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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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삶의 궤적을 알 수 있다. 소설이, 시가 상상의 산물임에도 작가의 생각과 사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 작가의 작품에서 그의 삶을, 그의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때로 좌파로 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애국자가 되기도 하며, 어떤 이는 매국노로 불리기도 한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시를 자주 읽으려 한다. 시는 소설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으므로. 짧은 시어에서 가슴을 쿵하고 울리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읽게된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이다. 그가 출간한 네 개의 시집을 한데 묶은 귀한 시집. 책 좀 읽는다는 나 조차 세사르 바예호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모른다고 해야겠다. 생소한 시인이지만, 페루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날선 감정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를 잘 알지 못한 탓인지 처음 시를 읽을 때는 그저 활자들을 읽어나갔다. 중간 부분부터 작가의 시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작가가 처한 상황들이 시에서 느껴졌다. 작가의 심연을 들여다 본 느낌이랄까.

 

여름, 나 이제 가련다. 저기, 9월에 심은

내 장미를 네게 부탁하마.

죄악의 나날, 죽어버린 모든 날,

그 나무에 성수(聖水)를 주렴. (42페이지, 「여름」 중에서)

 

 

 

낯선 존재는 끝났다. 밤이

깊도록 너와 도란대던 밖의 존재.

좋든 나쁘든,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중략)

다정한 말도 끝이 났다. 끝없는 고통 속

나의 성년, 그리고 이유 없이 태어난

우리의 운명을 위해 존재했던 그 말.  (145페이지, 「ⅩⅩⅩⅣ」 중에서)

 

삶이 평탄치 않았던 시인들의 시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만큼 삶이 고통스러웠다는 뜻일 게다. 죽음처럼 깊은 잠,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보는 시인을 그려본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장례식을 생각한 걸까. 무릇 한 순간의 재처럼 흩어지고 말 인간의 삶이거늘. 우리는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

 

(중략)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 (207~209 페이지,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중에서)  

 

한 번을 읽고, 두번 째 읽는 시는 느낌이 달랐다. 시가 더 가슴깊이 와닿았다. 감옥에서 쓰였던 시에서는, 스페인 내전에 상처받은 마음으로 쓰여진 시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의 슬픔과 그리움들이, 그의 고통이, 그의 울분이 전해졌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에 대한 공감이었다.

 

세사르 바예호가 펴낸 여러 시집을 한데 엮은 귀한 시선집이다. 여러 편의 시 속에서 응축된 그의 삶의 궤적을 엿본다. 세사르 바예호를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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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미래 - 편견과 한계가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라
신미남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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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성에 대한 위상이 많이 변해왔다고 여겼는데 얼마전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완전히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도 힘겹고, 가정에서도 여전히 힘겹다는 사실이다. 미혼인 상황에서는 그나마 직장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지만, 결혼 후 육아에 지치다보면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직장을 다니게 되면 육아와 가사도 부부가 함께 나눠야 하지만 대부분 여자가 육아를 전담하는 편이다. 이게 언제쯤이면 확연히 달라질까. 많이 변했다고 혹은 변화되고 있지만 언제쯤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도 『여자의 미래』다.

 

기업의 연구원에서 경영 분야로 옮겨 일하다가, 현재는 전문 경영인이 된 저자가 걸어온 길을 말하는 책이다. 여성으로서 두 아들을 키우며 직장생활하는게 쉽지 않았던 일에서부터 아이를 낳아 기르며 유학생활을 했던 이야기를 말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의 유아원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려고 할때 우는 아이들때문에 서럽게 울던 일도 말했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라면 한두 번쯤 경험했을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공감의 표현을 했던 것 같다.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음에도 여자라는 편견때문에 상사로부터 A등급이 아닌 C등급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유리천장에 균열을 내고 있는 여성 리더들의 이야기를 하며 여성으로서 편견을 이기고 자신의 역량을 펼칠 것을 말했다.

 

숱한 열등감 속에서 내가 깨달은 사실 하나는 열등감이 크게 느껴질수록 그 열등감에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등감을 나를 채찍질하는 동력으로 삼아 죽을힘을 다해 본질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열등감은 성장의 원천이 된다. (119페이지)

 

 

 

 

저자는 여성이 가진 특성들을 말한다. 원칙을 잘 지키고 공감력이 뛰어나며, 프리랜서가 주류로 부상할 미래를 준비할 것을 원한다. 이에 여성은 자신의 전문성을 확보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꼭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경우에도 꼭 필요한 일들이 아닐까 싶다.

