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한 마리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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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모모코의 [도미 한 마리]를 읽었다. 저자의 에세이 3부작 중에 세 번째 책이다. 마치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소리내서 웃은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야 당연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방귀 얘기가 들어가서이기도 했지만, 사쿠라 모모코처럼 실감나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거 같다. 암튼 더러운 얘기는 더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아마도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배설에 대해서는 똑같은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란 엉뚱한 가설을 세워본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만화가로도 유명하고 TV 프로그램의 각본까지 썼다고 하니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 저자의 에피소드가 담긴 에세이 시리즈가 무척이나 인기 있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와 이렇게 가까운 나라임에도 그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너무나 쉽게 이웃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정보를 알아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일본에 유학을 하던지, 살던지 했던 사람들만 아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30여년 전에 인기 있었던 작가의 책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저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읽으니 나와 동시대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진다. 저자 본인은 몰랐겠지만, ‘즐거운 후기 대담’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건데 너무나도 일을 많이 해서 몸을 혹사시켜 큰 병이 일찍 찾아온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에세이 시리즈에 단골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사쿠라 모모코의 가족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게 그려져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특히 저자가 17살 때까지 지독히 게으름을 피우며 엄마와의 갈등을 고백하는 내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엄마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철없는 아이같던 저자는 18살 때부터 갑자기 성실한 학생으로 변모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17년 동안 게으름을 부린 것은 그 후에 일하기 위한 힘을 축적한 것이다. 그러니 네타로의 다섯 배 이상 일을 해야 한다. 그의 다섯 배라면 엄청난 거다. 그냥 세 배 정도만 게으름을 부렸더라면 좋았을 걸.(118)”

