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부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유를 포기했단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녀는 만나자마자 그자신의 가장 아프고 민감한 상처를 단번에 알아본 것일까?
어떻게 자유를 잃어버리고 인내하는 자, 임시 고용인, 봉급생활자로만 살게 될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을까? 어떻게 그녀는 즉시 첫 손동작으로 이 모든 비밀을 벗겨낸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그는 부인을 쳐다보았고, 이제그는 자신을 신뢰하는 듯 관심 있게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눈빛을 알아차렸다. - P18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부인을 사랑했다. 격렬하게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으로 그는 여지없이 꿈의 물결 속으로빠져들었다. 하지만 그의 온몸을 뒤흔들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부족했다. 즉 그는 여태껏 경탄과 경외심, 애착이라는핑계로 덮어둔 것이 이미 사랑이라는 사실, 그것도 환상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열광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그의 내부에서 어떤 비굴한것이 솟구쳐 오르며 그 사실을 강력하게 물리쳤기 때문이다. - P21

하지만 사랑은 육체의 깊은 곳에서 맹아처럼 어둡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숨결과 입술로 사랑이라 말하며 떳떳이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법이다.  - P22

 ‘사랑‘이라는 그마법의 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자마자, 경악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소소한 기억이 반짝 불꽃을 튀며 그의 의식으로 빠르게 몰려들었다. 이제까지는 감히 한 번도 인정하거나 해명하지 못했던 사실 하나하나가 그의 감정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몇 달 전부터 이미 깊이 사랑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 P27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 P42

가로등이 그들을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걸어갔다. - P71

외롭고 추운 오래된 공원에서
두 유령이 과거를 좇고 있구나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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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김정은이 악수하며 말했다.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나 역시 생각했다.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구나. 힘겹게 갔으니, 간김에 실내 스카이다이빙 한번 하면 어떨까 하고(나만 당할 순 없다!). 기왕이면 커플처럼 트럼프랑 똑같은비행복을 입고, 손도 잡고, 허공에 붕 떠서 웃으면서, 찰칵! 그럼, 정말 역사적일텐데. 싱가포르 전력의 우수성을 입증할 좋은 계기이기도 하고…. - P47

결혼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우주가 만나서, 20평 내외의 아파트에 몸과 영혼과 라이프스타일을 구겨 넣는 것이다.  - P48

알고 보니 결혼은 두 개의 우주가 만나서 하나의 우주를 시원하게 인수 합병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제 버거를 먹으며, 오픈카를 운전하며, 수영한 뒤에 몸을 닦으며 인수 합병 프러포즈(즉, 설교를 계속 들었고, 결국 내 우주는 아내의 우주로 들어가 평화롭게 사라지는 길을 택했다.  - P49

인생이 비참한 건,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서 설렘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 P56

왜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체호프 같은 대문호가 많이 탄생했을까. 왜 겨울이 우울한 독일에서 니체, 쇼펜하우어, 괴테 같은 문필가가 탄생했을까. 이런 말은 좀미안하지만, 겨울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겨울에 백곰과 춤출 생각이 아니라면, 러시아의 한겨울을 나는 사람은 택해야 한다. 보드카를 마시며 인생을 한탄하거나, 글을 쓸 것을 서너 시면 해가 퇴근하는 독일에서 겨울을 나는 사람이라면 택해야 한다. 추운 겨울에도 맥주를 마시며 더 추워지거나, 글을 쓸 것을.
그렇기에 쇼펜하우어의 글들이 하나같이 염세적이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 하나같이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우울하지만,
그래도 이 사실 하나만은 변함없다.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인간이라면, 혹한의 추위에 뇌를 얻게 하느니 차라리 글을 쓴다는 것을. - P65

그런데 돌이켜 보면 언제나 가장 흥분한 시간은 무언가를 막 이뤘던 순간이 아니었다. 성취한 후에 몰려온 길고 허망한 시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보잘것없는 바람을 이루겠다며, 기대하고 준비하며 기 - P86

분 좋게 땀 흘린 순간들이었다. 차마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조금씩 자신이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그즈음의 나날들이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했다.  - P87

삶이 익숙한 것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단조로움의 - P100

무게를 견딜 수 없고, 삶이 낯선 것들로만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생경함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그렇다면 여행과 삶이 별반 다를게 없기도 하다. 둘 다 적당한 변화와 적당한 안정을추구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삶은 여행이고, 여행 또한 삶이다. 그래서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보내려고 한다. - P101

