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 요리 전문가부터 미식가까지 맛을 아는 사람들을 설레게 할 이야기
장준우 지음 / 북앤미디어디엔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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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작가의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를 읽었다. 부제는 "요리 전문가부터 미식가까지 맛을 아는 사람들을 설레게 할 이야기"이다. 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이미 여러차례 먹어본 후에도 고기의 다양한 부위나 생선의 여러 회의 이름에 거의 무지했다. 고기를 굽는 좋은 식당에 가면 의례 이건 이런 부위라고 아는 척하는 사람이 꼭 있고, 갓 잡아올린 신선한 생선을 바로 회로 준비한 식당에 가면 예쁘게 데코레이션 된 모양만 보고도 광어, 우럭, 돔 등을 바로 구별해내는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그럴때마다 드는 생각이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최 그런걸 어떻게 기억해내는지 신기하기만 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주에 대해 이슬파와 처음파로 나눠지는 것은 단순히 상표에 대한 기호일 뿐 맛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했다. 술을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가 그 말에 동조할 수 없다고 하자, 그럼 맥주를 맛 만으로 구별해보자고 제안했다. 소주가 양대산맥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라거 맥주에도 하이트와 카스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당시에 미국 라거 맥주 밀러까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 보았다. 흑맥주나 에일 맥주처럼 확연히 맛과 색깔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동일한 맥주잔에 부은 3가지 상표의 맥주는 모두 똑같아 보였다. 다년간의 음주로 자신만만했던 그는 제안자가 술 잔을 돌리는 사이 눈을 감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드디어 맛을 보고 이름을 외쳤는데, 정말 어이없게도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테스트를 자신했던 이는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해보자고 고집을 피웠고, 제안자는 거보라고 소주도 마찬가지로 이슬이든 처음이든 맛은 다 똑같은 거라며 아무거나 마셔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음식에도 관심이 없던 내가 술 맛을 구별할리 만무했지만, 그날의 테스트는 꽤나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고기나 회의 대한 잡다한 지식이 없어도, 눈으로 한 번 보고 구별하지 못해도 누군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을 권리가 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먹을 음식을 준비한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음식을 남기면 죽고 난 후에 지옥에 가서 코로 먹어야 한다는 음식을 남기지 말자는 터부 같이 말이 전해져왔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배를 곯느냐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무상급식을 하는 곳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한 하루의 제대로 된 한 끼를 위해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줄을 선 허름한 복장이 이들을 지켜본다면, 부의 편재만큼이나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의 부재가 심각한 이들이 우리 주변에 언제나 상존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아직 식사 시간이 한 참 남았음에도 이유없는 침이 새어나오고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내가 먹어보고 싶은 음식들이 전세계 어디에든 널려 있으며, 좋은 식재료들이 어디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성스럽게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딘간 낯선 곳에 머물며 맛보았던 음식들이 이 책을 계기로 되살아나 그 음식을 먹을 때의 정황과 설레임이 고스란히 내 안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맛집 탐방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통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시금 낯선 음식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과감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살아왔던 삶의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두를 물에 불린 후 맷돌에 갈아 끓이면 콩물이 되고 건더기를 짜내면 비지가 나온다. 짜고 남은 액체는 두유가, 두유에 간수를 넣고 그대로 응고시키면 순두부가 된다. 순두부의 물기를 짜내면 우리에게 익숙한 두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젓갈 같은 육수를 넣고 발효시키면 취두부가 된다. 갈지 않고 불려 익힌 콩에 누룩균을 배양시켜 따뜻한 곳에 두고 발효시키면 청국장과 낫토가 만들어진다. 같은 과정으로 삶은 대두를 으깨 뭉쳐 발효시킨 것이 메주,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더 발효시키면 간장과 된장이 탄생한다. 대두를 이처럼 많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방법을 찾아낸 인간이 더 경이로울 따름이다.(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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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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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시온의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을 읽었다. 마호로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인 이번 책은 주인공 다다 게이스케와 교텐 하루히코의 우연한 재회로 시작된다. 어찌된 이유인지 회사를 그만두고 심부름센터가 아닌 심부름집을 시작한 다다는 외로움의 냄새가 짙게 베어 있는 듯 하다. 마호로 외곽의 어느 집의 노인에게 부탁을 받고 그 집 정원을 정리하며 버스가 시간표대로 운행을 하지는 지켜보라는 의뢰를 받은 다다는 일을 마치는 길에 버스가 끊긴 정류장에서 쿄텐을 만나게 된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교텐은 친구들의 장난으로 제단기에 새끼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이야기의 후반에서 장난치던 친구들이 교텐을 밀치게 된 원인은 다다가 일부러 의자를 빼놓았기 때문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아무튼 쿄텐의 잘라졌던 다시 붙은 새끼손가락은 약간은 두터운 하얀 실을 두른 듯한 모양이 되고 그 손가락의 끝 부분만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다가 쿄텐의 손가락에 대한 죄책감은 자주 반복되며 다다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오갈데 없는 쿄텐이 다다의 심부름집에 빌붙으며 본격적인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쿄텐은 다다가 원치않은 조수 역할을 하며 주인이 버리려고 맡긴 치와와 ‘하루’를 키우던 소녀를 만나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려다 매춘부 루루와 하야시를 만나게 된다. 강아지를 찾아주고 정원을 정리하고 버스 운행시간을 확인하는 자잘한 일을 하던 다다 심부름집은 소소한 감동과 재미를 주는 이야기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쿄텐이 하야시를 스토킹 하던 마약 브로커에게 칼을 맞으며 급격히 하드보일드로 전환된다. 일본의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매춘부가 일하는 지역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마약 브로커들이 어린이들을 꼬드겨 운반책으로 이용하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어두운 세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특히나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나이의 호시는 야쿠자를 연상시키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다다와 쿄텐에게 살해의 위협도 마다하지 않는 스릴러의 여운까지 남겨주었다. 


