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붓을 쥐고 이 무서운 이야기의 첫 장을 쓰려고 하기에 이르러, 나는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다. 이 무서운 사건을 활자화해 발표하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도 음침한 사건이고 저주와 증오에 가득 차 있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줄 만한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본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 중에 뒷맛이 개운한 작품은 적은 게 당연할지 모르겠으나, 이 사건은 너무나 그 점이 극단적이어서 우려되는 것이다. 그 점은 긴다이치 코스케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소재를 내게 제공하기까지 그는 적잖이 주저하고 망설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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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아파서 문재야, 나 엎드려 있거든? 
지금 힘들어. 조금있다 전화하자.
그렇게 침을 맞고 약을 사서 들고 오는데, 
전화기에 ‘김훈‘이라는 이름이 떴다.
왜?
아파서 죽게 생겼냐?
내가그래, 문재가 전화해서 김용택이 
죽게 생겨 병원에 있다고 하던데?
잉?
아냐. 허리 아파 침 맞고 있다고 했는데.
그놈 새끼, 또 뻥친 거구나. 아프지 마.
조금 후에 문재의 전화가 왔다.
내가 용택이 형 죽겠다고 했더니, 
훈이 형이 막 엉엉 울었어. 
형, 아프지 마!
웃음이 나왔지만, 내내 웃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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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쳤다.
앞산 나무들이 촉촉하게 젖어 어제와는 다른 색이다. 산속에 참나무 강가 느티나무 산에 산벚나무, 실가지들이 보라색이다.
아름다운 색깔을 찾았다. 산이 봄으로가며 고와진다. 생생해진다. 전체적인 움직임 감지된다. 걸었다. - P64

봄은 문득이 없다
비 오다 그쳤다.
아내가 친구들하고 강 건너 밭에서 일렬횡대로 쭈그려 앉아나물을 캔다. 강을 건너갈 때 아내는 오늘은 쑥과 담배나물과머위만 뜯어 오겠다고 했다.
담배나물은 개망초를 말한다. 아내와 친구들은 나물을 다캤는지, 산복사나무 아래 삼각대형으로 앉아 나물을 다듬더니,
일어나 일렬횡대로 한가하게 강을 건너온다. - P69

강을 건너며 잎이 피어나는 느티나무를 자꾸 바라보았다.
느티나무 죽은 가지가 자꾸 헛보였다. 칠십 년이 넘게 바라보았던 나뭇가지다. 이 느티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라 한다. 마을의 뒤를 지켜주는 나무다. 당산제를 지냈었다.
사라진 나뭇가지 흔적은 없다. - P75

노을 뜬 하늘가에서 새들이 날았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다고 그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책이 많아졌으니 조금 더 살고 싶네,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다. - P76

언젠가부터 하루에 적어도 오십 페이지 정도 책을 읽겠다고혼자 다짐하고 그 다짐의 결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힘을 다하지는 않는다. 나는 평생 인생살이의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았다. 그러니까, 혼자 좋아서 하는소리라는 말이다. - P76

마을을 나올 때 왼쪽 밭에는 종길 아재가 밭을 매고 있다.
땅에 바짝 엎드려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일에 열중이어서 말을 걸지 않았다. - P79

같이 밥을 먹으며 제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시간에 부모 형제의 근황을 죄다 들었다. 우리네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런저런 삶들을 꾸리고 가꾸고 때로 아프게 버리며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아갈 그들 형제자매 얼굴이 차례 - P82

그런데 오늘 아침 제자가 가지고 온 상추와 파와 시금치 모양새가 바로 찬을 만들 수 있도록 잘 다듬어진 걸로 보면, 아마 아들 먹으라고 어머니가 다듬어 준 것을 우리 집에 가져왔다는 것이, 아내의 조심스러운 짐작이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 P83

시는 인간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 먼 여정이다. - P96

종길 아재가
새는 알아듣지 못할 욕을 하다 - P98

나비들은 바람 불고 이슬 깨는 풀잎 끝을 붙잡고 풀잎도 휘어지지 않는 몸무게로 풀잎을 따르며 쉰다. - P103

"그러나 이렇게 끊임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 설레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양미술사》의마지막 문장이다. 멋지다. ‘설레는 기쁨이란 말이, 멋지다. - P112

