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트 : 환영의 집
유재영 지음 / 반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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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실비가 혈액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세상은 본래 가장 취약한 이를 겨냥해 더욱 잔혹해진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려는 순간에도, 거리나 병원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거나 사체를 보거나 누군가 소리 내어 우는 소리만 들려도 숨이 막혔다. 어디에든 대고 작작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 까마득했다.

p.33

한집에 사는 일은 훨씬 더 파편화된 일로 구성되어 있어 섬세한 조절과 균형이 필요했다. 이미 규호와 함께 한 많은 시간들이 금이 가고 뒤틀린 채 고여 있었다. 그 어긋난 시간이야말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였다.

p.72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이니 다음 날이 귀신날이었다.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성에서 그날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엄마도 귀신날에 대해 이야기한 건 두 번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마당에서 잡풀과 잔가지를 불태우고 신발을 모두 장에 집어넣었다. 귀신들을 쫓으려는 게 아니라, 집을 찾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로 와도 괜찮다는, 환영의 의미였다.

p.133

고타로가 있는 세계는 죽음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곳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어떻게 인간은 죽는가. 매일 전쟁터에서 수천 명이 죽어갔다. 고타로는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썼지만, 이제 그 말은 다르게 들렸다.

p.136

나오의 기록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의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재하는 것일까.

pp.159~160

유재영, <호스트> 中

+) 이 소설은 한국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전개된다.

적산가옥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일본인이 건축해 일본식으로 지은 일본인 소유의 주택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매각한 집을 의미한다.

청림호 옆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1945년, 1995년, 2025년에 각각의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역순행적 구성으로 시간을 뒤섞으며 벌어진다.

2025년 현재의 시점에서 규호네 가족은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오고, 처음부터 적산가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규호'와 달리 아내 '수현'과 두 아이 '실비', '실리'는 이곳을 마음에 들어한다.

투병 중인 딸의 병원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큰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이 집으로 이사를 오지만, 이곳에서 규호는 내내 불안해한다.

그리고 실재하는 현상인지, 꿈속 같은 환영인지 알 수 없는 소리와 흔적, 존재들을 가족들이 보고 느낄수록 그 불안감은 증폭된다. 적산가옥과 관련된 규호의 숨겨진 사연은 무엇일까.

반면에 수현은 아픈 딸의 건강과 현재 가정 형편에 이 집이 큰 도움과 위안이 되기에 비현실적인 현상과 환영을 느끼면서도 머물고자 한다.

또 그때쯤 일본어로 실험 이야기가 기록된 글과 낡은 편지를 발견한다. 일본어를 천천히 분석하며 이 글들이 80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나오'의 것임을 알게 된다.

나오는 조선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의사였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림 병원에서 근무하며, 이 집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잃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기 무렵 그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일은 2025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선택의 하나로 이어진다.

이 소설을 호러 소설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아깝다. 오히려 스릴러 소설에 가깝고 문학적 깊이도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장르를 경계 짓기에는 폭넓은 성향을 지닌 소설이다.

그렇기에 각각의 갈래로 생각해 보자면, 스릴러 소설이 갖고 있는 특유의 긴장감,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몰입감을 잘 형성한 소설이다.

또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진실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핍박과 억압, 그 기회를 틈 타 조선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일본 내지인, 하지만 해방 직후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증오 등을 담백한 문장으로 냉철하게 그려냈다.

각각의 사건이 결말로 향할수록 호러와 미스터리 소설에 가까운 모습도 보인다. 시간적 배경이 확연히 다른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고, 시대를 뒤섞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도 작품의 흡입력을 높이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사연을 지닌 여러 인물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순간순간 마음이 아팠고, 또 그들의 고통에 함께 분노했으며, 그들의 두려움에 같이 무서워했던 소설이었다.

결말을 미리 언급하면 안 되는 영화를 보듯 쉼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다 읽고도 앞의 그 장면이 환영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읽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영일까. 그런 궁금증에 대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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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봄을 건너는 법 우리학교 상상 도서관
정은주 지음, 김푸른 그림 / 우리학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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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담한 체격과 유난히 작은 얼굴,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동작에 금세 멍해지는 표정. 산에를 오늘 처음 본 애들이 산에를 장애인이라고 말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저 모습밖에 없을 거다. 어렸을 때도 산에는 지금처럼 걷고 걸핏하면 저런 표정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산에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모두가 산에는 기분 좋으면 저렇게 걷고, 그냥 입을 잘 벌린다고 여겼다. 그때는 단지 다를 뿐이라 생각했던 모습이 지금은 '장애'라는 분명한 이름을 얻은 셈이다.

p.8

그때까지도 산에는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라도 산에 손을 붙잡고 "산에야, 이제 그만 가자."라고 말한다면 산에는 순순히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산에를 바라보는 윤하의 눈빛이 나현이의 눈빛과 똑같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p.49

"산에야."

