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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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루비 #박연준 #은행나무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박연준 시인의 시집을 읽은 적이 없다. 시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읽을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이것은 내가 읽은 박연준의 첫 작품. 더군다나 시인이 쓴 소설로 먼저 만났다. 이것 또한 박연준 작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시인이 쓴 소설을 먼저 읽으며 시적인 문장이 가득한 유년 시절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지극히 외로웠을, 그러나 루비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추억할 수 있었을 여름을 떠올렸다. 무심코 다가왔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옛친구를 떠올리며 첫사랑을, 첫 이별의 기억에 침잠해 있었으리라.

 



박연준 시인이 쓴 첫 장편소설이다. 아마 단편이었다면 선뜻 읽으려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 작품을 쓴 순간의 모든 것이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애타게 기다리다 조금 늦은 리뷰를 쓰게 되었다.






 

종종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의 기억보다는 증조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던 장면이 선명하다. 우리 집에 찾아왔던 스님 할머니, 손님들을, 여름의 기억들이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건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곱 살 소녀 여름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고모의 집에서 자라며 예민한 고모의 시선에 거스르지 않게 책을 필사하며 사촌 겨울 언니랑 지낸다. 겨울이라는 이름을 가져서 고모의 피아노 학원도 겨울 피아노 학원이다. 여름은 갖지 못하는 이름이다. 예를 중요시하는 고모 때문에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해 스스로 작은 회사원같다고 말하는 소녀의 여정을 따라간다.



 

아빠가 젊은 새엄마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며 여름의 다른 생활이 시작된다. 여름이 빨간불일 때 건너온 게 루비였다. 루비는 거침없이 다가와 여름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여름은 루비에게 다가가고 멈추었으며 또 외면했다. 루비가 여름에게 안녕을 고했을 때 비로소 루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머물 거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어느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사람과의 관계인 것 같다.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외로운 시절을 견디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80페이지)

 



어린 날의 여름이 바라보는 루비뿐 아니라 여름 주변에서 느껴지는 여자들의 분노를 말한다. 이를테면 고모와 할머니의 분노다. 할머니는 자기의 분노를 의자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는 거로 풀었다. 고모의 분노는 모아놨다가 한번에 터트렸다. 또한 고모는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신경을 썼다. 타인이 볼 때는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었으나 생활비를 주지 않은 고모부, 겨울 언니에게만 허락되었던 돈에 목말라했다. 그리고 새엄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새엄마, 아빠와 있을 때와는 다정한 엄마였으나, 새엄마도 한 사람의 여자였음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루비의 기억은 희미해졌을 테지만, 그럼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루비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의 삶에서 사라져 만나지 못한 시간을 찢어진 페이지라고 명명했다. 루비와 만나지 못했던 시간, 루비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업은 찢어진 페이지를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엄마가 낳은 아기 학자를 사랑하는 여름에게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발걸음임을 알 수 있었다. 기나긴 여름, 그리워지는 겨울. 누군가는 지루하고 괴로울 테지만, 지나간 것은 언제나 아쉬운 법. 오늘을, 이 순간을 잘 살아가자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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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걸어온 자리 - 비우고 바라보고 기억하는 나의 작은 드로잉 여행
최민진 지음 / 책과이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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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걸어온자리 #최민진 #책과이음

 


우연히 이 책에 대한 홍보 글을 보고 구매했다. 여행자의 눈으로 풍경을 그리고, 풍경에서 느꼈던 것들을 글로 풀어낸 책이란 게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구입했던 시기에 여행을 꿈꾸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여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마치 드로잉에 나타난 장소에 있는 듯한 마음을 가졌다. 떠나고 싶은 마음에 하나의 위로가 되었던 글이었다.


 

에세이의 부제가 먼저 들어온다. ‘비우고 바라보고 기억하는 나의 작은 드로잉 여행이라는 문장이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혹은 마음이 복잡할 때 들여다보면 좋을 책이다. 마음이 어지러운 출근길, 책을 펼치고 앉아 글과 드로잉을 함께 보았고, 두 번째 읽을 때는 그림만 들여다보았다. 미지의 장소를 상상해보고 작가가 느꼈을 감정에 공감했다. 작가가 느낀 감정이 마치 내가 느꼈던 감정인양 이입해 마음의 평안을 느꼈던 것 같다.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에 빠져들었다. 사진이나 유화가 아닌 드로잉은 어쩐지 더 섬세한 그림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게 되었달까.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툴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화가를 상상해본다.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문득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전남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거닌 적이 있다. 성곽길을 돌고 성안을 거닐며 그 시절을 여전히 살고 있는 듯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던 때, 그때를 떠올렸다. 돌담과 흙벽, 초가집의 이엉까지 과거의 한 장소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산 지니마노의 돌벽과 작은 화분들을 그린 그림에서 먼 나라에서 보는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낯익은 감정 혹은 안식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비로소 떠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나. 익숙한 장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낯선 나라 낯선 장소에서 떠올리고는 그리워한다.


