들이 고양이 세마리와 함께 사나요? 아이들을 위해서도 부모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고양이들을 위해서도 좋은 동거일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동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은빛 2025-05-14 13:44   좋아요 0 | URL
네, 작년까지는 두 마리였는데, 최근에 한 마리가 더 늘었어요.
애들 엄마가 자꾸 길고양이를 데려오고 있어요.
고양이는 영역 다툼을 하는 동물이라 한동안 살벌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어요.

잉크냄새 2025-05-14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동운동가 출신은 노동자를 완전히 잊었지만 소년공 출신은 노동자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은빛 2025-05-21 12:59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바람입니다만, 벌써 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이번 대선에는 찍을 후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권영국 후보가 어렵게 등록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이게 자본의 힘이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로 이뤄진 선본이라는 점이
제일 감동적인 지점입니다.

페크pek0501 2025-05-18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둘째애가 어릴 때 제게 너무 달라붙어 우리 친구들 모임에까지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들이 그 애한테 붙여 준 별명이 껌딱지, 였어요. 엄마랑 딱 붙어 있어서죠. 그런데 그 애가 이젠 다 커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더 즐기죠. 한편으론 편하고 한편으론 섭섭하고 그렇습니다.^^

감은빛 2025-05-21 13:12   좋아요 1 | URL
우리 둘째도 첫째에 비하면 엄마 껌딱지였어요.
어쩌면 심리적으로 첫째에 비해 둘째가 더 엄마를 찾는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이제 성인이 되고 청소년이 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 어렸을 때 모습들이 보여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더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또 한 편으로 우리 부모님도 이제 늙어가는 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매일은 아니고 자주 확인하는 북플 앱의 ‘지난 오늘‘ 메뉴에서 4개의 글을 확인했다. 확실히 특정한 날에 글을 더 많이 쓰고, 어떤 날에는 전혀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연휴 중 어떤 날에 짧게 북플에 접속했다가 과거에 한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또 어떤 날엔 하나 정도는 글이 있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 확인한 과거 오늘 쓴 글은 앞에서 말했듯이 4개였다. 재미있는 것은 첫글과 둘째글이 1년 사이에 쓴 것이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셋째글과 넷째글이 또 1년 사이에 쓴 글이었다. 그 가운데 꽤 긴 시간은 내가 이 알라딘 서재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기간이었다. 그때는 좀 더 대중적인 블로그 시스템을 갖춘 곳에 일상 이야기를 올리는 내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서비스가 없어지면서 몇 년간 올렸던 내 글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때 충격이 좀 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중요한 글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내 일상의 이야기들은 나중에 미래의 내가 본 입장에서는 정말로 소중한 기억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자본의 논리 때문에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그 글들을 다른 공간으로 옮기는 유예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정신 없이 바빴다. 그런 것들을 챙기지 못했고, 결국 블로그 서비스는 문으 닫았고, 나는 엄청 긴 시간 가끔 기록했던 일상의 기록들을 잃었다.

만약 불시에 알라딘 서재가 문을 닫는다면, 나는 또 다시 그때 이후의 일상의 기록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이번에는 백업을 꼭 받아두거나, 다른 곳으로 꼭 옮겨두어야지.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작은 메모 하나고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되었으니.

과거 오늘 올렸던 글 4개 중에 흥미로운 것이 두 개 있었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4개 모두 흥미롭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다. 일단 하나는 아이들의 유아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언젠가 유아어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과거에 했었다고 떠올릴 수 있는 글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같을 수 없다. 비슷할 수는 있다. 어떤 하나의 상황을 보고 다수가 비슷한 생각과 판단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걸 아주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다 다른 판단과 감정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유명한 스포츠 스타의 엄청난 업적을 보며, 해당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인지하는 세상이 바뀔 정도의 감흥을 얻겠지만, 그 스포츠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건 와! 하고 한번 아주 짧게 감탄하고 마는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사건일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면 최근에 본 [승부]라는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둑이라는 문화에 나는 어려서부터 익숙했다. 지금도 나는 화투라는 이름의 게임을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었다. 어떻게 화투를 칠 줄 모른다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지금은 그 말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수도 있는데, 90년대에는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모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화투라는 일본의 게임이자 도박을 익숙하게 접했던 것이다. 내가 화투를 배우지 못한 이유는 명확하다. 내 기준에선 친가와 외가 모두 화투를 치는 문화가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단 한 번도 화투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화투라는 게임을 배울 수 없었다.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화투를 몰랐던 것은 우리 집안에서 도박을 하지 않았고, 나도 도박은 무조건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도박이 아니라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써 화투를 잠시 배우기는 했다. 룰을 조금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다른 사람들과 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아주 조금만 더 옆길로 빠져보면, 다 늙은 이 나이에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고 말하면 대부분 거짓말 하지 마시라고 반응했다가, 거짓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말하면, 어쩔줄을 몰라하는 반응을 본다. 자전거 하나 없이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 덕분에 나는 다 늙어서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는 것 배운 과정이 어린 시절 지나쳐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라 그렇게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배워보려고 마음 먹었던 내 기준에서는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혼자 언제든 탈 수 없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텅 빈 넓은 공간에서만 탈 수 있다. 눈 앞에 사람이나 차량이 나타나면 나는 어쩔줄을 몰라 넘어져버린다.

