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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묵고 싼 💩 말쑥하다. 매꼼허다
감자묵고 똥을 싸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나뭇짐을 아주 아담하고 예쁘게 잘 꾸리면 사람들은
 "하따, 그 나뭇짐 꼭 감자 묵고 똥 싼 것처럼 매꼼허구만잉" 했고 또 오랜만에 말쑥하게 양복을 입고 집을나서는 사람을 보고도 그 말을 했다. 하다못해 머리만 깨끗이 빗고나서도 사람들은 "감자 묵고 똥 싼 것 같다고 했다.
감자만 먹고 똥을 싸면 여간 매끈한 게 아니었다. 똥도 잘 나왔다.
그래서 산길에서 똥을 보면 감자 먹고 싼 똥인지 고구마를 먹고 싼똥인지 금방 알았다. 감자나 고구마가 그만큼 사람들의 주식을 대행하던 시절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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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바람이란다.

"나랑 사니라고 애 많이 썼구만,
사는 일이 금방이네.
사는 것이 바람 같은 것이여.
사는 일이 풀잎에 이는 바람이구만."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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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새마을운동과 농촌 공동체의 붕괴, 사회적인 격랑 속에 다친 것은 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역사의 격랑에휩쓸려 떠내려가면서도 농토를 지키려 했고, 인간을, 사람을 생각했다.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야야,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살다보면 벼라별 일들이 다 있다" "죽은 사람도 있다" "남의 일이아니다" "싸워야 큰다" 라는 말들은 우리 어머니의 역사다. 
오랜 세월 전해내려오면서 다듬어진 사람에 대한 외경감의 경구들이다. 마을 공동체 정신의 지침이었다.
혹독한 시집살이의 기억을 간직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가 되었다. 그 아프고 쓰린 시집살이를 통해 며느리들은 자기가 시어머니가되면 며느리에게 잘해야겠다는 각오도 한 번쯤 했으련만, 그러나 시집살이는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숙명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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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돌아가신-내 나이 열살 83년.-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우리 4형제를 위해 뼈가 삭도록 일을 하셨다.

태산 같은 걱정을 앞세우고 강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머님이었다. 어머님께서 강길을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어머님도 울고 계셨다. 어머님은 마른 풀잎처럼 서서 울고 있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주었다.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다. 가시덤불 같은 손으로 내 손에 2천원을 쥐여주시며 어머님은 눈물 바람으로 "용택아, 어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헌다. 꼭 편지허고, 알았쟈" 하셨다. 나는 돌아서서 뛰었다. 혁, 바람이 내 가슴을 막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얼마를 뛰다가 길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님께서 그때까지 마른풀들이 쓰러지는 강바람 속에 마른 풀잎처럼 바람을 타며 서 있었다.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마른 풀잎 같은 손길이었다. 어머님 뒤 마을에 살구꽃이 찬바람 속에 하얗게 피고 있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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