쳅터가 바뀔 때마다 다다 심부름집이 의뢰받은 내용에 따라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주인공만 다다와 쿄텐이고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형식인가 했더니, 새롭게 나온 등장인물들이 앞 쳅터의 인물과 마치 아주 긴 실로 연결된 것처럼 얽혀 있어 어떤 결말이 이어질 것인지 뒤로 갈수록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또한 아주 시크하면서도 때로는 지혜롭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쿄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던 터에 쿄텐의 전처와 딸이 등장하며, 이 소설이 나올 2006년도 당시 우리나라에는 생소하기까지 했을 동성간의 결혼 생활을 위해 계약관계를 맺고 쿄텐의 정자로 인공수정을 한 사실에는 조금 놀랍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최근에야 소설 주제로 언급되는 소재를 이렇게 주인공의 과거 이력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사회 변화가 우리보다 빨랐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쿄텐 만큼이나 미스테리하나 인물인 다다는 쿄텐과의 동거생활로 어느덧 자신의 상처를 토로하게 된다. 어떤 의뢰인 부부의 창고를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을 하다가 나오는 길에 자신을 미행한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에게 창고를 정리해달라는 부부가 생물학적인 부모일 것이라고 자신을 키워준 부모는 병원에서 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다는 그 남자의 고백으로 인해 자신이 아내와 이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아이를 가질 무렵 아내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아내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태어날 아기도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가 친자확인을 하자는 말을 듣고 다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고 태어난 아기는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된다. 이 고백을 한 후 다다는 쿄텐에게 심부름집에서 나가줄 것을 부탁하고 쿄텐은 다다를 떠나게 된다. 이후 일상생활을 시작한 다다는 생각보다 큰 쿄텐의 빈자리를 느끼게 되고 자신과 쿄텐을 아는 세 명의 사람에게 전화를 하며 쿄텐을 찾게 된다. 


“<알고 난 뒤에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지.> 그 순간 쿄텐의 표정은 숲속의 은둔자처럼 감정에서도, 욕망에서도 해방된 듯 보였다. <마음 내키는 데까지,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겠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불행해질지도 모르는데?>

<불행하지만 만족할 순 있지. 후회하면서 행복할 순 없어. 어디서 멈출지는 기타무라 씨가 스스로 결정할 일 아냐?>(278)”


