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민, 이런 책』을 집필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순간이 있었나요?
제가 아는 한 독자분이 우연히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을 펼쳐보았다고 해요. 그런데 책 내지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그 독자분은 그 머리카락이 아버님 것이려니 생각했고 왈칵 울음이 터지더랍니다. 저도 돌아가신 아버님이 남기신 장서가 있는데요, 아버님의 흔적을 오랫동안 찾았더랍니다. 혹시 아버지가 남긴 메모라든가 하다못해서 밑줄이라도 있는가 싶어서요. 자식은 누구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하면 마치 부모님이 살아오신 듯 기쁘잖아요. 아쉽게도 저는 책을 읽으면서 그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중에 제 자식이 아빠의 서재에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읽고 아낀 책에 대한 글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등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았으면 하는 책’이라는 기준은 어떻게 정하셨나요?
제가 희귀본을 오랫동안 수집했었어요. 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책이 수십만 원짜리가 있지요. 제가 십수 년 전에 별생각 없이 박완서 선생님의 서명본 소설을 샀어요. 아주 낡고 오래된 책이지만 서명본이라 3만 원엔가 샀을 거예요. 그런데 얼마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박완서 선생님은 서명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서명본이 드물다고요. 호기심 삼아 검색해봤더니 박완서 선생의 서명본이 단 한 권 보이는데 가격이 80만 원으로 매겨져 있었습니다. 제 서재에 있는 박완서 선생의 서명본이 폐지 무게 값으로 팔린다면 좀 억울하겠다고 생각했더랬죠.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이 책은 비싼 것이니 그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비싼 책보다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통찰을 줄 수 있는 책으로 기준이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 이런 책』에서 다룬 책은 어른이 되는 일에 서툴러 삶이 어렵다 느끼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를 줄 만한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결국 비싼 책보다는 인생에서 어른스러움을 찾는 낚시법을 알려주는 책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소개해주신 책 중,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아무래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니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신영복 선생은 낯선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을 때 아이들이 좋아하고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접근법을 선택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신영복 선생처럼 세심하고 다정하게 아이들에게 다가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라고 해서 어른이 자기가 하던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절감했습니다. 언젠가 학생 다섯 명 앞에서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관해서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고 나서 무척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제가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닌데 그 이유를 넌지시 알아보았는데 이유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반말했는데 저만 존댓말을 했다는 거예요. 존댓말 그 자체보다는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좋았던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다양한 고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쥴려스 시저』를 추천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특히 소장하신 책은 1989년 책이라서 더 궁금합니다.
고전의 장점 중의 하나가 다양한 판본과 번역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읽는 즐거움이 다채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89년판 『쥴려스 시저』는 제가 대학 시절 사용하던 교재였습니다. 영어영문학과에 다녔거든요. 이 책에는 제가 강의를 들으면서 남겼던 메모와 은사님의 말씀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더군요. 다시 20대 청년으로 돌아간 듯한 추억이 떠올라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했고요.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문학에 이바지했는데 무엇보다 인간 심리와 세상살이에 도통한 분 같아요.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고 거기에 따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거든요. 제가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 속에서 유독 『쥴려스 시저』에 주목한 것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작품들은 당시 떠돌던 민화나 전설에 기반했지만,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의 중요한 사건을 다뤘고 따라서 좀 더 몰입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거든요. 우리에게 시저는 로마의 위대한 정복자이거나 단순히 왕정을 꿈꾸다 암살당한 역사적 인물로 유명하지만, 책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현실적인 고민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공감됐습니다. 사소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부조금 액수’ 같은 고민에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추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소설의 주인공 잔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쓰라고 있는 것이라고 교육받았어요. 흥청망청 쓰라는 말이 아니고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늘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인색하게 구는 남편과 달리 잔느는 하인들에게 늘 따뜻하게 대하며 수고비도 후하게 주었죠. 그런데 잔느가 무척 곤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하녀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어요. 부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하는 것이 낫고,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에서 고민될 때는 10만 원 하는 것이 낫습니다. 받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지만 모두 다 기억하고 고마워합니다. 고민하다가 부조하지 않거나 더 적은 금액을 하면 자기의 짐으로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마음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느니 돈 몇만 원으로 홀가분하게 사는 게 낫죠.
3,000여 권의 책을 수집해 안방을 서재로 꾸며 각종 매체에서 화제가 되셨죠. 안방을 서재로 만든 작가님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책과 함께한 일상의 풍경을 들려주신다면요?
20년 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였어요. 바로 위층에 직장동료가 살고 있어서 구경하러 갔었죠. 그런데 집에서 제일 큰 방을 서재로 쓰고 있는 거예요. 양쪽 벽에 책장을 넣고 책으로 꽉 채웠더라고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보는 순간 참 멋지다고 생각할 만한 풍경이었습니다. 아내는 책벌레 때문에 책을 많이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순간에는 반한 거죠.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아내에게 건의하여 우리 집도 저렇게 서재를 꾸몄죠. 그때 꾸며진 서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제가 살아오면서 드물게 잘한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물론 아내는 20년간 안방을 빼앗기고 벌레와 먼지 때문에 고통받고 있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책에 빠져서 대책 없이 사는 일은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겠지만 가족의 희생이 따르는 일 같아요.
『이런 고민, 이런 책』을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책은 독자에 따라 다른 생각이나 다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제가 소개하는 책은 난해한 책들이 아니고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저서가 많아요. 모두는 아니더라도 읽거나 제목 정도는 들어본 책이 많을 거예요. 그래서 본인이 그 책을 읽은 느낌과 소감을 제 것이랑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좀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종의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