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키 연애편지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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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연애편지 #오가와이토 #위즈덤하우스

 

외국을 방랑하던 포포,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대필가 집안의 츠바키 문구점을 물려받으며 소설이 시작되었고,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되는 과정이 반짝반짝 공화국이었다. 이번에 츠바키 연애편지에서는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대필 업무를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포포를 찾아와 대필을 부탁하게 되는데, 과거 대필가였던 사람의 마음과 대필을 의뢰할 수밖에 없던 날들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두 아이를 낳고, 큐피를 포함해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포포는 한층 성숙해진 어른스러운 모습이다. 가족들 틈에서 자기만의 시간의 필요성을 느낀다. 과거 인연을 가졌던 사람과 주고받았던 할머니의 연애편지를 발견하게 되며 자기가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과거를 살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가와 이토의 작품이 좋다. 작가의 모습인 것만 같았던 포포를 창조해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할뿐더러 삶이야말로 이처럼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한다. 때로는 세찬 물보라가 일 때도 있겠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책의 뒤편에는 실제 쓴 듯한 포포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어딘가에서 대필가로 활동하는 포포를 만날 것만 같다. 마음이 약해 쓰지 못했던 편지를 부탁한다면 고심 끝에 들어줄 거 같지 않은가. 대필 의뢰가 들어올 때, 그 상황에 맞는 차를 내리고 간단한 다과를 내와 마주 앉은 장면이 어렴풋하게 상상이 된다.

 



직접 전하기 어려운 내용을 편지로 써 건네주는 것. 편지지를 고르고 만년필을 골라 정성을 다해 글을 쓰는 포포의 모습이 정겹다. 행복한 가족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남편 미츠로 씨와 서로 겹치지 않은 새벽 시간에 일어나 차를 준비해 마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의뢰인의 마음에 닿아야 편지를 쓸 수 있는 것. 그 마음가짐을 위한 준비 행동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귀여웠던 큐피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포포와 큐피의 다정함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북풍처럼 차가운 관계로 변했다. 그럼에도 포포는 조바심 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줄 줄 알았다. 할머니의 연애편지를 태우러 이즈오시마섬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거리를 걷다 마주친 큐피와의 만남은 예상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떠나기로 했으나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칠 줄 알았다. 포포와 미츠로 씨를 이어준 큐피는 최악의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다. 그렇지만 포포와 나누었던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잊겠나.



 

엄마는 영원히 엄마인 것 같고, 할머니는 영원히 할머니인 것 같다. 과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에 아파했던 여자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다. 포포에게 할머니는 대필가였다는 것밖에 없다. 그런 할머니에게 과거 연인이 있었다는 게 생소했다. 사랑에 아파하고 보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는 편지를 발견했다. 그 전에 이즈오시마섬에서 토마 씨가 방문했다. 할머니가 미무라 씨에게 썼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포포는 책 속에서 할머니가 부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해 읽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손 편지가 귀한 시대다. 필요한 건 휴대폰 메신저나 메일을 사용하고, 친구 혹은 가족에게 작은 선물할 때만 메모를 사용해 간단하게 마음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손으로 쓴 메모나 편지는 사람을 감상에 젖게 만든다. 편지지를 고르고 펜을 골라 글을 쓰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였을 그 정경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 편지는 마음을 움직인다. 편지로 전하는 마음을 잊고 있었다. 받는 마음을 알기에 이 소설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오가와 이토의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더불어 츠바키 시리즈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대필가로서 살아가는 포포가 좋다. 손님을 맞이할 때 등장하는 차와 간단한 화과자 등의 다과는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이다. 왠지 커피가 아닌 차와 과자 등을 내어 고요한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츠바키연애편지 #오가와이토 #위즈덤하우스 #권남희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일본소설 #일본문학 #일본소설추천 #츠바키문구점 #반짝반짝공화국 #츠바키시리즈 #포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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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예능 - 많이 웃었지만, 그만큼 울고 싶었다 아무튼 시리즈 23
복길 지음 / 코난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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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예능 #복길 #코난북스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드라마 보다 오히려 예능을 찾아본다. 고민과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어 그렇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오랜 시간 마음을 쏟아야 하는 드라마보다 예능을 챙겨보며 웃고 웃는다. 그래서 이 책이 읽고 싶었는가 보다. 짐작하기로는 어떤 예능을 좋아하고 예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 드러난 글로 여겼다. 하지만 저자는 예능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예능인에 관하여 정확한 코멘터리를 한다. 놀라울 정도다.



