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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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었다. 밀레니엄을 지나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난 제니가 회고하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아주 오래전 고1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친구 S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국영수 과목을 잘해야했다. 배점이 워낙에 높은데다가 단시간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등급을 매기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과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1때 만난 그 친구는 꽤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당시에 주변의 모든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유일하게 사복인 학교였기에) 입성이 좋았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메이커가 눈에 띄는 상하의를 반듯하게 다려입고 체격도 건장하고 비교적 핸섬한 편이라 여러모로 주목을 받곤 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방과후 자율학습 시간에 원하는 등수가 잘 나오지 않아 내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부러울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도 지금의 성적으로는 인서울 대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는지, 어느날 미국에 유학을 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넌지시 내게 건넸다. 나는 '설마, 말도 안되' 라는 심정으로 '얘가 성적이 드럽게 안 오르니까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라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헛된 꿈꾸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좀 더 나은 성적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몇 달 후에 S가 진지하게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1학기를 마치고 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심각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울쩍해졌지만 미국 유학의 꿈에 부푼 친구 앞에서 그런 서운함과 아쉬움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S는 더 이상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았고 몇 달 동안이었지만 짬짬이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가까워진 S와의 공유된 마음이 휑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지나고 S는 정말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S는 한국과 비슷한 미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간 후 정성스럽게 공들인 몇 장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편지의 내용은 미국에서는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헬로나 굿모닝 같은 인사를 하지 않고, "Hey, What's up?"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건넨다는 인사말에 대한 설명이었다. '짜식 잘난 척하기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놈이'라는 혼자만의 코웃음을 치며 나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S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국제 우편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알렸지만, 매번 새로운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을 전하는 S와는 달리 나는 너무나도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해줄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없어서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점점 빠듯해지는 학업 일정이라는 표면적인 핑계들로 연락이 끊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제니는 내 친구 S보다 10년이나 늦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도 칭챙총이라는 대명사로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난무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보니, S도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영어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잘 견뎌낸 것일까, 혹시나 제니와 한나처럼 기막힌 푸대접의 억겹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제니가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반추하는 회고록의 형태를 띤 성장소설이지만, 십대 소녀들의 친구를 사귀고 무시당하지 않고 주류가 되고자 하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의 풋풋한 이야기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제니와 한나가 만난 미국의 백인 주류의 학생들이 보여준 역겨운 행태들은 인간 본성의 추악한 면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약한 자를 따돌리며 비열한 만족감을 얻는데 집중하는가? 사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모국어가 달라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고 피부색 또한 달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배려가 원만히 형성되지 않는 나이 때의 학생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차별과 배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배경으로만 생겨나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똑같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같은 말을 하고 경제적 상황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든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종교의 신심활동 단체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들고 나면 대놓고 따돌리며 무시하지는 않고 때론 다행스럽게도 좀 더 성숙한 누군가가 배제된 이를 감싸며 공동체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나의 유약함을 제니가 비난과 질책의 억척스러움으로 극복해나가는 이민자들의 연대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제니의 한나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로 이어지는 반성의 회고록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주류에서 벗어나 밑바닥을 치며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가장 적대시하며 모멸감을 준 이들과 동일한 모습으로의 변화를 시도하는 비겁함을 지적한다. 제니는 한나의 무능력함을 한탄하고 무시하면서도 한나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니는 한나를 괴롭히던 새라와 노라와 같은 학교의 주류를 이루는 친구들의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제니는 한나를 보호하며 마음으로부터 친구가 되고, 좋은 집안의 자녀로 풍족하게 자란 제니의 선망이 된 아이들은 폐쇄된 캠핑장에서 마약과 성행위를 즐기는 그들만의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니는 생일을 맞이하여 한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가 영원히 후회로 남게 될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제니와 한나가 미국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당한 따돌림과 폭력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자신의 경험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제니와 한나의 미국 학교 적응기를 읽으며 이건 누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상으로서는 감히 그려볼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거나 도와줄 이가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가장 큰 상처와 모멸감을 끊임없이 던진다면 과연 그 지옥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학교 폭력과 따돌림이 너무나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라 그렇게 큰 상처로 아파하는 모든 아이들을 위힌 기도가 절실해진다.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꼭 다른 일들이 일어난대. 되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다 이유가 있고, 그게 또 다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 

부스러기라는 게 그냥 영향을 뜻하는 거야?