자, 내가 왜 영화 [승부]와 바둑 이야기를 하다가 화투 이야기로 넘어갔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바둑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투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신 바둑을 두는 모습을 늘 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수읽기에 빠져있는 모습은 어린 아이가 보기엔 재미없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내 기준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바둑이란 걸 두는구나. 그럼 나도 바둑을 공부해야 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화투만 쳤다면, 나도 아마 어려서부터 화투를 배웠을 것이다.

자, 다시 과거 오늘 쓴 글 중에 유아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참 재미있는 것이 대체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재미있고 독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인생의 큰 관문을 건넌다. 그래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 수다를 떨며 정보를 나누고, 각자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주위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유아어였다. 아직 어린 아가들이 자신만의 표현으로 발음하는 단어들.

큰 아이는 삼촌을 부를 때, ‘찌쭝‘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큰 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하는데, 대체 왜 삼촌을 그렇게 발음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에 아기였던, 아이에게는 그렇게 들렸거나, 그렇게 발음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에 작은 아이는 삼촌을 ‘땀똔‘이라 불렀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작은 아이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아기들이 비슷한 발음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찌쭝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큰 아이는 계란을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계란이 귀했다. 비쌌다. 그래서 가장인 아버지만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가 계란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며 침을 삼키는 풍경, 이것이 80년대와 그 이전 시대를 그리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아마 어머니는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계란을 비싸게 사면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도 주고 싶지만, 돈 벌어오는 남편에게만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 하시지 않았을까.

암튼 우리 큰 아이는 계란을 아주 좋아했고, 아주 특이하게 발음했다. ‘기랑‘이라고 발음했는데, 이 ‘기‘자의 발음이 독일어 R 발음처럼, ‘키‘와 ‘히‘ 중간 발음 같은 느낌으로 혀를 굴려서 나오는 발음이었다. 애들 엄마가 독일어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독일어 신동인 아기가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유아어는 정말 유아어였다. 아이는 조금 더 자라자마자 곧 그 발음을 잊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이 그런 발음과 표현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큰 아이의 경우에는 나로서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처음이라 사소한 경험들을 제법 남겨두어, 여러 유아어에 대해 기록을 해두었고, 나중에 그걸 적었던 것이 2013년 오늘 쓴 글이었다. 작은 아이는 상대적으로 기록을 많이 남겨두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다만 작은 아이는 언어의 측면에서는 주위 아이를 키우는 다른 부모들에게 들은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유아어도 기억에 남을 만할 독특한 표현들이 없었는데 반해, 행동 발달 측면에서는 정말 달랐다. 이 녀석은 큰 아이와 비교해 모든 지표에서 아주 빨랐다. 큰 아이였다면 아직 배밀이를 하고 있을 정도의 월령에 작은 아이는 본인 키보다 더 큰 인형을 끌고 익숙하게 걸어다녔다.

2010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 나는 작은 아이에게서 재미있는 혹은 독특한 유아어가 없는지 유심히 살폈던 것 같다. 하지만 큰 아이의 경우처럼 독특한 단어가 들리지는 않았다. 이건 어쩌면 아이가 가진 개성, 재능과 연관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당시에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확실히 재미는 있다. 당시의 내가 좀 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있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유아어에 대한 연구를 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느꼈을 때부터 긴 시간 글을 쓰면서 습관처럼 굳어진 것이 있다고 느끼는데, 서두에 과도하게 분량을 많이 두고, 쓸데없이 힘을 빼는 것이고, 중간에 자꾸 쓸데없이 곁가지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이게 거의 평생 굳어져 온 습관이라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최근에 느낀다. 혼자 개인적으로 쓰는 글에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청탁 받은 글, 기고문, 성명서나 논평 등 공식적인 글에서도 자꾸 이 습관을 떨쳐내지 못해 부끄럽거나 곤혹스러운 상황을 자주 겪는다. 예전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쓴 성명서나 논평을 보면 핵심을 분명히 짚고, 우리의 주장만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지금 내가 다시 봐도 꽤 잘 쓴 글이었는데, 지금 그런 성격의 글을 쓰려고 하면, 안 써진다.

지난달에 청탁받아서 쓴 기고글은 그런 의미에서 최악의 글이었다. 시간 여유가 너무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쓴 글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엉망이었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친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활동가 동료 서너 명에게 글을 보내어 좀 봐달라고 요청했었다. 남성 활동가 몇 명은 내 기대를 저버리고 성의 없게 잘 썼네 하고 말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존중하는 여성 활동가는 아주 구체적으로 의견을 전해줬다. 비록 일부는 문장의 구성까지 건드려서 아주 살짝 내 자존감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내게 필요한 의견이었고, 그를 바탕으로 다시 기고글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쉽게 수정할 수 있었다.