걱정만 끼치는 언니에 대한 소회는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언니에 대한 뒤담화를 해도 되는 것인지 우려가 될 정도로 솔직하다. 그런데 내용은 물론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겠지만, 내용대로라면 언니는 민폐 캐릭터가 맞는 것 같다. ㅋㅋ 저자의 가족 중에 최고는 역시 아빠 히로시가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어설픈 캐릭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뭔가무능력하고 무색무취의 존재감은 바닥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야기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히로시에게 가장 큰 고민은 근처 맛있는 생선 가게가 휴일일 때 어디서 생선을 사는가, 하는 정도라고 한다.(208)” 우리가 이렇게 단순한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친구가 저희 집 복도에서 방귀를 뀌었는데, 제가 그것도 모르고 복도로 나간 거예요. 순간 친구가 ‘앗, 지금 복도에!’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너무나도 고약한 냄새에 저는 쓰러지고 말았죠. 쓰러지면서 저도 모르게 방귀를…. 제 방귀도 만만치 않아서 이건 방귀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복도가 조금 칙칙해진 느낌이었어요. 쓰러지면서 눈에 들어온 복도에 어린 빛까지 얼핏 보이더라고요.(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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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도배사 이야기 -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 에디션L 3
배윤슬 지음 / 궁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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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슬 님의 [청년 도배사 이야기]를 읽었다. ‘궁리’라는 이름의 출판사에서 연재하는 ‘Love My life’, 에디션L 시리즈 3번째 이야기이다. 책날개에 출판 이름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나와 있다. “배우고 익히는 데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모름지기 독서에 있다.” 요즘 출판계의 유행이 이렇게 연재 형식의 책을 내는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시리즈도 있고, ‘띵’ 시리즈도 있고, ‘like-it’ 시리즈도 있고, ‘일하는 사람’ 시리즈도 있다. 글을 전문적으로 써온 작가들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각자 살아온 직업과 정해진 주제에 대한 개성 있는 글들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 책은 우연히 뉴스를 통해 잠시 소개된 내용을 얼핏 살펴보고 나중에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학벌지상주의의 나라에서 명문대학을 나와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젊은 청년이 도배사를 한다고 하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 이유가 뭘까 정도의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인지 청년들 사이에서 스펙이라는 말이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하면 경력이나 자격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싶은데, 스펙은 단순히 경험을 쌓아 삶의 지평을 넓히려는 의도보다는 취업을 위한 하나의 배경정도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신입사원을 뽑는데 이런 저런 경험이나 자격이 전무한 사람보다는 그래도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이 더 경쟁력이 있게 비춰지다보니, 너도나도 스펙쌓기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가 학벌지상주의에 몰입해 있는것과 비례적으로 화이트칼라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이 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일에는 머리를 쓰는 일과 몸을 쓰는 일이 나누어져 있고, 자신의 성향과 재능에 따라서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우리사회는 몸을 쓰는 일을 미천하게 생각해왔기에 전국민이 대학을 나와 화이트칼라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책의 에피소드에 나왔듯이 저자가 속한 도배팀이 소갈집에 회식을 하러 갔을 때도 작업복을 입은 그들을 티나게 푸대접하며 불친절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형차를 몰고온 어떤 사람이 냉면 한 그릇 먹고 갔음에도 정중히 대했다는 내용은 우리가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답습해온 인간의 나약한 습성의 단면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Praxis와 Poiesis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에 대한 구분을 짓는다. 실제로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걸맞지 않지만 그저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일을 억지로 행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직업을 가식과 위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에 반해, 허름한 옷을 입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대체 뭐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을 갖고 일을 한다면 그가 선택한 직업은 진실한 것이며 그 직업을 선택한 이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을 더 이상 하찮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선택하고 행하는 직업은 날때부터 귀한 일과 천한 일이 구분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러한 차별에 익숙해진 순간부터 차별을 당하는 일이 아닌 차별을 할 수 있는 일을 맡기 위해 맹목적인 교육을 받아 왔다. 배윤슬 님의 글은 어쩌면 이렇게 오랜시간 답습해온 우리 인간사회의 나약한 단면을 보기 좋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예리한 칼로 도려내고 있는 시도가 아닌가 싶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일이 손에 익어 자연스럽게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까지 홀로 감내해야만 했을 인고의 시간이 있을텐데, 기꺼이 그러한 시간을 솔직담백하게 나눌 수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몸이 힘들고 피곤한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을 다잡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몸이 아프고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보다 마음이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니 말이다. 몸의 피로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익숙해지지만 거친 일터에서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적은 월급을 받아가며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주변에 보여주기 부끄러울 수 있다.(88)”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롭게 시작하는 것과 지지를 받으며 일하는 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이고 내 선택이지만 주변의 응원과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도배를 시작했고, 그 지지에 대한 믿음은 내가 도배를 하는 것에 있어 아주 큰 자원이 되었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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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집 -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아무튼 시리즈 44
김혜경 지음 / 제철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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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님의 [아무튼, 술집]을 읽었다. 부제는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이다. 아무튼 시리즈 44번째 책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외식 약속이 있어 식당에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응근 부아가 치밀어 오르며 어서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약속 시간을 정했던 카톡 대화방을 여는 순간 약속 시간이 1시간 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마이 갓!! 내 인생에 약속 시간을 착각해서 이렇게 일찍 나온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라는 허탈함과 더불어 남은 시간을 어정쩡하게 남들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 만은 없어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는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근처의 독립서점을 가보았다. 읽고 싶은 책은 이미 대부분 사놓은 터라 서점만 구경하고 오려고 했는데, [아무튼, 술집]이 눈에 띄었다. 책 분량도 무게도 남은 시간 동안 읽기에는 최적화된 책이라 생각하고 일행을 기다리며 술집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약속을 마치고 읽던 책들을 보느라, 다른 신간을 읽느라 젖혀 놓았던 책이 드디어 다시 나의 눈에 들어올 차례가 되었다. 