 

성차별적인 진행방식과 주변인에 불과하게끔 여성을 축소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주요 인물로 강호동이나 유재석, 신동엽, 이경규 외에 나영석 프로그램에 대한 저자의 생각, 남성 일색인 예능인들의 대화에 대한 불편함 등을 거론한다. 저자의 글을 읽고 예능을 보는데 저자가 주장하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성으로 구성된 여러 명의 진행자와 진행방식이 약간 거슬렸다는 게 정답이다. 이처럼 어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개인적으로 나영석 피디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신서유기> 빼고 거의 다 본 거 같다. 특히 좋아하는 건 <삼시세끼> 시리즈와 <서진이네>, <윤식당> 등이다. 일부러 시간 맞춰 보고, 여의치 않으면 재방이라도 꼭 챙겨본다. , 저자가 주장하는 바도 알고 있다. 나영석이 추구하는 건 우려먹기식 비슷한 포맷이지만 그게 편한 걸 어떡해. 좋은 걸 어떡해.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해 좋아하는 거라고 해두자.

 



제대로 수평을 잡으려면 기울어진 쪽에 더 무거운 추를 달아야 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방송의 여러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많다. 그것이 당연해지는 세상이 될 때까지 남성들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감시를 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다면 압력 또한 높여가야 한다. (182페이지)



 

남성 예능인과 더불어 여성 예능인에 관해서도 말한다. 최근 TV에서 자주 보이는 김숙, 송은이, 이영자, 박미선 등이다. 남성 주도적인 예능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박미선에 관해 말한 게 인상적이었다. 남성 패널의 편을 들다가 예쁘게 봉합했던 예전의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주 예능인이 하는 말에 장단도 맞춰야 하지만 정확한 주관과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법이다. 저자는 박미선을 가리켜 겁에 질린 것같이 커다란 눈이 이제 정확한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고, 나의 엄마, 나의 달의 눈이 될 거란 기대가 생겼다.’ 라고 한 건 새겨들을 만하다.

 



대한민국의 간판 예능이라고 할 수 있는 <무한도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무한도전>을 주말마다 기다리다 보는 마니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챙겨보면 낄낄거리며 많이 웃었고, 가요제나, 못친소 같은 건 재방까지 찾아볼 정도로 좋아했다. 최근엔 무한상사를 OTT에서 하는 걸 보고 한두 시간을 앉아 보았다. 저자가 전하는 무한도전 장례식은 <무한도전>을 보고 드는 생각, 변화에 맞서지 못해 폐지하게 된 프로그램이다. 서글픈 마음과 조금은 반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추모한다는 저자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우리의 예능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프로그램과 예능인이 대처하는 것에 대한 성차별적인 발언들. 아울러 여성으로서 느끼는 성차별에 관한 불편함을 기술한 책이었다. 가볍게 접근했다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우리가 된 느낌이었다. 아마도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남성 일색인 진행자들이 불편할 것이며, 대사 하나에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거슬리는 말을 하는 예능인에 관한 판단을 새롭게 하게 되지 않을까. 더 원하는 건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고 남녀 성별을 떠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목소리를 내다보면 우리 사회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아무튼예능 #복길 #코난북스 ##책추천 #문학 #한국에세이 #한국문학 #에세이 #에세이추천 #아무튼 #아무튼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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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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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증명 #최진영 #은행나무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읽지 않은 책 중 구의 증명을 떠올렸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중 이렇게 처절해도 되는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답 하나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남자 담과 여자 구의 사랑 이야기다. 빚쟁이들을 피하다 연인이 죽었다. 죽은 연인의 몸을 먹으며 삶을 기억한다. 매끈한 팔과 다리, 눈썹을 훑고 몸을 먹으며 슬픔을 이긴다. 지나온 삶, 처음 만났던 여덟 살 시절, 서로 모른척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기억하려 한다. 담이 구의 시체를 먹는 건 그를 기억하는 시간과 같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시간이다. 기억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 그와의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어렸을 적 구는 담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담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이들이 담과 구를 놀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죽은 구를 업고 택시를 타 집에 데려왔다. 대야에 물을 담아 구의 몸을 씻겼다. 구를 방에 누이고 구의 몸 전체를 닦았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고는 꿀꺽 삼켰다. 구를 먹는 작업은 구의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구의 몸이 자양분이 되어 자기 몸에 흡수되어 영원히 나의 몸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의 기억조차 나의 것이 될 터였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 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20페이지)

