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민, 이런 책』을 집필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순간이 있었나요?

제가 아는 한 독자분이 우연히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을 펼쳐보았다고 해요. 그런데 책 내지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그 독자분은 그 머리카락이 아버님 것이려니 생각했고 왈칵 울음이 터지더랍니다. 저도 돌아가신 아버님이 남기신 장서가 있는데요, 아버님의 흔적을 오랫동안 찾았더랍니다. 혹시 아버지가 남긴 메모라든가 하다못해서 밑줄이라도 있는가 싶어서요. 자식은 누구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하면 마치 부모님이 살아오신 듯 기쁘잖아요. 아쉽게도 저는 책을 읽으면서 그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중에 제 자식이 아빠의 서재에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읽고 아낀 책에 대한 글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등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았으면 하는 책’이라는 기준은 어떻게 정하셨나요?

제가 희귀본을 오랫동안 수집했었어요. 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책이 수십만 원짜리가 있지요. 제가 십수 년 전에 별생각 없이 박완서 선생님의 서명본 소설을 샀어요. 아주 낡고 오래된 책이지만 서명본이라 3만 원엔가 샀을 거예요. 그런데 얼마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박완서 선생님은 서명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서명본이 드물다고요. 호기심 삼아 검색해봤더니 박완서 선생의 서명본이 단 한 권 보이는데 가격이 80만 원으로 매겨져 있었습니다. 제 서재에 있는 박완서 선생의 서명본이 폐지 무게 값으로 팔린다면 좀 억울하겠다고 생각했더랬죠.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이 책은 비싼 것이니 그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비싼 책보다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통찰을 줄 수 있는 책으로 기준이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 이런 책』에서 다룬 책은 어른이 되는 일에 서툴러 삶이 어렵다 느끼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를 줄 만한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결국 비싼 책보다는 인생에서 어른스러움을 찾는 낚시법을 알려주는 책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소개해주신 책 중,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아무래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니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신영복 선생은 낯선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을 때 아이들이 좋아하고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접근법을 선택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신영복 선생처럼 세심하고 다정하게 아이들에게 다가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라고 해서 어른이 자기가 하던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절감했습니다. 언젠가 학생 다섯 명 앞에서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관해서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고 나서 무척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제가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닌데 그 이유를 넌지시 알아보았는데 이유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반말했는데 저만 존댓말을 했다는 거예요. 존댓말 그 자체보다는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좋았던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다양한 고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쥴려스 시저』를 추천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특히 소장하신 책은 1989년 책이라서 더 궁금합니다.

고전의 장점 중의 하나가 다양한 판본과 번역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읽는 즐거움이 다채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89년판 『쥴려스 시저』는 제가 대학 시절 사용하던 교재였습니다. 영어영문학과에 다녔거든요. 이 책에는 제가 강의를 들으면서 남겼던 메모와 은사님의 말씀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더군요. 다시 20대 청년으로 돌아간 듯한 추억이 떠올라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했고요.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문학에 이바지했는데 무엇보다 인간 심리와 세상살이에 도통한 분 같아요.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고 거기에 따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거든요. 제가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 속에서 유독 『쥴려스 시저』에 주목한 것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작품들은 당시 떠돌던 민화나 전설에 기반했지만,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의 중요한 사건을 다뤘고 따라서 좀 더 몰입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거든요. 우리에게 시저는 로마의 위대한 정복자이거나 단순히 왕정을 꿈꾸다 암살당한 역사적 인물로 유명하지만, 책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현실적인 고민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공감됐습니다. 사소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부조금 액수’ 같은 고민에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추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소설의 주인공 잔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쓰라고 있는 것이라고 교육받았어요. 흥청망청 쓰라는 말이 아니고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늘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인색하게 구는 남편과 달리 잔느는 하인들에게 늘 따뜻하게 대하며 수고비도 후하게 주었죠. 그런데 잔느가 무척 곤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하녀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어요. 부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하는 것이 낫고,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에서 고민될 때는 10만 원 하는 것이 낫습니다. 받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지만 모두 다 기억하고 고마워합니다. 고민하다가 부조하지 않거나 더 적은 금액을 하면 자기의 짐으로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마음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느니 돈 몇만 원으로 홀가분하게 사는 게 낫죠.