집 앞에서 종길 아재를 만났다. 벌써 논에 다녀오신다. 고라니와 멧돼지를 막기 위해 논가에 둘러놓은 전선의 전기를 차단하고 오는 길이란다. 생각보다 비가 적게 왔네요, 내가 그랬더니 말보다 적게 왔고만 하신다. 응답이 정확하다. - P115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비설거지를 하다
앞산에 바람 불어 참나무의 잎이 하얗게 뒤집히면 어머니는 사흘 후 비가 온다 하였다. - P117

그 옛날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바람을 통해서 알았다. 바람결에 숨은 온도와 습도, 구름이 흩어지고 모이는 속도와 색상, 새들의 울음과 나는 모양, 물소리의 고조, 풀잎들의침묵을 느끼고 사람들은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17

그리하여 곧 비가 닥칠 아침이면 어머니는 ‘빗낯‘이 든다며장독을 덮고 일 나가고, 아버지는 물꼬를 단속하러 논으로 나가셨다. 그런 날에는 꼭 비가 왔다. 농부들은 비의 얼굴을 미리 보고 집안일과 논밭일을 정돈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설거지‘라 일컬었다. - P117

뉴턴은 고향 마을로 돌아가 빛의 색깔 원리, 미적분의 이론,
우리가 말하는 만유인력인 중력의 범칙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상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새벽의 어둠이 조금씩 서서히 환한 빛으로 밝아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나는 그 묵묵한 시간을 ‘아침산책‘이라고 부른다. - P122

마을 사람들과 밥을 먹다
아침에 강 건너며 종길 아재를 만났다. 오늘 회관에서 밥을먹는다고 했다. - P124

오래전 무더운 여름이면 마을 남자들은 강변에서 잠을 잤다.
어른들은 느티나무 아래서 이슬을 피해 자고, 젊은이들은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 벼락바위 위에서 잤다. 그곳은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이다. 넓적한 바위가 방구들처럼 널리깔려 있다. 곳곳이 잠자리였다. 따로 잠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 P127

강길에서 종길 아재를 만났다. 내가바람이 달라졌지요? 했더니 가을인 개벼 벼도 팬당께 하신다. 가을 강변에는 어느새풀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침 햇볕도 어느새 달라져 있다.
쇠락이란 말이 생각났다. 놀랍다. 나뭇잎 색깔들이 달라졌다멈추었다. 다 자랐다. 다 컸다. 퇴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 P145

강 같은 나의 세월이 그렇게 흐른다. 흘러간다. 흘러갔다.
미련을 둘 것도, 아쉬운 것도, 다시 꺼내 생각할 것도 없다. - P145

농사에서 나온 말은, 시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자연과학이다.
이 밭은, 아직도 강 건너 앞산에 유일하게 곡식을 키우는 밭으로 남아 있다.
그밭은 내게 아름다운 서정시다. - P149

오늘 아침에 내 몸은 가을 속에 있구나.
어떤 새도 울지 않았다. 이 계절에 나는 작은 강마을에 살고, 그러니 나는 이 작은 마을을 생각한다. - P161

가을 정리
새벽이 소란하여 창문을 열었더니, 빗소리였다. 소낙비다.
세차다. 가을비 소리는 내리는 비의 양이나 굵기보다 내리는소리가 크다. 가을바람 소리는 크다. 문을 열어 놓고 앉아 책을 읽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날이 어둡다. - P183

그러더니, 별안간 눈이 뚝 그칩니다.
앞산에 오래 묵은 길이 희미하게 드러났습니다. 죽은 길인줄만 알았는데, 눈이 옛길을 찾아 살려 놓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갑자기 나무꾼들의 행렬이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 P197