 


최근에 <조명가게>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나타낸 드라마였다. 죽은 자가 헤매는 골목은 과거와 이별하는 공간이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추스르고 결정하는 공간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지난한 과정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경계선을 나오는 자는 살 것이며, 그 안에 갇힌 자는 죽음 너머로 가는 과정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회차가 늘어갈수록 슬펐다. 죽은 엄마가 저 길을 헤매었을 거라는 생각. 살길 바라는 엄마가 구해오라는 것.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딸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담이 구의 몸을 먹는 과정은 하나의 장례 의식이었다.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되는 담만의 장례였다. 구의 기억과 내 기억이 맞물려 사랑했던 추억을 함께하는 의식. 영원히 내 마음속에 두게 하는 과정이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68페이지)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과정. 기억은 곧 사랑의 기억. 영원히 마음속에 가두어 현재를 이겨내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과정이었다. 온전히 기억해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것처럼.


 

구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모든 말은 곧 우리의 기억. 죽는 게 죽는 게 아닌 상태의 기다림.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닿는 곳.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의 속삭임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구의증명 #최진영 #은행나무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장편소설 #사랑의아픔 #장례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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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을 나누는 기분 (시절 시집 에디션)
김소형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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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을나누는기분 #창비교육

 

까마득한 청소년 시절을 떠올려본다. 질풍노도의 시기, 부모에게 반항했던 것도 같지만, 대체로 착한 아이였던 나.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어울려 다녔다. 그때의 친구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만약 그 시절을 떠올리는 시를 쓴다면 어떤 감정을 담을까.


 

스무 명의 시인들이 청소년 시기를 떠올리며 쓴 시절 시 육십 편을 수록했다. 일명 시들의 초대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들의 초대라고 해야 옳겠다.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시를 가까이하겠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실행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늘 시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잊었던 시심을 찾아드립니다라는 모토를 가진 시절 시집 에디션이다.

 


오랜만에 시를 읽고, 시가 이렇게 좋았었지.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 이처럼 기회가 닿아야 자주 읽게 되는 것 같다. 시가 시를 부르는 것 같달까. 시 몇 편을 읽어 보자.





 

바스락대는 봉투에서

도넛을 꺼내려는

밤의 버스 정류장.

버스는 아직 오지 않고.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아도 좋고.

그런 밤의 버스 정류장.

, 도넛을 꺼낸다.

그런데 어째서

도넛은 손끝으로 집는 거지.

아슬아슬하게.

까슬

까슬

까무룩

(중략)

꺼낸 도넛을 반으로 가른다.

집으로 돌아가려 함과

집으로 가고 싶지 아니 함처럼.

정확히 나누었는지를 묻지 않기.

(후략)

(132~133페이지, 유희경 도넛을 나누는 기분중에서)


 

유희경 시인의 시 세 편은 다 옮겨오고 싶을 정도였다. 밤의 버스 정류장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도넛을 꺼내어 반을 갈라 설탕 가루가 떨어지는 모양 즉 '까슬''까무룩'이란 시어가 퍽 인상적이었다. 서윤후 시인의 하나를 세어 보는 수만 가지 방법이라는 시는 또 어떤가.


 

빗방울은 모두 몇 개지?

 

우산을 나눠 쓰던 네가 묻는다

모른다는 말은

너무나 큰 먹구름일 테니까

단 하나야

셀 수 없는 건 모두 단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중략)

 

우리는 알 수 없어서

 

비가 그친 줄 모르고 우산을 함께 쓰고 걷는다.

이 모퉁이만 지나면

집에 가는 길이 나뉘니까.