알고 있다. 내 글이, 내가 쓰는 스타일이 쉽지 않고 별로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친한 친구가 늘 하는 말, 형은 서론이 너무 길어. 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을.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서론을 풀어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더 많이 들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곁가지로 빠져서 어쩌면 엉뚱한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본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글을 쓰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흔히 성급한 사람들이 나의 조금은 긴 서두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길다고 비판하곤 하는데, 사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집중하게 되는 것이 본 이야기가 아니라 서두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 이야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서두에서 이미 이 이야기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서두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몰두하는 편이었고, 그런 성향이 지금 좀 과하게 관심을 모으는 차원의 서두를 만드는 것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암튼, 내 생각에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감응하는 것은 그 이야기의 교훈이나 올바름이 아니다. 본 편의 흥미와 빠른 전개도 필요하고, 클라이막스의 흥분과 반전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사실 서두에서 독자와 청자의 흥미를 가져오지 못하면 사실 본 이야기에 접근할 기회조차 잃는다. 서두를 잘 풀어내지 못하면 본 편은 그냥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친한 친구가 서두가 너무 길다고 표현한 것을 염두에 두고 반영해야 하겠지만, 그 만큼 내가 서두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편이라는 것을 대개 사람들은 모른다.

내 생각에 감동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연결되는 독특함과 독창적인 어떤 하나의 점에서 온다. 나는 그 밑밥을 서두에 깔아두기 위해 철저히 계산해서 서두에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는데, 종종 그것이 과해서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글이나 말에서 이런 나의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공식적인 성격의 글에서도 내 방식을 접목해서 효과를 거둘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는 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남들이 잘 쓰는 방식의 글은 오히려 잘 못 쓰는 사람이라 느낀다. 어릴 때는 내가 글을 좀 쓴다고 자만심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 사이에서 내 글을 그저 한심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여기서 나를 드러나는 방식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익숙한 것을 잘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좀 길고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서두를 잘 풀어내어 본 내용에 연결시켜, 사람들이 느끼기에 아! 하고 환기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고, 대체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수 있다.

아까 영화 [승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영화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라고 본다. 비교적 젋은 나이에 받아들인 엄청난 재능을 가진 제자. 이 제자가 아직 청소년이었을 때 자신을 넘어선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스승의 입장은 과연 어떨까? 이병헌 이라는 연기의 신이라 부를 만한 배우가 연기한 조훈현 9단은 정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싱크로율 99.9999퍼세트라고 부를만하다. 과거의 뉴스나 언론에 나온 모습들을 그대로 재현한 장면들은 칭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관객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영리한 장치들이었다.

유아인은 음, 솔직히 연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꼭 칭찬을 남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런 내 생각이 그의 마약 투약 등 사회적 기준의 범죄 행위에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아인의 연기는 늘 미묘한 위화감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단 하나 유아인의 연기가 좋았다고 칭찬할 만한 영화는 [소리도 없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연기. 그만큼 그 배우의 발음과 발성은 좋지 못했다. 연기를 하면서 왜 이렇게 떨리는 발성이 많은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생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보니 정말 심하게 떨면서 말을 하더라.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어쩌면 그래서 이 사람이 마약에 기댈수 밖에 없었던 걸까? 암튼 유아인의 약물 문제 때문에 다 찍어놓은 이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어쩌면 영영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병헌의 신들린 연기를 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을 것 같다. 물론 이병헌도 과거 성범죄 논란이 있었다. 실제 상황은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그런 논란 만으로도 이 배우에 대한 실망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양가감정이 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도덕적, 상식적인 잣대로 배우를 외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양심 사이의 갈등.

지금 이 시점에서 문득 깨닫는다. 사실 나는 과거 오늘 쓴 글들 중에서 두 개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서 유아어와 문화에 대해 다루고 싶었고, 그 중 특히 최근에 본 영화인 [승부]를 모티브로 바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계속 다른 이야기인 화투와 글쓰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과 분량을 써버렸다. 음, 그렇다. 나는 이렇게 글을 못쓰는 사람이다. 바둑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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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10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헌이 연기력으로 깔 수 없다는 사실은 이번 승부에서도 잘 들어났지요.그런데 이병헌은 과거 미성연자 성범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혼 이후에도 젊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희망하는 녹취로 인한 협박으로 논란이 된것이지요.근데 이건 부인이 이민정이 뭐라 안하니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 하기가 힘들더군요.