외국어 학습은 하는 만큼 솔직하게 결과가 나오는 아주 정직한 세계다. 반면, 소설은 아무리 매달리고, 아무리 다가가도, 쉽게 열매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깜깜한 세계를 걷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자에게, 외국어 학습은적어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땀의 보증서 같은 것이다. - P129

소설은 뒷전이고, 생계비와 육아비를 위해 지방을 오가며행사와 강연을 하고 있었다. 집에 오면 육아와 살림을 하고, 밖에 나가면 노동을 했다. 게다가, 내 명의로 된 부친의 은행 대출도 있었다. 부친의 사업 실패 탓에, 내 수입의 8할은 내가 쓴 적도 없는 대출을 갚는 데 쓰였다. 이렇게 3년을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사람이 무너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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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24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현재 마음 상태
1.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기차를 타고
2.홀로 책을 펼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싶다.

실제로 추운 나라 사람들이 독서층이 굉장히 두텁고 독서 인구가 엄청 납니다
전 세계 독서 일등 시민이 사는 곳은
아이슬란드 라고 ^^

바람돌이 2022-08-26 12:22   좋아요 0 | URL
기차 타고 맥주마시면서 책 읽고 싶다. ㅎㅎ 정답입니다. 음 사실은 기차보다는 비행기를 더 타고싶긴 합니다. ^^
추운 나라는 아무래도 밤이 길고 또 추우니까 나가서 놀고싶지 않을것도 같고, 특히나 북유럽은 밤에 놀곳도 없고 진짜 할일이 없을 듯요. 그래서 북유럽이 독서강국이기도 하지만 포르노 강국이라고도 하더군요. ㅎㅎ
 

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국민 만들기‘를 목표로,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관리하려는 한 가지 수단이다. 이는 법을 통해 현실화된다.  - P212

여성이 어디에 사는지, 여성의 몸이 ‘국가주의적모성‘이라는 도식을 통해 어떻게 읽히는지에 따라, 임신중지를+ ++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는 존재로 인식됨을 보여 준다.
‘국가주의적 모성‘이라는 발상 · 이데올로기는 ‘좋은 어머니‘
라는 문화적 상상을 통해 합리화된다. 서방 영어권 전반에 걸쳐 ‘좋은 어머니‘는 백인 중산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의 어머니들은 미국의 경우 ‘복지의 여왕‘이라 불리는 흑인 여성이라든지 36 ‘크랙 베이비 crack baby‘ 의 어머니, 37 영국의 경우 ‘차브맘chav mum ‘38 처럼 태만하거나 병리적인 이미지가 계속 나돌았다. 오스트레일리아 39. 캐나다 40. 미국에서 선주민 어머니는 병리화된 모성의 예가 되었다. 20세기를 거치며 우생학적 담론이
‘역기능 공동체‘라는 담론으로 합리화되는 동안, 규범적 모성과일탈적 모성 도식은 식민주의적 기획에 얽혀 잔존했다. - P213

배제(국민으로부터 특정 신체를 배제), 재생산(백인 중산층 여성의 재생산), 부인(식민화 내지는 선주민 주권의 부인)은 국가적불안을 관리하는 교차적 기술이다. 국민은 바로 그 구성 자체 때문에 불안을 준다. 국민은 한 번도 ‘만들어진‘ 바 없기에, 이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 계속된다. ‘국민만들기‘의 과정은 결코 끝이없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 주권의 취약함이 드러난다. - P217

어떤 것을 ‘너무 많다‘고 하는 바로 그 수량화와 공표의 과정은, 임신중지에 대한 도덕적 공황이 ‘어떤 신체가 국민을 형성해야 하는가‘라는 더 광범위한 국가적 불안과 연계됨을 보여 준다. - P224

정치인들과 광범위한 공동체는 임신중지를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관리할 수있는 사회문제로 프레이밍하면서, 임신중지를 통제할 수 있다는환상을 만들었다. 임신중지에 대해 토론하는 행위는, 임신중지를 고려하는 임신한 여성을, 그들을 걱정하고 평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통제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 P236

백인 국가라는 환상과 그 핵심 제도인 ‘가족‘의 안정을 위협하는 다른 인물형이 임신중지 여성과 환유적으로 연결될 때, 공포는 더 강력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1970년대에는 동성애자와 이혼 여성이, 2000년대에는 레즈비언어머니, 무슬림, 망명 신청자가 있었다. 임신중 여성은 이들과마찬가지로, 국가의 미래란 어떠해야 한다는 환상 - 행복한 백인 이성애 가족‘이라는 날조된 과거를 향수 어린 눈으로 갈망하는 것-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처럼 공포를 통해 빚어진 환상적인 미래에서라면, 적어도 백인 여성은 임신중지를 해서는 안되고, 156 이주는 엄격히 통제되어야 한다. 백인 여성은 임신중지대신 국가를 선택해야 하며, 국가와 함께 나란히 ‘행복의 대상인미래의 아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 P238

