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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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를 읽었다. ‘19세 등단. 21세 두 번째 소설로 아쿠가와상 수상’이라는 걸출한 표제가 걸린 문구를 보고 과연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최애(最愛)’라는 단어를 주인공의 이름인가 생각했었는데, 내용을 살펴보며 ‘가장 사랑한다’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이 대중문화에 대한 유희가 우리보다 빨라서인지 특정인물이나 특정된 무엇인가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을 오타쿠라는 말이 오덕후 혹은 덕후라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이에 질세라 아이돌을 주축을 우리는 대중가요가 붐을 일으키며 팬덤이라는 말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팬질은 때로는 도를 넘어서 스토킹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며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일본에서는 욘사마의 중년 여성 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뉴스 보도를 보면서 대체 저 나이에 자국민도 아닌 외국 배우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거야 라는 의아함이 생기기도 했다. 

이제는 남녀노소를 떠나 최애 배우나 가수 등이 한 명 쯤은 있을 것이고 그들의 활동으로 인해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런 말들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한때 한 가수의 노래로 많은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가수는 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내가 그렇게 자주 반복해서 자신의 노래를 들었다는 것을 아마도 죽는 날까지 모를테지만, 소설의 주인공 아카리처럼 최애가 나를 알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최애의 노래가 좋았던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누군가를,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기에 여러가지의 것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의 행위를 누군가 눈치챈다면 철이 없다느니, 대체 그런 무용한 짓을 왜 계속하는 것이냐며 핀잔을 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의 행위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욕구에 정당한 응답을 보내는 것 뿐이다. 그래서 열정적인 구애의 행동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회나 아쉬움 같은 것은 남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 아카리는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 마사키를 최애한다. 그런데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일상이 마사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학교 공부도 뒷전이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중퇴하게 된다. 학교를 다니지 않을 거면 일이라도 하라는 부모의 이야기를 담아듣지 않는다. 아카리는 오로지 마사키만을 생각하는 조금은 모자란 청소년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카리가 그렇게 자신의 온 일상을 바쳐 최애하는 마사키 또한 조금 제멋대로의 아이돌이다. 아카리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팬들에 대한 배려 없이 갑작스레 그룹을 해체하고 연예가 생활에서 은퇴를 하고 만다. 마사키가 삶의 중심이었던 아카리는 몹시도 혼란스럽다. 꼰대의 나이에 이르러 아카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대체 아무런 의지도 없이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삶이 얼마나 한심해보이는지 티를 내지 않기란 쉽지 않다. 일본 사회에서 이 소설이 주목받고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이렇게 서로가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 속해있을 때 한 걸음만 뒤로 내딛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편협한 시각을 내려보라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오후, 전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어딘지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일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동하는 중’이라는 안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이동하지 않아도 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안도, 그러니까 속 편하게 휴대폰을 보거나 잘 수 있다. 대기실 같은 곳도 그렇다. 햇살조차 차가운 방에서 코트를 껴입고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에는 때때로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따스한 다정함이 있다. 만약 우리 집 소파였다면, 내 체온과 냄새가 스며든 담요 속이라면 달라진다.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 자더라도 해가 저물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마음 어딘가에 새까만 초조함이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83)”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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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띵 시리즈 10
배순탁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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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탁 작가의 [평양냉면: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0번째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여름을 나면서 냉명 한 번 안 먹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딱히 냉면을 먹으로 냉면 전문점을 찾지 않는다고 해도 고기 먹으러 갔다가 후식 냉면 정도는 한 번씩 맛보기 마련이다. 면 매니아가 아닌 나 조차도 해마다 여름이면 냉면을 몇 번씩 사먹곤 했으니 말이다. 띵 시리를 읽다보면 갑자기 나도 그 음식을 먹으러 나가야 할 것 같은 유혹에 휩싸인다. 비단 음식을 주제로 한 에세이지만 음식 얘기만이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틈틈이 섞여 있어 주제가 된 음식이 더욱 땡기는 것 같다. 


이미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얼굴까지도 어느 정도 알려진 저자이기에 혹시나 유명세를 타고 이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란 우려는 단숨에 사라질 정도로 잘 읽혔다. 살얼음이 살짝 낀 냉면수를 들이키는 것처럼 시원한 맛이 느껴지고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주저없이 드러내는 소신넘치는 진술에는 나도 모르게 동조하며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음악 평론가이자 전문가답게 평양냉면에 대한 생각과 짝을 맞추는 듯한 음악 이야기는 여러모로 매력적이고, 음악이 절대로 고정관념처럼 음악을 좀 안다고 허세를 부리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어필해주니 더욱 고맙기 그지없다. 


나도 냉면을 먹으러 가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식초나 겨자 소스를 넣거나 가위로 면을 자르는 행동은 평양냉면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지 냉면을 가위로 자를 때면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슬쩍 눈치를 보게 된다. 혹시 나 촌뜨기처럼 냉면 자르고 있는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런 나의 의기소침함을 저자가 단숨에 위로해 준다. 식초나 겨자를 넣든 말든, 면을 자르던 말던 냉면을 먹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편하고 내가 만족스러우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평양냉면을 먹을 때의 어떤 절대적인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양냉면 매니아가 설파해주니 속이 다 시원해진다. 특히나 내용 중에 돼지갈비와 같이 먹는 평양냉면에 대한 감상 부분이 나오는 부분은 정말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마도 이렇게 평양냉면 하나에도 전심전력인 작가와 한 팀이기에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앞으로도 꾸준히 인기가 높을 듯 싶다.