 

해 질 무렵 제주의 다랑쉬오름을 오르며 바라보는 풍경에서 아픈 역사인 제주 4.3을 떠올리며 썼던 글과 그림을 바라본다. 그 풍경을 그리며 동시에 고통과 상처를 느꼈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기억해주어야 한다. 비록 가끔이라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않겠나. 고통스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자꾸 기억하고 떠올려야 한다.

 


기억하고 살아내며 삶은 계속된다.

늪이 연꽃을 피우고,

수풀 그늘에 자리 잡은 악어들이

한가롭다.

스페인 이끼 우거진 물길로

배가 조용히 나아간다. (147페이지)

 


물에 잠긴 뉴올리언스 늪지대에 떠내려온 것들을 바라보며 잃어버렸던 것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마음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여행자는 낯선 장소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그동안 감춰두었던 감정들, 아팠던 마음들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장소에 얽힌 역사를 기억한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그리는 작업을 한다. 여행자가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고 그걸 읽은 독자들 또한 작가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독서와 미술이 주는 효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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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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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창비



 

2024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중 단연코 눈에 띄었던 작품이 혼모노였다. 마치 실제 무속인을 보는 듯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이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 중에서 이런 소재의 글을 쓴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소재의 새로운 발상의 작품으로 성해나라는 작가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출판사 <무제>의 대표 박정민의 추천사로 더 인기를 끈 작품이지만, 수록된 작품들도 만만치 않았다. 재미있고, 소설을 읽는 게 즐거운 시간이란 걸 깨닫게 해주었다. 소설이야말로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나.





 

먼저 표제작이기도 한 혼모노를 보자. 30년 경력을 가진 무속인의 앞집에 신애기가 새로 오며 소설이 시작된다. 소위 신발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 몸주로 모셨던 장수할멈을 위해 생화를 바치는 등 최선을 다하지만 장수할멈은 감감무소식이다. 그런데 신애기가 하는 말마다 장수할멈의 말투가 배어난다. 즉 장수할멈이 자신에게서 떠나 신애기한테 옮겨간 것이다. 신애기의 집 앞은 신점을 보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걸 지켜봐야 하는 무력감이 곳곳에 드러났다. 늙은 무속인이 벼린 칼날 위에서 작두춤을 춘다. 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뚝뚝 떨어지며 무속인은 비로소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가짜가 진짜가 된 것처럼 그렇게 신명을 다한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오버랩되는 소설을 읽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룬 게 아닌, 표면적으로는 건축물을 설계한 이들의 이야기다. 인간을 생각하는 건축물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인간을 위한 공간이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된다.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그 공간은 지옥이 될 수도, 누군가의 권력을 위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공교롭게 이 책을 읽은 후 인터넷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에 관련된 기사가 있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고통과 치욕의 건축물이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스무드를 읽고 실소를 터트렸다. 일명 태극기 부대가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예술가 제프의 방한에 맞춰 한국에 오게 된 미국인 듀이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핸드폰 배터리마저 나가자 성조기와 타이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무리를 따라갔다. 성조기를 따라가면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영어를 사용하는 친절한 할아버지가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고 배터리도 충전해주었다. 친절한 사람들이라 여기며 비로소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걸 느낀다. 공동체의 힘은 노선을 떠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매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영화감독을 덕질하는 여자가 느끼는 가짜와 진짜 사이에서 혼란을 말한 소설이며, 우호적 감정은 스타트업 직원들이 소서리 마을 사업을 컨설팅하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다룬 소설이다. 나이, 성격 혹은 공동의 이익이 미치는 영향을 말했다. 우호적인 감정이라는 것도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한낱 물거품이 될 뿐이다. 메탈을 좋아하는 고등학생 시우와 조현, 우림의 변해가는 것들을 담은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메탈 밴드를 꿈꾸고 음악을 만들었던 나날들. 별 뜻 없이 내뱉었던 말 한마디에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처럼. 관계는 되돌릴 수는 있지만, 또 되돌릴 수 없는 거라는 걸 보여준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시간, 좋은 장소에서 태어나게 하고 싶은 건 당연할 것이다. 해주고 싶은 것도 많다. 그래서 잉태기의 엄마 마음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에서는 엄마인 화자가 아이를 가진 딸을 쟁취하기 위하여 시부와 경쟁이 벌어지는데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다. 딸의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딸이 하는 말도 들리지 않을뿐더러 그저 상대방에게서 딸을 뺏어오고 싶을 뿐이다. 아이러니다. 딸은 또 이것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는가 말이다. 가진 자의 이면에 깃든 복잡한 감정을 보며 쉬운 건 없는 거 같다.




