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기분 이해해. 강요하지 않을게.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너의 다정한 마음씨를 믿어." 이렇게 말하는 슬픈 표정을 보자 캐서린의 자존심이 한순간 무너졌고 바로 대답이 나왔다. "오, 엘레노어, 꼭 편지할게."

틸니 양은 말을 꺼내기가 좀 거북했지만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캐서린이 집을 떠난 지 한참 지났기 때문에 돌아갈 비용을 감당할 돈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자상하게 비용을 보태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캐서린은 그때까지 돈 문제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갑을 뒤져 보고서야 친구의 친절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집에 도착할 돈 한 푼 없이 여기서 쫓겨나는 꼴이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만약 그랬을 때 그녀가 겪었을 곤란함에 황망해하며, 말없이 남은 시간을 기다렸다.

"여기 없는 그 친구와 나눈 다정한 기억"을 남겨 두고 떠난다고 알아듣게 말해 주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돌려서 말하고 나니 오히려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손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쏜살같이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 나가 마차에 올라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집에서 멀어져 갔다.

거기서 보낸 날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 중 하루였다. 바로 거기서, 바로 그날, 장군은 헨리와 그녀를 엮어서 말했고 말로도 표정으로도 분명히 그들의 결혼을 소망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렇다. 바로 열흘 전에 자신을 향한 특정한 배려에 우쭐했었다. 너무 대놓고 언급하는 바람에 민망하게 만들더니! 그러나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했다고 또는 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달라진 대접을 당하는 걸까?

재주 많은 작가라면 여주인공이 모험을 마치고 고향 마을로 돌아올 때 성공적으로 명성을 회복하고 백작 부인의 품위를 지키며 몇 대의 쌍두 사륜마차에 귀족 친척들을 줄줄이 태우고 세 명의 하녀를 따로 사륜마차에 태워 뒤따르게 하는 내용을 신나게 써 내려갈지도 모른다. 모든 결론이 다 그렇고, 작가는 그렇게 관대하게 영광을 베풀고 즐긴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퍽 다르다. 여주인공을 고독과 불명예에 빠져 집에 돌아오게 만들었으니까. 달콤하고 우쭐한 기분을 시시콜콜 묘사하긴 글렀다. 전세 마차를 탄 여주인공만으로도 산통 다 깨진 셈이니, 거기에 위엄이나 감정을 불어넣으려 해 봤자 소용없으리라.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부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신속하게 마을을 통과해 그녀를 후딱 마차에서 내려 주는 것으로 하자.

몰란드 부인이 말했다. "슬퍼하고 있을 거다. 다른 건 상관없다. 캐서린이 집에 무사히 왔으니 됐고, 우리야 틸니 장군 없이도 잘만 사니까."

"네가 그렇게 돌아올 줄 몰랐다만 차라리 잘됐다. 이제 다 지난 일이고, 손해 본 것도 없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니. 내 딸 캐서린, 원래 딱한 말썽꾸러기 아이였지. 이제는 마차도 그렇게 많이 타 보고 했으니까 철들었을 거다. 그런 일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렴."

"그렇다면 틸니 장군 때문에 속 끓이는 모양인데 너도 참 단순하구나. 십중팔구 다시 만날 거다. 그런 사소한 일로 속 끓이지 마라." 잠시 멈춘 다음 이렇게 말했다. "캐서린, 우리 집이 노생거만큼 으리으리하지 않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마라. 그렇다면 네 여행은 정말로 나빴던 것이란다. 사람은 어디에 머물든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특히나 집에 있을 때가 그렇다. 늘 사는 곳이잖니. 아침 식탁에서 노생거에서 먹었던 프랑스 빵 얘기를 들어 주긴 힘들구나."

