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아니라 가치관이다.  - P11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이미 배제된(foreclosure)‘ 영역이 있다. 해방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질문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축복이다. - P12

융합은 우리가 아는 지식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실천(practice)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다. - P16

융합은 계급, 젠더, 인종, 성정체성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호 교차성 (inter-sectionality)과도 다르다. 계급, 인종, 연령, 지역, 종교를 통한 여성들 간의 억압은 교차하고 겹치는 더 커다란 구조의 매트릭스(母型)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융합의 의미다. 즉 융합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고 재구조화perfo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질적 전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합의가장 정확한 번역은 ‘횡단의 정치‘이다. - P21

약자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E로-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 가는 몸, 그 변화를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P53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법이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 P57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 P81

파이 통렬하게 지적한 대로 하얀 가면을 쓴 흑인은 백인과 같은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의 흑인 개념은 헤겔식 노예보다 훨씬 종속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동일시와 욕망 상태에서는 변증이 발생할 수 없다. 당연히 상호 해방의 가능성도없다. 욕망의 특징은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이기때문이다.  - P89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 (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 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얇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하나의 고정된 정보로 여기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알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 P98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 P104

융합이 가성비 높은 공부인 이유는, 융합을 공부하려면 기존의 지식은 물론이고 그 지식과 융합할 수 있는 자기 가치관을 확립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점을확립하고 응용하려면 연습(practice)과 현실 개입적 실천(praxis)이 모두 필요하다. - P115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 P138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 P146

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실천과 거리가 먼 단어는 ‘연대‘와 ‘성찰‘이 아닐까? 연대는 융합에 대한 최악의 이해다. 통용되는 연대 개념은
"우리가 99퍼센트(?)이니, ‘나쁜‘ 1퍼센트(?)를 제거하자"는 논리다. 문제는 99퍼센트 안에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의 교차 영역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한 가지 억압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노학 연대, 청년 빈민 연대, 성소수자 연대, 사회적 약자와의연대・・・・・・ 그런데 연대 과정에서 각 집단은 등가 사슬(chain ofequivalences), 즉 하나의 ‘마디 (article)‘가 되지 못하고 약자는연대에 동원된다. 인구수가 많은데도 여성이나 장애인 이슈는대동단결 일치단결의 ‘대의‘에 종속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대의를 약자와 대립시킨다. 예를 들면 "민족 문제냐, 여성 문제냐"가 있다(이 말 자체가 여성을 민족에서 배제한다). 장애인 문제는 시혜적이고,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다. 이것은 융합도 절합도 아니고 폭력이다. - P148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언설이다. 이 언설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이때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정함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이다. 차이는 해소하거나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 P151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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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프랑스인 · 권위적인/소극적인 배려하는/냉담한여성적인 남성적인 재미있는/엄격한.
너그러운/고집 센 · 쾌활한/냉소적인 깔끔한/지저분한.
.
친절한/심술궂은 열정적인/둔감한 매력적인/심각한.
정중한/퉁명스러운 책임감 있는/무신경한.
사교적인/비사교적인 페미니스트/전통적인.
눈에 띄는/은둔하는 메리 포핀스/사악한 마녀- 비비안 마이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묘사한 비비안의 모습 - P11

비비안의 사진을 발견하고, 비비안의 작품에 돈과 명성이 따라붙자 추측과 비난이 먹구름처럼 순수했던 처음의 찬사를 재빨리 감싸기 시작했다. 언론은 비비안의 작품을 수집한 두 사람에게 사진작가의 작품을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과 자질이 있는지를 물었고, 많은 사람이비비안 마이어가 대중에게 사진을 공개하는 걸 원했을지를 놓고 맹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 P22

처음부터 사람들은 비비안에게 그들 각자의 가치와 기대를 투영했다.
비비안에 관한 가장 강력한 신화는 그녀가 소외됐고, 불행했고, 무엇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비비안은 끝내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엉망이 된 가족과 과감히 절연하고 자기 삶의 질을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린불굴의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비비안은 끈질긴 회복력으로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P24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았다. 나는 독자들이 비비안의 이야기 속에서, 작품 속에서 그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영감을 받을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이 전기가 끝날 때쯤이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비비안 마이어는 누구이며,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은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관한 답을 알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 P25

