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실 혹은 가설을 바탕으로 외삽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6)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 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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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공생은 어디에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간적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개별 작품마다 인간에 치우치거나 비인간에 치우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SF에서 비인간 존재들-자연, 우주, 행성, 테크놀로지, 동물, 식물, 외계 생물-은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는 이 행성의 꽤 많은 사람이 비인간 존재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는 사실을, 또 그들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부가 SF를 읽고 쓴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버려진 장소들은 이제 가장 번성한 생태계다. 물과 바람, 흙, 그리고 식물들이 가장 먼저 인간이 떠난 장소를 점령하고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러면 인간 대신 다른 동물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운다.

인간 없는 세상에 무엇이 가장 먼저 퍼져나갈지 답은 분명했다. 불모지, 폐허, 무인도를 뒤덮어버리는 식물들. 식물은 황무지를 개척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존재다. 지구의 거의 모든 생물이 식물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들은 말없이 뿌리를 뻗고 세상을 지탱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미루기를 주제로 한 여러 문헌을 조사하고 취재 장소를 여행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글쓰기를 미루어왔는지를 털어놓는데, 저자의 말마따나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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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책이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우린 충분할지도.

무엇보다 우리가 살며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전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일단 저 밖에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오면 남은 평생 인간의 관점에 매여 살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결망의 한 점으로, 조그만 구성요소로, 수천수만 가지 현실의 단면 중 오직 일부만을 감각하는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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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이지! 대체 이건 어찌된 영문인가. 스님이고 촌장님이고 코안 씨고, 그럼 옥문도에는 범죄의 천재가 모여 있단 말인가."

나는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어. 츠키요와 유키에와 하나코를 죽이는 꿈이라네. 그게 또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살인이었지. ……카에몬 님은 그렇게 말하고 무서운 미소를 떠올렸어.

칠전팔도(七顚八倒):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섬. 즉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음.

내 결의의 굳건함을 처음으로 두 사람은 알게 된 것이야. 그 두 사람으로서는 죽은 카에몬 님의 한보다 살아 있는 내 지벌이 두려웠지. 이 내가 결행하자, ……두 사람도 마침내 결심했다네.

섬도 혁명이라면 일본도 혁명, 선주라 하여 옛날의 달콤한 꿈을 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저는 머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섬에도 귀환으로 차차 젊은이들이 돌아올 겁니다. 그 중에서 좋은 신랑감을 찾아내서, 이룰 수 없다 해도 기토 본가를 지키고 키워가겠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부님의 혼은 이 집의 용마루를 떠날 수 없을 겁니다. 섬에서 태어난 자는 섬에서 죽는다. 그것이 정해진 도리인 겁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이제 이걸로 더는 만나 뵐 수 없겠군요.

"아하하, 우카이 씨. 댁도 드디어 해고당했구먼. 알고 보면 기토 분가의 부인도 계산적이야."

그렇다, 그걸로 된 거다. 여기는 타지방 사람이 오래 살만한 곳이 아니야

거룻배가 조용히 출발했을 때, 안개비를 뚫고 천천히 종소리가 흘러왔다. 료타쿠 군이 작별인사로 종을 쳐주는 것이리라. 무서운 추억이 있는 저 종을…….

코스케는 거룻배 안에서 가만히 일어서고는,
"나무석가……."
하고 안개비에 덮인 옥문도를 향해 합장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코고로(明智小五郞)와 짝을 이루는 일본의 명탐정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아이누 어(語) 연구가로 이름이 높은 문학자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京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946년 작, 《혼징 살인사건》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혼징(귀족이나 공인들이 묵는 공인된 여관) 가문에서 일어난 불가해한 살인사건을 멋들어지게 파헤치는데 당시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보통 추리소설에서 섬은 공간에 폐쇄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이용된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놀라운 성공 후에 후배 작가들은 앞 다퉈 섬을 이용했다. 하지만 《옥문도》에서 섬은 공간의 폐쇄성이 아닌 시간의 폐쇄성, 즉 전통적 인습이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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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토 치마타가 죽었다는 사실은 전류처럼 옥문도를 꿰뚫고 지금 그곳에 일종의 공황상태를 일으키고 있다. 모두 묘하게 불안한, 침착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숙련된 어부들이 수평선 저편에 뜬 검은 구름 안에서 폭풍우의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타세아미(打網網): 배의 선수와 선미에서 긴 막대를 내밀고 그 끝에 망 끝에서 나온 줄을 달아 인력, 풍력, 조력으로 배를 끌며 고기를 낚는 것.

선주는 배를 갖고 있다. 그물을 갖고 있다. 어업권을 갖고 있다. 그 대신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획량의 전부를 고스란히 받는다. 어부는 일당 얼마를 받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렇군. 마치 도시의 자본가 대 노동자와 같은 관계로군."

