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기억
류주연 지음 / 채륜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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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력과 콘텐츠가 모두 좋은 글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콘텐츠라고 생각했었다. 문장력이란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문장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내용이 독특하고 공감을 준다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기 마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주 가끔, 좋은 내용에 탁월한 문장력이 갖춰진다면 독자에게 전해지는 감동과 공감이 더해질 뿐만 아니라 서투른 문장력 때문에 아직 전달되지 못한 글쓴이의 진심이 오롯이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류주연 작가의 <딸의 기억>이 그런 책이다. <딸의 기억>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오래되지 않은 저자의 가족과 고향 이야기,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취업 준비 시절의 발버둥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무엇보다 가난에 시달리며 고생만 한 저자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비보를 접하는 것을 시작으로 어머니의 투병기도 이 책의 근간에 자리 잡는다. 부모님이 큰 병에 걸리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그런데도 <딸의 기억>은 저자의 탁월한 문장력 덕분에 저자 개인의 발버둥이 우리 모두의 발버둥이며, 그녀의 어머니 암 투병이 우리 모두 어머니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식탁 한구석 아주 자그마한 그릇에 당신이 좋아하는 반찬을 따로 담는 것만으로 자기주장을 하던 엄마가 취향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나 역시 류주연 작가처럼 시골 출신으로 도시로 나가 대학을 다니고 갑자기 큰 병을 앓게 된 어머니를 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사랑받았던 외아들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했던 원죄가 있는 사람이다. 류주연 작가가 암투병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마늘장아찌 담그는 방법을 연구한 것처럼 나도 어머니가 반신불수가 되고서야 어머니를 위해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었다. 손을 잡아드리고,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와 함께 저녁노을을 구경하고 간식을 떠먹이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대소변을 받아주었다. 


암 환자을 간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고되다. <딸의 기억>은 분명 읽기에 유쾌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가 걱정하는 것처럼 어두운 내용도 결코 아니다. 어쨌든, 자신에게 주어진 난관을 이겨 내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로망인 사서가 된 성공스토리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딸의 기억>을 읽다 보면 저자가 많은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머니의 투병 이야기는 큰 줄기로 흐르는 한편 자신의 고향 집, 어린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 남녀 공용 샤워실이 있는 고시원 생활, 너무 배가 고파서 손님이 먹다 남긴 라면 국물을 마신 이야기 등이 곁가지로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딸의 기억>은 마치 촘촘히 잘 설계된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감동과 공감을 준다. 


만약 이문열 작가가 요즘 시대에 태어나 <젊은 날의 청춘>을 쓴다면 <딸의 기억>과 같은 책을 쓰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딸의 기억>은 한 사람의 가난했던 청춘을 넘어서 요즘 세대가 겪는 난관과 극복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의 기록으로 읽힌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누구나 류주연 작가에게 행복만이 이어지고 어머니께서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딸의 기억>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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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과 사람 - 세균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
고관수 지음 / 사람의무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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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출간되어 저자 아베 코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모래의 여자>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은 잿빛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모래땅으로 희귀 곤충채집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원치 않게 모랫구멍에서 평생 모래를 퍼내야 하는 운명에 빠진다. 처음에는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자신과 함께 모래를 퍼내야 하는 여인과의 동거와 적응을 통해서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모랫구멍에 감금되는 것을 선택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생명체가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래 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곤충이라면 그에 걸맞은 강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강한 적응력은 곧 많은 변종이 있음을 뜻한다는 것을 주인공은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곤충을 찾아 곤충 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모래땅으로 스스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주인공은 곤충 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영광은커녕 죽을 때까지 모래를 위로 퍼 올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휴가를 모래땅에서 기꺼이 허비할 만큼 과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고관수 선생이 쓴 첫 책 <세균과 사람>은 동물에게만 한정되었던 ‘학명 짓기’ 사냥이 세균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신종 세균을 발견하고 언젠가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의 중요성을 밝혀지기를 기대한 학자 즉 세균학 영웅 들의 노력과 성과 그리고 숨은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세균과 사람>'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지하철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를 위한 어렵기만 한 책은 아닌 것이 저자가 친절하게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봄 직한 ‘유명한’ 세균을 주로 다뤘고 새로운 세균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서 교양과 책을 읽는 즐거움을 고루 갖춘 책이다. 

