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여름, 완주
저자 김금희
무제
2025-05-08
소설 > 한국소설
그럼 서로 마주보고만 있으면 되겠네. 그러라고 여름이 있는 거네.
■ 책 속 밑줄
손열매가 처음으로 성대모사 한 사람은 스탠리 입키스였다. 그는 짐 캐리가 연기한 영화 「마스크」의 주인공으로 고대의 나무 가면을 쓰면 평소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한다. 히어로라면 히어로의 일종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포장하기에 두꺼운 초록 버터크림의 그 얼굴은 토네이도처럼 무질서를 몰고 와 현실을 엉망으로 만든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
평면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오려 내는 영혼의 가위질처럼, 진흙 덩어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신의 숨결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라 장독대 안을 푹 익히는 유산균처럼 손열매는 자기 안의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그간 한 번도 경험 못 한 고도의 집중력이라 코끝까지 시큰해졌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듯했다.
보령에서 올라와 오랫동안, 대학을 졸업하면, 서른이 되면, 경력이 차면, 듬직한 안정으로 나아가리라 믿었지만 이상하게 삶은 매번 흔들렸다. 마치 우는 사람의 어깨처럼.
열매는 자괴감이 들었다. 호흡을 더 고르자 드디어 생각마저 날아갔다. 버글거리던 것들이 사라지고 서 있다는 느낌만 남았다. 옆에는 과잉 흑담즙으로 고생하는 우울한 어저귀와 슬픔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맹렬히 저항하는 문제 학생이 서 있고 봄은 그냥 봄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감싸며 마치 눈보라처럼 수양버들 씨앗이 날았다.
함께 수미 얼굴을 보고 있던 열매는 얼마 전 동창들이 야유하듯 전한 말을 근황 소식으로 바꾸어 들려주었다. 여의도에서 본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어디 직장을 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순간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러갔지만 수미 엄마는 표정을 감췄다. 기쁨이나 즐거움, 안도와 낙관 같은 것 대신 신산함, 피로감, 불안, 불편, 침묵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사람처럼 재빨리.
느린 템포의 음악이 흐른다. 고독과 상실, 순수의 근원에 대한 염원, 무력감과 나약함 속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호혜적 사랑, 그 시절 신해철의 음악에는 그런 여린 신념들이 들어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마음을 차게 쓸고 갔다. 뭔가 다른 것, 완평을 찾아간 그 봄처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 완주 나무도 없고 숲의 친교도 느껴지지 않는 이 도시에도 가끔은 그런 기적이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외로움, 후회, 책임감, 소진,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일.
모두가 여름 속에서 말없이 자신의 계절을 통과한다.
■ 끌림의 이유
『첫 여름, 완주』는 상처를 드러내지도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습니다.
무너짐과 회복을 말없이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풍경과 사람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완주라는 장소는 삶의 속도를 바꾸는 장치이며 등장인물들의 모든 감정은 말보다 시선과 조용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듣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만들어낸 독특함 덕분에 이야기는 더 따뜻하고 느긋하게 진행되며 말보단 리듬으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소설입니다.
『첫 여름, 완주』는 잠시 멈추었지만 결국 끝까지 걸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여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함께 있으되 침묵이 가능한 관계가 얼마나 따뜻한지 잘 보여줍니다.
■ 간밤의 단상
누군가와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자 커다란 위로인 거 같습니다.
우린 종종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치유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침묵에서 더 큰 온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읽는 내내, 묵인이 아닌 수용이란 감정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마음, 서로를 급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 관계 그리고 내 속도를 기다려주는 사람들.
그런 여름을, 그런 완주를 누군가 내게도 건네줄 수 있을까?
아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감정은 사실 조용한 회복입니다.
폭발하거나 울부짖는 대신, 그저 스스로와 타인의 말 없는 연대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 일이 제겐 꼭 맞다고 할까요.
『첫 여름, 완주』는 그런 회복의 과정을 마을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 담아냈습니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않고 누구도 구원자가 되지 않지만, 모두가 서로의 마음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방식만으로도 위로가 되죠.
살다 보면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는데 그럴 땐 슬픈 이야기조차 꺼려집니다.
이 책은 아무 말 없이 따스한 햇빛이 비춰주는 테이블에 앉아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는 시간과도 같은, 여름날의 속삭임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언가를 극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멈춘 채 숨만 쉬어도 괜찮다고.
말보다 조용한 사람이 세상을 완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고요한 소설 속에서 저는 제 삶의 불시착을 잠시 안아주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 건넴의 대상
조용히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분
말 없이 있어주는 관계에 위로를 받는 분
김금희 작가 특유의 정서적 호흡을 좋아하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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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조금 더 깊고 따뜻해질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