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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21쪽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표제작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기에 오해하고 그래서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모르는 사람이 앎의 순간으로 들어오는 그 찰나의 이야기이다.
<모르는 사람>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라고 아버지가 말한다. 듣고 있는 아들은 그 의미를 알아듣기 힘들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종 이후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듯하다. 아버지는 삶의 모멸감으로부터 견뎌야 했구나라는 짐작이다. 그런 결론이 나온 건 아버지의 실종에 대한 어머니의 폭력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점점 아들의 삶에 대한 압박으로 전이된다. 그러나 불현듯 전해진 아버지의 부고, 그리고 사진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전혀 다른 삶을 내내 꿈꾸었던 아버지의 고백은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삶의 공간에서 배제되는 모멸감을 느끼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서로를 안다는 전제가 될 수 없음이고, 밖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에 맞닿는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배제함으로써 서로에게 모멸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헤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은 가장 큰 족쇄이자 슬픔이 된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 속에도 사랑이 있다는거다. 그것이 자기 연민이든 착각이든 어쨌든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괴로울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덤을 보러 비행기 표를 끊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복숭아 향기>
또 사랑이다. 단 한순간의 연민이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아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내 옆의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온갖 욕을 퍼부으며 말리고 말릴 일이지만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연민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타인에 대한 연민은 그에게서 나를 보는 것으로 비롯된다. 나에 대한 연민이 타인을 통과하며 동질화 되는 것이다. 얼핏 이해되지 않을 이 과정을 작가는 같은 문장을 여러가지 다른 뜻으로 변주하면서 반복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복숭아에 대한 문장이다.
그 순간 딱히 좋아하는 과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데, 딱히 좋아하는 과일이 있는데도 떠오르지 않았다면 문제일 수 있지만, 딱히 좋아하는 과일이 없으므로 이상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한 것은 딱히 좋아하는 과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을 사전에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대답이 같았다는 것이다.... -42쪽
이렇게 계속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 어느덧 복숭아라는 대답에 뭔가 필연성이 있지 않나 싶어져 버린다. 이런 문장은 M시에 대해서도 계속되며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문장들이 그렃게 부딪히며 독자를 이해와 인정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인정할 수 없어도 불합리해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자리가 여기 있다고.... 그것도 사랑 아니겠냐고....이는 <윔블던, 김태호>에서 다시 반복된다. 화자가 자식이 섬망병자이자 금치산자로 치부해버리는 노인의 청을 들어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자리를 우리는 또 모르는 사람들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강의>
주식이니 투자니 하다 빚의 수렁에 빠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다. 너무 흔해서 소설이든 영화든 주 소재로 써먹지도 못한다. 그저 없으면 심심한 지나가는 소재로나 소비된다. 작가는 이 흔한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다. 제목처럼 일장 연설을 강의라는 제목처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그 중 모르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장황한 대사가 독자를 빨아들이는 것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구구절절이 반복되는 문장의 힘이다. 반복이지만 반복이 아니다. 같은 말을 문장의 표현을 달리하면서 점점 점증하는, 아니 수렁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적어도 이 단편집 안에서 작가의 문장의 특징이 가장 잘 보이는 작품이다.
단편 <찰스>와 <넘어가지 않습니다>는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이야기이다.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유발하고, 그래서 알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책임을 유발한다. 찰스의 김철수는 자신이 감당해야 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질문하기와 대답하기를 멈춘다. <넘어가지 않습니다>의 화자인 나는 모른다는 벽을 절박하게 두드리는 남자에게 결국 문을 열고 질문과 앎의 공간으로 그를 맞이한다. 우리는 사실 모르는 사람에 대해 늘 저 2가지 태도 사이에서 망설인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사실상 닥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질문을 그만두고 개입과 책임을 그만두었을 때 우리는 김철수가 그러듯이 오래도록 씁쓸한 자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누구도 완성된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질문과 책임, 문을 여는 그 행위가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것은 분명하기에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소설의 질문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신의 말을 듣다>에 나오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네가 그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안다. 네가 했는데 드러나지 않아서 감춰져 있는, 크고 작은 아주 많은 것들을 안다. -203쪽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구원을 제시하기도 한다. 과거의 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덮을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의 행동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것으로.... 때로 그러한 구원이 폭력적으로 억압되었을 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때, <안정한 하루>의 장필수씨와 장철수 형제처럼 사람은 서로의 일을 모른척 함으로써, 즉 의도적으로 서로의 상처를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바깥으로의 감각을 닫아버린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는 모르는 사람을 나의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이승우 작가의 에세이집 <고요한 읽기> 서문에서 작가는 말한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고요한 읽기 6쪽)
이승우 작가의 <모르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내가 읽은 것이 책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생각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