 

하나는 쪼개지면 겨우 다시 하나가 된다

조금 더 큰 하나의 어깨 쪽으로

우산을 밀어 준다

 

화창한 가운데 젖은 자리를

다독이는

 

햇빛 쏟아지는 (60~61페이지)


 

예전에 읽었던 시와 조금 달라진 거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들의 마음처럼 통통 튀는 시어들의 집합이다. 비와 우산, 빗방울.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어 우산 하나로 골목이 나뉘는 모퉁이까지 걷는 그 마음이 짐작되었다. 설레는 기분. 행복한 기분.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서 시험 공부라는 핑계를 대고 친구랑 같이 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한 시인의 시 세 편이 실려있고, 끝나는 장에 시작 노트가 수록되어 시를 쓰게 된 배경과 느낌이 드러나 있다. 시를 잘 몰라도 시작 노트로 짐작해보게 된다. 표지도 정말 예쁘다. 마치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것처럼 선명한 색감에 기분이 밝아진다. 색깔이 이렇게 마음을 두드리는 것, 오랜만이다. 기억과 경험, 그리고 상상이 묻어나는 시였다. 좀 더 시를 읽고 싶게 만들었다. 어디든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어도 되고, 필사하며 읽어도 되는 시절 시집을 읽어 보자.

 

 


#도넛을나누는기분 #창비교육 #김소형 #김현 #박소란 #박준 #서윤후 #성다영 #신미나 #양안다 #유계영 #유병록 #유희경 #임경섭 #임지은 #전욱진 #조온윤 #최지은 #최현우 #한여진 #황인찬 ##책추천 ##시집 #시집추천 #한국시 #한국문학 #시절시집에디션 #시절시집 #창비청소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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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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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알베르카뮈 #녹색광선

 

살면서 내가 계엄령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엄령을 내렸던 이의 탄핵을 바라보는 초유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 독재를 꿈꾸는 지도자가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퇴근하면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일상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보지 않던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를 보며 세상에, 이런 일이~!’란 말을 반복했다. 자유롭던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자각했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다. 소설인지 희곡인지 알지 못했고, 알베르 카뮈의 책이라는 것만 알았다. 책을 읽으려고 펼쳐보니 희곡이었다. 이방인에 이어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은 페스트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다. 프랑스의 배우이자 연극연출가인 장루이 바로의 연출을 위한 초안을 바탕으로 한 작품의 결과물이다.





 

에스파냐의 카디스에 혜성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카디스에 저주가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 뒤 독재자 페스트가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총독은 카디스를 페스트와 비서에게 이양하고 도망쳤다. 즉 카디스를 버렸다. 비서는 페스트의 명령에 따라 인간들을 선별하여 가슴에 표식을 남겼다. 표식 하나는 의심자, 둘이면 감염자, 셋은 말살자다. 표식은 페스트이며,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페스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감시 대상이며 사랑같은 건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카디스는 혼란에 빠졌다.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사이이며 판사인 빅토리아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비서에게 말했다가 겨드랑이 밑에 표식을 받았다. 술주정뱅이 나다는 그들의 부름에 사람들을 선별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느냐 말이다. 그러나 디에고는 표식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페스트라는 독재자는 공포를 극복한 사람에게 나타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혼란스럽고 두려운 도시에도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비상계엄령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국회로 달려갔다.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계엄령 해제를 의결하기 위한 표결에 참여했다. 그리고 탄핵 결과만을 앞둔 이때 계엄령은 얼마나 적절한 책이냐 말이다. 계엄령은 용기를 북돋는다. 용기를 잃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국회 앞, 헌법재판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적극적으로 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한 희망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용기, 물러서지 않는 저항정신이 우리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뒤엎으려 하는 자가 있었고, 그를 옹호하는 세력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카뮈의 계엄령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책이다. ‘전체주의 억압에 관한 극적인 은유에 가깝다.’라고 했다. 에스파냐 내전을 재현하는 듯한 상황과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이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래의 문장에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결함이 있다고요.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체계의 결함이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공포를 극복하고 저항하기만 해도 삐걱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체계가 멈춰 버린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죠. 하지만 어쨌든, 삐걱거린다는 거죠. 때때로 작동이 완전히 정지될 수도 있는 거고요. (131페이지)

 



체제에 순응하고 살기보다는 공포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의이며 살아갈 힘이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페스트라는 독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를 따르는 자들의 행태와도 비슷하다. 이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현재에 꼭 읽어야 할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가벼운 바닷바람이 불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이다. 그게 간절한 바람이다.

 

 



#계엄령 #알베르카뮈 #녹색광선 ##책추천 #문학 #희곡 #안건우 #프랑스소설 #프랑스문학 #프랑스희곡 #전체주의 #에스파냐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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