감은빛 2025-05-14 14:06   좋아요 0 | URL
이병헌 배우에 대한 부분은 제가 착각했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쓴 부분은 저의 큰 실수입니다.
정확하게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카스피님.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이병헌 배우는 국내 영화나 드라마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영어 연기도 꽤 좋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바람돌이 2025-05-10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기록은 여기 알라딘 서재에 다 있는데 여기가 갑자기 문을 닫아 내 글이 사라진다라면 제겐 진짜 재앙입니다. ㅎㅎ 유아어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우리집 큰 애의 유아어가 생각나서 즐거웠습니다. 큰 애는 자기를 지칭할 때 ‘이예‘라고 했는데 이게 얼토당토않은 발음이라 이해할 수 없었다죠. ㅎㅎ 내 생각에 감동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연결되는 독특함과 독창적인 어떤 하나의 점에서 온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또 그걸 엮어내는건 다른 문제인거 같아서 글을 잘 쓴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싶어요. 그래도 감은빛님의 글은 항상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어서 저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은빛 2025-05-14 14:08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알라딘이 오래도록 잘 운영하기를,
만약 서재를 닫는다면 백업 기능을 반드시 제공해주기를 바라야 하겠네요.

유아어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음들이 많아서
독특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공감해주시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글이라고 해주시니, 어깨를 으쓱 해 봅니다. ㅎㅎ

희선 2025-05-11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써둔 곳이 없어지면 무척 아쉽겠습니다 그때까지 써둔 글이 다 사라질 테니... 알라딘은 사람들이 책을 사고 서재에 글을 쓰면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요 그래야 할 텐데... 영원한 건 없다고 하니 여기도 언젠가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많은 사람이 한다고 해도 그걸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죠 저도 그런 거 많아요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도 그것도 몰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 있을지도...


희선

감은빛 2025-05-14 14:14   좋아요 0 | URL
블로그란 공간이 내 공간인 줄 알았는데,
결국 기업이 운영하는 곳이고,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였어요.

홈페이지도 마찬가지겠죠.
도메인과 서버 비용 등을 내지 않으면 없어져 버리더라구요.

알라딘을 포함해 기업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현명하게 잘 이용해야 하겠습니다.
 

고군산군도, 부안 내소사, 고창 선운사


어린이 날이 포함된 연휴라 아이들과 어디 놀러 갈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했으나, 아이들은 이미 애들엄마와 놀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 한발 늦었구나. 나는 그냥 조용히 혼자 집에서 영화나 보고,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연휴 거의 직전에 친한 친구가 전북 고창에 귀농한 친한 형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형님이 귀농하시기 전에 한동안 제법 친하게 지냈었는데, 몇 해 전에 귀농하신 이후로는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었다. 반면 놀러 가자고 제안했던 친구는 그 형님과 잘 알지 못했는데, 동네 등산 모임에서 어쩌다 그 형님과 친한 다른 사람 덕분에 그 집에 놀러 갔었다고 했다. 나는 이미 연휴에 집에서 조용히 지내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는데, 그 형님과 몇 해 동안 연락을 못 하고 지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연락을 드려봤다. 형님은 반갑게 전화를 받으시고는 언제든 편하게 놀러 오라고 하셨다. 일단 날을 잡고 나서 함께 놀러 갈 다른 사람들이 혹시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을 제안했던 친구는 사람들을 더 모아서 가려고 친한 사람들 중심으로 더 제안을 해봤는데, 거의 연휴 직전이어서 다들 이미 다른 일정이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와 단 둘이서 아침 일찍 만나서 출발했다. 여행 전날 밤에 악몽을 꾸느라 같은 악몽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꾸면서 몇 번이나 잠을 깨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로, 피곤한 몸으로 출발했다. 거기에 연휴 시작 시점부터 계속 얼굴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심했다. 통증 부위가 살짝 더 부어올랐고, 여러 형태의 통증들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며 사람을 괴롭혔다. 게다가 통증 부위가 바로 눈 밑이라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으면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어버릴까봐,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혼자 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혼자 속으로만 통증을 견디며 보냈다. 


고창까지는 먼 길이다. 중간에 운전하던 녀석이 피곤하다며 휴게소에 들렸을 때, 운전 교대를 제안했다. 녀석 혼자 오가는 길을 다 운전하게 할 수는 없으니, 체면 상 내가 한 번 정도는 운전을 해야 할텐데, 돌아오는 길은 녀석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려가는 길에 내가 운전을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았는데, 낯선 차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했고,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통증이 자꾸 눈에 영향을 미쳐서 혹시라도 내가 실수를 하게 될까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일단 핸들이 좀 빡빡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엑셀과 브레이크 유격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옆에 앉은 친구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면서, 눈이 불편해도 일부러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건만.