각본의 규범에서 멀어져 가는 존재였다. 여성이 모성으로부터독립하는 것은 운동 진영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비쳤다. 반면 애통함에 잠긴 임신중지 여성은 어느 쪽에서든 올바른 방향으로 여겨졌다. 안티초이스와 프로초이스는 수사의 주된기조를 모성적 여성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설명했다. 그러므로임신한 여성을 위한 탈출구는 여기 없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중지를 선택할 때조차 모성을 선택한 셈이 되는 것이다. - P243

임신중지를 선택한다는 의미에 들러붙어 그 의미를 바꿔 놓는 감정들은 이미 ‘줄 세워진 ‘ 행동 규범에 여성을 복귀시켜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장치‘다.  - P244

나는 임신중지가 축하받을 일이라고 본다. 임신중지는 의도치 않게 임신을 한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재생산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재생산과 분리된 이성애 섹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일이다.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이라는 위치는 담론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다. 이 책의 초점은 아니지만, 나는 어떤 포괄적인 ‘재생산 정의‘ 프레임 안에서 임신중지를 쟁취할 필요가 있다는 데뜻을 같이한다. 즉 임신한 여성에게 필요한 사회·경제적 지원체계를 제공해, 임신 중지를 하려는 여성이라면 그저 임신을 원하지않는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도록 가능한 한 확실히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 P248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상은 커다란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다른 근원과연계되어, 사회체에 대한 위협으로서 구성됐다. ‘페미니스트‘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 아이 ·남성·가족에 반하는 존재로, ‘십대엄마‘, ‘복지 의존자‘, ‘성적으로 무책임한 자‘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부주의한 ‘실패자‘로, ‘이혼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 양육자‘,
‘싱글맘‘과 연결될 때는 핵가족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말이다. - P249

임신중지에 자유가 존재하려면, 자율적인(선택하는) 주체에 기반한 자유라는 개념에서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에 살고 있다. 따라서 웬디 브라운이 주장하듯 "개별적 자유라는 건 없다. (・・・) 인간에게 자유란 결국, 언제나 타인과 함께 세계를 만드는 기획이다.""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 P250

임신중지의 감정적 서사에 대해 대항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미안해하지 않는‘ 임신중지 서사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예로 유명 페미니스트들의 임신중지 이야기!"
#ShoutYourAbortion 트위터 캠페인, 12 주류 언론의 반응, 13 ‘셋중하나‘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임신 중지를 안도, 감사함.
심지어 행복과도 연결한다. 이런 서사는 "미안함 없는, 요구대로하는 임신중지"라는 정치적 슬로건과 함께 등장했다. 여성에게임신중지를 대가로 슬픔이나 비탄을 고백하라고 요구하는, 성문화되지 않은 계약에 똑똑히 되갚아 준 것이다. 임신중지를 ‘대놓고 말하라‘는 주문은 임신중지 낙인 그리고 침묵을 명하는 문화적 지령에 대한 응답이자,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평범한 일로 다시 프레이밍하려는 시도다.  - P252

임신중지 정치가 임신중지를 하려는 혹은 하고 난 여성의 느낌으로 환원되면, 그 느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광범위한 사회·구조·정치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를테면 양육에 대한 결정, 또 그런 결정에 대한 다른이들의 평가와 판단을 손쉽게 하거나 감추는 ‘젠더화된 노동분업‘과 ‘계급·인종에 기반한 불평등‘, 임신중지와 피임의 구별이나원치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 등 역사사회학적 질문, 임신의 조건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 등이 있다. - P255

 ‘미안해하지 않는‘ 임신중지 서사는 가치가 있다. 임신중지라는 결정이이로우며 삶을 고취시키는 결정이 될 수 있다. 이때 그 여성은 주체의 자리를 정당하게 부여받는다. 이 주체의 자리를 배제하려는끊임없는 움직임은 임신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발상이 전복적임을 반증한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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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다양한 담론장을 가로질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이 중요한 까닭은 임신한 여성을 이미 자궁안에서부터 자율적인 ‘아이‘의 어머니로 만들고, 임신중지를 여성에게 도덕적으로 문제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반임신중지의 수사가 숨어들어 그 규범적 효과를 증폭시킨 강력한 수단이다. 이때 정치는 임신중지에 무엇이 뒤따르며 여성이 어떻게 임신중지를 경험하는지를 말해 주는 진실로 둔갑한다. - P131