3,000여 권의 책을 수집해 안방을 서재로 꾸며 각종 매체에서 화제가 되셨죠. 안방을 서재로 만든 작가님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책과 함께한 일상의 풍경을 들려주신다면요?

20년 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였어요. 바로 위층에 직장동료가 살고 있어서 구경하러 갔었죠. 그런데 집에서 제일 큰 방을 서재로 쓰고 있는 거예요. 양쪽 벽에 책장을 넣고 책으로 꽉 채웠더라고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보는 순간 참 멋지다고 생각할 만한 풍경이었습니다. 아내는 책벌레 때문에 책을 많이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순간에는 반한 거죠.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아내에게 건의하여 우리 집도 저렇게 서재를 꾸몄죠. 그때 꾸며진 서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제가 살아오면서 드물게 잘한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물론 아내는 20년간 안방을 빼앗기고 벌레와 먼지 때문에 고통받고 있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책에 빠져서 대책 없이 사는 일은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겠지만 가족의 희생이 따르는 일 같아요.

『이런 고민, 이런 책』을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책은 독자에 따라 다른 생각이나 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제가 소개하는 책은 난해한 책들이 아니고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저서가 많아요. 모두는 아니더라도 읽거나 제목 정도는 들어본 책이 많을 거예요. 그래서 본인이 그 책을 읽은 느낌과 소감을 제 것이랑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좀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종의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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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07-23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제 책장이랑 비슷해요 쌤~

박균호 2025-07-23 11:05   좋아요 0 | URL
앗 그래요?? 반가워요. 보물선님 책장도 구경시켜 주세요 ^^

보물선 2025-07-23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렸어요. 구경해주세요

박균호 2025-07-23 11:18   좋아요 1 | URL
예쁜 서재 정말 잘 구경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물선 2025-07-23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쌤 책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박균호 2025-07-23 11:30   좋아요 0 | URL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
 

<이런 고민, 이런 책> 출간 북토크를 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 앞에서 말로 먹고살았는지라 대면 강의는 부담이 안 되는데 역시 비대면 강연은 조심스럽고 염려가 된다. 코로나 때 제법 여러 번 비대면 강연을 해봤는데 겨드랑이에서 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런데 역시 저자는 자신의 책을 궁금

해하는 독자를 만나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다. 열심히 준비해서 알찬 강연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고민, 이런 책>에서 다룬 모든 책을 다룰 수는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봐야 90분 남짓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중심으로 할 생각이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가장 재미나게 읽는 것은 프랑스 문학과 독일 문학인 것 같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작품 못지않게 워낙 극적인 인생을 살았고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아서 내 강연 단골 소재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중심으로 강연할 생각인데 작가에 대한 뒷 이야기가 반쯤은 차지할 것 같다. 그만큼 두 작가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 서재 이야기를 곁들일 생각이다. 내 서재도 두 러시아 작가 못지않게 사연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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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7-21 2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응원합니다!^^

박균호 2025-07-21 21:18   좋아요 1 | URL
ㅎㅎ 감사합니다
 

며칠 전 우연히 디씨인사이드 독서갤러리에 놀러 갔다가 한 흥미로운 게시물을 발견했다. 흔히 디씨인사이드라고 하면 인터넷의 온갖 찌질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갤러리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독서갤러리는 내가 아는 한 독서와 고전을 사랑하는 커뮤니티 중의 하나다.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신간 정보를 신문이 아닌 독서갤러리에서 얻는다. 역설적으로 디씨인사이드는 극단적 선택과 연관된 갤러리가 있어서 직장인 학교에서는 접속이 차단된 사이트다.

 

어쨌든 독갤(독서갤러리)에서 헌책을 좋아하는 독봉이를 위한 추천 도서 목록에 내 책 <오래된 새 책>을 그중 하나로 꼽은 글을 발견한 것이다. <오래된 새 책>2011년에 나온 내 첫 책이다. 모든 작가는 출간 경험은 감회가 남다른데 나도 마찬가지다. 이 책 덕분에 지금까지 책을 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2000년 초반 나는 열성적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였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 당시 콜럼버스는 위인이 아니라는 취지의 글을 썼는데 그 기사를 출판사 사장님이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마침, 위인의 어두운 뒷면을 말하는 책을 기획 중이었다는 것. 그래서 출판사에 들러 계약하기로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누군가의 뒷담화를 책으로 남기기가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헌책과 희귀본 수집을 좋아하니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고 싶다고 제안해서 <오래된 새 책>이 나온 것이다.

