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놀라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들을 보고 겪고 느끼면서
참다운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 나는 아무도 모르게 휴양차 머물던 카르스바트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남국으로 향하는 나의 긴 여행을 누구라도 알게 된다면 꽤나 성가실 터였다.
여행의 동반자들을 꺼낼 때가 왔다.
아름답고 따뜻한 나라로 데려갈 자유로운 공기가 나의 시상을 부풀리고 이끌었다.

이 놀라운 섬의 도시 베네치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나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주신 곤돌라 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수로는 베네치아인에게 도로이자 광장이자 산책로이다.

드디어 라파엘로의 <성 체칠리아>를 보았다.
나는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라지더라도 이 그림만은 진정 영원하기를 소망하고 싶었다.

드디어 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상상했던 그대로인 동시에 새로웠다.
성인들을 위한 축제인 만성절을 로마에서 맞이하기 위해 르네상스의 고향 피렌체도 세 시간밖에 머물지 않았다.
축제는 소박했지만 미사는 꽤 마음에 들었다.

원형 극장과 판테온, 카피톨리노 언덕,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 베로나 광장도 달빛에 비친 모습은 꼭 보아야만 한다.
로마에서는 태양도 달도 다르게 비추는 모양이다.

만월의 달빛 아래 로마를 거니는 아름다움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폴리, 여기는 낙원이다.
로마에 있으면 공부하고 싶어지는데 여기서는 그저 즐겁게 지내고만 싶어진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산물이 느긋하고, 행복한 나폴리 사람을 만들어 낸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늘 말한다.
"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나폴리에는 ‘무위도식하는 떼거리’가 있다.
하지만 내가 이른 아침부터 관찰한 남국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만사가 끝장난다는 북방인의 편견일지 모른다.

친애하는 벗들에게 소식 전합니다.
고백컨대 나폴리를 떠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저는 그제 로마에 잘 도착했습니다.
저는 점점 더 내면으로 깊숙이 빠져들어나 자신의 고유한 것과 내게 생소한 것들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티슈바인이 그리고 있는 제 초상화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앙겔리카 부인도 제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신통치 못합니다.
곱상한 청년의 모습이긴 하지만 저와는 거리가 멀답니다.
이만.
1787년 6월, 로마에서

그리고 한 독일인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미켈란젤로가 낫다 했고 그는 라파엘로 편이었는데, 결국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다 함께 칭송했답니다.

1788년 4월, 2년 가까운 이탈리아 기행을 마쳤다.
이탈리아에 와서야 나는, 나를 쓸모없게 느끼게 만들었던 지독한 상처들을 치유했고, 예술을 향한 뜨거운 갈증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작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자각했다.
그것은 오직 작품을 써야만 한다는 절박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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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화이부동은 조화를 이루되 편당을 짓지 않고, 동이불화는 편당을 지으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화’와 ‘동’은 다르다는 취지로 말한 안영의 화여동이和與同異 주장은 「자로」에 나오는 공자의 화이부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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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나라와 결맹했습니다. 신의를 잃으면 자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난씨를 받아들여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군주는 힘만 믿고 맹주의 나라를 치고자 하니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나라의 복이지만 덕행도 없으면서 전공을 세우게 되면 반드시 우환이 군주의 몸 위에 떨어질 것이다."

"군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오직 사직을 지킬 뿐이다.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으면 따라 죽을 수 있고, 사직을 위해 망명하면 따라서 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가 자신을 위해 죽거나 망명할 경우 그의 총신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같이 죽거나 망명하겠는가? 하물며 신하가 모시던 군주를 시해한 상황에서 내가 어찌 그를 위해 죽거나 망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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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죽는 것이 대상大喪이고, 형제간에 싸우는 소리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것이 대란大亂입니다. 지금 일거에 대상대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틈타 보위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당시도 정략결혼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중이가 마침내 회영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여기서 ‘진진지의秦晉之誼’라는 성어가 나왔다. 두 나라 군주들이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어 우호를 다진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다 후대에 혼인 및 혈맹의 관계를 맺은 국가 관계를 흔히 ‘진진지의’ 내지 ‘진진지호秦晉之好’로 표현하게 됐다.

중이는 그날로 강도에 입성에 곧바로 보위에 올라 진문공이 되었다. 당시 진문공은 이미 62세에 달해 있었다. 패업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제환공은 바르면서 술수를 부리지 않았으나 진문공은 술수를 부리면서 바르지 않았다."

똑같은 패업인데도 제환공의 패업은 이른바 ‘정패正覇’, 진문공의 패업은 이른바 ‘휼패譎覇’로 나눈 것이다. 훗날 주희는 공자가 정패와 휼패를 나눈 배경과 관련해 이같이 풀이했다.

"제환공은 초나라를 칠 때 대의를 내세워 말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진문공은 위나라를 쳐 초나라를 싸움으로 끌어들이고 음모로써 승리를 취했으니 그 속임이 매우 심했다. 두 사람의 다른 일도 이와 같은 것이 많다. 공자가 이를 언급함으로써 그 숨은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안영은 사람과 더불어 사귀기를 잘하여 사람들이 오래도록 그를 공경했다."

칭송이기는 하나 극찬은 아니다. 안영은 자가 중仲이고, 시호는 평平이다. 시호와 자를 합친 ‘평중’을 이름 ‘영’ 대신 사용해 흔히 ‘안평중晏平仲’으로 불린다.

"우리는 진나라와 결맹했습니다. 신의를 잃으면 자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난씨를 받아들여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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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말기 일부 변법개혁파가 영어 ‘이코노믹스economics’를 ‘경중학輕重學’으로 번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 ‘이코노미economy’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인 ‘경제’로 번역하며 메이지유신을 강력 추진한 것과 같은 취지다.

동양에서는 원래 경제를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한다는 뜻의 경국제세의 약자로 사용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경세제민’의 약자로 사용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경세제민’ 표현은 수나라 때 왕통王通의 『문중자』 「예악」에 처음으로 나온다.

일본의 유학자를 비롯해 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하는 난학자蘭學者 모두 유사한 취지의 경세제민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의 『경제록』이다. 그는 이같이 풀이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경제’라고 한다. 세상을 바로잡아 백성을 구제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투는 21세기 G2시대는 과거의 춘추시대를 방불케 한다. 관중을 효시로 하는 상가의 본령인 정치경제학의 근본 취지를 되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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