약속을 착각했던 덕분일까? 책의 부제도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들 치고 술집을 적게 다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모임은 식사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술자리 그리고 이어지는 2차 술자리는 새로운 맛집과 새로운 분위기 또는 익숙하고 특색있는 맛집과 술집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술집의 분위기와 왁자지껄함은 긴장된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풀어주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보다 오히려 학생 시절에 술집을 많이 다닌 것 같다. 당연히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대학생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매번 끌려다녔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술집을 따라가는 시간은 거의 군복무만큼이나 당연하고 해내야만 하는 거대한 숙제였다. 무슨 쌍팔년도(여기서 말하는 쌍팔년은 1988년이 아니라 1955년으로 당시에는 단기를 사용하던 시절로 단기 4288년이라 쌍팔년이라 불렀고 흔히 지금이 쌍팔년도 시절도 아니라고 하는 말은 한국전쟁 후 열악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의 시절도 아니었지만 술로 군기를 잡는 문화는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나는 거의 십여년 동안 그 시절의 마지막 희생양으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지금도 가끔 나이드신 신자들과 식사를 하다 내게 권한 술을 마다하면 한결같은 조언을 듣곤 한다. ‘이제 술 좀 배우셔야겠네요. 자꾸 마시면 늘어요. 제가 술 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잊고 있었던 술자리의 폭언과 추악한 기억들이 떠올라 갑자기 혈압이 오르며 불같은 화를 추스르느라 억지 웃음을 짓게 되다. 그분들이야 당연히 아무런 악의없이 어쩌면 진심으로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건넨 말일 수도 있음을 알기에 정말로 화를 낼수는 없다. 그래서 한때는 진짜 나도 술 좀 잘 마셔서 싸나이들의 세계를 평정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런 큰 야망을 가진다 한들 나는 영원히 술꾼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아무튼, 술집]은 재미있다. 저자가 소개한 술집을 다 가보고 싶다. 못 마시는 술이지만 맛이라도 한 모금 머금고 싶다. 망원동이 그리 핫하다는데 나도 망원동의 새벽길을 걸어보고 싶다. 쿠바의 럼주도, 영화 덕분에 더 유명해진 모히또의 몰디브도, 파인애플이 화살표로 꼿힌 피냐 콜라다도 마셔보고 싶다. [아무튼, 술집]을 읽고 났더니 코끝에 알콜향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만 같다. No, No 재팬이지만 올림픽 기간이니 조만간 하이볼이나 한 잔 하러 가야겠다. 

“기실 술자리에 대한 기억은 ‘우리 어제 좋았지’ 정도의 대략적인 느낌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취기가 무르익을수록 술자리는 지나친 동어 반복, 통제를 벗어난 감정 표출, 행위예술 수준의 보디랭귀지 등으로 범벅되니까. 그런 자리를 거듭해본 분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망각은 괜히 선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모두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적당히 흘려보내는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술자리, 그런 의식 있는 자리들의 집합소가 술집이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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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다섯 마리의 밤 -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채영신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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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신 작가의 [개 다섯 마리의 밤]을 읽었다.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이다. 역시나 문학상 수상작답게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어딘가 모를 깊숙한 곳에 남겨진 영혼의 상흔들이 들춰져 살아남기 위해 악한 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연결되어 잠시도 곁눈을 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큰 맥이 되는 주인공인 박세민은 알비노 환자인 초등학생으로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능력많은 아이지만,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새롭게 전학을 온 상태이다. 세민은 태권도장에서 권 사범을 만나 그가 알비노로 받은 상처를 위로받게 되고 권 사범인 요한에게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요한은 세민을 괴롭힌 친구들을 연쇄적으로 죽여 살인범으로 잡히게 된다. 요한은 세민과 마찬가지로 육손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었다. 


알비노라는 증후군은 일명 백색증이라고도 하며 선천성 색소결핍증을 말한다. 소설에서 안빈의 엄마가 잔인하게 말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알비노에 해당되는 흑인의 신체 일부를 갖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살아 있는 알비노 흑인의 팔과 다리를 사냥하는 이들이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세상에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어떻게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것인지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안빈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세빈과 세빈 엄마인 혜정에게 몹쓸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그런데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자식 밖에 모르는 안빈 엄마의 속사정에 그려질 때는 그녀의 잔인한 말과 행동이 오히려 더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안빈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자기 밖에 모르는 언니가 무용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머니가 밤새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자 어머니를 돕는 헌신적인 작은 딸로 고생을 한다. 자신은 어머니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동지라고 생각하며 어머니는 분명 자신을 특별한 딸로 생각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그녀에게 대학 등록금도 대주지 못하겠다는 어머니에게 불평을 하자 어머니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한테 그러라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 안에서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215)"


바람끼가 다분한 남편과는 애초에 소원한 관계가 되어버렸고 안빈만은 자신과 같은 삶의 전처를 밟아서는 안된다는 다짐에 안빈 엄마는 안빈보다 월등히 공부를 잘하는 세빈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세빈과 안빈 및 학교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학예회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으로 연극을 하기로 결정하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간다. 세빈은 뛰어난 글짓기 실력으로 초등학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연극 각색을 만들어내고 안빈과 안빈 엄마의 질투심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에 반해 세빈의 엄마 박혜정은 세빈이 거짓말을 해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티비와 라디오 소리에 파묻힌채 술에 취해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삶을 보여준다. 혜정이 이렇게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병에 걸린 언니의 병원비를 위해 어머니가 새아버지의 방에 자신을 들여보냈던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혜정이 일기에 남긴 내용을 안빈 엄마가 보게 되고, 안빈 엄마는 세빈과 혜정을 망가뜨리기 위해 세빈이 근친상간으로 태어나 알비노가 되었다는 폭언을 내뱉고 만다. 