거기에 어부란 배 밑 널빤지 한 장 아래는 지옥이란 생각을 늘 하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먼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 마시다, 치다, 사다19)의 삼박자, 그러다가 가불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어촌의 선주 대 어부의 관계는 농촌의 지주 대 소작농 이상으로 강한 봉건적인 굴레로 결합되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그 대신 선주 쪽도 어지간히 빈틈없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죠. 여하튼 상대는 농민과 달라서 거친 어부거든요. 돌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금물입니다. 결국 위엄을 보여야 하는데, 위엄으로 말하자면 작년에 돌아가신 기토 가의 어르신, 카에몬(嘉右衛門) 씨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지요."

마시다, 치다, 사다(飮む·打つ·買う): 일본남자들의 3도락(三道樂)을 일컫는 말.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듯 도박을 하고, 여자를 ‘산’다는 것. 즉 음주, 도박, 매춘을 가리킨다.

다이코(太閤): 간바쿠(關白)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을 가리키는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듣고 코스케는 처음으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기토 가의 다다미방에 앉아 있을 때, 그는 한 번 심상치 않은 외침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야수의 포효와도 비슷한, 거칠고 미친 듯한 외침으로 꽤나 간담이 서늘해졌던 것이다.

코스케는 엄청난 아가씨들이라고 느꼈다. 고르고의 세 자매라고 생각했다. 고르고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원래는 아름다운 처녀였지만 미네르바와 아름다움을 겨뤘던 탓에 자매 세 사람의 머리가 죄다 뱀이 되고 독수리 날개와 놋쇠 발톱을 지닌 괴물로 변하였다. 기토 가의 세 자매에게는 어딘가 그런 기분 나쁜 요사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오츠쿠리란 말하자면 바닷물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살피는 역할로, 군대로 따지면 연대장 같은 것이라고 이발소 주인인 기요오미는 설명했다.

이에야스 공(家康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는 옥문도의 다이코, 카에몬의 ‘적수’라는 의미.

요도기미(淀君):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던 히데요시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요도기미로부터 아들을 보는데 바로 후계자가 되는 히데요리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들과 함께 할복할 것을 명받는다. 여기서는 ‘늘그막의 애첩’이란 뜻.

이즈미 쿄카(泉鏡花): 에도 시대 극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서민의 생활을 다룬 세와모노(世話物)와 환상적인 작풍을 구사한 메이지 시대의 작가. 필명은 ‘거울에 비치는 꽃이나 물에 비치는 달처럼 눈에 보이지만 손에 쥘 수는 없는 것’, 혹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경화수월(鏡花水月)’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어린 시절 잃은 그는 일평생 미를 추구하며 아름다운 여자를 성스러운 대상으로 그린 걸로 유명하다.

히로시게26)가 칠한 쪽빛물감을 녹인 듯한 세토 내해는 조수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면서 군데군데, 뱀 껍질 같은 무늬를 만들고 있었고, 그 사이로 시아쿠 제도의 섬들이 바둑돌처럼 늘어서 있다.

섬에는 주재소30)가 하나밖에 없다. 순경은 한명이다. 그것도 그 순경은 육상과 해상의 양쪽 경찰을 담당하며 모터보트를 한 대 갖고 있다. 어구(漁區)의 감시, 어기(漁期)의 주의, 어부의 감찰조사 등, 섬의 순경은 육상보다도 오히려 해상 쪽 일이 많은 것이다. 옥문도의 순경은 시미즈(淸水) 씨라고 하는데, 마흔 대여섯 정도로 늘 다박수염을 기르고 있는 호인이다. 코스케와는 이미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덴구(天狗):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깊은 산에 살며 신통력이 있다는, 얼굴이 붉고 코가 높은 상상의 괴물.

주재소(駐在所): 경찰서의 하부조직으로 순경이 주재하며 담당구역 내 경비나 사무를 처리하는 곳.

"긴다이치 씨. 저는 말이죠, 지금 묘한 예감이 들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 웃을 지도 모르지만 예감이라는 거죠. 뭔가 곧 일어나진 않을까, 이 옥문도에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저 우카이란 남자 말인데요. 댁은 지금, 그 녀석을 미소년이라고 말씀하셨죠. 역시 아름다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소년이라는 건 좀 그렇군요. 저래 뵈도 스물 셋인가 넷인가 하는 놈이니까요. 물론 이 섬사람은 아닙니다. 다지마(但馬)란 지방에서 왔답니다. 아버지는 소학교 교장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거짓말인지 진짠지는 모르죠. 어쨌든 다지마란 지방 사람이 어째서 이런 섬에 왔냐면 전쟁 때문이에요. 전쟁이 그 남자를 여기까지 데려온 겁니다."