프랑스에서 찍은 초기 사진들은 비비안이 정말로 아꼈던 사진들일 것이다. 비비안이 인화한 사진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때 찍은 것으로 비비안은죽을 때까지 이 사진들을 간직했다. 시카고에서 비비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들을 크게 확대해 액자에 넣었는데, 이때 찍은 사진들은 오랫동안비비안이 방에 전시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 P87

프랑스에서 비비안은 훗날 자신이 깊게 탐구하게 될 주제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인다. 이른 시기에 성별과 인종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비비안은 공산주의자 집회,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들, 다인종 가족을 사진에 담으며 사회적 대의에 대한 깊은 헌신을 미리드러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니스의 영화 촬영장을 담은 사진들은 영화와유명인, 파파라치 같은 사진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P93

목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새롭게 시작할 자유를 얻었다. 그때까지 비비안은 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 중요한 삶과 가려진 삶 깊이 사랑받는 삶과 비극적으로 버려진 삶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두 삶을 살아야 했다. 부자들과 어울렸지만 가난한 사람들 손에서 자랐고 모든곳에 속해 있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제, 비비안은 온전히 홀로 설 수 있었다. - P100

이 키메라는 허리 부근에서 잡을 수 있게 설계되어 눈에 띄지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동시에, 사진 찍는 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때문에 비비안이 원한다면 피사체와 눈을 맞추고 촬영을 할 수도 있었다.
정사각형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수평에서 수직으로 카메라를 돌린 필요가 없어졌고, 렌즈가 허리 부근에 있어 피사체 대부분을 아래에서 위로찍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비비안의 사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이런 기능들 덕분에 조용하고 튼튼한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비비안에게 완벽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곧 비비안은 카메라를 부드럽게 쥔채로 자화상을 찍기 시작했으며 자기 자신을 진지한 사진작가로 표현할수 있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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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Philos Feminism 8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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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는 유난히 출생의 비밀이 많다.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절대적인 숫자로도 많다.
심지어 전혀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최근의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조차도 출생의 비밀을 깔고 간다.
드라마의 개연성을 말아먹으면서까지 왜? 굳이?
어쨌든 그 서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보면 대체로 일관된데 중요한 것은 아이는 생기면 무조건 낳는다. 그 아이가 불륜, 강간, 실수 무엇에 의해서 생긴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생명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니까 설사 낳아서 어디 고아원에 갖다 버리더라도 아이는 낳아야 한다. (그래서 출생의 비밀이 생기는거다)
왜? 생명은 소중하니까다.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모성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버리는 것이기때문에 용인되는 안타까운 모성이고, 배속의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아이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피눈물도 없는 잔인한 모성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잔인한 모성은 없다.
모든 여성은 아이가 생기자 마자 넘치는 모성이 우러나며, 기필코 아이의 생명을 지키는 투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나는 첫 임신에서 3개월만에 유산을 했었다.
의사가 아이 심장이 안뛰어요라고 했을 때 당황했고, 눈물이 쏟아졌었다.
저 때 나의 눈물은 그러면 모성의 발로였을까?
대답은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니다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몰랐을 뿐이다. 
유산은 분명 안타까운 사건이었지만, 죽은 태아를 위해 애통해지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이 이상해, 아 나는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라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해야 했다.
이후 두 명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역시 나는 배속의 아이에게 모성애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아이가 그저 빨리 나왔으면 했고, 좋아하는 커피도 술도 못먹고, 내 몸을 내가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갑갑했을 뿐이다. 
덕분에 나는 임신기간 내내 나는 모성애 인자가 남들보다 작은가봐라는 오해를 키우고 살았다.
이건 사실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여 남편한테 나 정신적으로 문제 있나봐라고 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못해봤다. 
그러면 도대체 나로 하여금 아이들을 물고빨며 지극정성으로 키우게 한 모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와 똑같다.
아이가 물화되어 내 앞에 선 순간부터, 아이를 안아주고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고, 아이의 똥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키고 그 무수한 육체적 정신적 터치와 만남에서 모성애는 생기는 것이었다.
선천적인 모성애는 없었는지 몰라도 책임감은 투철한 인간이었던 나는 아이를 돌보는 모든 노동을 성심성의껏 수행했고, 그 과정은 어느새 노동이 아니라 아이와의 교류, 교감으로 사랑이 싹터는 시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교류를 하고 우정을 나누다 사랑이 되기도 하는 것은 상대와 내가 잘 맞기 때문이거나, 상대와 내가 서로를 많이 배려해주거나 이해해주는 경험들이 쌓이면서이다.
모성애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아기들은 그 천진난만함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어른들이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기 훨씬 쉬운 존재라는 것 뿐....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한달만에 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이 아이가 너무 작아서 부서질것 같아 아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갈고 하는걸 어려워하며 못하겠는데 어떡하지라며 난감해했다. 
그 때 내가 당신과 아기 사이에 사랑의 깊이는 갈아준 기저귀 갯수와 목욕시켜준 횟수만큼이야라고 했던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고 100% 진심이었던 것이다. 
아빠의 손길에도 아이는 아무데도 부러지지 않았고, 아이 아빠는 목욕과 기저귀 갈기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당연히 아빠와 아이들의 애정은 딱 그만큼 깊어졌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모성애든 부성애든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
그것 역시 현실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면 뱃속의 태아 역시 관계가 아니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감수성은 다르니 딱 잘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쩌면 현실의 사랑과 관념의 사랑의 차이정도 아닐까?
내가 유산했을 때 죽은 태아는 구체적인 죽음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저 하혈이 있었고, 그게 아이의 흔적이었구나정도..... 
태아와 나는 허구의 관념속 교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 나와의 감정적 교류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만 그런걸까싶기도 하지만 또 내 직업군에서 유산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건 너무 흔한 일이다보니 이런 일에 대해서 자주 얘기를 해보게 되는데 그들 중 유산 이후 태아의 죽음을 실제 아이의 죽음처럼 치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본적이 없다.

