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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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라는 부제 때문에 이 소설이 더 궁금했다. 사랑했던 아내가 죽은지 1 년째 되는 날. 아서 페퍼의 슬픔이 그대로 묻어나는 하루의 일상이었다. 아내가 있었던 때 처럼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회색 바지와 겨자색 민소매 티로 갈아 입고, 평소처럼 아침을 맞이하는 남자. 다만 커다란 식탁에 홀로 앉아있다는 것만 다를 뿐. 슬픔에 빠져 있다보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느끼지 못한다. 홀로 된 그에게 파이 등을 가져다 주면 그를 들여다보는 버나뎃을 피할 정도다. 이제 아서 페퍼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딸 루시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아내의 물건을 정리해야만 했다.

 

아내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신지 않았던 부츠 속에서 참팔찌를 발견했다. 아내 미리엄이 살아 있을 때는 보지 못한 화려한 팔찌였다. 팔찌에는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반지, 하트의 참들이 달려 있었다. 소박한 삶을 살았던 아서와 미리엄에게 어울리지 않는 팔찌였다. 꽤 값이 나가보이는 코끼리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아내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머나먼 인도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 메라 라는 남자에게서 결혼전 아내가 자신의 보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함께 머물렀던 공간에서 움직일 줄 몰랐던 남자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새로운 모습,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내력을 알고 싶었다. 아내가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 난생 처음 새로운 곳을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부담스럽다고 여겼던 버나뎃과 버나뎃의 아들 네이든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말이다.

 

어떤 삶이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서 페퍼가 아내의 부츠 속을 더듬지 않았더라면 아내의 참 팔찌는 누군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아서 페퍼는 자신과 만나기 전의 아내 모습을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신이 모르는 아내의 삶이 두렵고 불안했지만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낯선 사람과의 우정을 나눌 수도 있었고, 아내의 담당이었던 딸과 아들과의 관계도 다시금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미리엄이 걸어왔던 삶은 자유롭고 열정적이었다. 자신과의 삶이 너무 무료하지 않았을까 염려했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픔을 간직했으나 누구보다도 아서와의 삶을 사랑했던 미리엄이었다.

 

앞서 아들 댄과 루시는 아내 미리엄의 담당이었다고 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딸과 아들이었다. 아내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기 어려웠던가. 서운했던 마음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했다고 해야 맞겠다. 하지만 미리엄의 자취를 살펴보며 자식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편함을 느꼈지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이웃들의 새로운 관계도 달라졌던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 웅덩이에 갇혀 있었던 건지 몰라. 그가 생각했다. 비록 두려운 미지의 세계일지라도, 나도 바다로 나아가야 해. 그러지 않으면 말라 죽어버릴 테니까. (368페이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가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대하게 되니 그들도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닫았던 마음을 열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딸 루시와의 관계도, 아들 댄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만 빠져있지 않고, 이제 그만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누구나 삶이 어렵다.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있어 우리 사회는 아직 따스한 관계를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미리엄을 잃은 아서를 늘 살펴주었던 버나뎃이 있었고, 버나뎃의 아들 네이든의 말을 묵묵이 들어주었기에 아서와 마음을 터놓는 관계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 역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일지라도 우리는 배워야 할 게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가족과 사랑하는 방법도, 누군가를 포용하는 것도, 용기를 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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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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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태국을 여행할 때 신랑과 나눈 이야기가 있다. 신랑 퇴직후 따뜻한 나라 태국에서 한두 달쯤 머물다 가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도시든 며칠을 머무는 여행이 아닌 한두 달쯤 살아보는 여행. 꼭 태국이 아니어도 좋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 제주도든,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머물다 오자는 말을 했다. 친구네 가족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아 함께 여행간 친구네 부부와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왕이면 함께 다니자고.

 

틀에 박힌 듯 생활하고 있는 우리. 익숙한 도시를 떠나는 여행이란 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이유도 되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삶을 향한 원동력이 되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나는 다른 데 덜 쓰고 여행하자는 주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좀더 즐겁고 행복하자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삶을 잘 사는 것이리라.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 자유로운 직업을 가졌으며, 꼭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들처럼 우리나라를 떠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 일이 년쯤 머물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도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은 곧 여행이며, 여행이라는 것도 며칠 머무는 게 아닌 일이 년쯤, 어쩌면 더 적은 한두 달쯤 머무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 (9페이지)

 