응, 근데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거.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거. 

아까 비가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비에 다 젖었지? 그건 잘 보이잖아. 딱 봐도 비를 맞아서 젖은 거라고 설명이 되잖아. 

근데 만약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떤 사람이 쓸려가 죽었어. 그 사람의 연인은 그때 큰 충격을 받아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비가 오며 슬퍼져. 심지어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는데도. 그러면 그 사람이 슬픈 건 비가 많이 온 어떤 날의 부스러기가 되는 거야.(154-155)"


"한나는 언젠가 먼 미래의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내가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일 것이다. 그 애는 그때쯤 나를 갖추는 여러 부분의 기원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제삼의 눈일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제야 사람들이 어떻게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수없이 쌓인 슬픔의 부스러기 위에서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이 미래의 문을 연다.(338)"


#김서해 #여름은고작계절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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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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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었다.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전 작품이 학생 교과서에 실릴만큼 뛰어난 가독성과 글쓰기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 소설집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만큼 단편 하나 하나의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안녕에 대한 기원은 단지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닌 문학 작품이라는 예술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확신을 갖게 만들어준다. 


사실 소설집을 다 읽을 때까지도 7편이 모두 '돈과 이웃'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평론에 나온 내용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단편의 소재와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것처럼 내용이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이유는 바로 '돈과 이웃'이라는 유사한 문제에 얽힌 이야기가 펼쳐졌기 때문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겉으로 드러나게 돈을 밝히는 것은 속물처럼 비춰졌기에 마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거나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애써 돈에 대한 욕망을 감추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돈 자랑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SNS의 범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중시켜 모바일 인터넷 세상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의문의 1패를 당한 사회적 루저가 된 듯한 좌절감을 안겨주곤 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찌나 구질구질해 보이던지 갑자기 짜증과 분노가 밀려와 무심코 내뱉은 말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대인관계까지 어그러지고, 그러한 상황을 자초한 자신을 경멸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너무 비약적인 성격으로 해석한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황당무계한 설정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세상사 지금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유사한 고통과 어려움 없이 지나간 시대가 단 한 순간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고통과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의 갈등과 한계를 어떻게 한 꺼풀 벗겨낼 것인지에 대한 접근법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세상은 내적 법정의 최고의 심판자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법과 규율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얄미워 죽을 만큼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어떤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감정적 답답함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인을 응징하고 선인이 보상을 받는 전형적인 상선벌악의 스토리가 아님에도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 소설의 정황으로 보아 등장인물들의 사정이 별로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도, 소설의 시작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달리 뭔가 힘있게 살아갈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극중 인물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을 마주하며 표출되는 감정의 변화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란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그냥 내 차례가 되었다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태어난 모양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바꿔 쓸 수 없다는 다소 염세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창조해 낸 예술이라는 영역에 접근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자기 성찰의 시간 뿐이라 생각된다. 그때 마주한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아침을 맞이하게 해 준다. 이번 소설집의 단편들이 그런 선물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은 감사함을 갖게 된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 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한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141)"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 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 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179)"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 정신에, 취기 없이.(214)"


"'표현론'의 미학자 R. G. 콜링우드는 이젠 거의 잊힌 고전 [예술의 원리들 The Principles of Art](1938)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도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실패한 표현은 '추'가 아니라 '악'이라고 덧붙였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인데,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 김애란의 아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형철 평론 중에서(312-313)"


소설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안녕이라 그랬어>의 단편 중에 'Love Hurts'라는 팝송이 나온다. 화자인 '나'는 헤어진 연인 헌수와 함께 'Love Hurts'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우리말이 들린다고 했을 때 헌수가 그건 원래 가사인 'I'm young'을 잘못 들은거라고 정정해주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캐나다인 로버트와 화상 영어 수업을 하던 화자는 우리말 '안녕'에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안부의 인사가 담겨 있음을 설명하다가 언젠가 헌수가 전화를 걸어와 그 때 안녕이라고 들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한 것을 후회하는 대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화자는 헌수의 노래 가사에 정정 때문인지 그 팝송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내용을 되내이게 된다.


"- I learned from you, I really learn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248)"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250)"


내 차례를 맞이한 화자는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249)" 말한대로 인생을 말한다. 


안녕. 

그래. 세상 많은 안녕. 