그녀의 죄는 오로지 그녀가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부자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그녀의 재산을 오해하고 바쓰에서부터 그녀와 친분을 쌓으려 했고 노생거에서 친해지려고 했으며 그녀를 며느리로 맞을 계획이었다. 오해였음을 깨닫자 그녀에 대한 분노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혐오가 적절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오해를 부추긴 건 존 쏘오프였다. 장군은 어느 날 저녁 아들이 극장에서 몰란드 양에게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 우연히 쏘오프에게 그녀의 이름 이상으로 아는 게 있는지 물었다. 쏘오프는 틸니 장군 정도 되는 사람이 말을 걸어 주자 우쭐해져서 신나게 떠들었다. 그는 몰란드와 이자벨라가 오늘내일이면 약혼할 거라고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캐서린과 결혼하려고 꽤나 마음을 먹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캐서린의 집안을 자신의 허영과 탐욕이 부추긴 기대치보다도 더 부유하게 묘사해 버렸다.

말할 때 우쭐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배나 부풀려 얘기하고 몰란드 씨의 성직에 딸린 재산을 멋대로 배로 올려 생각하고 그의 개인 재산을 세 배나 부풀리고 부유한 숙모도 있다고 하고 자녀의 수는 절반으로 깎아 말하면서 그 집안 전체가 장군의 눈에 대단해 보이도록 떠벌렸다.

각별히 장군의 호기심의 대상이자 자신의 관심 대상인 캐서린에 대해서는 내세울 걸 더 만들었는데, 앨런 씨의 장원에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줄 만 파운드 내지는 만오천 파운드가 더해질 거라고 했다. 앨런 씨와 친밀하니까 한몫 물려받을 거라고 그는 진지하게 믿었다. 그녀를 거의 공인된 풀러튼의 상속녀라고 말해 버린 건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캐서린은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고 장군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헨리와 엘레노어는 그녀가 아버지의 각별한 관심을 받을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관심에 놀랐다. 최근에 그녀를 잡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고 거의 명령을 내리는 등, 몇 가지 힌트가 있어서 헨리는 아버지가 이 결합을 유리한 혼사로 여긴다고 확신했지만, 마지막으로 노생거에서 모든 설명을 들을 때까지는 아버지가 잘못된 계산에 빠져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보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장군은 처음에 정보를 알려 준 바로 그 사람, 쏘오프로부터 들었다.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쏘오프는 처음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감정에 싸여 있었는데, 캐서린의 청혼 거절에 기분이 나쁜 데다 최근 몰란드와 이자벨라를 화해시키려고 애썼다가 실패하자 더 기분이 나빠져서 그 둘이 영원히 갈라섰다고 믿고서 쓸모없어진 우정쯤이야 치워 버린 채 예전에 몰란드 집안에 대해 좋게 말했던 모든 것을 반대로 뒤집어 토해 놨다.

사실상 가난한 집안이다, 그렇게 바글바글한 집도 드물다, 최근에 특별히 더 알아보니 결코 동네에서 존경받는 집안이 아니다, 그들의 재산으로 누릴 수 없는 생활 수준에 욕심을 낸다, 부자와 결혼해서 한몫 보려 한다, 건방지고 허풍스럽고 꿍꿍이가 많은 족속이다, 등등.

그의 분노가 헨리를 경악하게 했지만 위협할 수 없었던 것은 헨리가 자신의 목적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이것이 몰란드 양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명예가 걸린 문제임을 직감했고, 그가 얻으려고 하는 그녀의 마음이 정말 자기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금껏 보여 줬던 암묵적인 동의를 비겁하게 철회하고 말도 안 되는 분노에 휩싸여 과거를 뒤집으려는 걸 보면서도 신의가 흔들리지 않았고 신의에서 나온 결단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캐서린을 쫓아낼 명분으로 만들어 낸 약속인 히어포드 방문에 동행하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버텼고, 그녀에게 청혼하려는 의도를 똑같이 끈질기게 선언했다. 장군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들은 험악하게 다투면서 헤어졌다. 헨리는 길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진정될 것 같은 어지러운 마음을 안고 즉시 우드스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풀러튼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른 결혼을 성사시킨 수단이 무엇인지 그것만 궁금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발생하여 장군의 마음을 움직였단 말인가? 여름에 장군의 딸이 재산이 많고 명망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그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인데, 장군은 가문의 영광에 엄청 기분이 좋아져서 엘레노어가 헨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만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고 허락해 버린 것이다.