"다행이다. 치과 치료를 열심히 받은 결과, 내 이는 아직까지 얼음을 견딘 만하다. 여러분도 더는 미루지 말고 치과 치료를 빨리 받기 바란다. 맛있게 나온 냉면 기왕이면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나. 무섭다고 치과 치료 미룰수록 늘어나는 건 지옥으로의 초대장이나 다름없는 고통과 치료비뿐이다.(52)"


"내가 바라는 타인과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적어본다. 상대방에게 사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는 않은 관계. 마치 노련한 조종사처럼 서로 간의 영역과 궤도를 잘 지키고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 할 일 열심히 할 줄 아는 관계.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관계.(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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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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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스키마와라시]를 읽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면 제목에 붙은 말이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스키마와라시’라는 말은 실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고 작가의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말이라 소리내어 반복할수록 어떤 주문을 외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문학으로만 여겨졌던 SF와 판타지 소설들이 점차 주목받는 시기라 그런지 이번 소설도 판타지 요소가 큰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책 표지부터 뭔가 일본의 정통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같이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읽고나서 다시 살펴보니 소설의 가장 중요한 화두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다. 책날개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원서와 같은 표지 디자인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중간에 대화가 상당히 많이 나와서 희곡집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주인공 ‘산타’가 ‘스키마와라시’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아주 친절히 설명해주듯 이야기는 진행된다. 산타와 그의 형 다로는 골동품 전문점을 운영하며 더불어 몇 가지 음식을 팔고 있다. 그런데 산타에게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는데 어떤 물건을 만지고 나면 그 물건에 담긴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어릴때 지로라는 개가 물어온 샌들을 만져 죽은 아이가 버려진 곳을 묘사하거나 커다란 호텔의 기념 파티 현장에서 바닥에 떨어진 오비도메라는 물림 장치만 보고도 주인이 누군지 찾아내는 신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에서는 스티븐 킹의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그린 마일>이 생각났다. 교도소에 갇힌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인물은 범죄자와 악수를 하면 상대방이 살인이나 상해를 가할 때의 장면이 떠오르게 되고 그로 인해 죽음에 처한 이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온다 리쿠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오마주 한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산타가 갖게 된 이상한 능력은 그의 형 다로가 운영하는 골동품 전문점을 유지하기 위한 일과 연계되어 사건이 발생된다. 우연히 만지게 된 어떤 타일을 통해서 ‘그것’이라 지칭되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의 유입과 오감을 통해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산타가 형과 함께 그 타일을 찾아나서며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는 혹시나 부모님의 사고와 관련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 산타는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이미 무지개 다리를 건넌 지로와 너무나도 닮은 너트라는 개를 통해서 부모님을 만나는 통로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산타가 가진 의문을 해소된다. 

산타와 다로가 다이코 하나코를 우연히 만나 페스티벌에 그동안 모아온 골동품인 창문과 문을 사용하며 ‘스키마와라시’라 불리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한 여름 밤에 읽는다면 순간 순간 소름이 돋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기에 적당한 피서가 될 것 같지만 판타지한 요소가 자주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기묘한 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지 않나 싶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면 우리나라의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들의 주제와는 상반되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접할 때가 많다. 그들이 상상력이 더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단조롭고 일률화된 일상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것인지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저너머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SNS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뭐, ‘그것’ 탓도 있겠지만. 프라이버시 보호가 심해지고 개인 정보를 신경 쓰는 사람이 늘어난 것에 역행하듯이 어째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신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고 안심하고 싶은 것이라면 어쩐지 이해가 된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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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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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SOCRATES EXRESS]를 읽었다. 부제는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총 14명의 동서양을 망라하는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살피며 기차는 떠난다. 에릭 와이너가 타고 떠나는 철학의 기차는 인간 삶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하며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도와준다. 새로운 철학의 사조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변주곡과 같은 기이한 형태의 유행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결국은 인류의 발생 이래로 지속되어 온 핵심 화두는 마찬가지이다. 과연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 하는 것인가? 