 

성해나의 소설은 다양한 주제뿐 아니라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도 다채롭다. 물론 전체의 주제는 가짜의 진짜 사이에서 진짜를 가려내는 작업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악의와 정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심을 말하는 듯했다. 성해나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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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지만, 용기가 필요해 - 도망가고 싶지만 오늘도 이불 밖으로 나와 ‘나‘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든 어른들에게
김유미 지음 / 나무사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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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지만용기가필요해 #김유미 #나무사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늘도 출근한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고 말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비애일 것이다. 당장 그만두고 싶다가도 직장생활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찾는다. 넋두리처럼 퇴사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직은 퇴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든 생각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산다면 좋겠지만, 어른이라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다. 오늘을 살기 위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매일 용기가 필요하다.



 

직장에서 마음이 어지러운 일 때문에 이 책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판다의 시간을 그린 유화를 보며 작가가 주는 응원의 메시지에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역시 그림을 보며, 작가가 거쳐온 시간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 다시 또 열심히 살아갈 마음의 자양분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퇴근 후에 화실로 가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의 전작 에세이의 제목처럼 물감이 필요해 전업 작가가 되지는 않았다. 퇴근 후 혹은 주말에 그림을 그리며 전시회도 여러 번 했던 작가이며 그림 속에 판다의 시간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이 총 68점이 수록되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판다와 함께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한다. 판다가 이런 역할을 했던가, 그저 판다를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담벼락에 기댄 판다, 꽃 속에 파묻힌 판다, 양탄자를 타는 판다가 우리를 웃게 하고 감동하게 만든다.



 

작가가 지나온 소소한 이야기와 감정들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느리게 걷는 판다의 시간은 응원의 메시지이며,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넘치지 않게 우리를 새로운 도전의 힘을 갖게 한다.

 



거절을 못하던 시절에 나는 거절이 무례이고, 비싼 척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내가 거절을 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이고, 날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절하게 진솔하고 정중한 거절은 오히려 나와 상대방의 시간을 모두 소중히 여기는 존중의 표현이다. 한층 신중하게 나간 약속에선 그 만남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서로가 귀한 시간을 내서 왔다는 것을 알기에, 나와 만나준 상대방에게 더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81페이지)



 

누군가가 만남을 청할 때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만나면 그렇게 좋지 않더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만나야 상대방과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엄마와 만난 후 엄마 손 잡고 싶다, 고 혼잣말할 때 조카가 한 말에 용기를 얻어 엄마 손을 부여잡는 순간을 보며 우리에게 망설이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마음이 열려있다는 뜻이다. 어린 조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 누군가가 하는 말에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귀담아들으라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혼자서 가는 것이므로, 네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라, 고 말이다. 누군가의 충고와 조언을 듣지만 결국 어떤 일을 결정하는 건 나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고 결정하면 후회해도 누군가 탓할 필요가 없다.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된다.





