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쳤다. 앞산 나무들이 촉촉하게 젖어 어제와는 다른 색이다. 산속에 참나무 강가 느티나무 산에 산벚나무, 실가지들이 보라색이다. 아름다운 색깔을 찾았다. 산이 봄으로가며 고와진다. 생생해진다. 전체적인 움직임 감지된다. 걸었다. - P64
봄은 문득이 없다 비 오다 그쳤다. 아내가 친구들하고 강 건너 밭에서 일렬횡대로 쭈그려 앉아나물을 캔다. 강을 건너갈 때 아내는 오늘은 쑥과 담배나물과머위만 뜯어 오겠다고 했다. 담배나물은 개망초를 말한다. 아내와 친구들은 나물을 다캤는지, 산복사나무 아래 삼각대형으로 앉아 나물을 다듬더니, 일어나 일렬횡대로 한가하게 강을 건너온다. - P69
강을 건너며 잎이 피어나는 느티나무를 자꾸 바라보았다. 느티나무 죽은 가지가 자꾸 헛보였다. 칠십 년이 넘게 바라보았던 나뭇가지다. 이 느티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라 한다. 마을의 뒤를 지켜주는 나무다. 당산제를 지냈었다. 사라진 나뭇가지 흔적은 없다. - P75
노을 뜬 하늘가에서 새들이 날았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다고 그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책이 많아졌으니 조금 더 살고 싶네,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다. - P76
언젠가부터 하루에 적어도 오십 페이지 정도 책을 읽겠다고혼자 다짐하고 그 다짐의 결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힘을 다하지는 않는다. 나는 평생 인생살이의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았다. 그러니까, 혼자 좋아서 하는소리라는 말이다. - P76
마을을 나올 때 왼쪽 밭에는 종길 아재가 밭을 매고 있다. 땅에 바짝 엎드려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일에 열중이어서 말을 걸지 않았다. - P79
같이 밥을 먹으며 제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시간에 부모 형제의 근황을 죄다 들었다. 우리네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런저런 삶들을 꾸리고 가꾸고 때로 아프게 버리며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아갈 그들 형제자매 얼굴이 차례 - P82
그런데 오늘 아침 제자가 가지고 온 상추와 파와 시금치 모양새가 바로 찬을 만들 수 있도록 잘 다듬어진 걸로 보면, 아마 아들 먹으라고 어머니가 다듬어 준 것을 우리 집에 가져왔다는 것이, 아내의 조심스러운 짐작이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 P83
시는 인간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 먼 여정이다. - P96
종길 아재가 새는 알아듣지 못할 욕을 하다 - P98
나비들은 바람 불고 이슬 깨는 풀잎 끝을 붙잡고 풀잎도 휘어지지 않는 몸무게로 풀잎을 따르며 쉰다. - P103
"그러나 이렇게 끊임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 설레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양미술사》의마지막 문장이다. 멋지다. ‘설레는 기쁨이란 말이, 멋지다. - P112
집 앞에서 종길 아재를 만났다. 벌써 논에 다녀오신다. 고라니와 멧돼지를 막기 위해 논가에 둘러놓은 전선의 전기를 차단하고 오는 길이란다. 생각보다 비가 적게 왔네요, 내가 그랬더니 말보다 적게 왔고만 하신다. 응답이 정확하다. - P115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비설거지를 하다 앞산에 바람 불어 참나무의 잎이 하얗게 뒤집히면 어머니는 사흘 후 비가 온다 하였다. - P117
그 옛날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바람을 통해서 알았다. 바람결에 숨은 온도와 습도, 구름이 흩어지고 모이는 속도와 색상, 새들의 울음과 나는 모양, 물소리의 고조, 풀잎들의침묵을 느끼고 사람들은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17
그리하여 곧 비가 닥칠 아침이면 어머니는 ‘빗낯‘이 든다며장독을 덮고 일 나가고, 아버지는 물꼬를 단속하러 논으로 나가셨다. 그런 날에는 꼭 비가 왔다. 농부들은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집안일과 논밭일을 정돈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설거지‘라 일컬었다. - P117
뉴턴은 고향 마을로 돌아가 빛의 색깔 원리, 미적분의 이론, 우리가 말하는 만유인력인 중력의 범칙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상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새벽의 어둠이 조금씩 서서히 환한 빛으로 밝아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나는 그 묵묵한 시간을 ‘아침산책‘이라고 부른다. - P122
마을 사람들과 밥을 먹다 아침에 강 건너며 종길 아재를 만났다. 오늘 회관에서 밥을먹는다고 했다. - P124
오래전 무더운 여름이면 마을 남자들은 강변에서 잠을 잤다. 어른들은 느티나무 아래서 이슬을 피해 자고, 젊은이들은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 벼락바위 위에서 잤다. 그곳은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이다. 넓적한 바위가 방구들처럼 널리깔려 있다. 곳곳이 잠자리였다. 따로 잠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 P127
강길에서 종길 아재를 만났다. 내가바람이 달라졌지요? 했더니 가을인 개벼 벼도 팬당께 하신다. 가을 강변에는 어느새풀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침 햇볕도 어느새 달라져 있다. 쇠락이란 말이 생각났다. 놀랍다. 나뭇잎 색깔들이 달라졌다멈추었다. 다 자랐다. 다 컸다. 퇴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 P145