임신중지(낙태)가 아니라 유산의 경험을 가지고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경험과 감정을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감정, 한때의 약간의 안타까운 마음, 약간의 미련정도일 이 마음에 죄책감, 자괴감, 무책임성, 모성의 부재, 심지어 임신중지의 경우 살인죄라는 이름까지 덮어쒸우는 담론은 어디에서, 누가, 왜 조장하는가가 궁금해서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재생산과 결합하고, 모성은 여성의 기준점이 되며, 임신은 어머니가 독립적 개체로서의 아이와 맺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여성은 자신이 배태한 배아나 태아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며, 임신에 대한 주체로서 자기 위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임신중지라는 선택은 태아성 모성이라는 규범과 그에 따른 숱한 문화적 산물에 균열을 내려 한다. -28쪽

임신중지가 균열을 내는 문화적 산물이란 무엇인가?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상은 커다란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다른 근원과 연계되어, 사회체에 대한 위협으로서 구성됐다. '페미니스트'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 아이, 남성, 가족에 반하는 존재로, '십대엄마', '복지의존자', '성적으로 무책임한 자'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 부주의한 '실패자'로, '이혼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 양육자', '싱글맘'과 연결될 때는 핵가족 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말이다. - 249쪽  
 
와우! 임신중지는 현재의 사회체에 대한 위협이 된다.
그 사회체는 당연히 백인 남성을 중심에 둔 핵가족제를 기반으로 하는 가부장제다.(이 말을 한국사회에서는 한국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로 바꾸어도 당연히 맞다)
여성의 당연한 모성을 기반으로 하여 여성이 자녀를 양육해주고, 남편을 뒷바라지해주고, 그럼으로써 남성들이 편안하게 자신만 생각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바로 여성의 모성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를 위해 임신중지는 터무니없이 생명을 비하하고 하찮게 여기는 나쁜 인간 또는 실패한 인간으로 규정되어져야 하며, 다른 여성들에게는 그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여성이 모성을 본능으로 느끼게끔 끊임없이 세뇌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임신중지를 철저하게 개인적인 선택과 경험으로 위장하는 전술이다.
임신중지를 할 것인가 아이를 낳을것인가를 오롯이 개인의 선택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니 낳지 말아야 할 강간에 의한 임신 같은 경우에도 임신중지는 태어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게 낫다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인권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모성이 발휘되는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여성으로 하여금 임신중지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임신중지 여성은 모성이 없는 존재,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존재로 수치심을 만방에 까발려야 하는 것이다.
한 때 학교에서 성교육이랍시고 하는 것이 임신중지의 위험성, 낙태되는 태아의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주면서, 여학생들에게 너희는 그러므로 함부로 섹스를 하면 안돼, 혹시 섹스때문에 아이가 생겨도 이렇게 임신중지를 하면 안돼, 생명은 소중하니까라고 청소년기부터 미래의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것을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했었다.
또한 당시 청소년 권장도서중에는 임신한 10대 소녀가 태아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사이에서 방황하다 자살하는 책까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임신중지에 대해서 지독하게 그것을 여성만의 문제로, 또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도록 조장해왔는지를 절감한다. 그럼으로써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해왔는지도 말이다.