 

참 재미나게 쓰긴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글솜씨가 신통찮았고, 퇴고도 거의 하지 않은 부족한 책이었다. 그런데 책이 나오자마자 중앙일간지에서 기사를 냈고 특히 동아일보는 문화면 1면 탑으로 실어주었다. 한 신문사는 기자, 인터뷰어, 촬영기사 세 명이 내가 사는 곳에 내려와 취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만 해도 책만 내면 당연히 신문 기사는 나오는 줄 알았다.

 

사실 <오래된 새 책>은 겨우 중쇄만 찍은 많이 팔린 책이 아니다. 초판도 1천 부 찍었더랬다. 그리고 나온 지 14년이 지났다. 요즘 내 책이 나오고 한 2주 지나고 반응이 신통찮으면 이번에도 틀렸어라고 포기하게 되는데 아직도 이 책이 언급되고 기억되는 것이 나는 참 어리둥절하다.

 

새삼 <오래된 새 책>을 다시 살펴보면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이윤기 선생의 <하늘의 문> 권정생 선생의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 납니다> 신영복 선생의 <엽서> 등 당시 헌책 수집가가 욕심내던 목록을 하나씩 구할 때마다 느꼈던 희열과 행복. 지금은 그런 열정도 희열도 거의 없으니 이 책이 가끔 소중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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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7-17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왜요.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은 기억이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이책으로 작가님을 처음 알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치시는 일을하셔서인지 정말 잘 읽혔죠.^^

박균호 2025-07-17 10:2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선생님 책에서 언급해주셨죠 ! 감사합니다 .
 

나로 말하자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오래된 새 책>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 것 같다. 정신없이 전방위적으로 장르 불문하고 좋다는 책은 다 샀고 뭐든지 구하기 힘들다는 책은 마치 나에게 주어진 과제처럼 혈안이 되어 구했더랬다.


헌책과 희귀본 수집담을 그린 것이 <오래된 새 책>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한 책을 누군가 귀하게 여겨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것이 이번에 나온 <이런 고민, 이런 책>이다.

 

<오래된 새 책> 이후 본격적으로 책 내는 사람이 되고서부터 책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독자가 아닌 저자의 필요에 부합하는 책을 사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책은 기본의 자료와 문화 그리고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책을 내기 위해서는 참고 자료가 필요하다. 이른바 사전을 비롯한 참고 자료를 사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할 가능성이 있는 책만을 사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집 리모델링을 하면서 버린 천 권 이상의 책은 거의 <오래된 새 책> 시절에 산 것들이다. 단순히 읽기용이거나 내 기호와 상관없이 귀하고 구하기 힘든 책들.

 

따라서 내 서재에는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주로 고전 소설, 인문학, 역사책이 대부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고전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나며 인생의 귀가 막힌 통찰이 담긴 문장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언젠간 쓸 일이 있는 문장이고 집필이나 강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들. 그 문장이 몇 쪽인지도 기록한다. 그런 문장이 담긴 책은 절대로 버리지 못한다. 고전문학은 새 번역이 새로 꾸준히 나오지만, 새 판본은 그 문장이 담긴 쪽수가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나는 1천 쪽이 넘는 나폴레옹 전기나 6권짜리 <로마제국쇠망사>를 죽을 때까지 완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언제가 책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 그 책을 펼쳐볼 필요가 생길 가능성 때문에, 서재에 둔다. 나는 어쩌면 이런 책들을 읽지는 않지만, 서재에 두고 바라보는 것 자체로 든든하고 영감을 받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는 광대한 자료는 있지만 요약되거나 일부분을 떼어온 것이 많다. 일부만 참고해서 글을 쓰면 오류가 많고 원저자의 의도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한다지만 이 역시 오류가 많아서 사용자는 인공지능이 제시한 자료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서재는 나를 조련하고 나는 인공지능을 조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모든 능력은 역시 독서와 든든한 참고용 책을 겸비한 서재에서 나온다. 읽지 않은 책으로 가득한 작가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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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7-17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고, 읽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습니다. ㅋㅋ 자꾸 책 사고 싶고. 그나저나 그 천권되는 책을 어떻게 버리셨나요? 가슴이 찢어지셨을 것 같은데. ㅠ
저도 이제부터라도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겠습니다. 전엔 그 메모한 것도 잊기도하고, 메모장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냐며 메모 안하는 게으름에 정당성을 부여했죠.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가르침 받고 갑니다.^^