강 같은 나의 세월이 그렇게 흐른다. 흘러간다. 흘러갔다. 미련을 둘 것도, 아쉬운 것도, 다시 꺼내 생각할 것도 없다. - P145
농사에서 나온 말은, 시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자연과학이다. 이 밭은, 아직도 강 건너 앞산에 유일하게 곡식을 키우는 밭으로 남아 있다. 그밭은 내게 아름다운 서정시다. - P149
오늘 아침에 내 몸은 가을 속에 있구나. 어떤 새도 울지 않았다. 이 계절에 나는 작은 강마을에 살고, 그러니 나는 이 작은 마을을 생각한다. - P161
가을 정리 새벽이 소란하여 창문을 열었더니, 빗소리였다. 소낙비다. 세차다. 가을비 소리는 내리는 비의 양이나 굵기보다 내리는소리가 크다. 가을바람 소리는 크다. 문을 열어 놓고 앉아 책을 읽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날이 어둡다. - P183
그러더니, 별안간 눈이 뚝 그칩니다. 앞산에 오래 묵은 길이 희미하게 드러났습니다. 죽은 길인줄만 알았는데, 눈이 옛길을 찾아 살려 놓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갑자기 나무꾼들의 행렬이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 P197
허리가 아파서 문재야, 나 엎드려 있거든? 지금 힘들어. 조금있다 전화하자. 그렇게 침을 맞고 약을 사서 들고 오는데, 전화기에 ‘김훈‘ 이라는 이름이 떴다. 왜? 아파서 죽게 생겼냐? 내가그래, 문재가 전화해서 김용택이 죽게 생겨서 병원에 있다고 하던데? 잉? 아냐. 허리 아파 침 맞고 있다고 했는데. 그놈 새끼, 또 뻥친 거구나. 아프지 마. 조금 후에 문재의 전화가 왔다. 내가 용택이 형 죽겠다고 했더니, 훈이 형이 막 엉엉 울었어. 형, 아프지 마! 웃음이 나왔지만, 내내 웃을 수만은 없었다. - P199
아침마다 만났던 종길 아재, 재섭 아버지, 점순 어머니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말 걸어오고 말 걸 사람 없이홀로 강을 건너야 한다. - P207
아버지는 눈보라만 치지 날은 그리 춥지 않다며 밥상 앞에앉으셨다. 식구들 모두 밥 먹는 아버지 둘레에 모여 앉았다. 더운밥에서는 김이 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의 호롱불빛이 흔들리며, 아버지를 중심으로 우리도 환하게 흔들렸다. - P210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를 가서도 살아남는다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다. 마을이 학교였다. 마을에 있는 나무와 강과 하늘과 비와 바람과 해와 별과 달이 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님이었다. - P216
배우면 써먹었다. 배우면 써먹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농사일에 숙달되어 누가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일을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아 여기저기 응용하고 해석하여 두루두루 유용하게 썼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평생 공부했다. 그들은 예술 활동을 따로하지 않았다. 삶이 예술이었다. - P216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고 했다. 싸워야 큰다고 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배웠다. 그들은 같이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면서,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고막말 안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했다. - P216
그림이든 시든 정치든 뭐든, 최소한 ‘말은 되어야‘한다. 말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고뇌와 인간에 대한 슬픔과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정한 목소리가 되어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P230
지용출의 나무는 오랜 세월, 내게 늘 새로운 말을 걸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게 해 주는 예술의 궁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 사랑이란, 당신이 내뱉을 새로운 말의 탄생을 기다리는 일이다. 화가는 그 말을 받아서 생명이 다 빠져나간 마른나무판자에 새겨 생환시키고, 시인은 그 말을 받아서 흰 종이위에 적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세계관의 확대는 새로운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다. 그리고 그리움은 현실이라는 엄연함을 재현하는 끝없는 도상이다. - P230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시작이든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다. - P236
수저를 거꾸로 잡은 손으로 멀리 있는 김치를 엄지와 검지로몸을 구부려 집어 온다. 몸을 구부릴 때 어머니들의 복사뼈 굳은살을 보는 날이면흑단같이 단단하고 물렁물렁한 삶의 무한한 신뢰 앞에나는 눈물짓는다. 슬퍼서가 아니다. 하루의 경제적 경영 범위를 따른몸의 고졸한 움직임들이그토록 아름다워서다. - P251
강가를 오래 돌아다닌 것 같다. 밥 먹자는 소리가 들린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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