이 임신중지에 대한 발화의 은밀함은 여성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서 연대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의 내면에 우울감과 죄책감을 쌓아가도록 하면서 임신중지를 더더욱 여성 개인의 일로 한정시키고,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데 더더욱 일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21세기에, 가부장제는 한물간 과거의 냄새나는 유물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지난 6월 24일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판결을 뒤집어 임신중지를 다시 위헌으로 결정한 미국의 대법원 결정이 왜 다시 등장하는지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한다.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말이다.

이렇게 임신중지를 개인의 선택과 감정의 문제로 개별화 시키면서 사라지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임신중지 정치가 임신중지를 하려는 혹은 하고 난 여성의 느낌으로 환원되면, 그 느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광범위한 사회, 구조, 정치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를테면 양육에 대한 결정, 또 그런 결정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와 판단을 손쉽게 하거나 감추는 '젠더화된 노동분업'과 '계급, 인종에 기반한 불평등', 임신중지와 피임의 구별이나 원치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 등 역사 사회학적 질문, 임신의 조건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 등이 있다. - 255쪽

일단 정말로 중요하게도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빠진다.
임신중지의 문제에서 비난받는 것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모두 여성이다.
함께 책임져야 하는 남자들은 모두 어디갔지?
이 담론에서 왜 남자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 왜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일까?

또한 임신중지의 문제의 개인화는 국가의 다양한 책임을 방기하게 한다.
너의 선택이므로 임신중지에 드는 비용, 의료혜택, 아이를 낳아 기를 때의 보육환경과 직업선택의 기회, 빈부격차에 의한 거주환경, 육아환경, 성범죄 노출 정도 등등 국가가 책임져야 할 관련문제의 숫자는 끝이 없다. 
여기에 인종문제, 이주민 문제 등등까지 겹치면 이 문제는 단순히 여성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자신의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정치철학의 문제와 결국 맞닿게 된다. 
이러한 책임들을 교묘하고 집요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수많은 무책임하고 사회에 기생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물타기를 하는 정치인들.

결국 결론은 '자유롭게 말하기'이다.
언어가 있고, 소통이 있는 곳에 연대가 발생한다. 

'미안해하지 않는' 임신중지 서사는 가치가 있다. 임신중지라는 결정이 이로우며 삶을 고취시키는 결정이 될 수 있다. 이 때 그 여성은 주체의 자리를 정당하게 부여받는다. 이 주체의 자리를 배제하려는 끊임없는 움직임은 임신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발상이 전복적임을 반증한다. -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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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31 15:42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어휴 바람돌이 님, 리뷰가 너무 근사해서 기립박수 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은 진짜 모든 분들이 너무 좋은 글들을 써주고 계시네요. 어휴 ㅠㅠ

읽느라 그리고 쓰느라 고생하셨고, 읽는 동안 숱한 생각들이 찾아왔을 것에 대해서도 고생하셨다 말씀드립니다.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바람돌이 님!