"응?"

"너, 왜 이 학교로 전학 왔어?"

"... 어, 어. 내가 너무 똑똑해서, 너무 똑똑해서 영재. 장애아 영재. 어... 그래서 일반 학교에 다녀야 한대. 나 때문에 정말로 특수학교에 다녀야 하는 애가 못 다닌다고."

p.67

"민준아, 너는 햇살이랑 대화가 돼? 말이 통해?"

"뭐,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가 훨씬 더 많긴 하지."

"... 그런데, 왜 맨날 같이 다녀? 너 햇살이가 하자는 거 다 받아 주잖아."

"... 다 받아 주는 건 아니야."

민준이가 나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햇살이가 먼저 나한테 말 걸어 주고, 놀자고 했으니까... 햇살이만 그랬어."

p.84

"김햇살 장애인 아닌데요. 우리랑 수업 다 듣고, 지네 엄마도 햇살이 장애인 아니라고 그랬어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후의 태도에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후는 그보다 더 화가 난 거 같았다.

"어떨 때는 똑같이 대하라고 난리고, 이럴 때만 장애인이에요?!"

p.117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우정을 맺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동정하고 보살펴주는 대상으로는 봐 주는데, 우정까지는 참 어렵지요. 왜냐면 우정은 동등한 인간관계거든요. 그럼에도 제가 이런 제안을 했을 때 우리 친구들 모두가 데려올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눈물 날 것처럼 좋았습니다."

p.139

정은주 글, 김푸른 그림, <우리가 봄을 건너는 법> 中

+) 이 동화는 요즘 초등학생들의 교실 내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매 학기 초만 되면 친구 사귀는 것이 힘들어 긴장하는 아이들이 많다. 말로만 듣던 그런 상황을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아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도 바쁜 '선아'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유치원 때 단짝이었던 '산에'가 나타난다.

유치원 다닐 때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는데 산에가 '윌리엄스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앓고 있다는 걸 어른들이 알게 되면서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현재, 선아네 학교로 산에가 전학을 온다. 이미 선아네 반에는 자폐 증상을 보이는 '햇살'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산에까지 같은 반으로 배정되면서 아이들은 당황스러워한다.

물론 햇살이는 장애 판정을 받은 적이 없지만 아이들과 선생님은 햇살이의 특별한 행동에 종종 곤혹스러워한다. 이때 선생님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햇살이가 따르며 좋아하는 친구 '민준'이가 등장한다.

민준이는 이전에 학교 폭력 사건과 연관된 적이 있어서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는데 그런 민준에게 햇살이는 좋은 친구가 된다.

선아와 산에, 햇살과 민준이 한 반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은 여러 상황을 만나게 된다. 급식실에서의 소동, 선아와 산에의 관계에 대한 소문, 민준과 산에가 햇살이를 괴롭히는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는 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 사건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진실을 파헤치려는 선아와 반 친구들의 노력, 어른들이 바라보는 장애 학생에 대한 편견, 어른들의 미숙한 대응 방식 등등도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동화를 읽는 내내 마음이 여러 번 일렁였다. 장애와 비장애, 편견과 오해, 그리고 배려와 이해, 우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담아낸 동화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 초등학교 교실을 스케치한 듯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편견과 혼란으로 산에와 햇살이를 대하던 아이들이 이들을 친구로 대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읽는 내내 아이들의 장하고 멋진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또한 장애를 지닌 친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초등학생들에게 친구를 사귄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크고 깊은 건지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초등학생들의 학교생활 역시 하나의 사회생활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친구를 사귀고자 애쓰며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사회생활을 잘하고자 애쓰는 어른들과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무엇이 편견이고 무엇이 배려일까. 또 친구가 되어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친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동화는 그 고민과 아픔과 희망을 함께 담아낸 작품이기에 초등학생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또한 꼭 초등학생이 아니더라도 청소년을 비롯한 어른들에게도 한 번쯤 읽어볼 감동적인 동화책으로 추천해 주고 싶다.