임신중지는 의료 절차에 추가 단서가 붙는 매우 드문 경우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는 여성을 취약하고, 약하고, 착취당할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4 이런 조치는 "여성의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며, 85 여성이 임신중지를 적극적으로 바란다기보다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86임신 중지를 고려하는 여성은 상담을 받고 국가에서 주는 정보를받아야 한다. 반면 임신을 지속할 여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런식의 전제는 모성이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될 유일한 결과라는규범적 관점을 반영하며, 이를 재차 말한다. - P147

임신중지의 애통함이 첫째로 불가피하고, 둘째로 태어나지않은 아이의 삶을 끝장낸 여성이 치르는 결과라는 전제는, 임신중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폭을 좁혀 임신 중지 반대론자들의정치와 목표를 지지해 준다. 임신중지는 원치 않은 임신을 끝낸행위라기보다는 자율적 존재를 살해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임신중지 여성은 적어도 살면서 한 번은 모성에 ‘아니요‘라고 말한 여성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하게 그리고 언제까지나 어머니인존재로 비친다. 반임신중지 운동 안에서 보자면 태아중심적 애통함의 함의는 더 투명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했듯이,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를 알리는 데 전념하는 조직은 자신들의 반임신중지 의제를 숨기곤 한다. 게다가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임신중지 경험의 서사를 더 일반적으로 지배하게 됐고, 아마가장 놀랍게는 프로초이스 활동에 얼마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 P152

임신중지의 부정적 효과를 과장하면서 임신·출산·양육의 부정적 효과를 언급하지 않는 이중전략은, 모성이라는 규범적 행복과 임신중지의 애통함 모두를 구체화한다. 빅토리아 주 토론 당시 한 여성 의원은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지지하며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뚜렷이 대조했다. "나를 포함해아이를 낳는 순수한 기쁨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 어떤 이유로든 어떤 상황에서든 임신을 끝내는 일이 큰 고통을 야기할 것이다."  - P167

‘상실‘은 임신중지의 문화 지형을 지배하고 있고, 오히려 모성이 가져온 상실, 이를테면 모성 바깥의 삶에 대한 상실이야말로 실제 말해질수 없는 것이다. - P170

임신중지와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책임감을 개인화하는 것은 임신중지 수치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 P176

여성이 임신중지를 합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여기 접근할수 있을 때조차, 이를 선택하는 사람은 ‘실패자‘ 혹은 ‘패배자‘로재현된다. 수치와 수치 주기의 이중 과정이 여성에게 그런 느낌을 심는다. 수치와 수치 주기는 임신 중지를 겪은 여성을 처벌하려 하며, 임신중지 관련 선택을 통해 이들의 품행을 단속하고, 재생산을 기준으로 선택·선택자의 위계구조를 만든다. - P177

규범성, 수치, 비밀로 이어지는 순환적이고 자기영속적인 관계는 깨기가 쉽지 않다. 임신중지를 가득 채우는 수치는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부추기며, 사실상 자주 위반되는 규범 (의도된 임신‘과 ‘태아적 모성)을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 이로써 임신중지는일상적이기보다 예외적인 일이 된다. 수치 - 침묵 -예외성 - 수치 - P194

의 순환은 규범적 여성성과 임신중지 담론(감정의 기록 등)이 서로를 영속시키는 또 다른 순환을 만들어 낸다. 모성적 여성성은애통함과 수치가 뒤따르는 어려운 임신중지라는 서사를 유도하고, 애통함과 수치는 모성적 여성성을 자연화하는 근거가 된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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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 도스토옙스키부터 하루키까지, 우리가 몰랐던 소설 속 인문학 이야기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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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문학이 만났다.

좋아하는 분야가 같이 만났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


한 때 내가 왜 그렇게 문학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본적이 있다.

물론 가장 기본은 재미있고 평범한 일상에 짜릿한 전율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문학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무엇이 있었다. 

재미를 넘어 문학은 나의 삶의 범위를 확장하고 보다 많은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하고, 책속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사건들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작은 문제들을 대범하게 안고갈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었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당황스럽거나 어이없거나 혼란스러운 그 무수히 많은 만남과 상황들을 나는 문학의 힘으로 지나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인문학은 말 그대로 내 삶의 공간을 확대하고 다른 것을 알게 하고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 나 외의 존재와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대들보였다. 