바람돌이 2022-08-31 15:44   좋아요 8 | URL
저야말로 다락방님덕분에 이렇게 좋은 책들을 날로 먹는 기분이에요. 다락방님이 아니었다면 생각만 하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못읽었을 책들을 매달 읽으면서 좀 더 괜찮은 내가 되어가는 근사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 감사해요.

청아 2022-08-31 16:1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바람돌이님!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여성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개인적 선택으로 국한시키며 서로간의 연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징글맞은 가부장적구조! 그래도 이렇게 우리가 같이 읽고 쓰고 있고 그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여성들은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거라 믿습니다. 심지어 가장 열악한 곳에서조차 여성들이 저항,투쟁하고 있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함께 읽으며 이곳에서 같이 뒹굴고 있어 영광입니다.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08-31 21:55   좋아요 4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느끼던 것들이 명확해지는 기분이었고, 그럴 때마다 제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이 새록새록 돋아나서 화가 나고.... 저는 가끔 일베류의 인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옛날 같으면 저들이 눈에 띄지도 않을텐데 - 왜냐하면 대부분이 다 그러니까 - 오히려 자신들이 눈에 안 띄고 소수가 되니까 더 격렬하게 발악을 하는 것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요. 세상은 바뀌고 있고 그것이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해도 거꾸로 돌릴 수는 절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망설이다가 늦게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에 참여한게 후회스러워지는 요즘이에요.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수 있어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31 16: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임신중지의 문제의 개인화가 국가의 다양한 책임을 방기하게 한다‘ 정말 맞는 말이고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느낀 지점입니다. 좋은 리뷰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저도 다시 한번 이 책을 정리하고 가는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2-08-31 21:57   좋아요 5 | URL
이 책은 논란이 될 수 있고, 비난받을 수 있는 지점을 거리끼지 않고 명쾌하게 얘기해주는게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저 임신중지의 개인화의 문제점과 여성이 자신의 임신중지를 주체로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얘기해주는 부분이었어요. 여러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거 같습니다. ^^

건수하 2022-08-31 18:2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경험이 어우러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여성을 통제하려고 하는 여러 시도들이 직간접적으로 정말 많네요. 책 읽기가 쉽지는 않았어서 책에 담겨있는 내용이 조금 더 쉬운 책에도 담겨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읽어내니 뿌듯합니다.

바람돌이 2022-08-31 22:01   좋아요 4 | URL
여성주의 책은 읽고 나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런 이론서가 나오고 공감을 받으면 또 이것을 그래픽노블이나 좀 더 쉬운 대중서로 풀어내는 책들이 나오고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올해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이후 이 문제가 다시 공론의 장으로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더 여러 좋은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앞으로 수하님 글도 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
아 근데 대문의 저 아리따운 냥이는 수하님네 냥이인가요? 미모가 장난 아닙니다. ^^

건수하 2022-09-01 08:42   좋아요 4 | URL
네 저희집 첫째 냥이랍니다 ^^ 한 십년쯤 된 사진이기는 합니다만.. 지금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coolcat329 2022-08-31 20:3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이런쪽으로 참 무지한데 이렇게 바람돌이님 사연을 곁들여 알기 쉽게 책 소개해 주시니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 북플님들 공부하고 책 읽는 모습이 참 좋네요.

바람돌이 2022-08-31 22:02   좋아요 4 | URL
저도 사실 여성주의 책을 읽기 시작한건 올해부터라 아는게 없어요. 일찍 시작하신 분들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 정말 분발해야겠다싶을 때가 많네요. ㅎㅎ 그래도 이렇게 같은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입장, 다른 입장들을 얘기할 수 있는건 정말 좋은것 같아요. 분량도 한달에 한권. 딱 좋은..... ㅎㅎ

단발머리 2022-08-31 2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 페이퍼의 제목에서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너무 좋네요. 저는 이번 책이 유달리 안 읽히고 안 써져서 여지껏 책읽기 중인데요. 바람돌이님 리뷰 읽고나서 얻은 에너지로 얼른 마저 읽어야겠어요.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말하기‘ 꼭 기억하겠습니다.
좋은 글 읽는 호강을 오늘도 하고 갑니다. 감사해요^^