고창의 형님은 낮에 농사일과 소 키우는 일을 하셔야 해서 저녁이나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 7시쯤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막히지 않아서 수월하게 군산까지 내려왔다. 친구는 우선 새만금 방조제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를 가보자고 했다. 녀석이 얼마 전에 다녀왔었는데, 제법 좋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운동에 참여했었다. 내가 공저자로 참여했던 첫 책 [100인의 책마을]에 실었던 원고에도 그 이야기를 썼었다. 당시 나는 새만금 투쟁이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졌다가 실패하면서 그 결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투쟁 이후로 새만금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었다. 4공구 기습 점거 투쟁 이후 20년이 훌쩍 지났다. 나와 함께 간 친구는 방조제로 인한 환경오염과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방조제 덕분에 고군산군도를 차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며,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군산에서 방조제로 조금 들어갔다가 선유도 방향으로 빠져서 신시도, 무녀도를 지나 선유도에 차를 대고 보행자 전용 다리인 스카이워크(왜 이름을 영어로 이렇게 촌스럽게 지었을까>)를 건너서 장자도로 들어갔다. 풍경이 멋졌다. 그곳에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걸으면서도 나는 그 옛날 새만금 4공구의 그 날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걸었던 노무현 정부는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막바지에 전국의 거의 대다수 덤프 트럭을 동원해 밤낮없이 바위와 흙을 퍼날라 부어서 원래 예정된 공사기일을 크게 앞당겨 물막이 공사를 끝낼 참이었다.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적으로 비상선언을 하고 부안성당에 모였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몸으로 물막이 공사를 막다가 끌려 나오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빠른 시간 안에 바위와 흙으로만 방조제 뼈대를 쌓아서 물막이 공사가 끝나버렸다. 이에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약 80여명의 활동가들을 모아 비상 작전을 실시했다. 4공구 기습 점거 및 해수유통 행동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은 밤까지 작은 읍내인 부안에 직접 들어오지 않고 인근에 잠복해 있다가 자정이 넘어서 부안성당에 모였다. 새벽에 새만금 개척사업에 반대하는 어민들의 협력을 얻어 어선 여러 대를 얻어 타고 4공구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방조제 위에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우리는 삽과 곡갱이로 바위와 흙을 파나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해가 뜨고 사방이 밝아질 무렵 방조제 위쪽을 파내어 다시 해수를 유통 시켰다. 막혔던 물길을 임시로 다시 뚫었던 것이다. 그 무렵 소식을 접한 언론사 기자들과 시공사와 농어촌공사 직원들이 몰려왔다. 곧이어 전경들이 엄청나게 몰려왔고, 이어서 새만금 개발 추진협의회(새추협)라는 이름을 앞세운 용역 깡패들이 나타났다. 깡패들이 타고온 배는 물대포가 장착되어 있어서 바닷물을 강하게 뿌렸다. 경찰 물대포도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뒤로 밀리고 휘청거리듯이 그 해수 물대포도 엄청 강해서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휘청 거렸다. 얼굴이라도 맞으면 소금물이라 눈이 따갑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 깡패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바닷물에 빠뜨리려고 했다. 우리는 여성 활동가들을 안쪽으로 배치하고, 남성들이 여려겹으로 바깥에 둥글게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더러 머리채를 잡히거나 수염을 잡혀(중년의 남성 활동가들은 수염을 기른 이들이 제법 있었다.) 끌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깡패들이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전경들은 그 주위에 도열해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이 되어 전북환경연합에서 빵과 물 등 우리가 먹을 것들을 배로 싣고 왔는데, 깡패들이 이 음식들을 빼앗아 죄다 바다에 던져버렸다. 


용역들이 몇 차례 우리를 뒤흔들어 놓다가 지쳤는지 빠져 있는 동안 이제는 전경들이 우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수였고, 전경들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으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우리가 전경들에게 밀려 뒤로 또 뒤로 물러나는 동안 저 멀리서 포크레인이 나타나더니 우리가 새벽에 몇 시간이나 걸려서 삽과 곡갱이로 파서 해수를 유통시켜 놓은 것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손으로 팔 때에는 몇 시간이나 걸렸지만, 포크레인은 채 몇 분이 걸리지도 않아 모두 원상태로 만들었다. 허무했다. 당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혹은 시민사회 수석이 새만금 재검토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이 방조제를 점거하고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로 새벽에 불시에 기습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채 24시간도 버티기 전에 많은 활동가들이 지치기는 했다. 용역 깡패들은 계속 폭력을 휘둘렀고, 여성 활동가 두 명이 그들이 던진 물병 등에 맞아 실신해서 병원으로 실려 나갔다. 그럼에도 전경들은 깡패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우리만 괴롭혔다. 깡패들이 빠지면 전경들이 달려들고, 전경들이 빠지면 다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밤새 삽질과 곡갱이질이라는 고된 노동을 하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아 온 몸은 쫄딱 젖어 있었으며, 아침이 되자마자 깡패들과 전경들의 폭력에 번갈아 시달리며 몇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다들 지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록 점심으로 전달 받으려던 빵과 물도 죄다 빼앗겨 버려졌지만, 우리는 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랑 소통하던 서울의 상황실에서는 청와대가 처음에는 당황하고 난처해하다가 시간이 갈 수록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며, 더 무리하지 말고 철수하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연차가 제법 있는 선배 활동가들은 다들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나갈 수는 없다고. 비록 밤이 춥더라도, 하루쯤 더 굶더라도 이렇게는 나갈 수 없다고 버티자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우리 몫이 아니라 서울의 상황실에 맡겨진 임무라고 했다. 나갈 수 없다고 버티던 선배 활동가들도 결국 위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나보다. 둘째날 저녁이 다 되어서 우리는 긴 방조제를 터덜터덜 걸어서 나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간다고 하니 친절하게 길을 터줬다. 용역들은 점심 시간에 배를 타고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온 후로는 그렇게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다가 철수한 후였다. 오락가락 비를 계속 맞기도 했고, 안 하던 곡괭이질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거기에 용역 깡패들과 전경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탓에 너무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고생을 하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냥 내 발로 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방조제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속상했다. 그때 그 감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고군산군도를 대충 둘러보고 차를 타고 나와서 다시 방조제 위를 지났다. 지도를 보며 내가 당시에 기습 점거했던 4공구가 어디쯤일지 가늠해보려고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 부안에서 접근하는 방조제 입구에서 차로 얼마나 걸리는 곳일까? 당시 내가 걸어서 나오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1시간쯤이었을까? 확실히 30분 보다는 길었던 것 같다. 방조제 위를 차로 지나며 계속 그날의 그 감정에 곱씹어 보았다. 씁쓸했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자 석가탄신일이었다. 우리는 내소사 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내소사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내소사는 처음 와봤는데 절이 참 좋았다. 특히 대웅전이 웅장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게 예쁘기도 하고 정말 멋있었다. 예전부터 문화유산 답사도 다니고 하면서 절을 제법 다녀봤는데, 이렇게 멋진 대웅전은 몇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소사를 적당히 즐기는데 비가 오락가락 했다. 아까 장자도에 있을 때부터 비가 어중간하게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고창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는 15년? 16년 전쯤에 어느 소설가와 시인의 결혼식 때문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당시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진입로를 걸어가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났다. 진입로의 기억과 풍경이 좋아서 비를 맞으면서도 기분이 괜찮았는데, 절에 들어서자마자 확 기분이 나빠졌다. 경내에서 조그맣게 무대를 만들어 조잡한 스피커로 뽕짝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자랑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가 조잡하다 보니 반주의 음질이 형편없었고,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실력도 참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좀 차분하게 조용하게 절을 즐기다 가고 싶었는데, 시끄러운 뽕짝 음악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대웅전과 그 주위를 휘휘 돌아보고는 그냥 나왔다. 그 와중에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대법원의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과 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 재판 연기