허리가 아파서 문재야, 나 엎드려 있거든? 지금 힘들어. 조금있다 전화하자.
그렇게 침을 맞고 약을 사서 들고 오는데, 전화기에 ‘김훈‘
이라는 이름이 떴다.
왜?
아파서 죽게 생겼냐?
내가그래, 문재가 전화해서 김용택이 죽게 생겨서 병원에 있다고 하던데?
잉? 아냐. 허리 아파 침 맞고 있다고 했는데.
그놈 새끼, 또 뻥친 거구나. 아프지 마.
조금 후에 문재의 전화가 왔다.
내가 용택이 형 죽겠다고 했더니, 훈이 형이 막 엉엉 울었어. 형, 아프지 마!
웃음이 나왔지만, 내내 웃을 수만은 없었다. - P199

아침마다 만났던 종길 아재, 재섭 아버지, 점순 어머니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말 걸어오고 말 걸 사람 없이홀로 강을 건너야 한다. - P207

아버지는 눈보라만 치지 날은 그리 춥지 않다며 밥상 앞에앉으셨다. 식구들 모두 밥 먹는 아버지 둘레에 모여 앉았다.
더운밥에서는 김이 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의 호롱불빛이 흔들리며, 아버지를 중심으로 우리도 환하게 흔들렸다. - P210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를 가서도 살아남는다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다. 마을이 학교였다. 마을에 있는 나무와 강과 하늘과 비와 바람과 해와 별과 달이 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님이었다. - P216

배우면 써먹었다. 배우면 써먹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농사일에 숙달되어 누가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일을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아 여기저기 응용하고 해석하여 두루두루 유용하게 썼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평생 공부했다. 그들은 예술 활동을 따로하지 않았다. 삶이 예술이었다. - P216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고 했다. 싸워야 큰다고 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배웠다. 그들은 같이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면서,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고막말 안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했다. - P216

그림이든 시든 정치든 뭐든, 최소한 ‘말은 되어야‘한다. 말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고뇌와 인간에 대한 슬픔과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정한 목소리가 되어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P230

지용출의 나무는 오랜 세월, 내게 늘 새로운 말을 걸고 새로운 세상을 그리게 해 주는 예술의 궁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 사랑이란, 당신이 내뱉을 새로운 말의 탄생을 기다리는 일이다. 화가는 그 말을 받아서 생명이 다 빠져나간 마른나무판자에 새겨 생환시키고, 시인은 그 말을 받아서 흰 종이위에 적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세계관의 확대는 새로운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다.
그리고 그리움은 현실이라는 엄연함을 재현하는 끝없는 도상이다. - P230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시작이든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다. - P236

수저를 거꾸로 잡은 손으로 멀리 있는 김치를 엄지와 검지로몸을 구부려 집어 온다.
몸을 구부릴 때 어머니들의 복사뼈 굳은살을 보는 날이면흑단같이 단단하고 물렁물렁한 삶의 무한한 신뢰 앞에나는 눈물짓는다.
슬퍼서가 아니다.
하루의 경제적 경영 범위를 따른몸의 고졸한 움직임들이그토록 아름다워서다. - P251

강가를 오래 돌아다닌 것 같다.
밥 먹자는 소리가 들린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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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생기 넘치는 청년단 일동에게 호안 씨 같은 늙은이의 생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호안 씨의 시체를 거기 던졌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습지도라지.
즉 이 부근에서는 촌장님 죽이기라 불리는 식물로 실제 사람 잡아먹는 늪 주변에도 이곳저곳 군생(群生)하고 있다. 그럼 역시 호안 씨는 촌장님 죽이기의 맹독으로 독살당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린 씨를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이 편지는 1년의 세월을 거친 오늘날 홀연히 나타나더니 더없이 기괴한 수수께끼의 요기를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소란은 점차 커져갔고 백중맞이 춤이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수색했지만 그날 밤 결국 야스코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이었는데, 술잔 집 딸 유라 야스코는 그 공놀이 노래처럼 잔으로 어림잡아 깔때기로 마셨던 것이다.

그것은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사건이었으나 또 한편으로 묘하게 아름답고 고혹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찍이 세토 내해의 외딴 섬, 옥문도란 섬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세 아가씨가 살해당했고 시체는 저마다 기묘한 구도를 그리고 있었다. 옥문도의 경우에는 그 구도에 악마 같은 의미가 숨겨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어떨까.