‘자신이 이름 붙인 세균에 감염되어 죽다’, ‘ 순한 양으로 생각했는데 호랑이였다’, ‘ 경성 제국 대학 총장이 발견한 세균’, ‘ 시골의사에서 세균학의 황금시대를 연 영웅으로’, ‘파트퇴르의 이름을 가질 뻔했던 세균’ 등 이 책의 소제목만 훑어보기만 해도 의과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라기보다는 세균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의 면모가 더 도드라진다. 아울러 ‘읽고 쓰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삼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저자 고관수 선생은 내가 알기로 웬만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긴다. 따라서 세균학에 대한 강의보다는 세균학을 독자와 함께 읽어나간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세균학이라기보다는 세균 열전(列傳)이라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세균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지만, 특히 내 이목을 끝 것은 ‘장질부사’였다. 나이 지긋한 사람은 장질부사라고 불렀던 이 말은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상록수의 저자 심훈, 고종의 후궁 엄귀비, 동양화가 김기창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걸리면 약도 없다고 해서 ‘염병’이라고 불렀던 그 병이다. 장티푸스와 관련한 세균학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전염병과 관련해서 역사상 가장 큰 비난을 받은 사람 중의 한명인 ‘장티푸스 메리’라는 인물 이야기가 놀랍다. 

10대의 나이로 미국 부잣집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그녀는 건강한 겉보기와는 달리 장 속에서는 장티푸스균이 살고 있었다. 장 속의 장티푸스는 소변이나 대변을 거쳐 그녀의 손으로 이동했고 다시 그녀가 만든 요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당시 전염병 퇴치사로 불렸던 뉴욕시 보건 당국에 의해서 추적되었고 강제로 입원당했다. 3년간의 강제 입원을 마치고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결국 생활고를 못 이기고 몰래 요리사로 취업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일하는 직장에서 장티푸스 환자가 나왔고 다시 체포된 그녀는 1938년에 다시 병원에 수감되어 죽을 때까지 23년간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메리 맬런이라는 본명 대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으로 지목당하고 ‘장티푸스 메리’라는 오명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사실 유일한 보균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장티푸스 창궐이라는 비상사태에 대한 책임을 질 ‘본보기’였던 것이다. 특히 이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 신분은 그녀에게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기 편리한 존재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현대판 마녀사냥인 셈이다. 

세균 이야기을 하는데 페스트가 빠질 수 없다. 많은 사람 들이 페스트가 쥐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서 전달되는 질병이다. 어쨌든 페스트균 발견이라는 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기타자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기타자토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는 그가 2024년 새로이 발행되는 1,000엔짜리 지폐의 인물 주인공이라는 사실만으로 가늠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점은 우리나라는 1397년에 태어난 세종대왕부터 1545년에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까지 겨우 150년 사이에 조선의 유교 질서 속에서 살아간 인물 들만 화폐의 인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분들도 훌륭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지폐에 실릴만한 위대한 과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듭 말하게 되지만 <세균과 사람>은 굳이 세균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세균을 통해서 본 인간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교양서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저자는 많은 책을 읽는 만큼 많은 다양한 독자의 기호에 맞는 요소를 이 책의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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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란 무엇인가 - 천재들의 생각을 훔칠 단 하나의 방법 북클럽 은유 1
김용규.김유림 지음 / 천년의상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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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천재 주인공이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기발한 창의력을 발휘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저런 기발함과 창의력은 극소수의 천재의 전유물이려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은유란 무엇인가>는 누구나 은유 훈련을 통해서 설득력과 창의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솔깃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한권의 책으로 누구나 아인슈타인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 남보다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상대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니 얼핏 저자의 객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저자 김용규 선생은 독일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다수의 저작을 발표한 철학자이며 또 다른 저자 김유림 선생은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말하기 글쓰기 전문가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로 대표되는 은유가 당신의 말과 글의 표현력과 설득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두고 ‘이것만은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 칸트도 ‘재기 넘치게 시 짓기를 배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과연 이 두 사람의 말대로 우리는 은유는 학습될 수 없는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은유란 무엇인가>는 과거에는 맞지만, 현재는 틀린다고 주장한다. 은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인지과학의 발달 덕택에 서서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유는 배울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당시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사다리 치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뽑아주는 은유적 사고 방식을 개발하는 실용적인 훈련 방법 즉 ‘은유 패턴’을 활용한다면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는 아니어도 자기 분야의 고수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은유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는가? 우선 반복이다. 학습이 일어나려면 우리 뇌에서 새로운 뇌 신경 막이 만들어져 강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반복을 통해 이뤄진다. 마치 피아니스트나 피겨스케이팅 선수 들이 대부분의 연습 시간에 기본 동작과 테크닉을 무수히 반복하는 이유다. 단기간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것보다 적당한 간격으로 반복 학습하는 것이 장기기억에 도움이 된다. 


