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침내 삼수탑(三つ首塔)이 멀찍이 내다보이는 황혼고개에 다다랐다.

말 그대로 그것은 황혼 무렵의, 게다가 흐린 날의 일이었다. 좁은 분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언덕 중턱에 엷은 쥐색 수풀과 숲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삼층탑을 바라보았을 때,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내게는 삼수탑이 꿈이나 환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아, 우리가 이 탑에 다다를 때까지 대관절 며칠이 걸렸던 것일까. 그리고 그동안 몇 사람의 피가 흘렀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피바다를 헤엄쳐서 겨우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니,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곳은 아직 종착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삼수탑은 단순히 환승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삼수탑의 발견을 계기로 무서운 사건은 다시금 계속되지 않을까.......

"혹시 아가씨는 삼수탑이란 이름을 들은 적 있습니까?"
"삼수탑이라고요? 어떤 글자를 쓰나요?"
"석 삼(三)에 머리 수(首), 그리고 탑이라고 씁니다."

그럼에도 도도로키 경부는 엄청나게 반가운 기색이었다.
"앗, 긴다이치 선생. 어떻게 여길......."

치자나무를 뜻하는 구치나시(梔)와 입을 열지 않는다는 뜻의 구치나시(口無し)는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그분이 꽤 훌륭한 탐정이라더구나. 한데 그분이 말하기를 시체 옆에 떨어져 있던 치자나무 꽃 말이다. 그건 너한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입을 막기 위한 암시가 아닐까 하시더구나. 치자나무는 열매가 익어도 입을 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아가씨는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더라만."

"선생님, 긴다이치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예, 저, 저, 기, 긴다이치 코스켑니다."
느닷없이 말을 걸자 긴다이치 코스케는 겁을 집어먹고 조금 더듬거리며 더벅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 무렵 나는 치명적인 공포로부터 겨우 해방되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공포...... 그것은 임신에 대한 공포였다.

그때 임신한 건 아닐까 하는 공포는 거무칙칙한 불길이 되어 나를 남김없이 불태우는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내 몸을 살폈다. 그때의 추잡스런 쾌락의 결과가 잉태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정신이 나갈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랬기 때문에 그 현상이 순조롭게 찾아왔을 때의 나의 기쁨이란! 나는 겨우 원래의 명랑함을 어느 정도 되찾고 백부님과시나코 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오토네, 도쿄 같은 혼잡한 도시에서라면 범인이 누구든 도리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행동할 수 있어. 실제 내가 그랬지. 하지만 일단 도쿄를 떠나 이런 촌구석에 와봐. 바로 남의 눈에 띄지.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사람, 알아차릴 인물이 있잖아."

콘크리트, 흙 등으로 만든 사격 진지. ‘점’이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 ‘tochka’에서 유래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구니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 마사코(政子)의 별칭. 남편의 사후 비구니의 몸으로 내정을 움직였다고 한다.

요전에는 스케타케가 빠졌다. 그리고 오늘은 스케토모와 사요코다. 사요코는 무서운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미쳐 버렸지만 언젠가 상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침 그 무렵 나스 병원 안쪽 수술대 위에 놓인 채 구스다 원장의 집도 아래 해부당하는 스케토모는 두 번 다시 이누가미 가문의 친족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소설은 세상에 나와 있지 않았다. 남편이 불능이라고 해서 부인이 따로 연인을 사귄다는 대담한 정신은 일본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이 손을 대지 않아도 처는 잠자코 참아야 하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었고 도덕이었다. 특히나 구식으로 자란 하루요도 그런 의식이 강했던 탓에 사헤와의 관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컸다.

옹이 동시에 세 측실을 두고 그녀들을 한 지붕 아래 살게 하는 불길한 생활을 한 것도 자신의 애정이 하루요 이외의 여자에게 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장인물

이누가미 가문
이누가미 사헤 _ 방직업계 재벌
마츠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장녀
스케키요 _ 마츠코의 외아들
다케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차녀
도라노스케 _ 다케코의 남편
스케타케 _ 다케코의 장남
사요코 _ 다케코의 차녀
우메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삼녀
고키치 _ 우메코의 남편
스케토모 _ 우메코의 외아들
아오누마 기쿠노 _ 이누가미 사헤의 애인
아오누마 시즈마 _ 이누가미 사헤와 기쿠노의 사생아

노노미야 가문
노노미야 다이니 _ 나스(那須) 시 신사(神社)의 신관, 이누가미 사헤의 은인
하루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처
노리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딸
다마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손녀