이번에 나와 함께 고창에 다녀온 친구는 지역 녹색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녀석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재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서 나와 언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이 친구의 그런 성향 탓에 몇 차례 부딪힌 후로는 가능하면 민감한 주제를 피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서울을 나서는 동안 라디오로 시사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계속 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는 사실 이재명이나 저쪽 빨간당 후보들이나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 대해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만, 이례적으로 아니 말도 안되고 빠르게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태도는 무조건 비판 받을 만 했다고 여긴다. 내가 법조인은 아니니 2심의 판결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따질 입장은 아니고, 그저 태도의 문제로서 비판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 대법관들이 이재명을 제거하려고 정치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까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가 뭐라고 떠들던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든 나는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나빴고, 심지어 얼굴 통증이 심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연휴 내내 어디를 가도 이 이야기 밖에 없었다. 식당에 앉아 있을 때에도 옆 테이블과 그 옆 테이블 모두 이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고, 온라인에서도 다들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고등법원에서 파기환송심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제서야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으려나. 어쨌거나 김문수와 한덕수가 단일화를 하더라도 이재명이 당선되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권영국 후보가 무사히 후보 등록을 마치고 완주하여, 몇 퍼센트의 득표를 올릴 것인지가 이번 대선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권영국 후보가 없었다면 이번에도 투표장에서 그냥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을텐데, 그나마 찍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다. 그가 기탁금을 잘 모아서 후보 등록을 잘 마친다면 말이다.