누가 읽어도 가슴 찡하게 전하는 감동과 마음 깊이 생각해 볼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본다. 장애와 학교 폭력 등의 민감한 문제를 현실적이지만 인간적으로 잘 다룬 성장 동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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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맨 만큼 내 땅이다
김상현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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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일이 좋습니다. 노력한 것에 비해 쥐꼬리만 한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찬란한 미래보다 암울한 현실이 더 커 보일지라도 제 이야기로, 제가 펴낸 말들로, 제가 계획한 공간에 온 모든 이들이 삶의 어떤 순간에 아주 일부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가 저를 움직이기 만듭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만들어진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관점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세상은 늘 그대로 있지만, 관점 하나로 수많은 것들이 새롭게 포착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회'라는 이름의 선물로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pp.22~24

마음을 먹었으면 그냥 하면 됩니다. 마음만 자꾸 먹으면, 마음에도 살이 쪄서, 더욱더 움직이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사실 안 될 건 진짜 없으니 말이죠.

p.46

"코카콜라도 첫해엔 25병밖에 팔지 못했다. 포기하지 말길!"

p.52

결국 일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잘 경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p.62

진정한 행복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도가 아닌 빈도에 있었습니다. 거대한 성취가 주는 단 한 번의 강렬한 쾌감보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하고 확실한 즐거움의 총합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저는 저의 일터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미래의 어느 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경험 속에서 발견하고 채워나가야 할 구체적인 감각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행복을 좇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지도 않습니다. 대신, 저의 유전적 기질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불안한 욕망의 근원을 이해하며,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쾌감을 수집합니다.

pp.126~129

많은 사람이 줄 위에서 발만 내려다보며 위태롭게 걷는 데에만 급급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발이 아닌 저 멀리 있는 목적지를 응시하며 걷는다고 하죠.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균형을 잡아주는 긴 장대가 들려 있습니다.

그 장대가 바로 '나만의 기준'입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길지, 어느 쪽으로 무게를 실을지 스스로 정한 단단한 기준 말입니다. 결국 무엇을 선택하든 그에 상응하는 이점과 결점은 모두 제가 감당해 내야 할 몫입니다. 그렇기에 '나만의 기준'이 필요한 거예요.

pp.133~134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과 '모든 것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p.183

이 모든 변화의 끝에 무엇이 남게 될까요? 수많은 것들이 대체되고 사라지는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남게 될까요? 저는 그 답의 실마리를 '직렬적 경험(Serial Experience)'이라는 개념에서 찾습니다.

AI는 수백만 권의 책과 논문을 1초 만에 분석해 '병렬적(Parallel)'으로 쌓습니다. 그것은 넓고 방대하지만, 결코 깊이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의 경험은 결코 동시에 여러 트랙으로 처리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시간 축 위에서 순차적으로, '직렬적(Serial)'으로 쌓입니다.

시간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실패와 고통, 사랑과 연대라는 무형의 감정이 새겨진 경험.

이것이야말로 기술이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토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가변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자산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직렬적 경험뿐입니다.

pp.211~214

김상현, <헤맨 만큼 내 땅이다> 中

+)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겪고 느낀 바를 토대로 방황하는 시간, 헤매는 시간이 인생에서 왜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일에서든 우리는 흔들리며 좌절하고 실패했던 시간들이 있다. 그 시행착오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떻게 디딤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몇 개의 카페와 출판사를 경영하며 성공의 환희도 느꼈지만 좌절과 고난의 고통도 맛본 사람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깊이 깨달은 것들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인생의 지혜를 독자에게 전해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상당히 촘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에 있어서는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여유에 있어서도 저자는 틈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이는 저자가 언급한 '적당한 야망과 높은 행복'이라는 그의 잣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그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일도 부지런하게, 쉼도 성실하게. 그렇게 행해야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의 솔직한 표현이라고 본다.

무언가에 집중해 만들어본 경험이 만들어진 존재들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한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경험하고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취향과 방향에 맞는 걸 찾아 스스로를 채우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 끝없이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 일을 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 일상을 살피며 거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는 게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 어떤 것이든 꾸준함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 분명한 방향성과 탄탄한 회복력으로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건너야 한다는 것 등.