철학은 어렵다. 반면에 철학은 그럴듯하다. 폼내기가 좋다. 어려운 말이나 문장 몇 개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럴듯한 상황에 툭 내뱉으면 꽤나 관념적인 인간처럼 보인다. 실제로 철학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철학의 삶을 살고 있다. 에릭 와이너의 책은 실제 철학가들의 원서를 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지루해질만 하면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며 적당한 지점에서 딸과 같은 다른 등장 인물들을 등장시켜 책을 덮을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보통 일반적인 철학 전문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꽤나 깊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단지 몇 문장을 연이어 읽었을 뿐인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몇 페이지를 읽고 나면 그 책을 당장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따위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큰 소리 치고 싶어진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마치 고속열차를 탄 것처럼 순식간에 저명한 철학자의 정수로 우리를 데려간다. 에릭 와이너가 너무나 쉽고 간결하게 그 포문을 열어주다보니 철학도 별거 아니구나라는 손쉬운 단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다른 챕터로 넘어가서 저자가 방금 전 철학자의 이야기를 다시 언급해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철학은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다. 한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소화가 되기를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철학자가 언급한 내용을 살피기 위해 그가 비판하거나 예로 든 다른 사상가의 책을 뒤적거려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좀처럼 한권을 독파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한 명의 철학가가 수십권에서 수백권의 저서를 발표했다면,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가 지금까지 수 백, 수 천, 수 만에 이른다면 나는 사실 한 명의 철학자도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어느 시대의 철학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철학을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은 시대의 엄청난 거리와 사조의 다양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커대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어느 순간 비슷한 맥락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힘겹게 거두어들인 깨달음은 한 개인의 지평을 넓혀주고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14명의 철학자의 이야기를 다 읽었는데도 명확히 기억하는 내용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에릭 와이너가 친절히 안내한 기차를 타고 2천년을 넘나드는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하루를 시작하는 어떤 의미있는 약속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일주일이 조금 더 철학과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용기를 건네 주는 것 같다. 


"걷는 동안 대답이 떠오른다. 짧은 두 단어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터무니없지만 타당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말.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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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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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다. 2년 전 [파우스터]로 만났던 작가의 신작을 조금 늦게 접하게 되었다. [파우스터]와는 전혀 다른 소재로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표지 그림에 듬직한 주인공의 뒷모습이 보이고 ‘Always’라는 이름의 편의점이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같은 모습으려 그려져 있다. ‘Always’라는 이름의 편의점은 항상, 언제든 무심하게 반복되는 잔혹한 일상에도 그 불편한 편의점을 이용하고 나면 세상 모든 시름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것 같은 마법의 장소로 그려진다. 저자가 정말로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이 매정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딘가에 ‘불편한 편의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한 평생 역사 교사로 재직해온 염 여사는 남편이 남긴 재산으로 청파동의 한 주택가에 편의점을 열게 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장사가 잘 되었지만 주변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편의점이 두 곳이나 생겨나면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염 여사는 연금으로 일상 생활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편의점에 생계가 걸린 직원들을 위해서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을 팔지 않는다. 이야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염 여사의 편의점 운영은 실로 현실적이지 않다. 요즘에 누가 다른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수익이 시원찮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당연히 우리사회에 존재해야 할 인간상의 모습이 실제로는 극히 보기 드물기에 저자는 염 여사와 같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우리 마음 안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염 여사는 친지의 빈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탔다가 그녀의 지갑과 통장 등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는 파우치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고, 잠시 후에 독고라는 노숙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야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스터리스러운 인물인 독고는 염 여사의 파우치를 찾기 위해 폭행을 당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정의로운 행동을 보이지만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염 여사는 독고를 자신의 편의점으로 데리고 가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이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독고를 노숙자의 삶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한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독고는 오랜 노숙 생활로 어눌해진 발음도 서서히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되고, 술을 끊고 옥수수 수염차를 먹으며 아주 조금씩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독고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의 점진적인 변화는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독고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게 된다. 

불편한 편의점의 야간 알바생 독고는 ‘Always’에서 일하던 오 여사와 시현에게 신선한 충격과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현은 독고의 충고로 유튜브에 편의점 포스기 사용법을 올려 다른 매장의 점장으로 스카웃되게 되고, 오 여사는 방황하는 아들과 화해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된다. 그리고 독고가 일하는 시간에 편의점을 방문한 중년의 가장과 희곡을 쓰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 또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염 여사의 아들이 에일 맥주 양조장에 투자하려고 편의점을 팔기 위해 흥신소 곽에게 독고의 뒷조사를 부탁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강남의 어느 부유한 성형 외과에서 오히려 협박을 당한 곽은 독고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게 되고 곽은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고의 지난 과거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고백한다. 성형 외과 의사였던 독고는 취업을 위해 성형을 하려던 22살의 젊은 여성이 유령 수술로 숨지게 되는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던 독고는 아내와 딸에게도 버림받은 채 술로 매일을 지세우다 서울역의 노숙자가 된 것이다. 이야기는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독고가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의미로 대구에 봉사를 하러 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너무나도 큰 트라우마와 자신을 학대하는 삶으로 기억을 잃어버렸던 독고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마음이 따뜻한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과의 만남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가 변화되는 시간 동안 또 다른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된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인간에게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관계는 곧 소통이라는 사실을 머리속으로는 알면서도 그 작은 용기를 내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독고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성하게 된다. 

“어쩌면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도울 방법은 그렇게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8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140)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중에서”

“고통의 추가 내장을 관통해 바닥으로까지 그의 몸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사내가 판결문 읽듯이 숨을 골라가며 진술한 말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민식을 심해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181)”

“노인과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나보다 더한 중독자인 그는 생의 유일한 방비가 취권이어서 술을 안 마시곤 도저히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듯 늘 알코올에 젖어 있었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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