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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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그저 떨어지지 않은 채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언제 떨어져내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떨어져서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지 모른다. 나는 죽음보다 그 시궁창이 더 무서웠다. 그 떨어지는 맹렬함, 이것이 추락이구나 생각하면서 떨어져내려야 하는 그 순간을 인정해야 하는 그것이 두려웠다. 기를 쓰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면서 문득 여기가 어딜까 나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표지판 위로 차를 몰아왔던 것이다. 길이 아니라, 길을 표시해놓은 표지판 그 위로.......
-[꿈]
 
그녀는 그에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그 쳐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 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가 그 검은 눈으로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전혀 방어가 되어 있지 않은 눈이었다. 모욕에 대해서, 거짓말들과 가면에 대해 면역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무거운 가방]
 
 
공지영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中
 
 
+) 작가에게는 당황스러움일지 모르나 난 언제나 작가들의 첫 소설이 궁금하다. 이 사람의 처음과 현재가 얼마나 다른지, 그대로인지, 그렇다면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 아마도 작가들은 나같은 독자가 싫을 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더 많은 독자가 글쓰는 것을 궁금해하니 말이다.
 
공지영이 낸 첫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는 대부분의 화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에 망설이며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시대나 사회에 원인을 두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체들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단편들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들의 군상이 많다.
 
그건 어쩌면 글쓰기를 처음 시도하는 공지영의 내면이 아니었을까. 알다시피 그녀가 겪었을 시대적인 고민은 아니었을까. 나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읽으며 가슴이 답답하고 손끝이 떨려옴을 느꼈다. 감옥에 갇혀 살던 사람의 삶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런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힘은 공지영의 필치에서 온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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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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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작가만의 일정한 법도가 있다. 이를테면 작가 김애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솔직한 어조로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유지한다. 그것이 마치 작가의 체험인 것 같은 착각에 이르게 한다. 타인의 심리를 꿰뚫고 자신의 정확한 눈에 탄복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솔직한 자신에게 기특해 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작가 김애란은 마치 자신의 과거나 현재를 전하고 있는 친구처럼 독자의 옆자리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대부분의 화자는 자신에게 솔직하다. (“원래 말이란 주인이 없고, 오염되고, 공유되기 마련인 것이지만 후배의 입에서 자신이 즐겨 쓰는 어휘나 농담이 튀어나올 때마다 뭔가 도둑맞은 기분을 느꼈다.”「침이 고인다」부분)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잊었거나 잃었던 것들을 찾기도 한다. (“그때 나는 힘을 주지 않고도 뭔가를 움켜쥘 수 있다는 게, 또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도도한 생활」부분) 또한 사람 사는 것에 일정한 법칙은 있을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삶의 방식, 그러니까 중요한 감을 깨닫게 된다. ( “괜찮겠냐는 거, 결국 배려를 가장하며 책임을 미루려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침이 고인다」부분)
 
물론 그것은 절대 혼자(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어머니, 언니, 아버지 등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었을 때 나는 결국 남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라고 정리했다. 그녀의 소설에서 가족은 하나의 표면적인 액자에 불과하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거리로 좁혀지는 관심의 척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두 번째 소설집(『침이 고인다』)에서 그런 생각에 확신을 얻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춰내고 있으며,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비추고 있다. 액자에는 어떤 그림도 넣을 수가 있으며, 액자에 끼워 넣은 그림에 따라 액자의 분위기도 바꿀 수 있다. 내면의 문제가 인물들의 외적 상황에도 관여하고, 외부 요인이 인물의 내면 심리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모텔과 여관 창문을 올려다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그 많은 방 중 진짜 자기 방은 없다는 불안 때문이었다.”「성탄특선」부분)
 
나와 나 이외의 사람을 구분짓는 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리적인 혹은 화학적인 결합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인간관계이다. 특히 정으로 맺어지는 끈적한 무언가가 사람 사이에 있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칼자국」부분)
 