"옥문도 사건이 생각났어요. 하하."

"인간은 누구나 야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돼요. 게다가 지금은 글래머니 뭐니 해도 저런 거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란 걸 모르는지. 지금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사업에 투자하면 좋지 않겠냐고 입에 신물이 날 정도로 말했건만 망할 자식이…… 그 기둥서방이 죄다 구슬려 놓은 게 아닌지."

쇼와 7년 가을, 호안 씨 댁 별채에서 살해당한 것은 생각했던 대로 거북탕 차남 겐지로였을까. 아니, 저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피해자는 겐지로가 아니고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사기꾼 온다 이쿠조가 아닐까. 그리고 진짜 범인은 아오이케 겐지로가 아닐까. 즉 겐지로가 사기꾼을 죽이고 사기꾼이 모아 둔 돈을 가로채 달아난 건 아닐까. 거북탕 일족은 그걸 알면서 겐지로를 감싸기 위해 저 시체를 겐지로라고 주장했던 건 아닐까.

이것이 이십여 년 동안 이소카와 경부를 줄곧 괴롭히던 의혹이었다. 혹시 이 의혹이 들어맞는다면 언젠가 겐지로는 이 마을에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이소카와 경부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인과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 이거야말로 더없이 이상한 이야기, 이상이 전편의 끝이더라…….

경부의 당연한 충고에 즉시 형사 한 사람이 뛰어나갔는데 내친 김에 그 결과를 여기에 적어 보면, 다츠조가 가지고 돌아간 잔과 깔때기는 그대로 부엌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훗날 이 일이 범인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던 것이다.

버섯 된장국에 은어 소금구이, 고사리 유부 조림에 날계란 하나. 대단히 소박한 식단이었지만 맛있는 된장국에 만족스럽게 고픈 배를 달랠 수 있었다.

모처럼 조모의 공놀이 노래를 듣고 있던 며느리 에이코와 도시오의 누이동생도 일제히 몸을 일으켜 이오코의 노래는 끊기고 말았는데, 훗날 이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이었다. 이 때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오코 어르신의 공놀이 노래를 끝까지 다 들었다면…….

냉이(ぺんぺん草)가 두세 포기: 집이나 토지 따위가 황폐해짐을 일컫는 표현이다.

푹 숙면을 취한 덕분일까, 둘 다 몸이 가볍다. 몸이 가벼우니 입도 가벼워서 밉살스런 말을 서로 주고받는다. 티격태격 자전거를 같이 타고 나가는 두 사람을 뒤에서 바라보는 다치바나 경부보의 얼굴은 심히 불쾌해 보였다.

"아니오. 나는 그런 말은 안 합니다. 지금의 공놀이 노래가 이번 사건에 관계가 있을지 없을지 그 판단을 하는 것은 긴다이치 선생님이나 이소카와 경부님의 몫이겠지요. 나는 그저 옛날 이 마을에 이런 공놀이 노래가 있었다는 걸 댁네에게 알려 드렸을 뿐……."

가와나카지마(川中島)의 노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사이조 산은 안개가 깊고 치쿠마 강은 파도가 격하네(西山は霧ふかし千曲の川は波あらし) / 멀리 들려오는 소리는 소용돌이치는 물소리인가 무사의 고함인가(はるかに聞こゆる物音は逆まく水かつわものか) / 떠오르는 아침 해 빛나는 시간에 깃발이 빙글빙글빙글(のぼる朝日に旗の手のきらめく暇にくるくるくる)

그걸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도 그 정도 살면 상당히 악해지지 않을까요. 악해졌다기보다 선하고 악한 걸 초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촌장님과 자신의 손녀딸, 두 사람이 공놀이 노래대로 살해당했어요. 어쩌면 이번엔 저울 집 딸 차례가 아닐까. 좋아,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힘든 일을 겪었으니 저울 집도 똑같이 아픈 꼴을 당해봐라……. 그 정도의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결국 저울 집 딸도 공놀이 노래대로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 범인이 노리는 게 있다면 그건 이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고……."