저자는 이 의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이 책에서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논리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감성 어린 구절들을 발견하며, 독자들을 위한 인생 선배의 부드럽지만 단단한 조언이라고 느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패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흔들림의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는 사람들에게, 이 과정이 왜 가치 있는 시간인지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헤매는 시간의 깊이를 수용하며 삶의 방향성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응원과 공감의 메시지를 전달받고 싶은 이들에게도 위안이 되는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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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엔딩 라이프
정하린 지음 / 한끼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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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든가, 불행했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건 잘 모르겠어. 너를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니까."

"..."

"근데 그건 알아. 네가 나쁜 애는 아니라는 거. 나는 나쁜 사람 아니면 다 말해 주거든. 조심하라고."

p.33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저승사자는 그저 '신의 뜻'이라고 하니 신이 부를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겠죠."

몇 번이고 죽어도 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도 세상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게 신의 뜻이라고? 신이 부를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 삶은 어떤 형벌보다 끔찍한, 고통스러운 지옥 그 자체였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까 어차피 못 죽는 거 그냥 조금만 더 살아 보자고요. 그러다 보면 신이 부를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우리 같이 견뎌 봐요."

pp.56~58

"사람이라면 절대 못 그래. 신이니까 모르는 거야.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도, 남편 잃은 아내의 슬픔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거라고! 신도 막상 살아 보면 다를걸?"

그녀는 속사포처럼 설움을 토해 냈다.

"신은 인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얼마나 고통 속에 사는지, 얼마나 아프게 사는지 전혀 모르잖아! 자기들은 맨날 뒷짐지고 구경만 하면서 왜 늘 인간에게만 견디래?"

p.91

"네가 뭔가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건 알아. 그래도 이럴 땐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누군가의 호의를 고맙게 받는 것도 예의거든."

"..."

"그리고 다음에 너도 뭔가를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주면 되지. 그 사람한테 다 갚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도와줘도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그렇게 도움이 돌고 도는 거야."

p.119

"너 말이야. 솔직히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거나 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네 얼굴을 보니까 알 것 같아. 나는 네가 평온하길 바랐나 봐."

"오랜 시간 너의 고통을 지켜봤으니까."

"봐, 어딘가에는 이렇게 너의 평온을 바라는 사람도 있지? 그러니까 스스로를 너만의 세상에 가두지 말고 살아.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어딘가에는 너를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p.124

"나는 늘 아팠어요. 그리고 아픈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이미 아파 봤다고 해도, 늘 아팠다고 해도, 또 아플 수 있는 법이니까."

p.137

"사는 게 참 힘들다."

"뭘 해도 미움받기는 쉬운데, 사랑받기란 쉽지가 않더라."

"원래 그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우니까."

p.295

정하린, <네버엔딩 라이프> 中

+) 이 소설에는 삶에 지쳐 여러 번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등장한다. 여러 번 선택한 죽음이 되는 건, 죽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저승사자들이 존재한다. 때가 되면 사람들을 저승으로 인도해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저승사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아직 신이 부르지 않았는데 끝없이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 사람들 중 저승사자와 인연이 되어 이 생을 다른 삶의 패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 서은이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고 아빠와 둘이 살다가 아빠마저 사고로 잃은 서은이는 가난으로 인해 아프고, 세상의 폭력으로 인해 아프고, 학교 폭력으로 인해 아프다.

그래서 서은이는 이번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하는데 문제는 죽어도 죽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저승사자가 인도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생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저승사자 또한 인간에게 감정을 두지 말아야 하지만 안타까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연민 등 복잡한 감정이 생긴다.

이 작품에는 저승사자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들이 제시될 때마다 요즘 현대인의 모습을 담은 듯해 마음이 아프다.