박균호 2025-07-17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모를 남겨두면 그래도 뭔가 건진게 있다는 성취감이 들어요 . 그리고 책 사는거 재미있잖아요 . 자꾸 사게 됨 ㅎ

다섯 2025-07-1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는 거 재미있고 흥분되죠. 며칠 전 유튜버 ˝k편집자˝에 소설가 김연수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예전에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불현듯 이런 장면이 있었지 하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기억이 날 뿐이다.‘ 메모하는 것도 좋고, 이처럼 살다가 갑자기 다가오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도 좋습니다. 새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박균호 2025-07-18 11: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김연수 작가도 그렇다니 위안이 되네요 ㅎ
 
작품 을유세계문학전집 97
에밀 졸라 지음, 권유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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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을 좋아했다. 짜깁기에 불과하지만, 대학 졸업 논문도 서머싯 몸을 썼었다. 입대를 앞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인간의 굴레>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주인공 필립의 인생 역경이 어찌나 몰입되던지. 서머싯 몸 작품 중에서 읽기 난해하거나 지루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가 다녔던 영문과에서 서머싯 몸을 비중있게 취급하지 않았다. 고전을 주로 다루는 영문학과에서 다룰 만큼 문학적 깊이나 문학사적 입지가 그다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나는 깊이 존경하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런데 최근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었다. 에밀 졸라하면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를 흔히 떠올리는데 나는 에밀 졸라의 책이라면 모두 구매해서 재미없는 책에 실망했을 때 하나씩 꺼내 읽는다. 에밀 졸라 역시 실패가 없는 작가다. <작품>은 에밀 졸라의 평생 친구였던 세잔을 모델로 삼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클로드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완성하지 못하는 걸작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인물. 세잔은 파멸한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심한 충격과 모욕을 느껴 졸라와의 우정을 끊었다.

 

<작품>을 읽다 보니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서머싯 몸이 왜 통속소설가로 치부되는지 이해가 되었고 <달과 6펜스>가 왜 그토록 많이 읽히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 흔히 예술가 특히 화가의 소설이라고 하면 <달과 6펜스>를 흔히 떠올리는데 에밀 졸라의 <작품>이야말로 화가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술에 몰입하는 화가의 인생을 이토록 치열하고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와중에 600쪽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재미까지 놓치지 않았으니. 화가에게 그림의 소재로 삼을 게를 주고 그림값으로 게를 주겠다는 화상, 자기 아내를 누드모델로 삼은 남편, 남편의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이 되어 준 아내,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5시간에 걸쳐 아들을 화폭에 담는 일에 몰두한 아버지 화가. 끝내 아내를 버리고 대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살하는 남편.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으면서도 읽는 극강의 재미도 놓치지 않는 소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쓴 고전 작가. 에밀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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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14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혹시 세잔을 모델로 했다는 그 소설일까요? 당시에 누구나 알아보게 쓰는 바람에 논란이 되고 작품을 위해 친구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던데 말이죠. ㅎㅎ
저는 에밀 졸라 <패주>가 너무 재미없어서 이 사람 작품을 봐 말아? 하고 있는데 박균호님 글을 읽으니 또 봐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
아 그리고 새 책 내신거 축하드려요.

박균호 2025-07-14 09:42   좋아요 1 | URL
아. 네 맞습니다. 세잔을 모델로 했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아쉽게도 <패주>를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그런데 호불호가 좀 갈리긴 할 것 같아요. 에밀 졸라의 작품말이죠. 취향이 안 맞을 수도 있죠. 통상적으로 에밀 졸라 입문 순서가 목로주점, 제르미날, 나나, 인간 짐승. 뭐 이런 식이라고 말들 하더라구요. 로공 마카르 총서 1번이라고 하는 <루공가의 행운>(을유판은 루공가의 치부)읽고 있는데 초반 부터 정말 재미나요 ^^ 단 세밀한 풍경 묘사를 이겨내셔야 할 것 같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