이 여행산문집은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인 이우일이 역시 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인 아내 선현경과 그림을 공부하는 딸 은서와 함께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에 위치한 포틀랜드에서의 이 년 동안 살면서 그곳의 풍경을 전하는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받아들고 '퐅랜'을 '플랜'이라고 잘못 읽고는 어떠한 계획에 대해 말하는 책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여행산문집이라는 것에 다시 보았다. '퐅랜'은 '포틀랜드'의 영어식 발음을 그대로 가져온 제목이라는 걸 알고는 만화가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시계를 가지고 있다. 모양도 보는 법도 제각각이지만 시계를 가진 건 분명하다.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시계 관리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 그걸 보든, 버리든, 분해하든, 뭘 해도 상관은 없다. 고장이 나는 것도 자기 책임이고 잃어버려도 하는 수 없다. 중요한 건 누구나 하나씩 있긴 있다는 거다. (86페이지)

 

포틀랜드의 비오는 풍경을 상상했다. 일년에 6개월쯤 비가 내려도 퐅랜 사람들은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그곳 말이다. 일 년의 대부분이 비가 내리는 이곳이 어쩌면 소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이 머무는 곳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소설에서는 포크스라는 걸 나중에야 발견했지만 말이다. 비가 와도 퐅랜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여행자들. 저자 또한 처음엔 우산을 썼지만 나중에는 퐅랜 사람처럼 우산을 쓰지 않고 다녔다는 거.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찰나였다.

 

아마 포틀랜드의 풍경을 그려보자면 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거의 모든 퐅랜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타투,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 느리고 여유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느리다는 건, 순서를 지키고, 정확하게 일하는 것, 차례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능률적이고 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작 일 년을 살았을 뿐인데 집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껴도 되는 걸까? 집을 떠나 드디어 집에 도착한 것만 같은 이 평온한 기분이라니. (190페이지)

 

만화가 답게, 포틀랜드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 삽화가 실려 있었다. 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퐅랜의 풍경들에서 저자처럼 한 번쯤 퐅랜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행이란 게 스치듯 다녀가는 곳이 아닌 최소 몇 달, 일이 년쯤 살아보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북적대는 곳이 아닌 소도시의 차분함과 정겨운 풍경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도 그곳을 좋아할 수 있겠다는 어떤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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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2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Breeze 2017-12-22 22:4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2017-12-23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30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eeze 2018-01-03 10: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문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2018-01-03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12-31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내일부터는 2018년 새해가 됩니다.
새해에는 가정과 하시는 일에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저녁, 희망 가득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reeze 2018-01-03 10: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즐겁고 자주 웃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내가 사랑한 백제 - 백제의 옛 절터에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숨결을 느끼다
이병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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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아름다움을 엿보고 관심을 가진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 것이다. 학교다닐 적부터 역사를 좋아해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와 우리의 유물들에 대한 기록들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든 생각이지만 왜 역사를 전공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이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를 전공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텐데. 이런 생각을 너무 늦게야 했다는게 문제긴 하다.

 

역사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과거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다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치욕스러운 역사 때문에 어떻게든 일본을 이기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고구려, 신라, 백제 중에서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가 백제이다보니 백제가 가진 유산이 제대로 남아있을리도 없고, 역사적 기록 또한 폄하되었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초등학교때부터 배워왔던 역사 시간에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이 삼천 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하지 않았나. 나 또한 아이들 어렸을 적에 부여에 있는 낙화암을 방문해서 저 곳에서 삼천 궁녀와 함께 의자왕이 뛰어내린 곳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곳은 삼천 명의 궁녀가 뛰어내릴 곳이 못된다. 아주 좁은 장소. 그곳을 흘러가는 백마강 또한 아주 얕다는 것을 발견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니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신라나 고구려를 연구한 것 때문에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사랑했다. 자주 경주를 방문하고 과거 역사속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했었다. 이는 신라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았기에 그만큼 우리가 습득한 지식도 많았으리라. 이제는 백제에 주목할 때인가. 『내가 사랑한 백제』라는 다소 로맨스 소설적인 제목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나 또한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 현재도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백제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 생각했 듯 말이다.

 

백제를 연구한 학자 때문에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백제를 알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문물을 가져와 백제식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일본이 영향을 받아 그들이 꽃피운 아스카 문화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되었다.