달리기 이야기


지지난 주에 달리기 모임에서 함께 달리는 형과 가볍게 30분 달리기를 하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다. 이 형이 꽤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날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둘이 종종 30분 동안 6킬로 정도 달리기를 하면 우리 보다 빠른 사람들을 만날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혼자 10킬로미터에서 20킬로미터 사이를 긴 시간 달리다보면 나보다 빠른 사람들을 제법 만나게 되는데, 신기하게 그 형이랑 달릴 때에는 그닥 보지 못했었다. 이 형은 본 실력은 나보다 훨 빠르지만, 나랑 같이 달릴 때에는 가볍게 거의 내 페이스에 맞춰 달리곤 했었다. 그러다 두어번 우리를 추월해가는 젊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게 아마 3월 초였을 것이다. 우리가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오고 있을 때 아마 한 4킬로에서 5킬로 사이 정도에서 아주 빠르게 우리를 추월해 가는 키 크고 체격이 좋은 남성이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젊어 보였다. 그 형은 나를 돌아보면 "어떻게? 따라가 봐?"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형, 우리 못 따라가." 라고 말했다. 나는 겨울 동안 짧은 거리만 달리고 장거리 달리기를 쉬어서 그만큼 체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 보기에 그 형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린 이제 다 늙은 사람들이라 젊은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형은 아마 혼자였다면 따라가봤을텐데, 내 눈치를 보느라 못 간 것이 아쉬웠는지 여러 차례 나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나는 계속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약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지난 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와 대충 4킬로 근처였다. 젊은 여성이었다. 우리를 추월하기는 했지만, 아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를 제친 후에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조금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때 앞서 뛰던 이 형이 또 나를 돌아봤다. "어때? 이번엔 따라가 봐?" 라고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형, 아마 우리 이번에도 못 따라갈 걸." 라고 말했다. 이 여성은 그렇게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저 멀리서 다시 속도를 줄였다. 어쩌면 인터벌 훈련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속도를 확 줄이자 우리가 금방 따라잡았다. 아마 형이 무의식 중에 속도를 조금 올렸으리라. 그렇게 한동안 비슷하게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가 다시 속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그 분과 우리는 꽤 긴 거리를 비슷하게 달렸다. 우리는 우리 페이스에서 무리하지 않고 일정하게 달렸고, 그는 빠르게 뛰다가 속도를 확 줄이기를 반복했는데, 거의 비슷한 페이스가 나왔다. 그러다 아마 5.5 아니 한 5.3 정도 지점에서 이 분이 다시 빠르게 속도를 높였는데, 이 형이 앞에서 뭐라고 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뭐라고 하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속도를 높여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아, 근데 이 형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미 조금 지쳤던 나로서는 따라가기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전력질주 해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신나게 달리기는 했다. 그리고 뒤쳐지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형 뒤를 따라다닌 것이 이제 7개월쯤 되려나? 겨울 동안 안 달렸으니 거기서 3달을 빼면 4개월? 이젠 이 형이 속도를 맘껏 내도 뒤쳐지지는 않고 따라갈 정도는 되었구나. 아직 이 형을 앞지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목적지까지 전력질주를 마치고 들어보니 아까 그 분을 따라가려고 속도를 냈던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빨라진 형을 쫓느라 그 여성 분은 신경도 못 써서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오랜만에 15 아니 거의 16킬로


연휴 내내 얼굴 통증에 시달리느라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고창으로 출발하기 전에는 만약 통증이 좀 나아지고, 컨디션이 회복되면 짧게라도 달려보려고 런닝복을 따로 챙겨갔었는데, 꺼내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 8시에 일을 마치고 달리기를 하러 나섰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15 정도 달려볼 생각이었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달리기를 제법 쉬었던 만큼 근육 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11월 중순에 15에서 19 사이의 거리를 종종 뛰었던 것에 비하면 올해는 두 차례의 10킬로 대회를 제외하면 대부분 5~6 킬로 수준으로만 뛰었다. 딱 한 번 대회 직전에 8킬로를 뛰었던 것이 대회를 제외하면 가장 먼 거리였다.


오늘은 몇 차례 시도해다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던, 소위 말하는 존2 달리기, 혹은 LSD를 해볼 생각이었다. 시작부터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게 뛰었다. 심박수가 올라가지 않게, 호흡이 가빠지지 않게 신경쓰며 가볍게 뛰려고 했다. 평소 즐기던 롤링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툭툭 발을 옮겼다. 해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서 날이 너무 추워졌다. 시작 전에 가볍게 몸을 풀면서 조금 떨렸는데, 딱 2킬로 정도 뛰니까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3킬로 지점부터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계속 550 페이스를 유지했다. 평소 아무생각 없이 뛰면 거의 530 페이스가 나오는데,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성향 상 일부러 느리게 뛰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그래서 예전에 몇 차례 이 존2 훈련을 해보려다가도 실패하곤 했던 것. 거리가 늘어날 수록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조금씩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심박수가 빨라지길래 조금씩 속도를 더 줄였다.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니까 몸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암튼 6분대 페이스까지 느려졌을 때가 대략 5킬로미터를 지났을 때였다. 6과 7을 지나면서 다시 5분 후반 페이스로 돌아왔다. 7킬로를 지나 거의 8킬로가 다 되었을 지점에서 양화대교를 만났다. 여기를 찍고 돌아가면 15에서 16 사이 거리가 나온다. 조금만 더 갔다가 턴을 하면 16을 찍는데, 나는 그냥 여기서 돌기로 했다. 아주 잠시 하늘의 달을 찍느라 멈췄다가 다시 달렸다.