"그렇다면 당신이 아츠코 씨를 단념하게 하기 위해 야스코 씨의 혈통에 대해…… 혹은 그 의혹을 제기했고, 한편 아츠코 씨에게는 아츠코 씨대로 후미코 씨의 혈통을 얘기하고 당신을 포기하게끔 하지 않았나 하는 거군요."

"그렇지요, 그래요. 그대로예요. 촌장님이란 사람은 한번 삐뚤어지면 손쓸 수 없는 분이지만 근본은 친절하고 남을 돌봐 주길 좋아하는 분이지요. 뭐라 해도 저와 아츠코 씨가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마을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기에 그걸 걱정해서 그런 비상수단을 쓰신 게 아닐까, 지금은 그리 생각합니다."

벤케이(弁慶):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중.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심복으로 활약했으며 호걸로 이름을 떨쳤다. 힘이 센 사람, 장사를 가리켜 흔히 벤케이라고 한다.

"유카리 양은, 저 분은…… 아무것도 모르겠죠. 세 사람 모두 배가 다른 남매란 걸……."

7리 결계(七里結界): 밀교에서 마장(魔障)의 침입을 막기 위해 7리 사방에 경계를 두르는 일로, 비유적으로는 너무 싫은 사람을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걸 말하기도 한다.

보내는 불: 원문에는 오쿠리비(送り火)라고 되어 있음. 백중이 시작하는 날인 13일에는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의 싹 등을 태워 무카에비(迎え火)를 피우고, 끝나는 날인 16일에는 역시 조상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하여 오쿠리비를 피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거군요. 온다 이쿠조란 인물이 뒤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온다는 세 부인에게 각각 임신을 시켰다. 게다가 정처인 리카도 역시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사건 이듬해 네 부인이 일제히 아이를 낳았지만 그게 죄다 여자 아이였던 것에 이번 사건의 원인이 있다는 얘기로군요."

"오빠, 감히 저는 오빠라 부르겠습니다. 오빠도 아시다시피 전 철들 무렵부터 사기꾼에 살인범의 딸로 굉장히 기가 죽어지냈어요. 그 동안 몇 번이나 죽어 버릴까 생각했는지 모를 정돕니다. 하지만 전 죽지 않았어요. 이를 악물고 세상의 박해를 견뎠습니다. 오빠, 여자인 저도 참고 견뎠으니 설마 어엿한 남자인 오빠가 견디지 못할 리 없어요. 강해지세요. 언제까지나 강하게 살아주세요."

"실례했습니다, 경부님. 당신은 리카를 사랑하고 계셨군요."

앗! 하고 외치며 내가 주춤한 사이 긴다이치 코스케 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에 올라타 있었다.

쇼와 30년 9월 21일
이소카와 츠네지로(磯川常次郞)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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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30년 8월 10일 땅거미 질 무렵, 스스로 린이라고 칭한 노파는 그야말로 도리마(通り魔)15)처럼 센닌토게를 넘어 이 귀수촌에 온 것이다. 피조차 얼어붙을법한 공포와 전율 그리고 해답을 찾기 힘든 수많은 수수께끼를 저 불길한 보자기에 감싼 채.

하지만 그날 저녁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런 건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15) 도리마(通り魔): 바람처럼 사람을 지나가며 죽이는 마물. 바람에 칼날과 눈코입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짐. 전혀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도리마 사건이라 일컫는다.

오늘 밤은 호안 씨와 호안 씨의 다섯 번째 부인이 오랜만에 기쁨을 나누고 있을 텐데, 이건 정말 너무 날씨가 안 좋으니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나…….

백중맞이 춤: 오봉, 즉 백중 기간에는 여름 축제가 성대히 진행되는데, 이때 추는 춤을 봉오도리(盆踊り), 즉 백중맞이 춤이라고 한다. 야구라(やぐら)라 하여 광장 중앙에 큰북을 울릴 수 있는 높이 2미터 정도의 건물을 짓고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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