 

 

 

박물관 수장고에 남겨진 보물들은 그 가치를 알아 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물로 보인다. (173페이지)

 

나의 시각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백제가 다르게 보이고, 백제 유물이 달리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364페이지)

 

일제 강점기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수많은 유적들을 파헤쳐 유물들을 몰래 빼돌렸다. 그들은 미개한 조선인들을 위해 유적들을 발굴해 박물관 건립을 했다는 식의 말을 했지만 결국엔 조선의 유물들을 약탈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현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인 저자 이병호는 20여년 간 국립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박물관에 있는 백제의 유물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백제사 연구에 매진했던 학자다. 사료의 부족으로 연구되지 못한 백제의 유물과 유적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었던 것을 연구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아야겠다. 그는 정림사지의 소조상과 능산리의 목간, 연꽃 문양을 가진 기와의 수막새를 분석했으며, 능산리 사지의 가람배치 등을 밝혀낸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백제의 아름다움을 탐했다.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아름다움에 일찍이 눈을 떴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출생해 살아온 배경과 어떤 공부를 했으며, 국립박물관에 들어와 자신이 했던 백제사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산문처럼 다정하며 백제의 아름다움을 익히 터득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던 글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부여를 방문했었다. 최근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조만간 부여 여행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익산에 백제의 유적인 미륵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한번도 유적지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는데 이 책으로 인해 마음을 굳혔다. 부여와 익산에서 새롭게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저자가 속해있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방문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역시 책을 읽은 자만이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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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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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간의 삶 속에서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던가.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쳐 사랑을 하고, 그 짧은 생이 너무 안타까워 마치 달이 차고 기울듯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가. 오로지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설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일어날 것 같은 상황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종종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생기긴 하지만 우리의 상상일 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처럼 소설에서 나타나는 걸 보면 우리 주변 누구에겐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조금쯤은 느끼겠다.

 

소설의 큰 얼개는 오래 전에 딸을 잃은 한 나이 든 남자와 일곱 살의 소녀, 그리고 소녀의 엄마가 호텔에서 만나 이야기는 하는 것이 첫 번째고, 그 이면에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두 번째다. 먼저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야기. 오사나이 쓰요시에게는 고향의 고등학교 후배인 아내 후지미야 고즈에가 있고 둘 사이엔 루리라는 딸이 있다. 어느 날 루리가 일주일쯤 고열에 시달리다가 말끔히 나았던 이후로 이상한 행동들을 한다. 20여년 전의 노래를 하는 가 하면 일곱 살의 나이로는 알지 못할 한자들을 써보였다.

 

루리도 하리도 빛을 비추면 빛난다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문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장을 말하면 루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왜 그토록 중요한 문장인가. 다른 이야기로 스무살의 미스미 아키히코는 어느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영화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비오는 어느 날, 비디오대여점 앞에 젖어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비를 피하고 있었다는 그녀에게 수건이 없어 티셔츠를 건네주었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렇게 헤어졌다. 그녀의 모습이 궁금해 그녀가 자주 다닌다는 영화관을 순례하다가 우연히 만난 날 둘은 하염없이 거리를 거닐었다. 단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루리. 루리는 자신의 이름을 '루리도 하리도 빛을 비추면 빛난다'라는 속담에서 따왔다며 아키히코에게 말했다.

 

루리는 달처럼 죽었다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전설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달이 차고 기울 듯이 몇번이고 다시 죽고 태어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루리는 환생을 거듭한다. 짧은 삶을 살다가 다시 태어나 아키히코에게 향한다. 삼십 대의 아키히코에게, 사십 대의 아키히코에게, 오십 대의 아키히코에게 향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루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나고, 아키히코를 찾는다. 그가 근무했던 비디오 대여점으로, 그가 근무하고 있는 건설회사 빌딩으로.

 

 

 

예전에 드라마 <도깨비>에서 나타났 듯 과거의 기억을 안고 있는 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삶이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행복했던 기억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루리는 아키히코만을 사랑했고, 아키히코를 만나기 위해 짧은 삶을 반복하게 되었다. 마사키 루리가 죽고 난 뒤 첫 번째였던 오사나이 루리와 고누마 노조미(루리), 미도리자카 루리에게 환생이 반복되었다.

 

아이를 임신한 사람이나 임신한 이의 가까운 사람은 종종 태몽을 꾸게 된다. 태몽으로 인해 누군가의 임신을 알아채고 자신에게 다가온 새생명을 끌어안는다. 만약 임신한 상태에서 딸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루리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을때 아이 엄마는 대부분 그 이름으로 딸을 부를 것이다. 아이의 전생을 알게 된 엄마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를 믿어주었다. 어떻게든 미스미 아키히코에게 데려다 주려고 했으나 운명이 막았던 것일까. 그들의 생은 짧았다. 마치 마사키 루리의 짧은 생을 따라가듯 쉽게 아키히코에게 닿지 못했다.