『노생거 사원』이 ‘시대를 타는’ 소설이라면, 거기에 책의 존재가 빠질 수 없다. 이 시대는 책의 시대였다. 18세기에 인쇄 문화가 폭발함에 따라 문학과 비문학을 가로질러 다양한 종류의 읽을거리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책을 읽었고 그것에 대해 많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하나의 기계가 아니라 우리 손끝에 붙은 신체의 일부로까지 여길 수 있는 것처럼, 오스틴의 시대에는 책이 그런 위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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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가씨들이 속아 넘어가지. 그렇게 관심을 받아 본 적 없을 테니. 여자 마음은 갈대라잖아.

이런 얄팍한 수는 캐서린에게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첫 문장부터 변덕과 모순과 거짓으로 점철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자벨라가 부끄러웠고, 또 그런 친구를 사랑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애정 고백이 역겨운 만큼이나 변명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고, 뻔뻔하게 부탁까지 하다니.

"그렇다면 난 정말이지 그가 마음에 안 들어요. 결국 우리에겐 다행으로 끝났지만 그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요. 이자벨라가 산산조각 날 가슴이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셈이 되긴 했어요. 하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나를 바보로 여긴 게 아니면 이런 편지를 쓸 수 없어요. 그래도 이 편지 덕분에,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더 잘 알게 됐어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허영심 많은 바람둥이 아가씨의 사기가 이번엔 안 먹힌 거예요. 제임스나 나에게 요만큼의 애정도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애초에 만나지도 말았어야 했어요.

"프레드릭에게 처음부터 동기랄 게 있기나 했는지 모르겠어요. 쏘오프 양처럼 그도 허영이 가득한데,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가 더 영악한 부류라 그 허영에 자기가 넘어가진 않는다는 거예요. 그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데 그 원인은 찾아내서 뭘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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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의 꿈은 끝났다. 캐서린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최근 품었던 황당한 공상은 이미 일련의 실망을 겪어 왔지만 헨리의 간결한 이 한마디에 철저하게 깨졌다.

정말 지독하게 부끄러웠다. 정말 쓰라리게 울었다. 그녀 자신도 추락했고 헨리까지도 추락시켰다. 이제 와서 보니 거의 범죄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던 상상력인데,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는 그녀를 영원히 경멸할 것이다.

터무니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벌인 일을 계속 곱씹어 보니, 여차하면 놀라 자빠지겠다고 작정하고 덤벼든 상상력으로 하나하나의 소소한 정황마다 중요한 의미를 붙여 가며 결국 이 모든 망상을 혼자 만들어 냈고 아예 사원에 오기 전부터 그럴 작정으로 안달하면서 모든 것을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끌고 왔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분명해졌다.

노생거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바쓰를 떠나기 훨씬 이전부터 여기에 홀려서 엉뚱한 짓을 꾸며 왔는데, 이 모든 것이 거기서 미친 듯 빠져들었던 독서의 영향이지 싶었다.

그녀로서는 어떻게 생겼든 옻칠한 건 뭐든 꼴도 보기 싫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난 잘못을 때때로 환기하는 것이 고통스러울망정 쓸모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이, 당신 감정은 인간 본성에 참 충실해요. 그런 감정을 잘 연구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명색이 시골 마을 유지인데, 지나치게 무심하단 소리를 들을 거다. 몰란드 양, 조금만 시간과 관심을 바쳐서 될 일이라면 이웃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라는 게 내 원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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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우리가 살림이 평범하고 소박해서 즐거움이나 화려함을 선사할 수는 없어.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노생거 사원*에서 지내는 데 나쁘지 않도록 해 주지."

노생거 사원! 짜릿한 단어를 듣자 캐서린의 감정은 황홀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감사하고도 행복해서 침착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쭐한 초대를 받다니! 함께 지내 달라는 부탁을 이렇게 열렬하게! 모든 것이 영광스럽고 뿌듯했고, 현재의 모든 기쁨과 미래의 희망이 다 담긴 초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가겠다고 성심껏 대답했다. "바로 집에 물어보겠습니다"라고,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라고.