작가는 인간 본연의 애정을 혈연 관계로 받아들이기 쉽게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멀리, 더 깊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마음을 둔다. (“하루에도 수천만 명이 수천만 개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데. 어째서 이 사람의 ‘미안하다’와 저 사람의 ‘괜찮다’는 부딪치지 않고 온전히 상대방의 단말기로 미끄러져갈 수 있는 걸까.”「기도」부분)
 
즉, 김애란은 ‘사이’의 매력을 부각시킬 줄 아는 소설가이다. 깊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회 사이, 글자와 글자 사이, 넓게는 풍자와 해학 사이, 유머와 위트 사이, 말과 말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유쾌한 웃음과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치밀한 구성에서 드러난다. 평범한 일상의 한 단면에서 만나는 인물이지만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다. 그 역설적인 마력에 우리가 빠져드는게 아닐까.
 
 
김애란, <침이 고인다> 中
 
 
+) 얼마전 내가 감상문의 형식으로 적었던 글. 그 글에서 옮겨와 앞뒤를 살짝 자르고 편집하여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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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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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빠질 게 없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이란 감정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 그래서 시작되었다.
p.17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건 말이다. 말하자면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진 것이란 얘기야.-나 같은 유형의 인간에게, 확실히 그것은 자극적인 말이었다.
p.46
 
적응이 안돼요  /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요 /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 무엇보다 /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 살아가는 거잖아요 /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p.117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p.180
 
박민규, <핑퐁> 中
 
 
+) 지난번에 신춘문예 심사평을 읽다가 좀 놀란적이 있었다. 어느 신문이었는지 잊었지만 심사위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소설의 대부분이 '박민규'적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 박민규다운 스타일이 무엇일까. 박민규의 단편을 몇 번 읽고 그의 소설이 엉뚱하게 진행되는 것에 매력을 느꼈으나, 갑자기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처럼 끝나는 소설에 좀 난감했다. 장편소설을 읽으면 어떨까 싶어 이 책을 집어들었다.
 
<핑퐁>에서 그는 왕따 학생들을 소재로 그를 괴롭히는 학생과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거기에 탁구를 끌어들여 따를 당하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문제를 제시한다. 작가의 말대로 '결국 지구의 인간은 두 종류다. / 끝없이 갇혀 있는 인간과 잠시 머물러 있는 인간'이 그들이다. '갇혀 있는 것도 / 머물러 있는 것도 / 결국은 당신의 선택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문제는 학생들의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인류 전체로 확대된다.  
 
급히 읽으면 스토리의 전개에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천천히 곱씹어 읽어야 제맛을 살릴 수 있는 작품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가 내린 선택은 늘 극단이다. 기발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파격적인 환상선을 타는 것이다. 문제는 박민규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그 환상적인 소재 혹은 환상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일직선의 어조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현실 이외의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독자에게 무작정 들이대는 듯한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제시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째서 그는 이렇게 불친절한 구조를 전개하고 있을까. <핑퐁>에서 제시한 인류와 인간의 문제를, 즉 공동체와 개인, 다수와 개인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의미있는 문제였다. 결국 문제 없는 사람들의 집단에서 늘 문제가 발생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데 박민규의 필치는 돌고 돌아서 독자에게로 간다.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선택의 문제일까. 신춘문예 응모자들이 자신이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다만, 그 작가의 문체를 배우려한다면 그대로 모사하기 보다 한 단계 발전적인 생각을 갖고 있길 바란다. 박민규의 소설은 흥미로우나 박민규의 문체를 이해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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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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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직 사는 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로 난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필사적으로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심연 속의 영원함에 매력을 느껴요. 때로는 몸을 내밀고 영원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그래요, 마르게리타."
  나는 말했다.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절벽 가장자리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지. '몸을 내밀면 위험합니다.'"
p.16
 
선물을 살 때 사람들은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정복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구입한 것을 선물하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며, 선물을 받는 것은 훨씬 더 큰 기쁨이다. 받는다는 것은, 비록 좋아하는 것을 받을지라도 언제나 조금은 멋쩍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물을 받을 때 언제나 좋아하는 것만 받는 것은 아니다.
p.88
 