가모가와(加茂川)의 물과 야마호시(山法師)와 주사위의 눈: 헤이안 시대에 원정(院政)을 펼친 시라카와 상황(白川上皇)이 한 말, ‘가모가와의 물과 야마호시(히에이산의 승병)와 주사위의 눈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에서 인용한 것.

아무튼 이런 외딴 섬에서는 옛날부터 항상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해적의 내습이다. 그러므로 어떤 섬에 가도 만일의 경우에 즉시 집결할 수 있도록 부락은 조촐하게 한군데에 등을 맞대고 모이는 것이다. 옥문도도 그에 벗어나지 않는다.

기소 님하고 / 등댄 채 몸을 돌린 / 서늘함일까(木曾殿と背中あわせの寒さかな): 유겐(又玄)의 하이쿠. 기소 님(木曾殿)이란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 즉 헤이안 말기의 무장이었던 미야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를 가리키는 것.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는 요시나카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런 그가 죽은 다음 생전의 소원대로 요시나카 옆에 묘를 나란히 하고 묻히게 된 것을 표현한 시구임.

불허훈주입산문: 절의 정문에 냄새가 강한 야채나 술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운판(雲板): 선종에서 재당이나 부엌 앞에 달아두고 공양시간을 알리던 도구. 지금은 끼니때 사용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범종·목어·법고와 더불어 아침·저녁 예불을 드릴 때 중생교화를 상징하는 의식 용구로, 또는 허공에 날아다니는 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고 있다.

선당: 참선하는 집.

조동종(曹洞宗): 일본 선종의 하나로 임제종·황벽종과 함께 선종 3파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겐(道元, 1200-1253)이 개창하였으며, 에이사이의 임제선이 갖는 타협성과 불순성에 대한 반발로 참선만을 위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삼봉행(三奉行, 산부교): 에도 막부의 세 봉행(무가 시대의 직명). 삼봉행(산부교)란, 사원과 신사를 담당하는 지샤부교(寺社奉行), 각 대도시의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마치부교(町奉行), 지방관을 통제하는 간조부교(勘定奉行)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님은 괜찮습니다. 스님은 선주 이상입니다. 선주가 몇이든 어떤 다툼이 있든 섬의 신앙을 좌지우지하는 스님은 선주 위에 군림하고 있어요. 촌장이나 코안 씨의 목이 붙어 있는 것도 스님의 신용을 얻고 있기 때문이죠. 스님은 섬에서는 전지전능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앞으로 기헤에 씨나 시오 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제대로 뭘 할 수 없을 겁니다."

ちがいじゃが仕方がない
키치가이쟈가시카타가나이.
‘미치광이지만 도리가 없군.’

거북 등딱지보다 나이 값: 사람의 오랜 경험과 지혜는 가치가 있다는 뜻.

하이쿠(俳句): 5·7·5조 17음의 단시. 계절을 상징하는 키고(季語)와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 어느 한 단락에서 끊어줌으로써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줄 때 사용하는 키레지(切字)가 필수조건이다. 일본은 중세부터 조렌카(長連歌)라는 장시(長詩)가 있었는데, 15세기 말부터 정통 렌카(連歌)와 서민생활을 주제로 한 하이카이렌카(俳諧連歌)로 갈리었고, 에도 시대에 와서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같은 명인이 나와 크게 유행하였다. 바쇼는 렌카의 제1구, 즉 홋쿠를 중요시하였으며, 에도 중기 이후에 홋쿠의 비중은 더 커졌다. 메이지 시대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렌카의 문예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 홋쿠만을 독립시켜 하이쿠(俳句)라 명명하였는데 이것이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의 원문에는 3장 제목이 홋쿠 병풍으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홋쿠와 하이쿠는 위에 설명한 맥락에서 흡사한 의미를 지니므로 하이쿠 병풍이라고 번역했다.

하이카이(俳諧): 하이쿠, 렌쿠 등의 해학적인 시문을 통칭하는 말.

소쇼(宗匠)두건과 짓토쿠(十德): 소쇼 두건은 정수리가 평평한 원통형 두건으로 연가를 읊거나 다도를 가르치던 스승, 즉 소쇼(宗匠)들이 즐겨 썼다. 짓토쿠는 학자, 의사, 화가 등이 입던 낙낙한 옛 의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렌쿠(連句): 렌카(連歌)란 일본 고전시가의 한 양식으로 두 사람이 단가의 윗구와 아랫구를 번갈아 읊는 걸 말한다. 렌쿠란 하이카이렌카(俳諧連歌)를 가리키는 말로, 제1구인 홋쿠가 독립되어 하이쿠가 된 메이지 시대이래, 하이쿠 혹은 보통 렌카와 구분하기 위하여 쓰인 명칭이다. 5·7·5의 장구(長句)와 7·7의 단구(短句)를 일정규칙에 따라 교차시켜 읊는다.