#김애란 #안녕이라그랬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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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오늘의 젊은 작가 48
박대겸 지음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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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겸 작가의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8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작가와 내용과 상관 없이 무조건 구입하기는 하지만, 처음 제목을 봤을 때에는 완독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 몇 개의 작품에서도 독서 성향과 맞지 않아서인지 간신히 다 읽은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번 작품도 그런 류가 아닐까 싶었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SF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설마 진짜 외계인이 나오는 얘기일까, 아니겠지, 아니길 바랬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다. 헐 근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술술 읽히고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럴듯 한데, 종국에는 진짜로 이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란 상상까지 확대되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제를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막연히 이 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의 삶을 게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말로 해석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다분히 쿨함과 시니컬함을 오가는 방관주의적인 태도가 아닌가라는 해석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나 민주화 항쟁을 거친 세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세대보다 부유하게 자란 이들이 마치 자랑하듯 쿨함과 시니컬함을 표방할 때 좀처럼 반기를 들지 못했던 답답함이 소설의 주인공 지민의 불호령 같은 말을 통해서 해소되는 듯 했다. 


"나는 이틀 뒤에 정말로 인류가 절멸하면 어쩌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심각하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래.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인생이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해야지.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겠지. 행동으로 옮긴다고 한들 바뀐다는 보장도 없고. 바뀌지 않을 확률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아니, 바뀌지 않은 확률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그래도 해 봐야지. 그래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서 어른들이 사는 게 어렵다거나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모든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약간은 방관하는 태도로, 자신은 거기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듯, 그 일이 어떻게 되든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쿨하고 시니컬하게 말하고 행동해. ~~ 제발 남아 있는 이틀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지내 봐.(123-125)"


몇 년 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 그리고 이어진 이란의 핵시설 무력화를 위한 공격 등으로 제3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러다 전세계가 전쟁의 망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란 공포와 두려움이 양상된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지향을 두게 된다. 현재의 삶이 지옥처럼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엄청난 일이 생겨나 모두가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품게 된다. 반면에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행여나 이 행복이 갑자기 끝나버릴까 두려워 부디 모든 일이 평화롭게 잘 해결되기를 바라게 된다. 나 또한 뜬금없이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 의지가 아닌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해 지금의 고통이 단숨에 사라졌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지독하게 이기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내가 하루하루 사는게 별 의미없이 느껴질 때에도 분명 누군가는 매 시간을 충만하게 느끼며 감사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빠져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행복과 불행의 순간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확대되어 보이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봐도 한 인간이 보내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상의 삶을 살아가며 남기게 될 그 작은 점 하나가 수없이 모여 제대로 된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 삶의 점이 곧은 선을 만들어내는 데에 오점이 되지 않도록 항상 의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믿지 못할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냥 일상을 살아가다 다 함께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죽겠다는 쿨함과 시니커함을 소신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내란 사태 이후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은박 보호 담요를 덮은 이들의 몸에 소복히 쌓인 눈이 마치 초콜렛 모형처럼 보여 키세스 시위대라는 별칭이 붙어졌다. 영하의 날씨에 차디찬 바닥에 앉아 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의 사진을 보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대체 어디서 저런 인내와 저항의 힘이 나오는 것일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하지 않는 그 일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수많은 익명의 동조자들을 만들어내는 용기 있는 선택을 감행한 이들은 바로 소설 속 지민처럼 보인다. 이제 인류의 멸망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평소처럼 하던 알바를 하다가 가까운 이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 보는 선택할 수도 있지만, 지민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선택이 아닌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한다. 어떻게 어디서 미약한 자신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마냥 손놓고 있지 않기로 결심한다. 


"만약 어제 루리코와의 우연한 만남이 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맥락과 필연으로 인해 만나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오늘 오전에 받은 아빠의 메시지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면. 거창하게 인류를 위해서, 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고, 나의 의지라고(102-103)"


물리학과 우주와 관련된 과학적 설명이 많이 나와서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이 되어 그럭저럭 맥락을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 지민이 갑작스러운 삿포로 행을 받아들여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긴 구형 핸드폰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 육체적 죽음을 맞아 소입자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게 되는 장면은 과연 SF라 할만한 상상력을 가중시켰지만, 언제 어디일지 모를 작은 영웅으로서의 선택의 기로에 초대받게 된다면 지민처럼 미약하나마 기적을 위해 나의 의지를 불태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의 말처럼 "아마 인류는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들이 파동-입자가 되어 자신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외계 생명체 소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이겠지. 상관없다. 우리가 훨씬 더 넓은 곳에서 훨씬 더 오래도록 살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전부 기억할 테니까.(227)"