 

인간은 세 번쯤 환생을 한다고 어디에선가 들었다. 한번 뿐인 생이지만 생과 사를 반복한다면 어쩌면 이런 환생을 꿈꿀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사랑하면 이렇게나 생을 반복하는 것일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 생이 너무 짧아서, 제대로 사랑을 못해 이렇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던 것일까. 마치 운명의 굴레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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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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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난후 돌이켜보면 그리운 법이다. 그 시절의 고통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는 법.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임에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우리가 견뎌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픔도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는 법. 우리는 지금도 미래의 역사를 쓰는지도 모른다.

 

터키 이스탄불의 한 소년.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보자를 판다. 시골인 아나톨리아에서 도시인 이스탄불로 나와 낮에는 중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아버지를 따라 보자를 판매한다. 여기에서 보자란 기장으로 만든 술에 가까운 터키의 전통 음료다. 짙은 노란색을 띤 음료로 약간의 알코올이 가미되어 있다. 우리의 단술 정도라고 보면 될까. 1969년부터 2012년까지 약 사십 년 간의 이스탄불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 거리를 누비는 노점상들. 소위 노동자 계층의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도 자기 집 한 칸 제대로 가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닮았다.

 

많은 부분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보자 장사치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보오오자아아아~! 하고 외치는 소리는 우리의 과거와 닮았다. 찹쌀~떡!, 메밀~묵! 하고 외치던 소리 말이다. 때로는 집에 있는 손님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보자를 산다. 윗층에서 바구니를 내려 보내 보자를 사고 파는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다.

 

우리의 주인공 메블루트가 사촌 형 코르쿠트의 결혼식에서 형수인 웨디하의 여동생 중의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반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수백 통의 편지를 쓴다. 코르쿠트의 동생 쉴레이만과 형수 웨디하의 도움으로 눈동자가 아름다운 '라이하'에게 3년간이나 편지를 썼다. 그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쉴레이만의 도움으로 라이하와 도망치기로 했다. 일명 신부 납치. 터키에서 신부를 데려올때는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주어야 한다. 돈이 없는 메블루트는 라이하의 마음을 얻어 도망치기로 했던 것이다. 

 

신부의 아버지가 쫓아올지도 몰라 쉴레이만의 도움으로 트럭을 타고 도망쳤다. 도망친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메블루트는 번개가 칠때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가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 소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느꼈던 낯선 감정이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았다.

 

지난 3년 간 편지를 썼던 소녀가 아내의 여동생이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메블루트는 라이하에게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를 평생을 함께 할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메블루트의 과거로, 이스탄불로 오게 되는 과정들을, 라이하와 함께 이스탄불의 격동의 현대사가 시작되었다.

 

 

 

 

소설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거리를 누비는 하찮은 보자 장수 임에도 메블루트는 누군가를 속이려 들지 않는다. 그가 식당의 매니저로 일했을때 직원들을 감시해야 함에도 그들을 고자질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친구 페르하트가 전기검침원으로 일했을 때 불법으로 전기 쓰는 것을 봐주며 댓가를 챙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메블루트는 적발하지 않았다.

 

사람은 도시의 인파 속에서 외로울 수 있고, 도시를 도시이게 만드는 것도 어차피 군중 속에서 마음을 스치는 낯선 생각들을 감추는 데 있었다. (131페이지)

 

메블루트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으로 그의 주변 사람들은 돌아가며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메블루트를 바라보는 감정들,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들을 그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 마치 독백처럼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터키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의 궁핍한 생활. 집을 짓고 나서 마을 이장에서 서류를 임시로 발급 받는 것하며, 그 증서가 곧 그들의 재산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 군부 쿠데타로 인해 서로를 적대시 했던 행동들. 도시화로 변해가는 이스탄불의 풍경은 재산을 다투는 모습까지 보인다.  

 

나뭇잎들이, 단어들이 말을 하며 움직였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다리는 물론 운명이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운명은 이 두 가지를 합치할 수 있다. (중략) 하지만 마음의 언어와 말의 언어는 바람, 우연, 시간 같은 운명에 관련된 것들로 인해 실현된다. 라이하와 함께 발견한  행복은 메블루트의 인생에서 커다란 운명이었고, 그것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534페이지)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수많은 낯선 감정을 만나게 된다. 메블루트가 라이하를 처음 만났을 때 반했던 소녀가 아니었음을, 딸 아이가 태어났을때 라이하가 아이만 바라보았을때 느꼈던 질투라는 낯선 감정들처럼. 그럼에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일테다. 두려웠던 감정들을 뒤로 하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표지속에서 보였던 지게를 짊어진 소년의 삶의 무게가 지쳐보인다. 그럼에도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행복을 위한 발걸음이었다는 걸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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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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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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