그런데 그게 이루어지려 한다. 집, 복도, 안채, 마당, 안뜰, 별채 같은 건 다 없을 수도 있지만, 노생거는 어쨌든 사원이었던 곳이고 바로 거기에 머물게 된 것이다. 길고 축축한 길, 좁은 방들과 버려진 예배당을 매일 가 볼 수 있고, 어떤 전해 오는 전설, 상처받고 불운하게 살다 간 수녀의 끔찍한 기억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지려 한다. 집, 복도, 안채, 마당, 안뜰, 별채 같은 건 다 없을 수도 있지만, 노생거는 어쨌든 사원이었던 곳이고 바로 거기에 머물게 된 것이다. 길고 축축한 길, 좁은 방들과 버려진 예배당을 매일 가 볼 수 있고, 어떤 전해 오는 전설, 상처받고 불운하게 살다 간 수녀의 끔찍한 기억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없었다.

"형이 쏘오프 양에게 다가가서 고통스러워요, 쏘오프 양이 그걸 받아 줘서 고통스러워요?"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몰란드 씨는 차이를 알걸요. 남자는 다른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흠모한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지 않아요.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여자 몫이죠."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원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군요."
"그럼요. 책에서 읽은 것처럼 멋지고 오래된 곳 아닌가요?"

"‘책에서 읽은 것’ 같은 집에서 나오는 모든 공포를 마주할 준비가 됐어요? 심장이 튼튼해요? 미끄러지는 벽장문과 양탄자를 견딜 수 있겠어요?"

"그럼요! 집에 사람이 많으니까 쉽게 놀라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이 집은 오랫동안 사람이 안 살거나 버려진 적이 없으니까 미리 알리지 않아도 아무 때나 돌아올 수 있는 곳이잖아요"

사원! 진짜로 사원에 와서 기뻤다! 그런데 방을 둘러보니 그걸 의식하게 하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구로 가득 차있었고 모두 현대적인 취향의 우아함이 넘쳤다. 엄청 널찍하고도 육중한 구식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을 줄 기대했던 벽난로는 겨우 럼포드*였는데, 멋진 대리석이긴 하나 평범한 석판으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 정교한 영국 도자기가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장군이 말하기를 고딕 창문을 굉장히 정성스럽게 관리한다고 해서 특히나 관심이 갔는데, 그녀가 상상했던 것에 못 미쳤다. 뾰족한 아치가 고딕 모양으로 보존된 건 분명했다. 심지어 창문 여닫이조차도 그랬다. 그런데 창틀이 하나같이 너무 크고 깨끗하고 밝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갈라진 틈이나 무거운 돌 재료, 색칠한 유리창과 먼지와 거미줄을 상상했는데, 현실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금으로 치장한 방 하나를 특별히 언급하다가 시계를 꺼내 보더니 깜짝 놀라며 5시 20분 전이라고 말했다! 마치 뿔뿔이 흩어지라는 신호가 내려진 듯했고, 캐서린은 틸니 양에게 다급하게 끌려가면서 노생거에서는 시간을 철저하게 엄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앨런 씨 집에서 훨씬 큰 방을 많이 봤겠지?"
"아뇨." 캐서린은 꾸밈없이 대답했다. "앨런 씨의 식당은 이 절반도 안 돼요." 평생 이렇게 큰 방은 처음이라고 했다. 장군은 기분이 좋아졌다. 큰 방이 있는데 굳이 안 쓸 건 없다 싶었다.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났고, 가끔 틸니 장군이 자리를 비우면 훨씬 밝고 명랑해졌다. 그가 옆에 있으면 자잘한 여행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기운이 빠지고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에도 대체적으로 행복감이 더 컸고 바쓰에 남은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불은 한순간 밝아지더니 그만 꺼져 버렸다. 호롱불은 더한 위협에도 안 꺼졌을 텐데. 몇 분 동안 캐서린은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 했다. 완전히 끝났다.

남아 있는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일 가망은 없었다. 칠흑 같은 무거운 어둠이 방을 채웠다. 갑자기 포효하는 거센 광풍이 순간의 공포를 더했다. 캐서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했다. 잠시 고요해지더니 물러가는 발소리와 먼 곳에서 문 닫는 소리가 그녀의 놀란 귀에 꽂혔다.