#박대겸 #외계인이인류를멸망시킨대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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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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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작가의 [치유의 빛]을 읽었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다이어리앱을 열면 무심코 작년, 제작년 그리고 그 이전의 같은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무런 일정이 표시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거나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과 만남의 기록이 단출하게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은 그렇지만 어떤 특정한 날은 다이어리를 살펴보지 않아도, 아니 그 부근의 날력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직은 언제가는 좀 더 여유롭게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을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도 있다.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각자의 직면하기 두려운 과거의 기억을 감춘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와 이야기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그동안 억세게 운이 좋았거나 아님 무지하게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왔거나 둘 중의 하나였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란 부질없는 복기를 반복하게 된다. 어떤 판타지 같은 영화가 아니고서야 과거의 시간을 바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텐데 왜 자꾸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반복하는 것일까?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후회인가, 아님 안심인가. 나이든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게 된다. 한 눈에 봐도 부럽고 멋지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가 있는 반면에, 참 힘들거 같아 보여 상대적인 위안을 주는 이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나의 생각이나 예견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나의 추측은 사실 그들 각자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기준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아등바등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쉽게 삶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수치와 번지르르한 겉치장에 중독된 시대에 살면서도 어떻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죽는 그 순간까지 추구하는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 박지수와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인 해리아, 신아, 지연과의 최초의 기억에 대한 초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통증의 순간들을 치유하기 위한 빛을 찾아나서는 길을 안내한다. 중3이 되면서 갑작스럽게 몸이 커진 지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오래된 역사인 것 같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면서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에 지수는 엄청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해버린 몸을 마냥 탓을 수 많은 없다. 이제는 커진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수가 성인이 되어 태인과 연애를 하면서도 폭식과 단식을 오가는 극도의 다이어트를 지속해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의 서막은 비단 지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와 SNS를 통한 자기PR의 시대에 살면서 몸을 가꾸지 않는 것은 인생을 포기한 것과 동일시되어가고 있기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살과의 전쟁을 치루던 지수는 어느 순간부터 날개뼈 아래 부근에서 밀려오는 지독한 통증을 느끼게 되고 통증의 이유를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된다. 이것 또한 지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내 몸을 내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주장은 어이없지만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아주 간단한 감기 몸살이 아니라면 좀 더 복잡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몸의 이상을 느낄 때 아픈 것 이상으로 마음이 답답해진다. 병원에 가더라도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 힘들 때에는 아니 지금껏 수십년간 갈고 닦은 나의 몸의 이상을 이렇게 알아채기 힘들다는 사실에 무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수는 우연히 엄마를 통해 잊고 살아왔던 중학교 동창생들의 근황을 전해듣게 된다. 지수의 몸이 커졌을 때 지수를 알아본 전교생의 우상이었던 해리아와 지수처럼 해리아를 동경했던 신아가 채수회관이라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통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는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지수는 해리아를 만나기 위해서인지,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채수회관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과거의 수영장 사건을 다시금 조우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해리아가 지수에게 수영을 배우고 해리아를 질투하던 안지연과의 수영 대결에서 머리를 부딪혀 크게 다치는 사건을 계기로 지수는 다시는 해리아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지수가 회상하는 수영장 사고는 마치 자신이 동경해왔던 해리아가 수영을 배운 이후 자신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사고를 당한 해리아에게 왜 죽지 않았냐는 섬뜩한 말을 건네는 장면으로 긴장감을 드높인다. 


마치 해리아의 시녀처럼 다른 누구의 관심과 사랑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신아 또한 지수를 매몰차게 내치며 해리아와 신아의 가족이 소속되었던 사이비 종교 집단에 대한 접근도 거부한다. 해리아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영원히 지속되는 통증을 갖게 된 것이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매몰된 무지한 이들과 결속된 이상한 병원 의사와의 의심스러운 잇속 관계 때문인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것에서 뛰어나 보였던 해리아 마저도 사실은 지수처럼 그곳을 벗어나 진짜 자유로운 몸을 갖고 싶었다는 것은 소설의 말미에 드러나게 된다. 