 

내 인생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결국 내가 써야 한다. 작가도 나, 감독도 나, 주연 배우도 나. 서투른 작가가 쓴 드라마가 재미가 없거나 의도치 않게 새드앤딩이 되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 줄을 써 내려갈 사람은 나뿐인걸. (17페이지)

 



무언가를 도전할 용기를 갖는 것. 지치고 힘든 생활에서 한줄기 빛처럼 떠오르는 것을 향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 모두 내 선택에 달려있다. 마음이 아프다고 자기가 만든 우리 안에 갇혀있지 말고 과감하게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털고 일어나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우리의 생각은 변하고 새로운 일을 받아들일 용기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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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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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그랬어 #김애란 #문학동네



 

계급의 차이는 돈이 아닐까 한다.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굽신거리고, 나보다 돈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계급 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본인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시선에서 혹은 말에서 은연중에 드러난다. 반대로 나보다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겼으나 나보다 나은 집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어보라. 갑자기 질투의 감정으로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떠한 사정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할 형편(그것도 전세로)에 놓였는데, 젊은 부부가 집을 사서 이사 온다는 소식에 조금은 우울해지지 않을까.



 

김애란의 신작 안녕이라 그랬어에서는 사십대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돈과 그것에 얽힌 사람들의 관계 혹은 마음을 다룬 소설이다. 보통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삶을 다루었다고 해야겠다. 내가 겪었던 내용일 수도 있고, 내 이웃이 겪었던 내용일 수 있다. 혹은 여전히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치 주변 사람들 이야기 같았다. 김애란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은 이렇게 현재를 대변하듯 우리 곁에 성큼 들어와 있었다.






 

일곱 편의 소설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비슷한 면이 있었다. 타인의 공간 즉 집을 방문해 그 집에 놓여있는 가구 혹은 사람을 통해 내 삶의 누추함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물론 속에 담아둔 마음의 찌꺼기들이 샘솟듯 펼쳐지는 모양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속절없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홈 파티의 이연은 연극배우로 활동하나 전염병으로 일이 줄었다. 후배의 청에 의해 오 대표의 집을 방문하며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진 것과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본다.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가르는 것조차 모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연의 말에 얼마간 통쾌해졌지만, 이후에 일어난 일에서는 아찔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호기롭게 말하고 일어섰으나 결국 다시 돈에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장면이었다. 이연의 이 연극을 이대로 마치지 않을 생각이었다.’라는 말이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마음을 감추는 대사를 한 후,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쓰고 유유히 걸어가는 이연을 상상해보라.



 

숲속 작은 집의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늦은 신혼여행으로, 값싼 여행비용 때문에 선택한 북쪽 지방에 머무르며 일어난 이야기다. 숙소를 정리해주는 비슷한 또래의 현지 여성을 바라보는 마음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다뤘다. 팁을 어떻게 줄 것인가, 금액은 얼마로 할 것인가,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를 고민했다. 또한 어머니 혼자 자신을 키워주었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시점에서도 얼마간의 생활비를 드리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이 드러났다. 매월 들어와야 할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걱정하는 마음과 혹시 놓쳤나 싶은 생각에 전화를 거는 부모의 마음, 외국에 나와 있어 송금이 불가하다고 답하는 주인공의 불편함은 우리 모두 느끼는 낯익은 감정이란 게 조금 슬펐다.



 

좋은 이웃이란 무엇일까. 이웃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게 첫 번째일 것이다. 층간 소음과 집 밖에 물건을 방치한다던가, 혹은 담배 냄새를 피우는 건 삼가야 한다. 윗집에 새로 이사 오는 젊은 부부가 한 달 동안 인테리어 공사를 한다며 찾아오며 소설이 시작된다. 집에서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주인공은 시끄러운 공사 소음 때문에 힘들고 집을 줄여가야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 이처럼 돈은 사람을 슬프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녕이라 그랬어의 은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인터넷으로 원어민과 함께 영어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카메라에 비친 상대방의 표정과 서툰 언어로 대화를 하는 이야기다. 갑자기 수업에 빠질 때 혹은 그 이유를 알았을 때 모른 척 지나갈 수 없어 건넨 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무심코 들었던 노래 중에 '안녕'이라고 들려 그것을 우기는 장면 또한 익숙한 한 시절을 표방하는 것만 같다. '안녕'이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다. 한쪽 손을 흔들며 반갑다고 하는 몸짓, 뒤돌아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인사말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언어일 것이다. 그냥 알게 되는 인사,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그리운 단어를 말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천천히 아껴가며 읽으려고 했으나 금방 읽어버렸다. 이렇게 아까울 데가. 더 읽고 싶은 책은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어쩌면 살아가는 지표처럼,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에서 살아갈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돈으로 그어진 세상의 잣대를 지울 수도 없다. 김애란의 신작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우리에게 '안녕'이라고 안부 인사를 건네는 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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