사루조 _ 다마요를 숭배하는 일꾼
야마다 산페이 _ 귀환병 차림의 정체불명 남자
후루다테 교조 _ 이누가미 가문의 고문 변호사
와카바야시 도요이치로 _ 후루다테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미야카와 고킨 _ 마츠코의 거문고 스승
오야마 다이스케 _ 현재 나스 신사의 신관
다치바나 _ 나스 시 경찰서장
긴다이치 코스케 _ 명탐정

이누가미 일족 | 요코미조 세이시

발단
제1장 절세의 미인
제2장 요키 · 고토 · 기쿠
제3장 흉보가 도착하다
제4장 버려진 배
제5장 상자 속
제6장 거문고 줄
제7장 아아, 잔인하도다
제8장 운명의 모자
제9장 무서운 우연
대단원

신슈(信州) 재계의 최고 우두머리, 이누가미 재벌의 창시자, 일본의 생사*왕이라 불리는 이누가미 사헤(犬神左兵衛)옹이 81세의 고령으로 신슈 나스(那須) 호반에서 영면한 것은 쇼와(昭和)** 2×년 2월의 일이었다.

책에 의하면, 어려서 고아가 된 사헤가 신슈 나스 호반으로 흘러온 것은 17세 때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모른다. 대체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그것조차 모른다. 우선 이누가미라는 묘한 성이 정말 있는 건지 어떤지조차 확실치 않다.

"나는 열일곱이 될 때까지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흘러 다녔다네. 그러다가 이쪽으로 흘러와 노노미야 어르신의 눈에 든 게 처음 운이 트이게 된 계기였지."

사헤 옹의 평생 변치 않던 감사의 마음과 다이니의 유족에 대한 성의 있는 보은은 분명 하나의 미담이었다. 하지만 세상사에는 엄연히 한도란 게 있다. 옹의 사후, 이누가미 일족에게 일어난 피투성이의 살인 사건은 모두 노노미야 일족에 대한 사헤 옹이 가진 보은의 마음이 너무 지나쳤던 탓이었다. 이걸 생각해보면, 아무리 선의로 시작한 일도 일처리를 잘못하면 너무나 큰 참사를 야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다이니는 그 색을 사랑했다. 두 사람은 당시 남색의 정교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가장 큰 증거는 사헤가 몸을 의탁하게 되고 나서 몇 년 후에 여신처럼 상냥한 하루요가 한때 친정으로 돌아가 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이니가 사헤만을 총애하고 처를 돌아보지 않았던 탓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헤가 방적 공장에 들어간 메이지(明治)* 20년 무렵은 이른바 일본 방적 공장의 요람기 같은 때였다. 사헤는 거기서 일하는 동안 방적 공장의 기강을 확립하고 생사를 매각하는 상법을 배우고는 바로 독립해서 자신의 공장을 갖게 되었는데, 거기 필요한 자본을 제공한 사람이 노노미야 다이니였다고 한다.

그들이 초조하고 걱정하는 데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사헤는 그의 딸들에 대해서 어쩐 일인지 털끝만큼도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사위들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르신의 일주기를 기해 발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누가미 가문의 사업 및 재산 관리는 일체 이누가미 봉공회에서 대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누가미 사헤 옹은 81년의 다사다난했던 일생을 마쳤던 것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순간이야말로 그 후에 일어난 이누가미 가문의 피투성이 사건의 발단이었던 것이다.

나이는 서른대여섯, 더벅머리에 풍채가 좋지 않은 작은 키의 인물로 구깃구깃한 모직 옷에 구깃구깃한 하카마(袴)*를 입은 차림새. 말할 때는 조금 더듬거리는 버릇이 있다. 숙박부에 기록된 이름은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였다.

우메코의 남편인 고키치의 눈매는 호되게 얻어터진 떠돌이 개의 눈매와 닮아 있었다.

아아, 이누가미 사헤 옹의 유언장은 처음부터 어떤 무서운 목적을 가지고 쓰인 것은 아닐까. 옹은 자신이 죽은 후 마츠코, 다케코, 우메코 세 사람의 피로 피를 씻는 갈등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일부러 저런 기괴한 유언장을 만든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장인물

이누가미 가문
이누가미 사헤 _ 방직업계 재벌
마츠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장녀
스케키요 _ 마츠코의 외아들
다케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차녀
도라노스케 _ 다케코의 남편
스케타케 _ 다케코의 장남
사요코 _ 다케코의 차녀
우메코 _ 이누가미 사헤의 삼녀
고키치 _ 우메코의 남편
스케토모 _ 우메코의 외아들
아오누마 기쿠노 _ 이누가미 사헤의 애인
아오누마 시즈마 _ 이누가미 사헤와 기쿠노의 사생아