사람이라면 더는 못 버틸 상황이었다.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고 원고가 손에서 떨어졌고, 그녀는 침대를 겨우 찾아 다급하게 뛰어오른 다음 이불 밑으로 깊숙이 기어 들어감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날 밤 눈을 감고 잔다는 것은 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읽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이리저리 뒤척이느라고 이 세상의 모든 잠든 이들을 부러워했다.

아직도 몰아치는 폭풍우는 여러 가지 소리를 만들어 냈는데, 바람 소리보다도 더 무서운 소리가 가끔 겁에 질린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눈에 불을 켜고 한 면을 재빠르게 일별했다. 주요 내용에 집중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님 뭔가 잘못 본 것인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삐뚤빼뚤하고 현대적인 글씨체로 써 내려간 면직물 목록에 불과했다! 눈앞의 증거를 믿어야 한다면, 그건 세탁물 영수증일 따름이었다.

종이 한 장을 더 집어 들었지만 약간 다를 뿐 역시나 목록이었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다르지 않았다. 셔츠, 양말, 넥타이, 조끼의 목록이 차례로 나왔다. 동일한 글씨체로 쓰인 두 장을 더 보니 우편료, 머리 파우더, 구두끈, 승마 바지 세제 등 고만고만한 품목에 들어간 비용이 적혀 있었다.

다음 날에도 그 비밀스러운 방을 조사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일요일이었는데, 오전 기도와 오후 기도 사이 시간을 몽땅 장군을 따라 야외에서 걷거나 집에서 차가운 고기 음식*을 먹거나 하면서 보냈다.

아무리 캐서린의 호기심이 크다고 해도, 저녁 식사 후 6시와 7시 사이의 엷어지는 햇살에 기대거나 또는 그것보다 더 밝지만 협소하게 비추는 믿을 수 없는 촛불만 달랑 들고 그 방을 탐험할 용기는 없었다.

추모비를 세워 놨다는 이유만으로는 틸니 부인이 실제로 살아 있을 거라는 의심을 조금도 해소할 수 없었다. 부인의 유골이 잠들어 있는 가족묘로 내려가서 유골이 담겼다고 알려진 관을 들여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캐서린이 책에서 한두 번 읽은 것도 아니고, 밀랍으로 만든 형체가 등장하고 가짜로 꾸민 장례식을 벌이는 것쯤은 태연하게 해치웠을 것이다.

친구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흘깃 쳐다본 후 그에게 달려간 사이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피신한 다음 문을 잠그고는 다시는 내려갈 용기가 안 생길 거라 생각했다.

"나도 계획보다 일찍 돌아올 줄 몰랐어요. 세 시간 전에 상황을 보니 기쁘게도 더 머물 이유가 없는 것 같더군요. 근데 창백해 보입니다. 내가 계단을 너무 빠르게 올라오는 바람에 놀란 모양이네요. 이 계단이 하인 숙소와 연결되는 것도 몰랐을 것 같은데, 그렇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이웃의 자발적인 감시꾼들이 서로서로를 감시하고, 사통팔달로 뚫려 신문이 모든 것을 실어 나르는 이런 나라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런 짓이 저질러질 수 있단 말인가요?

친애하는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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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독자들 앞에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차례로 펼쳐졌다. 매일의 사건, 희망과 두려움, 상처와 즐거움을 각각 진술했고, 이제 일요일의 고통만 묘사하고 나면 일주일이 끝난다.

클리프튼 여행은 사라진 게 아니라 연기되었던 터라 이날 오후에 크레센트를 걷다가 다시 이 주제가 나왔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이자벨라와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안달 난 제임스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날씨만 좋으면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제 시간에 귀가할 수 있도록 굉장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쏘오프가 승인하자 캐서린에게만 알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틸니 양과 대화하느라고 잠시 떠나 있었다. 그사이에 계획이 섰고,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동의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이자벨라의 기대대로 즐겁게 동의해 주는 대신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미안하지만 갈 수 없다고 했다.

캐서린은 난감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강요하지 마, 이자벨라. 틸니 양과 약속했어. 난 못 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하며 몰아세웠다.