 

세상 모든 일은 생각의 결과다. 물건도, 영화나 책도, 심지어 우리 삶의 반경이나 사회적 제도마저도 모두 생각의 산물이다. 그래서 어떤 높이와 잣대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물건도, 세상도, 국가도, 삶도 변화한다. (113페이지)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게 아닌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의 삶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욱 좋겠지만,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게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뛰어 넘는 도전하는 자들만 갖는 성공의 기회를 잡으라고도 한다.

 

유대인 가정 교육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다. 어머니의 혈통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다양한 삶의 지혜를 배운다. 특히 어머니는 가족 간의 우애나 집안의 행사, 종교 활동, 공동체 생활, 예의 범절, 관계 형성 등 유대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을 가르친다. (259페이지)

 

아이에게 부모가 필요한 시기는 10년 정도다. 그 후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 품을 떠난다.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그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 두고 있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여성임에도 육아 문제 때문에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저자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으면 했다. 결국엔 일하는 여성이 아이에게도 자립심을 키워주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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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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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다. 배우들 때문에도, 영화가 가진 스토리 때문에도 이 영화가 궁금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의 미국. 한 소녀가 허밍을 하며 숲속을 걸어간다. 고요한 숲속에서 들리는 건 소녀의 숨소리뿐.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 버섯을 따는 깡마른 소녀. 누군가 나타날 것만 같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소녀는 한 젊은 군인을 발견한다. 남부 연합에 속한 버지니아 주에 북군의 옷을 입었다. 다리를 다친 그를 부축해 소녀가 머물고 있는 마사 판즈워스 신학교로 온다. 마사 판즈워스 신학교에는 여자 교장과 한 명의 교사, 여학생 다섯 명이 머물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마사 교장은 북부 연방군의 존 맥버니 상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치료한다. 여자들만 있는 곳이었을까. 여자들만 있는 공간에 남자가 들어오니 여자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맥버니에게 잘 보이려 미소를 건네고 그가 괜찮은지 자주 살펴보러 다닌다. 존은 모든 여자들에게 친절하다. 단 둘이 있을때 네가 제일 예쁘다며 그녀들의 환심을 산다. 저녁 식사에 존 맥버니를 초대했을 때 그녀들이 입었던 드레스는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선택했다. 열살에서 열일곱 살, 아니 마사 교장까지 그에게 예뻐보이기 위해 그들의 숨죽인 설렘이 엿보인다.

 

 

그들이 짓던 미소, 존을 향한 눈빛, 그것은 숨죽인 욕망과도 같았다. 식탁에서의 모든 여자들은 존을 향해 있었다. 그들 모두를 매혹시켰던 존 맥버니. 그는 유달리 에드위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모두를 매혹시켰으나 그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에드위나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여학생의 방으로 숨어들었던 존. 그리고 이어지는 사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쉼없이 달린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매혹적인 영화.

 

1971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그리고 2017년 니콜 키드먼 주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원작이기도 한 소설이 궁금한 건 당연했다. 책을 읽기까지 숨죽이는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책은 어떻게 다를까. 영화에서 느꼈던 그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질까. 이런 마음에 두근두근했던 것 같다. 일단 영화와 다른 인물이 에드위나 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교사로 나왔지만, 소설 속에서는 열일곱 살의 학생이다. 아마 감독은 마사의 동생이자 교사인 해리엇 판즈워스와 여학생인 에드위나를 에드위나라는 하나의 인물로 그렸던 것 같다.

 

 

고립된 장소에 있다보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 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여자 신학교에서 남자 하나 없이 여자들만 있다보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극도에 다다를지 모른다. 존의 말 중에 나이가 많건 적건 모든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되겠다는 부분이 있다. 모두들 숨죽이며 자신의 병상에 찾아오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것에 대해 그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저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는 길은 그것 뿐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의 친절함, 그가 건네는 미소, 자신의 말을 들어주며 예쁘다고 칭찬하니 모든 여학생들, 심지어 마사 교장의 마음까지 훔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모두의 마음을 훔쳤다.