바람돌이 2022-08-31 22:04   좋아요 4 | URL
좋다고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님 글 읽으면서 항상 저는 아 나는 공부가 더 필요해 이러거든요. ㅎㅎ 저는 책을 읽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글을 어떻게 쓰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는게 더 어려웠던거 같아요. 단발머리님 마저 열심히 읽으시고 또 좋은글 남겨주시길 기대 고대 하고 있습니다. ^^

얄라알라 2022-09-01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감사합니다.
혹시 더 올라온 리뷰가 있을까 뒤지다가 바람돌이님의 멋진 페이퍼를 찾았어요

질문을 던지시니, 뜨끔 뜨끔, 물음표를 한참 같이 생각해보게 하는 글쓰기라 더욱 좋습니다.
청소년 권장도서 실례로 소개해주신 줄거리는 황당하네요. 그게 바로 프레임이라는 걸 바람돌이님 덕분에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바람돌이 2022-09-04 13:21   좋아요 1 | URL
같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말이 무엇보다 큰 칭찬이라 저 지금 춤추고 있어요. ^^
그 책은 그 때 읽을 때도 분노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역시 시대적 한계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프레임이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을 벗어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9-02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뒤늦게 이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저도 학창시절 처음 받았던 성교육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은 아녔을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영상이 바로 아이를 낙태시키는 장면이었네요. 너무나 충격이어서 임신중지에 대한 당연한 거부 반응을 은연중 가지게 되었단 걸 알았었는데 바람돌이님께서 잘 짚어주신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글은 읽고나면 늘 갈증해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2-09-04 13:22   좋아요 2 | URL
좋은글이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덕분에 저 바람에 휘날리는 길거리 주유소 인형처럼 막 춤추고 있어요. ㅎㅎ 우리 학교 다닐때 성교육이라고 하면 저런 영상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것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갖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한층 한층 쌓아간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또 새삼스럽게 분노가 확!!! ㅠ.ㅠ

- 2022-09-10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
돌이
님 ㅋㅋ
저도 추석 맞이 이제사 늦은 리뷰 올리고 이거 좋다는 소문만 듣고 있다가 꼼꼼히 읽었어요. 또 역시 근사!하다니깐요 ㅋㅋ 근사하한
바람
돌이님
귀중한 생각 경험 근사한! 글로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근사함과
바람
돌이
에 꽂힌 공쟝쟝 올림)

바람돌이 2022-09-12 16:02   좋아요 0 | URL
뒤끝 낀 공쟝쟝님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어여쁜 여동생님들과 맛난 송편 드셨기를.....
앞으로 계속 제 닉네임은
근사한
바람
돌이로...... ㅋㅋ

추석연휴동안 한번도 서재 못들어오고 내내 먹어제끼다가 이제야 들어와서 보고있어요. ^^
 

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암흑을 휘젓고,
그림자들을 흐트러뜨리고, 유령들을 소환하는 일이다.
허공에 질문을 하고, 잃어버린 메아리들에 귀 기울이는일이다. - P32

인종차별이 절정에 달하던 1950년대에 비비안 마이어는 흑인, 히스패닉계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소외된사람들, 주변인들, 버려진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부서진 사람들의 사진을. 그리고 작품으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셀 수없이 많은 그 자화상 사진들에 대해서는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는 당혹스러운 존재-부재 속에서 육체 혹은 얼굴의 파편들을 드러내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레임 안 그리고 어긋나고 중심에서 벗어난 프레임 밖이, 그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은유처럼,
주제의 해체와 소멸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것과 같은 무에 대한 보잘것없는 저항이다. - P33

자유롭고 대담하고 삶의 광경들이 가득한,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이 작품들을 만들어낸 여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점에 달한 감수성과 깊이를알 수 없는 생경한 방식 뒤에, 기묘함과 지나치게 이넓은 옷들 뒤에 고독이 숨겨져 있다. 유모라는 사회적조건과 두려움 가득했던 가정사가 초래한 유폐된 삶을초월하는 힘. - P39

나중에 일자리를 얻어 고용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비비안은 딱 하나의 요구 사항을 제시한다. 자기 방문에 자물쇠를 달아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내밀함과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 P88

