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 소설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 출판사 <수선사> 창립 본명은 하태용(河泰鏞)1904년 평북 선천 출생, 1961년 사망. 작품세계에 적극적이지 못한 방관자적인 자세가 그의 문학적 특징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를 비롯해<청춘도>, <신기루>, <유앵기>, <별을 헨다> 등의단편소설과 한 권의 수필집 《상아탑(象牙塔)》이 있다.
김남천 소설가, 문학비평가 본명은 효식(植) 1911년 평남 성천 출생 1953년 북한에서 숙청 일본 유학 시절인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동경지회에 가입하였고, 1931년 제1차카프 검거 때 기소되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1947년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공장신문>, <소년행>, <남매>, <처를 때리고> 등의 단편소설과 《대하》, 《사랑의수족관》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김상용 시인, 교육자 호는 월파(月) 1902년 경기도 연천 출생 1951년 식중독으로 사망 일본 릿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 이화여전 교수, 강원도 지사, 이화여대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에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영미 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일 성향의 시 3편을 써 논란이 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34년 《문학》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오>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 작품을 포함해 <서글픈 꿈>, <반딧불> 등27편의 시를 수록한 시집 《망향》,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등이 있다.
노천명 한국의 대표 여류시인 1912년 황해도 장연군 출생 1957년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사망 본명은 노기선이나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죽을 고비를넘긴 후 ‘천명(天命)‘으로 개명하였다. 진명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32년 <신동아>에 <밤의 찬미>, <단상>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친일 시를 쓰는 등 그녀의 문학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특히대표 작품인 <사슴>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방정환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 1899년 서울 출생 1931년 신장염으로 사망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1923년3월 한국 최초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으며, 1928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는등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귀먹은 집오리>, <동생을 찾아서>, <까치옷>, <만년 사쓰>, <양초 도깨비>, <사랑의선물> 등이 있다.
백신애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1908년 경상북도 영천 출생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 1929년 《조선일보》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꺼래이>, <적빈>, <낙오>, <악부자>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이병각 시인, 기자 1910년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결핵으로 사망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가 해체된 1935년 무렵부터 타계할 때까지 6년 동안 다수의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연모>, <소녀> 등의 시가 있다.
이효석 소설가 호는 가산(可山), 필명은 아세아(亞細亞) 1907년 강원도 평창 출생 1942년 뇌막염으로 요절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이국을 동경하는 엑조티시즘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원초적인 에로티시즘 성향 등이 드러난다. 주요 작품으로는 <분녀>,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석류> 등의 단편소설과 《화분》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채만식 기자, 소설가, 극작가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 1902년 전북 옥구군 출생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적인 작품을 주로 쓴 사실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미스터 방> 등의 단편소설과 《탁류》, 《태평천하》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그는 광복 이후에 자전적 소설인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하였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채만식을 일제시대 친일 행위자로 결정하였다.
최서해 소설가 본명은 학송(鶴松) 호는 서해(曙海) 1901년 함북 성진 출생 1932년에 32세의 나이에 요절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처녀작인 <토혈>, 데뷔작인 <고국>을 비롯해 주요 작품으로는 <탈출기>, <박돌의 죽음>, <홍염> 등의 단편소설과 유일한 장편 소설인 《호외 시대》가 있으며, 어릴 적부터 가난했던 삶은 그의 문학에 근간을 이룬다.
수박 취미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기는 할 것이로되 여름 과실로는 아무래도 수박이 왕좌(王座)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맛으로 친다 해도 수박이 참외나 다른 그 어떤 과실에 질 배 없겠으나 그 생긴 품위로 해서라도 참외나 그런 그 어떤 다른 과실이 수박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천진에 가까울 만치 순한 빛이요, 연한 살이다. 아마도 자연의 제과품으로선 이 수박이 여름의 풍물 가운데선 가장 예술적일 것이다.
영리를 위하여 다량 생산을 목적하고 인공을 가하여 자연을 모독해서 조숙 시킨 것이 거의여서 수박 본래의 제맛을 다들 그대로 지니지 못했다. 심지어는 속을 붉게 만드느라고 애숭이에다가 물감 주사질로 성숙시킨 것도 없는 게 아니라니 도시 사람은 어쩌면 한 평생 수박의 제맛을 모르고 지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여름의 미각 여름은 채소를 먹을 수 있어 좋다.
시금치, 쑥갓, 쌈, 얼마나 미각을 돋우는 대상인가. 새파란 기름이 튀여지게 살진 싱싱한 이파리를 마늘장에 꾹 찍어 아구아구 씹는 맛, 더욱이 그것이 찬밥일 때에는 더할 수 없는 진미가 혀끝에 일층 돋운다.
먹는 데도 역시 그 운치가 반은 더 미각을 돋우는 것이어서 수박은 다락 위에서 꿀을 부어 한가히 먹어야 맛이 나고, 참외는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가는 원두막 안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런 것을 서울선 기껏 골랐대야 따다 두어서 익힌 속 곤 놈을 그것도 마루 위에서 밖에 앉아 먹을 데가 없으니 제맛이 돋귈 리가 없다.
가배6) 요즘 알베르 티보데7)의 책을 한 권 사서 《소설 독자론》의 첫 혈(頁)8)을 펼치니까 이런 글이 나왔다. 피에르 루이9)가 어떤 재미스런 콩트 속에서 희랍 문명과 근대 문명이 쾌락(그에 의하면 유일의 가치 있는 것)의 수확으로서 선물한 것을 비교해 보고, 근대인의 새로운 일락(逸樂)을 단 하나밖에는 발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담배다, 라고 결론하였다.