 
조반니노 과레스키,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中
 
 
+)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유머러스하고 조금은 까칠한 그의 가족 이야기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이 사는 이야기인데, 읽고 있노라면 '오쿠다 히데오'가 제시하는 유머와 재치가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살아가며 가끔씩 부딪치는 고민들과 가족들에게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아이들의 한 두마디에도 어른들의 시각과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며 부부간의 문제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시각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조반니노는 유명한 소설가이나 집안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엉뚱하지만 빈틈없는 논리성을 갖춘 아들과 딸의 아버지이기에 진땀을 흘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마르케리타는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상상으로 감수성을 지나치게 자극시켜 자신과 아이들까지 감성의 늪으로 잡아두는 엄마이다. 2% 부족한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귀엽네,하고 넘길 수 있는 개성적인 여성이다.
 
알베르티노는 아버지가 쓴 책을 읽고, 아버지 앞에서 '별로'라거나 혹은 '급하게 대충 썼네'라고 평가하는 무서운 아이돌이다. 열살 남짓의 나이에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관찰하는 시각이 날카로우며 삶의 난관들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다. 파시오나리아는 영리가하고 귀여운 소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버지 혹은 오빠에게 조리있게 설명하고 주장을 펼칠 줄 아는 아이답지 않은 면모를 가졌다. 이제 겨우 여섯 살 정도의 아이지만 그녀의 주장에 반박하기란 절대로 쉽지 않다.
 
이 유쾌한 가족 이야기를 전철에서 읽으며 풋,풋, 웃어대다가 사람들의 묘한 시선을 받았다.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에서 정신과 의사만의 독특한 위트와 재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조반니노의 작품에서는 촌철살인의 유머와 지혜가 가족 별로 발견할 수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이 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은 왜 일까. 어쨌든 소설이나 그들 가족의 실상을 보여주는 이 책에서는 유머러스한 그러나 탄탄한 논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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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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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걘 구제불능이야. 어떻게 해도 안돼. 안해도 안되고 해도 안돼. 나는 지금 걔를 이해할 능력이 없어.
- [천애윤락]
 
사귀기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같은 것보다 낫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뜨거운 부위에서 차가운 부위로 열이 옮아가듯 움직임이 있다. 서로 비슷해져서 고여 있는 물 같은 상태보다, 알 것 다 알아서 미지근한 관계보다는 낫다.
- [욕탕의 여인들]
 
노름은 믿음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의 운에 대한 믿음, 노름의 일회성에 대한 믿음, 인생의 일회성,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노름을 하게 한다. 누구의 믿음이 큰가, 철저한가에 따라 이기고 진다. 그렇지 않은가, 사막에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한숨짓는 나그네여. 누군가 사막을 울림통으로 삼아 이렇게 속삭였다. 그게 누구인지는 말할 수 없다. 나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 [꽃의 피, 피의 꽃]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中
 
 
+) 위의 글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성석제의 언어유희는 일품이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을 연쇄적으로 나열하며 변형시키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문장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가만히 읽고 있자면 역설적이거나 혹은 반어적인 표현들에 독자들은 흡수당한다.
 
가끔은 고전적인 소재들을 끌어 들이기도 하고, 또 현대의 밑바닥 소재들을 소설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천상 이야기꾼인 작가가 만든 작품은 다양한 소재만큼이나 흥미롭다. 주로 짧은 문장들로 치밀하게 써내려가는 그의 필치는 까다로워보이기도 하지만, 작품마다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부러운 재주가 그를 편한 작가로 바꿔버린다.
 
물론 작중인물의 행동이나 결말에 의문이 남을 때도 있다. [천애윤락]의 동환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라는 말로 그간의 일을 대신할 때, 도대체 그 자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작가의 부족함으로 치부하기 보다, 열린 가능성으로 남겨두고 싶다. 독자에게 맡긴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시장에서 이제 막 잡아올린 신선한 물고기같은 그의 작품들이 좋다. 그것은 그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손에서 뗄 수 없게 하는 재미와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생각해야 하는 꺼리를, 동시에 던질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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