다음은 이해다. 연주가들이 코치와 함께 다른 연주가의 연주를 듣거나 운동선수들이 코치들과 함께 경기 영상을 보며 분석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각을 얻기 위해서다. 강의실 내에서는 천재였던 MIT 학생이 강의실 밖에서는 간단한 자연현상마저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학습만 했지 이해를 하는 데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실용이다. 학습에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정도로’라는 전제다. 실용적이지 못한 교육은 분명히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강조한 이해는 ‘실용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반복과 이해 그리고 실용이 서로 순환하면서 되풀이될 때 마침내 가장 뛰어난 학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유란 무엇인가>가 제시하는 은유적 사고 방식을 기르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법을 익힌다면 분명히 ‘학습에도 왕도는 있다’라는 명제를 믿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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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선, 면 다음은 마음 - 사물에 깃든 당신에 관하여
이현호 지음 / 도마뱀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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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시인의 <점,선,면 다음은 마음>은 사소하면서 고귀한 책이다. 스마트폰, 실내화, 도마, 책장, 모뎀 등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해 빠져서 보이지 않아도 표시가 나지 않는 사소한 물건에 대한 시인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괴테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각별하고 독특하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흔해 빠진 사소한 물건이라도 주인에 따라 각자의 사연과 특이점을 소유하기 마련이다. 


가령 이 책에 수록된 ‘휴지’는 이토록 사소한 물건에 이토록 따뜻한 감정을 내재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잘 더러워진다는 것은

오히려 더 깨끗하다는 뜻이다.


살짝 힘을 주면 툭 끊어져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

위로하는 사람.


혼자 구겨져서 울기도 하지만,


자기를 전부 풀어내고 나서야 

그 단단한 심지를 알게 되는 사람.


아주 오랜만에 따스함이 느껴지는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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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사소한 것에서 사소하지 않은 마음을 찾아내는 시인이란 이들은 뭔가 같은 사람이 아닌듯요. ^^

박균호 2023-02-27 09:0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감성이 남다른 분들이죠.
 
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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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서가의 고민은 더 이상 장서 수가 아니라 책을 둘 곳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서 생활이 길어질수록 넓고 아름다운 서재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마음껏 책을 사모아도 둘 곳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있는 독서가는 드물다. 어쩌면 서재 공간의 부족이야말로 좋은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조언자인 셈이다. 책을 사다 둘 곳이 없으며 새 책이 들어오면 헌책이 나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새 식구를 들일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나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서 ‘강제로’ 깐깐하게 살 책을 고르는 편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책을 사더라도 부족한 공간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산 만큼’ ‘버려야 할’ 운명은 피하기 어렵다. 내 경우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꼭 필요한 책은 절판되어서 더 이상 구할 수 없거나 집필하는데 참고해야 할 책이다.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만 내 서재에 입주할 수 있고 서재 한켠 작은 공간을 차지할 축복을 누린다. 


더숲 출판사에서 나온 <비잔티움의 역사>와 같은 책은 내 서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서재 영주권을 보장해줘야 하는 책이다.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서 존재하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을 자랑하며 고대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 버틴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것을 다룬 이 책을 버린다면 내 서재에 존재할 수 있는 책은 아마도 한 권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왜 이토록 중요할까? 우선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아 로마법과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 전통을 형성하고 전파했다. 또 러시아, 프랑스, 오즈만 군주 등 동서양의 군주들에게 살아있는 로마제국의 모델 역할을 했다. 따라서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지만, 오늘날 유럽의 정치 문화 경제의 근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즉 오늘날 서양문명은 비잔티움 제국의 폐허 위에서 건설된 것이나 다름없다.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탄생을 기술한 부분이었다. 역사 교과서에는 단 몇줄로 요약하며 지나가지만, 그리스도교가 비잔티움 제국에 정착하는 과정과 속사정이 흥미로웠다. 한때 갖은 박해를 받던 기독교는 4세기에 이르러 제국의 종교로 정착하였다.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모든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일약 특권을 누리며 로마의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자 로마 황제는 앞다투어 기독교를 지지하는 법을 제정하고 로마 고유의 고대 신앙은 탄압하였다. 고대 신앙에 대한 지원은 중단하였고 필요하다면 재산을 박탈하였고 신전에서의 그 어떠한 의식도 금지하였다. 물론 고대 신앙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아 곳곳에서 기독교와의 충돌을 벌였고 서로에게 린치를 가하기도 하였다. 


고대 신앙과 함께 올림픽을 비롯한 고대의 제도도 그 운명을 함께 하였다. 서기 390년에 이르러 올림픽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고대 신앙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은 고대 신앙의 자양분을 차용하고 그리스도교 사상과 이상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의 문명은 고대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이상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정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왕과 왕비가 돈이 없어서 보석이 아니라 색을 넣은 유리가 박혀 있는 왕관을 써야 할 정도로 나라 곳간은 비었는데 소수의 귀족 기업가 들은 더할 나위 없는 호시절을 보냈다. 빈부 차가 극심하여서 일부 부유층 들은 자신 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집을 요새화하고 탑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가 줄어만 갔다. 세금을 내고 전쟁터에 나가 싸울 인구가 준 것은 물론 전쟁 탓도 있겠지만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병의 창궐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 우리가 비잔티움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모름지기 나라는 변화 속도에 뒤처지면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지만, 더 빨리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다른 이탈리아 국가 들이 민주적인 투표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모든 것이 황제나 총대주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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