이런 것을 읽다가 나는 펀뜻 벽초10) 선생의 《임꺽정》을 생각했다. 임꺽정과 그의 일당이 두주로 유흥을 하는 장면은 많지마는 담배를 피우는 대목은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조 명종 전후에도 끽연의 풍속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차라고 하면, 퍽 전에 고 호암12) 선생의 글에서, 이것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유래를 읽었던 것처럼 어렴풋이 생각되기는 하지만 기억이 도무지 확실치가 못하다. 그러니까 차에 대해서도 재미난 이야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임꺽정의 일당이 숭늉을 마셨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가배를 가장 애음(?)한 사람은 아마 오노레 드 발자크16)일 것이다.
"그는 오만 잔(杯)의 가배로 생활하고, 오만 잔의 가배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나는 야반에 기상한다, 그리고 17시간 동안 원고를 쓴다" "나는 다섯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야반으로 정오까지는 제작에 소비하고 정오로부터 네 시까지 교정을 본다" 이러한 격렬한 노동 가운데서 그의 의식을 지탱해 준 것은 45잔의 가배였다고 한다. 51세에 드디어 죽었으나 20년 동안 백 권의 소설을 썼다.
그렇다고 흥분제는 일적(一適)도 안 마신다고 손님에겐 홍차를 주면서도 자기는 백비탕(白沸湯)17)을 마시는 장개석18)의 기질은 또한 나의 본 받을 바 못 되고…….
‘냉면’이란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이라야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의 입에 가장 많이 기호에 맞는 음식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아니한다.
모든 자유를 잃고 그러므로 음식물의 선택의 자유까지를 잃었을 경우에 항상 애끓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냉면이 우리에게 가지는 은연한 세력은 상당히 큰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선주후면(先酒後麵)25)이란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소갈비나 구워서 소주를 마신 뒤에 얼벌벌하니 고추를 쳐서 동치밋국에 말아 놓은 냉면을 먹는 맛이란 지내보지 않은 사람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기막히는 진미다.
냉면에는 꿩(雉)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꿩볶이를 쳐서 동치밋국에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는 냉면에 대하여 용훼(容喙)36)할 자격이 없다. 꿩은 겨울에 나는 동물이다. 냉면 맛이 겨울에 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꿩고기 쳐서 냉면을 먹어 보지 못한 겨울은 나에게 있어선 지극히 불행한 겨울이다.
전주(電柱) 하나 없는 마을! 아무 ‘바쁨’도 아무 ‘시끄러움’도 없는 듯한 봄 산촌에 끊겼다 이었다 호드기 소리가 들려를 와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을 처다보며 이 소리를 들을 때의 내 맘이 어떻더라 할가 슬픈 듯 애닳은 듯 하여간 울어버리고 말았네 그려.
조선의 봄! 조선의 그윽한 봄 정조(情調)! 오냐 하루쯤 배탈이 났다고 결근에 굴(缺勤屈)하고 이런 데를 꼭 한 번만 다녀오자 하는 죄 많은 음모를 자리 밑에서 하네.
산나물 먼지가 많은 큰길을 피해 골목으로 든다는 것이 걷다 보니 부평동(富平洞) 장거리로 들어섰다.
술의 생리 천하의 대장부들은 좋은 일이 있으며 좋다고 한잔, 궂은일이 있으면 또 마음이 상한다고 한잔…… 술을 생리는 지극히 복잡하다.
이러고 보면 남자들은 분명히 조물주에게서 은택(恩澤) 하나는 더 받은 셈이 되지 않나 모르겠다. 마귀가 씌워 가지고도 자기 마음에만 좋다면 그것은 그대로 그 사람의 즐거움에 틀림없을 게다.
원두막 백중(白中)79)이 되도록 모가 나가질 못하고 빽빽이 서 있는 모판이 있는가 하면 김장을 갈려고 품을 뽑고 밭을 매는 데가 있어 농촌 풍경도 얼쑹덜쑹하다.
빙수 1 "조선의 여름이란 낮에는 몹시 따가워도 저녁때의 서늘한 맛이 참말 좋아요."
더위에 시달려서 견디다 못하여 저 거리(街)에 들어가서 얼음을 먹을 밖에 없다고 열사(熱沙)의 위에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허위허위 얼음을 구하러 가면 "오늘 기차 편에 얼음이 오지 않아서 오늘은 없습니다, 내일이나 가져오면 있지요" "날마다 기차 편에 얼음을 가져다 파니까요" 기가 탁 막힌다. 기차도 자동차도 다니지 아니하는 곳, 아주 얼음을 생각도 못 하고 온 여름을 지내는 시골을 생각하면 서울 같은 곳에서 마음대로 얼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기왓장이라고 땅바닥이 갈러지는 듯싶은 여름 낮에 시커먼 구름이 햇볕 위에 그늘을 던지고 몇 줄기 소낙비가 땅바닥을 두드려 주었으면 저으기 살맛이 있으련마는 그것이 날마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 소낙비 찾는 마음으로 여름 사람은 얼음집을 찾아 드는 것이다.
경성 안에서 조선 사람의 빙숫집 치고 제일 잘 갈아 주는 집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종로 광충교 옆에 있는 환대(丸大) 상점이라는 조그만 빙수점이다.
슈크림 벌써 신혼이라는 그러그러한 때가 저 먼 옛날같이 되어버린 이때에 새삼스럽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신혼 여행기를 쓰라는 명령을 받고 펜을 들게 되니 공연히 웃음만 납니다. 대체 쓸 만한 거리가 기억에 남아있어야 될 터인데 잊어버렸는지 또는 눈을 감고 여행을 했는지 좌우간 여행기가 될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여행기가 아니라 그저 생각나는 대로만이라도 쓴다면 다음과 같은 운치 없는 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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