반면에 자연스러운 죽음 앞에서 저승사자의 인도를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지만, 끝까지 저항하며 이 생을 더 이어가려 애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지금 살아가는 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또한 사람 사이 마음이 전해지고 전해지듯, 돌고 도는 인연은 한 생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걸 신비롭게 풀어냈다. 마치 드라마 시리즈를 본 느낌이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이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저승사자의 이야기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흥미있게 풀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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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 관하여 - 이금희 소통 에세이
이금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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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저희 엄마가 항상 저에게 해주시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보다는 격려가 힘이 세다.' 저도 누군가 걱정이 될 때는 무조건 격려를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타인의 삶을 고작 한 조각만 보고 지레짐작하며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상대방의 마음을 위축시키기보다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주면 어떨까요.

p.29

가족은 짐이자 힘입니다. 배를 띄울 때 밑바닥에 싣는 '바닥짐' 같은 존재죠. 바닥짐이 없으면 배는 균형을 잡지 못한답니다. 반면 너무 많으면 정작 실어야 할 다른 짐을 실을 공간이 부족해집니다. 적당히 실어줄 때 배는 균형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습니다. 그러니 가족은 바닥짐입니다.

p.33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재미없어서 그러는 겁니다. 자기 삶이 흥미진진하고 어디로 갈지 몰라 관심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면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남의 인생에 관심 두지 맙시다. 내 인생을 챙기기도 바쁜 삶인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가족도 실은 남입니다.

pp.52~53

"상처는 칼끝이 아니라,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이의 입에서 더 깊이 온다."

- 아리스토텔레스

p.83

"머무는 이유가 사라지면, 떠나는 건 결코 배신이 아니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

p.120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행복해질 필요는 없다."

- 달라이 라마

p.139

아침 일을 그만둔 후에 감사하게도 밥을 사주겠다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선생님,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그럴까 봐 어디에서도 말 못 했는데요. 저는 불과 두 달밖에 안 됐지만, 제가 아침 생방송을 진행했던 것이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쯤인 것 같아요. 조선 시대도 아니고요. 저, 이상한 거 아니죠?"

'나는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를 찾았습니다. 먼저,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기 때문. 제가 뭘 했든 누가 뭘 했든, 그건 그 사람의 경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말해주는 건 현재!

다음, 저는 자기 연민이 별로 없어요. '내가 너무 불쌍해. 나만 힘들어.' 이런 생각은 안 하거든요. '나도 불쌍하고 너도 안됐고, 그런 거지. 다들 비슷하게 힘든 거지. 5년 6개월 동안 1주일에 7일을 일했어도, 고단하기는 했지만 방송 경험도 늘었고 감사하지.' 이렇게 말이에요.

pp.198~199

루틴은 나를 만들고 나를 지탱해 줍니다. 그 어떤 예술도 루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루틴을 만들고 루틴을 이어 나갑니다. 루틴은 스스로 안정을 시켜주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가게 해줍니다.

일상은 힘이 셉니다. 루틴은 소중하지요. 큰일이 생길 때일수록 일상을 유지해야 합니다.

p.239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 백무산, [정지의 힘] 中

p.293

이금희, <공감에 관하여> 中

+) 이 책은 아나운서인 저자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느낀 공감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이다.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공감의 자세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는 걸 강조한다.

저자는 겸임교수로 재직할 때 만났던 학생들과의 이야기, 유튜브와 방송 청취자들의 이야기, 강연장에서 직접 뵙는 청중들의 이야기 등을 이 책에서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공감을 기본으로 하는 대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따뜻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걸 보여준다.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고, 저자 본인의 경험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은 공감과 소통이 핵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대부분 '배려'의 자세를 통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소통의 시작이고 공감하는 자세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가족과 얽힌 사연,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태도 등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저자는 각각의 사연을 성의껏 들어주고 그에 맞는 조언을 공감 어린 시선과 어조로 전달한다. 평소 저자의 표정과 목소리가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묻어나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사연에는 맨 끝에 저자의 생각, 즉 문제를 헤쳐갈 방법 등이 짧지만 단단하게 실려 있다. 이런 부분에서도 독자를 배려하는 저자의 소통법이 드러난다고 느꼈다.

사회 초년생 젊은 세대들이나, 가족과의 관계로 힘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느낀다. 또한 직장 상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배려의 자세를 배울 기회가 될 책이니, 멋진 인생 선배가 되고 싶다면 미리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별 뜻 없이 물었던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부담으로 다가갔겠구나 싶어 반성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또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게 미덕이라는 농담이 생각나는 순간이 많아서 아프지만 즐겁게 읽었다.

웃픈 현실이 담겨 있어서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그와 달리 본받고 싶은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라 감사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저자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사람 같다. 자기 연민이 적어 내면이 단단한 저자를 보며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느끼고, 배우고, 생각할 게 많은 에세이집이었다. 우리 사회 현실도 알 수 있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도 볼 수 있었던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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