 

그는 다정하고 솔직했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순수함 이면에 교활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교활함이 소년의 장난기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134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바라보는 존 맥버니를 이야기한다. 자신과 얘기했던 존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친절함을 베푸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원래 여자들이 '네가 제일 예쁘다'라는 말에 약한 건 알지만,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처럼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그들 모두를 매혹시켰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여겼을때는 가차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여자들이다. 존 맥버니는 그걸 몰랐던 듯 하다. 그가 힘이 세고, 모든 여성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 기한이 언제까지일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소설 또한 무척 매혹적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무척 매혹적이다. 인물 하나하나에 부여한 각자의 이야기들이 그 사람의 행동을 말해준다. 영화 속에서 왜 그렇게 말했을까, 행동했을까에 대한 답이 소설에 있다. 영화에서 하나의 행동으로 묘사되었던 그들의 삶들이 그 한마디의 말에 내재되어 있었다.

 

소설을 읽고 났더니 영화속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었는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숨겨진 섹슈얼한 이미지마저 온전히 이해되는 느낌이었달까. 니콜 키드먼의 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에드위나 역할을 맡았던 커스틴 던스트라는 인물의 매력에 빠졌다. 콜린 파렐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삼십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했던 존 맥버니가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는 게 약간 아쉽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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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 박상 본격 뮤직 에쎄-이 슬로북 Slow Book 2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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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삭막할까. 음악이 갖는 힘이 크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때 팝송을 많이 들었고, 한동안 뉴에이지 음악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팝을 다시 들으면서 라디오의 어느 한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잊어버릴까봐 음악을 검색해 리스트에 넣어두고는 한다. 혼자 듣는 것 보다 이상하게 누군가 들려주는 음악이 좋다는 걸 새삼 느끼는 중이다. 최근 방송사 파업 때문에 그마저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책을 읽는데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랄까. 적막감이 감돌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하고 생각해보니 내 곁에 음악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새운다. 습관처럼 듣고 있는 음악들, 그 음악들 사이로 추억들이 함께 하기도 한다. 나만 이런 건 아닌 듯,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소개하며 같이 들어보자고 하는데, 이 또한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언젠가 김중혁 작가가 음악 에세이를 쓴적 있어 즐겁게 읽은 적이 있다. 음악을 좀 한다는 박상 작가 또한 '본격 뮤직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음악과 여행 이야기를 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헤매고 다닌 듯 하다. 일상이 무료하거나 우울하면 훌쩍 떠나 글을 쓰는 장소를 찾는다고 했다. 그 곳에서 작가는 며칠을, 몇 달을 머물며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다.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경제 활동을 한다는 박상 작가. 가장 부러웠던 건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구입해 그 나라로 훌쩍 떠나 그곳에 머무른다는 것. 비록 숙소는 보잘것 없었다고 하지만, 여행가들만이 갖는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여행지에서 음악은 뗄레야 뗄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는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꽂힌 음악을 닳도록 듣고, 여행지에서의 일들은 추억으로 다가설 것이다. 비록 한도내에서 돈을 써야해 먹는 것, 잠자는 것마저 주저하게 될지라도. 훗날엔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게 여행인 것 같다.

 

그러나 아픔이 다가 아니었다 .비록 비현실적인 플랫폼은 사라졌지만, 가슴속에는 그리움과 애틋함과 그 시절을 아름답게 보낸 시간과 그것을 기억한 순간의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실 아픈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되기 위해 현실의 대기권을 통과하는 마찰인 것이다. (27페이지)

 

 

 

모든 음악은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운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음악은 마음을 열고 들을 때 비소로 빛나는 보석인 것이다. 음악이 비즈니스가 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것이다. 달랏의 음악을 잠시 촌스럽게 생각한 내 편협한 감각이 몹시 부끄러웠다. (89페이지)

 

채널예스에 연재했다고 들었다. 스쳐가듯 읽어본 것도 같은데,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유쾌했다. 작가가 가진 유머와 위트때문이었고, 그가 가진 여행에 대한 마인드 때문이었다. 그의 여행지론을 들어 보자면, 돈 모아서 여행을 가는게 아니란다. 모을 때 고생한 기억 때문에 아까워서 못떠나게 되니 일단 아무 생각없이 카드 긁어서 출발한다고 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게 무조건 모아서 가자는 주의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돈이 모일때쯤 되면 꼭 써야할 곳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최근엔 무조건 저지르고 본다. 카드로 여행비를 계산해 할부로 갚아가면서, 거의 갚아질때쯤 새로운 곳을 물색하는 식이다. 이처럼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니 여행 갈 기회가 더 생겼다. 그래서 박상 작가의 여행 마인드에 깊이 공감했다.