이야기의 중간에 김장미라는 또 다른 등장인물이 요한에게 전하는 편지와 같은 고백이 삽입된다. 김장미는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요한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요한과 부모의 이야기는 실제 우리나라에서 발생된 1993년에서 94년까지 연쇄살인에 인육까지 먹은 것으로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던 지존파의 내용을 연결시킨다. 소설에서는 의리파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백화점에서 부유한 고객 명단을 빼내 그들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실제로 지존파 범인들은 그들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살해한 반면 소설의 의리파는 그 부자들을 납치해 의자놀이로 한 명씩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요한의 부모는 자신들이 의자에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아들이 죽게 되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그로 인해 에스더와 요한의 부모는 이단 종교에 빠져 그들이 모두 구원된다는 휴거설을 믿으며 성별자를 찾아다니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세빈이 각색한 동물농장이 연극으로 구현되고 세빈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는 일기를 미리 써 놓는다. 세빈의 갑작스러운 애드립 대사로 무대에서 바보처럼 행동한 안빈은 광분하여 세빈을 옥상에 데리고 올라고 맥가이버 칼로 그를 위협하지만 세빈은 마치 그들을 비웃듯 연극 속의 주인공이었던 복서가 되어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된다. 이후 세빈 엄마 박혜정은 자신의 아들이 정신이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집단 괴롭힘 때문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빈 엄마와 그녀이 남편을 제물로 삼는다. 안빈 엄마는 혜정의 시나리오에 그대로 걸려들게 되고 김장미가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각자 상처를 지고 살아온 이들이 남겨진 삶을 견뎌내기 위해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고 이 소설을 썼다. '잔인함은 약한 자들에게서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자가 많다.'(273)"


"아주아주 오래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추운 밤에 개를 끌어안고 잤대. 조금 추운 날엔 한 마리, 좀 더 추우면 두 마리, 세 마리.... 엄청 추운 밤을 그 사람들은 '개 다섯 마리으 밤'이라고 불렀대.(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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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통조림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사쿠라 모모코의 [복숭아 통조림]을 읽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원숭이의 의자]와 함께 출간된 에세이 3부작 중의 첫 번째 책이다. 역시나 엉뚱하면서도 재기 발랄한 저자의 스펙타클한 일상이 적잖은 웃음을 선사해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저자의 인터뷰 내용이 첨부되는데 에세이 내용에서는 볼 수 없는 더욱 솔직한 저자의 고백이 더해져 사쿠라 모모코란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조금은 상상이 되고 더 알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나 ‘마루코는 아홉살’이라는 만화가 유명해져서 시즈오카현 시미즈에서 채소 가게를 하던 부모님 집 앞에 관광 버스로 사람들이 몰려와 저자의 어머니를 당황케 한다던지, 아버지 히로시의 이름을 부른다는 이야기는 꽤나 당혹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유명해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부채를 감당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지 않나 싶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집중할 때는 심지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고백하는데, 아마도 그런 생활 태도로 꽤나 많은 잔소리를 들으며 살았겠지만 외부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을 굳건히 지켜나갔기에 아마도 유명한 만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해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급우들의 비웃음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한 게 좋은 거라고, 남들보다 아주 월등하지는 못해도 적당한 선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가는 것이 좋은 거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면 독불장군처럼 보이는 독특한 행동들은 너무나도 쉽게 비판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살아오면서 그런 특출난 일탈의 일상을 살아온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무색무취의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는 것 같다. 최근 방송되고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에서 익준과 송화가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다음에 뭘 먹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송화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다음에 먹을 음식을 나열하자, 익준은 송화를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막 영감처럼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냐고 감탄한다. ‘뭐 먹으러 갈까?,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라는 질문은 내가 싫어하는 질문 중의 하나이다. 그냥 누가 결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도 분명 좋아하고 먹고 싶은 게 명확히 있을텐데 왜 이렇게 우유부단한 것일까란 답답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극중 송화처럼 자신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모습이라면 꽤나 매력적일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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