"뭐야, 바쇼(芭蕉)57)인가."

지하에 묻힌 바쇼 옹에게는 죄스러운 일이지만, 그 때 코스케의 말투는 몹시 불손했다.

잔인하도다 투구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여

한집 옆방에 유녀도 잠든 모습 싸리 꽃과 달

바쇼(芭蕉):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를 말함. 주된 기행문·일기로 《노자라시기행(野紀行)》 《오이노고부미》 《사라시나기행(更科紀行)》 《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 《사가일기(嵯峨日記)》 등이 있다. 바쇼의 문학은 여정(餘情)을 중시한 중세적인 상징미를 근세적인 서민성 속에 살린 것으로, 하이쿠의 예술성을 높인 공적이 매우 크다. 그는 스스로 오키나, 즉 옹(翁)이라 칭하여 경험을 쌓아 완숙해졌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아뇨. 도망치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도망쳐봐야 소용없지요. 하늘 그물이 성기다 해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63)지 않습니까. 아하하하."

하늘그물이 성기다 해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天網かいかい疎にして漏らさず): 악인은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뜻

"전 모릅니다. 왜 그런 무서운 의심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만사가 이 화딱지 나는 옥문도 탓입니다. 저, 긴다이치 씨. 언젠가도 말했던 것처럼 이 섬 주민들은 모두 상식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기묘한 구석을 갖고 있어요. 조개껍질처럼 견고한 갑옷 안에 본토 사람 따위는 생각도 못할 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예요. 거기다 저 전쟁이 있었지요. 모두 크든 작든 미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미쳤는지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무서운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 잡았을 리 없지 않습니까."

‘밤이 새도록 태풍을 들었구나 뒤쪽 산에서’

한 치 벌레에도 다섯 푼의 혼이 있는 법: 아무리 작고 약한 자라도 그만한 의지는 있어 업신여기지 못한다는 뜻.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정말이지 그 때 사나에의 태도나 행동거지에서는 전사한 일족을 맞이하는 사무라이의 기개가 엿보였다. 바야흐로 그녀는 가냘픈 손으로 몰락하는 고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약장수 똘마니처럼 일동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고는 다시 주변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뭘 생각했는지 무턱대고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이른바 밑 빠진 독이란 것이다. 마시지 않으면 마시지 않는 걸로 그치지만, 한번 술맛을 알게 되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또 한 잔, 또 한 잔, 이제 반잔 그런 식으로 거듭되고 마침내 다시 한 병이 되고 반병이 되어, 끝내는 완전히 인사불성으로 잠들어버린다.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마셨다는 자각조차 없는 코안 씨인 것이었다.

망아지가 날뛰면 꽃이 진다.
고양이가 춤추면 방울이 울린다.

그들이 아까부터 듣고 있던 방울소리는 고양이가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수색하러간 일행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집 옆방에 유녀도 잠든 모습 싸리 꽃과 달

바다는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을이 살짝 깊어진 세토 내해는 푸른 옥구슬을 풀어 흘려보낸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스님이 그 때 중얼거리신 말은, 정말은 ‘미치광이지만 도리가 없군’, ‘정신이 어긋나 있지만 도리가 없군’이 아니었던 겁니다. ‘키가치갓테이루가시카타가나이(季がちがっているが仕方がない). ‘키’가 어긋나 있으나 도리가 없군, 이라는 거였죠. 그걸 저는 멋대로 ‘키치가이(ちがい)’라고 요약해서, 그것을 광인(狂人)이라고 해석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때 스님이 말씀하신 ‘키’는 정신을 말하는 ‘키()’가 아니라 계절(季節, きせつ, 키세츠)의 ‘키’였던 겁니다. 즉 그 때 스님은 ‘季(키)’, 즉 ‘계절이 어긋나 있으나 도리가 없군’이라고 탄식하셨던 거지요. 그럼 왜 그런 탄식을 하셨냐 하면 스님이 하나코의 피와 살로 비유한 시구, ‘휘파람새의 몸을 거꾸로 하여 첫 울음일까’란 시구는 명백히 봄의 시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을이거든요. 그래서 스님은 ‘계절이 어긋나 있으나(이것도 돌아가신 카에몬 씨의 뜻이라면) 도리가 없군’이라고 탄식하셨던 겁니다. 결국 스님이 어긋나 있다고 한탄하신 ‘키’란 것은 사실은 하이쿠의 계어(季語)92)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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