마땅히 가야 하고 당연히 가야 하고 거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틸니 양에게 가서 막 선약이 떠올랐으니까 산책을 화요일로 연기하자고 부탁하면 간단하잖아."

희생은 고귀하다. 그들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친구를 불쾌하게 만들고 오빠를 화나게 만들고 그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계획을 자신이 나서서 망쳤다는 괴로운 자책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편견이 없는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면 그녀의 행동에 대해 확신이 들고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서 다음 날 앨런 씨에게 자기 오빠와 쏘오프 남매가 짜다 만 여행 계획을 털어놓았다. 앨런 씨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따라가려고?" 그가 물었다.

캐서린은 그대로 따랐다. 이자벨라가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안타깝지만 앨런 씨가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 줘서 아주 안심했고 그의 충고 덕분에 잘못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기뻤다.

클리프튼에 가지 않고 빠져나온 것은 정말 탈출이었다. 그 자체로 너무나 잘못된 일을 벌이느라 틸니 남매와 했던 약속을 저버렸다면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법도에 어긋난 잘못을 저지르고 그럼으로써 또다시 법도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지를 뿐이라면 말이다.

"신사든 숙녀든, 좋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형편없이 지루한 사람일걸요. 난 래드클리프의 작품은 전부 읽었는데요, 대부분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유돌포의 비밀』을 읽기 시작하니까 손에서 못 놓겠더라고요. 이틀 걸려 다 읽은 기억이 나요. 읽는 내내 머리카락이 곤두섰어요."

"그 얘길 들어서 다행인 게 앞으로 『유돌포』를 좋아한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을래요. 여태까지 젊은 신사들은 진짜 소설을 엄청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엄청난 생각이네요. 그들이 정말로 소설을 싫어한다면, 그게 더 엄청난 일 같은데요. 남자도 여자처럼 소설 많이 읽어요. 난 수백 권 읽었어요. 줄리아와 루이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몽땅 섭렵했으니까 나와 겨룰 생각은 말아요. 우리가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이것 읽었어?’와 ‘저것 읽었어?’를 따지는 끝없는 싸움에 돌입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럴 때 적당히 뻐기는 미소를 지어 줘야 하는데 말이죠. 당신이 아끼는 에밀리가 이모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날 때 불쌍한 발란코트에게서 멀어지는 것만큼이나 내가 저만치 앞서가며 멀어질걸요. 내가 당신보다 몇 년이나 먼저 시작했는지 생각해 봐요. 당신이 집에서 자수 교본이나 가지고 노는 착한 아이였을 때 난 옥스퍼드에 공부하러 갔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훌륭한 역사가들 편에서 한마디 하자면, 그들이 더 높은 목적이 없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게 언짢을 수 있고 또 그들의 방법과 스타일을 볼 때 그들은 가장 진보한 이성을 가지고 성숙기를 보내고 있는 독자마저 완벽하게 고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가르친다’ 대신 ‘고문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신의 어법을 보니 두 단어가 동의어로 쓰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교육을 고문이라 했다고 날 놀리겠지만, 불쌍한 어린아이들이 처음 알파벳을 배우고 그다음 받아쓰기를 배우는 것을 나처럼 지켜봤다면, 오전 내내 그 아이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그리고 불쌍한 내 어머니가 오전이 끝날 때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지금껏 거의 매일 지켜본 적이 있다면, ‘고문하다’와 ‘가르치다’를 가끔 동의어로 쓰라고 허락할걸요."

높은 언덕의 꼭대기에서 본다고 좋은 풍경이 잡히는 게 아니었고, 푸른 하늘을 그린다고 좋은 날씨라고 말할 수 없다니 말이다. 무지가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이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부끄러움이다. 누구와 친하고 싶다면 항상 무식해야 한다. 학식이 쌓이면 다른 사람들의 허영을 부추겨 줄 수 없으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를 늘 피해야 한다. 특히 여성은 불행하게도 무엇이든 알고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그걸 감추어야 하는 법.

"내 사고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반가운 친구를 달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지게만 해 달라, 있고 싶은 곳에서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있게만 해 달라, 나머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이겁니다. 당신도 같은 말을 하니 진심으로 기쁘네요. 몰란드 양,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를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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