8을 찍고 9을 향해 달릴 무렵에 한 여성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그냥 보기엔 아주 가볍게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느꼈는데, 같이 달려보니 엄청 빨랐다. 와! 저렇게 조깅하듯이 뛰는데도 이렇게 빠르다고! 한동안 따라가보려고 속도를 높여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안 하던 롤링까지 하면서 속도를 올렸는데도 간신히 그 속도를 따라가는 정도였다. 신기했다. 롤링도 하지 않으면서 저렇게 빠른 자세라니. 저 분이 롤링을 하면서 더 속도를 높이면 대체 얼마나 더 빨라질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따라가면서 짧은 구간 좋은 런닝 메이트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턴을 해서 양화대교 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뛰던 관성이 있으니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유지했다. 여기서부터 좀 신기했다. 앞서 말했듯이 한 7킬로 정도까지는 550 정도 페이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9킬로 지점에서 갑자기 페이스가 확 빨라졌다고 앱이 알려줬다. 520 페이스라고? 내가 지금 그렇게 빠르다고? 긴 거리를 600에 가깝게 뛰었으므로 지금 종합해서 520이 나왔다는 것은 현재 페이스가 4분대 페이스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고? 그런데 왜 안 힘들지? 이상하게 크게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10을 넘어서서부터 조금씩 체력이 다 되었음을 느꼈다. 지쳤다. 그런데 좀 신기했던 것이 지난 주까지 그러니까 4월까지는 후반에 지치기 시작하면 자세부터 무너져서 체력도 다 되었는데 자세까지 무너져 더 나쁜 상황이 되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분명 지쳤고 힘들었는데,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페이스도 그닥 떨어지지 않고 비슷하게 유지했다. 그런데 크게 힘이 들지 않았다. 이거 뭐지? 이게 소위 말하는 '러너스 하이' 상태인 건가? 10이었나 11이었나 이쯤에서 심지어 종합 페이스가 510을 찍었다. 말도 안돼! 절반 이상을 일부러 천천히 달렸는데, 그럼에도 지난 4월 초 대회에서 죽어라 뛰었던 수준의 페이스가 나온다고? 이거 앱이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후로는 제법 힘들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주 조금씩 페이스가 느려지면서 달렸다. 13을 지나 14로 가면서부터 급격하게 발바닥이 아팠다. 물집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제서야 내가 제대로 된 런닝화를 안 신고 평소 신는 저렴한 런닝화, 바닥이 두텁지 않은, 즉, 쿠션이 별로 없는 런닝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션이 제대로 된 비싼 런닝화는 주로 10킬로 이상 뛸 때에만 신고, 평소 6에서 8킬로 정도 뛸 때에는 늘 이 신발을 신고 뛰었었다. 오늘은 아침에 나올 때 이렇게 본격적을 장거리를 뛸 생각이 없었기도 했고, 그냥 습관적으로 늘 신던 이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이게 10킬로 미만일 때에는 발에 그렇게 충격이나 무리를 주지 않는데, 거리가 늘어나니 급속도로 발 상태가 나빠졌다. 그러고 보니 신발끈도 꽉 조이지 않았었네. 내 발보다 발볼이 조금 더 넓어서 신발 안에서 발이 조금씩 놀다보니 더 발바닥이 아픈 느낌이었다. 마지막 2킬로 정도는 정말 힘들었다. 여기서 페이스가 확 쳐졌다.


그래도 15.89킬로미터를 535 페이스로 뛰어서 1시간 28분에 들어왔다. 나중에 앱을 보니 10킬로미터 PB를 달성했더라. 기존 기록은 지난 4월 12일 양천마라톤 대회에서 50.29였는데, 오늘은 49.26으로 나왔다. 음, 이거 아무래도 오늘 앱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달리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땀을 씻고 잠시 쉰 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실은 발바닥이 아파서 바로 집까지 걸어가기가 어려워 일부러 사무실에서 글을 쓰며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제 발바닥이 좀 덜 아프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면서 뭔가 가볍게 먹을 것을 사서 얼른 먹고 쉬어야겠다.


오늘도 정말 기분 좋은 달리기였다. 충분히 쉬어 준 후에, 다음 주에는 20킬로미터에 도전해볼까나.


아, 오늘 강양구 기자 페이스북에서 본 책 두 권을 올려둬야지. 조만간 구매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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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5-08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활동가 분들을 직접 본 것은 대추리였어요. 알라딘에서 알게 된 여성 활동가 두 분을 모시고 대추리까지 갔는데 도로 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허허벌판 중간에 각종 깃발이 펄럭이는 그 곳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더군요. 꽤 먼 곳에 차를 세우고 셋이서 철조망을 통과해서 들판을 전력질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그 날 행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비닐하우스에서 봉준호 감독, 가수 정태춘씨가 인사하는 모습도 보고요. 같이 간 두 분이 다른 활동가 분들과 인사하는 동안 마당에 쪼그려 앉아 바라보던 밤하늘도 떠오르네요. 다음 번에도 운전을 부탁받았는데 그 전에 대추리가 군 병력에 의해 진압되어 그 때가 마지막이 되었어요.

감은빛 2025-05-14 13:42   좋아요 0 | URL
제가 평택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딱 미군기지 투쟁이 시작되던 때였어요.
그 당시 주민공청회 막으려고 평택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이 총 출동했다가,
평택 경찰서 형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끌려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안경도 깨지고 얼굴에 상처도 입었는데 보상도 전혀 못 받았어요.
당시에는 밥값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활동비를 받을 시기여서
비싼 안경 값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나중에 내부 사정으로 평택환경연합이 문을 닫고,
서울에 있는 다른 단체에서 일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미군기지 투쟁이 이뤄졌어요.
저도 당연히 자주 참여했었습니다.

대추분교를 철거해버렸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 때에는 다른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었는데, 늘 그것이 빚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