그녀의 사진 작업에는 나이 든 여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무엇도 우연히 찍히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의머릿속에 맴도는 것,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자신을 관통하고 찢어놓는 것을 추적하는 법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비비안 마이어는 무엇보다 예술가였다. 그녀가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었어도 말이다.  - P126

어떤 이유로도, 추하고 절망스러운 유기의 장면들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에 관음증은 존재하지않는다. 그렇게 얼굴에서, 몸짓에서, 세부에서 한 사람의 삶 전체의 전개를 몇 초 만에 알아보려면 스스로 많은 경험을 해야, 존재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 P132

는 것이 된다. 인생에서 자양분을 제공받은 작품은 인생보다 더 위대하다. 내가 문학을 보는 방식도 이와 같다.
황금 같은 단어들이 평범한 여행을 시베리아 횡단 여행으로 변모시킨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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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찍은 사람들과 풍경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마이어는 탁월한 시선과 완벽한 기술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그녀는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담았고, 평생 그 일에 몰두했다. 음악가의 수업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론상우리도마이어가 보았던 세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 P9

마이어는 새 카메라를 목에 두르고 도시를 누볐다. 자신이 일하던 집의 모습들도 담았다. 사진에는 아이들, 생일 파티, 다양한 가정 풍경과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자주포즈를 취해주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가장 생기 넘치고 독창적인 작품은 뉴욕의 거리 사진이다. 마이어는 뉴욕 거리에서 도시의 모습과 생활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 도시 특유의 문화를 찍었다. - P15

항상 방심하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그녀의 직업이었다면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고사람과 공간을 관찰하는 일은 특별하고도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마이어를 알았던 사람들이 그녀를 이야기할 때 독특한 차림새나 걸음걸이도 자주 언급하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목에언제나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8

을지 우려했다. 1987년 잘만과 카렌 우시스킨의 집에서 일하기 위해 구직 면접을 볼 때 마이어는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인생과 같이 이 집에 들어옵니다. 제 인생은 상자들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마이어를 고용했고, 마이어가 일을 하기 위해 집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함께 온 200개가넘는 상자에 깜짝놀랐다고 한다. - P22

대다수 사진가들이 안전하게 최상의 사진을 확보하려고 같은 대상을 다양한 구도로 여러 장 찍는 데 반해 마이어는 관심이 있고 눈에 들어온 피사체를 단 한장만 찍었다. 필름낭비를 하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고 단호한 자신감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덕분에 필름 한통에서 흥미로운 사진들이 차지하는비중이 믿을수 없이 높다. 마이어는 자신이 무엇을하고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26

마이어의 셀프포트레이트는 어디에서 어떻게 자세를 취하고 찍을 것인지를 늘 의식했다는점에서 수행적이다. 하지만 반복해서 계속 찍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의 반복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갔던 장소에 대한 기록일수도 있고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간을 단호하게 동결시켜버리는 사진의 속성에 기대어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응시하고 바라보는 수단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혹,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간헐적이지만 단호하게 세상 속에서의 고독함을 선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누구를 찍었고, 무엇을 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진가임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말하기 위한 수단인지도 모른다. - P33

마이어의 사진, 필름, 테이프는 세상을 기록하는 행위가 그녀 삶의 중심임을 말해준다. 다양한 기록 저장장치와 특히 사진을 통해 마이어는 자신을 인생의 관찰자 위치에 둘 수 있었다. 마이어의 사진에는 모순을 포용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가까워지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균형을 맞추는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P36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보는 사진들이 마이어의 의도대로 출력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녀가카메라 뷰파인더에서 보았던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마이어의 작품이 매혹적인 이유는 우리는절대 알지 못할 이유로 스스로 예술가로 존재할 수도 존재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가였던 한여성의 시선으로 보았던 세상을 우리도 똑같이 본다는 점이다. - P41

그녀가 남긴 사진들은 사진이 그녀에게 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준 자의식과 대리 자의식 그리고 유물의 증거이다. 비비안마이어의 사진이 매력적인 것은 우리가 그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사진들이 우리에게 예술가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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