이런 문학과 인문학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시작은 역시 묵직하다. 

무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 톨스토이 부활의 카튜사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베리아 유형소에 복역한 죄수들이라는 것.

여기서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넓은 시베리아 땅이 언제부터 러시아의 유형지가 된거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리고 그곳에 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래서 인문학 도서를 찾는다.

<시베리아 유형의 역사>와 실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경험을 적은 <죽음의 집의 기록>

온통 얼어붙은 땅에서 모두가 똑같이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 이 땅에서도 유형수들은 귀족 출신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또 가진 돈이 있나 없나에 따라서 처우가 달라졌다. 

오죽하면 도스토옙스키가 "돈은 주조된 자유다"라고 외쳤겠는가말이다.

이 위대한 작가가 돈때문에 절규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세계의 곳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가난한 도스토옙쓰키의 흔적을 찾고, 이 도시 하층민의 뼈아픈 삶을 증언했던 고골을 만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이 도시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면 브루스 링컨의 역사책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만나면 된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며, 대공황기 미국의 농민들이 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왜 서부로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면 알렌의 <1929, 미국대공황>을 만난다.

물론 관심사가 다른 사람은 다른 책을 찾을 수도 있을테다. 

우리의 독서 여행이 꼭 바깥의 거대 역사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를 읽으면 레베카에 대한 주인공의 열등감과 질투에 한없이 갑갑해진다.

너는 레베카랑 비교하지 않아도 돼, 너는 너만으로 매력적이야라고 백만번쯤 외쳐주고 싶은데 그럼에도 소설을 읽다보면 나조차도 이렇게 질투로 피폐해지겠구나싶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작가가 너무 잘 썼기 때문이겠지....

작가들은 이런 감정에 대해서 다 겪은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잘 묘사하지라는 궁금증을 가지는 당신이라면 피터 투이의 <질투>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권한다. 


때로는 의외의 조합을 발견하기도 한다.

<마담 보바리>를 읽을 때 소설속에 등장하는 요리들이 등장인물의 결정적인 심경의 변화와 욕망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마담 보바리>에서 요리는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또 엠마의 현실과 욕망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종횡무진 등장한다는 것.

이런 요리의 상징과 의미를 미리 공부한다면 <마담 보바리>를 읽는 것이 더 풍성해 질것은 틀림없다.


책을 읽는 방법에 정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독서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은 분명히 아주 큰 즐거움이다. 

굳이 나이 오십이 아니어도 이런 독서의 즐거움을 다 같이 나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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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2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8-22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리뷰 읽으니 넘 재미있겠어요. ㅎㅎ보바리와 요리의 상관관계라니 궁금합니다 *^^*

바람돌이 2022-08-22 19:29   좋아요 2 | URL
책 좋아하는 우리는 비켜가지 못할 책.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든 좋잖아요.

페넬로페 2022-08-22 2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문학론에 공감합니다.
50쯤 되면 이제 다르게 읽어야 하는건데 아직 평지에 머무는 듯해 갈길이 먼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2-08-22 21:43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이 평지라면 저는 땅파고 들어가야할듯합니다. ㅎㅎ 그래도 우리한테 그동안 읽은만큼은 아니라도 그래도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제 머리를 다독이는 중이랄까요? ㅎㅎ

희선 2022-08-24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에서 다른 걸로 뻗어가는 책읽기면 좋을 텐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군요 잠깐 알고 싶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한 걸 잊어버리네요 그저 하나만 보는... 어쩌다 이어질 때도 있지만, 그건 정말 가끔 일어나네요 저는 그런 우연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2-08-24 11:31   좋아요 2 | URL
사실 저도 그때 그때 읽고싶은 대로 읽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좀 이런 연결 된 독서도 끌린다고 할까요? 하기야 책을 어떤 식으로 읽든 뭔 상관이겠어요. 즐거우면 되죠. ^^

새파랑 2022-08-26 16: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온리 문학파인데 인문학도 좋아하시는군요 ㅋ 명작도 뭔가 읽는 방법을 먼저 알고 읽어야 느낌이 오더라구요 ㅋ 요기 있는 책은 다 읽어봐서 그런지 반갑네요 ^^

바람돌이 2022-08-27 16:4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이면 다 읽으셨을 줄 알았어요. ^^ 저는 생각보다 세계문학을 많이 안읽었더라구요. 그동안 뭘한건지.... 인문학쪽도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챙겨보는데 이쪽은 또 너무 새책들이 많이 나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