 

사는 일이 뭔가 안 풀리고, 할 일도 많은데 몸이 아프고, 좌절감과 통증과 외로움이 태풍처럼 밀려올 때 이 음악이라도 없었음 어쩔 뻔했나 싶다. 음악이 있는 한 인간은 절대 혼자가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175페이지)

 

그가 듣는 음악은 클래식에서부터 팝송, 우리나라 가요를 넘나든다. 그 장소, 그 때의 기분만이 갖는 음악을 만끽한다. 그가 소개하는 음악을 들으며 에세이를 읽었다. 그가 소개한 노래를 듣다가 노래를 부른 가수의 다른 노래를 듣느라 책 읽는 일을 제쳐놓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음악이 있어 이렇게 행복한 것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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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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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2년생은 아니지만, 이처럼 공감하며 읽은 책도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 이토록 힘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책이었다. 82년생 김지영 씨의 생을 보라.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보면,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차별받고 사는지 실감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맞아맞아 하며 읽었다. 

 

김지영 씨는 두살 터울의 언니와 김지영씨, 다섯 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다. 2남 1녀로서의 김지영 씨의 태생을 보고 있노라니 나의 어릴적 상황이 그대로 그려졌다. 우리는 3녀 1남의 형제다. 딸,딸,딸 그다음에 아들이 되고보니 김지영 씨 집안의 상황과 거의 흡사했다. 시골에서 살 때였는데, 아빠와 남동생만 쌀밥을 주고 엄마랑 우리 딸들은 보리밥만 주어서 정말 싫었다. 비싼 달걀 또한 마찬가지. 선생님 선물로나 주었던 귀한 달걀이기에 우리 딸들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거. 생선이며 고기 반찬 모두 아빠와 남동생한테만 가고, 우리는 쩝쩝 입맛만 다셨다지.

그게 불합리한 것을 알면서도 투정도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소설 속 김지영 씨의 상황을 보며 또 생각나는게, 훗날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엄마가 딸만 주르르 셋을 낳고 아들을 못낳으니 할머니는 아빠한테 여자를 소개시켜주었다고 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말씀하시긴 했는데, 진짜 박차고 나오셨을까, 조금의 의심은 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이라고 많이 변했을까?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별받고 있지 않을까.

 

직장도 그렇다. 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아이들 낳고 다니는데, 출산휴가가 2개월 있는데도 다 쉬지 못하고 출근했을 뿐만 아니라, 신랑이 섬으로 발령이 나 아이 때문에 눈치를 보며 직장을 다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게 다닐거면 직장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지영 씨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남편 정대현 씨가 자꾸 도와주겠다는 말을 할때 화가 나 대꾸하는데 그것처럼 통쾌한 적도 없었다. 김지영 씨의 말처럼 같이 맞벌이 하는데 집안일이든 아이 돌보는 것등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144페이지)

 

김지영 씨 말처럼 이게 사실인데, 남자들은 아직도 옛날 사고 방식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아이 챙겨 유치원이나 학교 보내는 것도, 퇴근후 아이를 챙기는 것도 엄마가 대부분 한다는 사실이다.    

 

더 가관인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 씨가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데,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했던 남자 상담의도 결국엔 남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에서다. 안과의인 아내가 아이때문에 병원 일을 접고 집에서 수학문제집이나 풀고 있어 안타까워 아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병원의 상담사 여선생이 몇 번의 유산 위기로 일단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그에 훌륭한 직원이지만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직원은 여러가지로 곤란한 법이라며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라고 말한 장면이다.

 

아,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남자의 본심이라는 거다. 물론 지금은 남자들도 육아 휴직을 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도 하는 사람이 꽤 늘었다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숙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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