노노미야 가문
노노미야 다이니 _ 나스(那須) 시 신사(神社)의 신관, 이누가미 사헤의 은인
하루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처
노리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딸
다마요 _ 노노미야 다이니의 손녀

사루조 _ 다마요를 숭배하는 일꾼
야마다 산페이 _ 귀환병 차림의 정체불명 남자
후루다테 교조 _ 이누가미 가문의 고문 변호사
와카바야시 도요이치로 _ 후루다테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미야카와 고킨 _ 마츠코의 거문고 스승
오야마 다이스케 _ 현재 나스 신사의 신관
다치바나 _ 나스 시 경찰서장
긴다이치 코스케 _ 명탐정

이누가미 일족 | 요코미조 세이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7-0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사세요.지나가다 들렸습니다.저도 일본 추리소설 자주 읽는데 특히 일본이름이 너무 복잡해서 읽는데 몰입이 잘 안되더군요.대장정님처럼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먼저 적어놓고 외운뒤 책을 읽는것도 좋은 방법일것 같네요^^
 

어쨌든 나는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청년이 가진, 경이롭다 싶을 정도의 통찰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듣자하니 그 시체는 우연히 거기서 파낸 게 아니라 긴다이치 씨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설령 거기 시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몰랐더라도 세 손가락의 남자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부로는 물론 기소되었다. 하지만 아직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중일 전쟁이 차츰 격렬해지자 법정에서 소집에 응했는데, 한커우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가련한 스즈코도 그 이듬해 죽었다. 그 소녀는 죽는 편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료스케는 작년 히로시마로 여행을 갔다가 원자폭탄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임종한 땅에서 그 아들이 같은 전쟁 때문에 목숨을 잃다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냐고 마을 노인들은 수군거렸다.

나는 문득 눈을 돌려 스즈코가 고양이를 묻었다는 저택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돌마늘이라고도 불리는 만주사화의 검붉은 꽃이 하나 가득 피어 있었다. 가련한 스즈코의 피를 칠한 것처럼…….

이렇게 대충 인물이 모인 시점에서 쇼와 21년(1946년) 여름 초엽, 갑자기 아무 예고 없이 혼이덴 다이스케가 돌아왔다. 그의 귀환은 물론 혼이덴 가문에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귀기와 전율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 구즈노하는 자못 슬픈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요, 눈만은 시원스레 뜨고 있었어요. 그런데 뜬 눈에 양쪽 다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았어요.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이지, 인간의 모습에서 눈동자란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그림을 보고 깨달았어요.

"너희들은 이 그림에 눈동자가 없단 얘길 하는 게로구나. 허나 그것이 바로 그림을 그린 화공의 깊은 뜻이겠지. 이 그림의 구즈노하는 진짜가 아니란다. 여우가 변한 구즈노하지. 이 그림을 그린 화공은 여우 불을 피운다든가 여우 꼬리를 그리지 않고 눈동자를 생략함으로써 이 구즈노하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 게지. 나는 항상 이 그림을 보면 그 부분에 감탄한단다."

‘의견무용, 명대안매(御意見無用, 命大安売り)*’라는 문신을 새겼다고 합니다.

* ‘입 닥쳐라. 목숨이 아까우면’이라는 뜻.

"산하고 아가씨는 훔치는 게 맛이야. 게다가 원래 이 산은 우리 거였는데 혼이덴 가문에 속아서 넘겨준 거라고."

일본 민담에 ‘여우가 시집갈 때 제등행렬을 한다.’고 해서 ‘줄지어 늘어선 도깨비불’을 가리키는 말임과 동시에 ‘여우가 시집가는 행렬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잠시 비를 내린다.’고 하여 ‘여우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미토 고몬(水戸黄門). 본명은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圀)로, 도쿠가와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우리나라의 어사 박문수 같은 인물로, 미토 번의 번주였으며 그가 내보이던 인로(印篭)는 마패 같은 역할을 하였다.

가부키 ‘게이세이아주마카가미(傾情吾妻鑑)’에서 시라이 곤파치(白井権八)가 반주이인 조베에(幡随院長兵衛)의 집에서 식객을 했다는 의미에서 더부살이, 식객을 의미한다.

매우 봉건적인 경제 구조에 기반한 명문가는 우리나라 대기업과 같은 존재이다. 가문 자체의 영달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본가와 분가가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다. 중앙 정치의 손길에서 떨어져 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 가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중앙과 고립되어 자신이 뿌리 내린 토양의 자양분을 끊임없이 빨아먹는 동시에 주변에 자신의 양분을 내줘야 하는 이 가문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이미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옮긴이 정명원

1974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 옮긴 책으로 《이누가미 일족》《옥문도》 《팔묘촌》 《악마의 공놀이 노래》 《삼수탑》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