지수가 채수회관에서 머물며 지우의 케어를 받는 도중에 환시를 보는 듯한 장면들은 마치 지수가 영원히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은 몰래 준비해 온 약에 의지하며 무력하게 무너지는 듯한 결말을 가져오는 듯 했으나,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벗과 심우의 베일에 싸인 비밀이 지수가 수영장에서 보았던 빛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지수가 지우의 마음을 돌리고 심우인 신아와의 대화에 이어 해리아를 마주하는 장면들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으스한 느낌을 넘어 결국은 비극으로 치닫는 것이 아닐까란 섣부른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지수가 해리아를 만나고 치유의 빛에 해당되는 처음의 기억은 다름 아닌 지수와 해리아와 신아가 사이좋게 수영을 배우고 대결을 치루다 외톨이였던 지연을 불러내며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지수가 보았던 치유의 빛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다 과거를 비틀어버리는 것일까? 아님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으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을 마음대로 재해석해버리는 것일까? 어느쪽이든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과거에 하지 못했던 용기 있는 결단을 이제는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삶이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될 수 있기 때문에....


#강화길 #치유의빛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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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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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글쎄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불행이 생겨난 원인을 공유하다보면 겉으로는 참담한 척 애써 연민의 눈빛을 드러내지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을 안도하게 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불행의 이유를 낱낱이 기억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조금은 삐딱한 시선이고 타인을 경계하는 태도를 자아낼 수 있겠으나, 불행의 이유를 곱씹게 되는 시간을 통해서 불행이 남겨둔 숙제인 고통이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인 고등학생 때에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 앞에서 진지한 주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늘어놓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성당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그런 일이 잦았는데, 교리 선생님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아마도 다른 친구들은 상당히 재수없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는 애써 참석한 교리시간을 허투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님 옮긴 성당에서 아직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오면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나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내뱉은 것 같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했던 문집을 만들 때 너무나도 거창하게 제목을 '삶의 의미'라고 붙이고 나만의 철학을 써내려갔다. 원본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떤 내용을 썼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목만큼은 확실히 생각난다. 세상에 스무살도 안된 나이에 '삶의 의미'라니, 대체 뭘 알고 그런 제목을 붙인걸까?


이번 책에서 김영하 작가님은 조금 놀랄만큼 상세하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어쩌면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가감없이 서술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과의 일화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했던 이들에게 남다른 위로를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나와는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나았거나 나빴거나 하는 우위를 가늠할 수 있다 해도 세상을 떠난 두 분을 기리며 전하는 진심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순간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31)"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내용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던 생각에 유연함을 가져왔다. 내가 알던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한 번 뇌리에 박힌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지속적으로 적용해 왔던 삶의 습관이 때로는 얼마나 옹졸해 질 수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인간의 몸이란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다.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다시 생성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세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76)" 


<왕좌의 게임> 미드로 더욱 유명해진 조지 R. R. 마틴 작가에 대한 내용에서는 전업 독자라는 생경한 직업의 탄생을 알게 되었고,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다음 권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애타는 비난은 실로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할 뿐이다. 나도 한 때 '얼음과 불의 노래' 독자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영하 작가님이 '알쓸신잡'에 출현하느라 바빠서 새로운 작품을 못 쓰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치 어떤 작가의 애독자라면 작가를 향한 채찍질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위안'에 나온 내용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삶의 양태를 스스로 선택하고 완성해 나가는 것에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그리고 저자가 말하듯이 어쩌면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단 한 번만 허용된 솔직 담백한 인생 사용법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기에, 기다림은 우리 삶에서 뜻밖의 기쁨과 행복을 전해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작동하는 상상력 덕분에, 삼십대에 영화계로 넘어갔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대학에 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뉴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방송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상상 끝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내 눈앞의 세계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내가 하마터면 살 수 있었을 n개의 인생 중 하나로 보인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이 방법이다.<우연한 생>- (187-188)"


나이가 들수록 그때 그 선택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자주 하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을 상상하며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보다보면 아쉬움과 더불어 안도감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지금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비슷한 형태의 잘못을 했을 것이고, 엇비슷한 실수와 상처를 주고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삶을 잘 완성해가며 오래전 사춘기 시절에 끄적거린 '삶의 의미'를 재현해 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김영하 #단한번의삶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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