“어때? 아물었지? 새끼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보다 조금 차갑긴 하지만, 문질러주면 온기가 돌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순 없어도 회복할 순 있다는 말이야.(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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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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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지 김의 [미라클 크리크]를 읽었다. 11살 때 가족들의 이민으로 한국계 미국인이 된 저자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변호사로서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삶의 경험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허구의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등장 인물들에 대한 내면적이 묘사와 그들의 갈등과 주저함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솔직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적인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법정 드라마의 형식으로 회피하지 말고 용기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특히나 모국어를 쓰는 타지가 아닌 언어와 문화와 풍습이 다른 먼 타지에서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 처절한 비애와 자괴감이 한 순간에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필체로 묘사한 부분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겪었던 시간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견뎌왔던 체념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내와 같은 감정들이 때로는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저자의 생애처럼 미국으로 이민간 박 유와 그의 아내 영 그리고 그들의 딸 메리(매희)가 어느 외딴 곳에서 헛간에 고압산소요법 장치를 마련하여 현대 의학의 치료나 약물로 쉽게 치료되지 않는 병과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미라클 서브마린’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고압산소실에서 치료를 받던 이들에게 일어난 화재로 시작된다. 산소를 주입하는 관에서 누군가 담배불을 놓아 헨리라는 어린이와 자폐아 어머니 킷이 죽게 되었고 산소탱크가 폭발하며 박 유는 불구가 되고 메리는 한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이후 과연 그들을 죽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 과정에 박 유의 가족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의사 부부 맷과 재닌이 등장하고 미라클 서브마린에서 치료를 받던 헨리의 엄마 엘리자베스, 가장 장애 상태가 심했던 로사의 엄마 테리사, 그리고 검사 에이브와 변호사 섀넌이 등장한다.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증인 심문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하지 않으면 범인이 누군인지 예측하는 과정에 혼란이 생기곤 한다. 재판날이 하루 하루 늘어갈수록 처음에 가장 유력했던 범인인 엘리자베스의 증거들이 무력해지고 또 다른 용의자로 맷과 재닌 그리고 박 유에 이어서 결국 메리가 범인임이 밝혀지게 된다. 


박 유가 운영하는 미라클 서브마린에서 화재가 일어나게 된 원초적 계기 중의 하나는 고압산소요법으로 자폐아를 치료하려는 이들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데모 때문이다. 이들은 자폐는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갑자기 생겨난 병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생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폐아 자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들에게 화재 위험성이 높은 고압산소요법과도 같은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은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유명 연예인이 자신의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며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보여주곤 한다. 어쩌면 자폐나 발달장애를 지닌 자녀들은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손길이 필요할지 모른다.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아기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너무나도 고되고 온전히 아기를 위해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 양육 기간이 지나고 나면 아이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특수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는 일은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내 아이를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아이를 돌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죽을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그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알 수 있을까? 메리의 자백을 이끌어내며 메리의 엄마 영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머리속으로 그리며 만약 정전이 되지 않았다면, 잠수가 지연되지 않았다면, 맷의 쪽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메리가 재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박의 담배를 메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영은 깨닫게 된다. 그런게 바로 인생이라고. “모든 인간은 백만 개의 경우의 수가 얽히고설킨 결과물이었다. 백만 개의 정자 가운데 하나가 정확한 시간에 난자에 도달해 탄생하는 인간은 천분의 일 초라도 어긋났다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고 만다. 하나씩 놓고 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사소한 것들 수백 개가 모여서 -우정과 사랑이 싹트고 사고와 병이 생기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다.(506)”


“영어를 쓸 때의 박 유는 한국어를 쓸 때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대로, 언어의 유창함이 한풀 꺾이면서 유능함이나 성숙함도 한 꺼풀 같이 벗겨지는 이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 버전의 그들이 되고 만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리라 예상한 어려움에 대한 대비를 했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 어색함이나, 맥락에서 단어의 뜻을 유추해야 하는 지적 부담감, 한국어에는 없는 소리를 내기 위해 혀를 익숙하지 않은 위치에 두어야 하는 신체적 난관,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이런 언어적 불완전성이 바이러스처럼, 발화 능력을 넘어 다른 부분까지 오염시킨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사고와 태도, 그리고 성격까지도. 한국어를 쓰는 그는 배울 만큼 배운, 존경받아 마땅한 권위적인 남자였다. 영어를 쓰는 그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며, 매사에 자신 없고, 걱정하고, 서투른 머저리였다. 한마디로 바보.(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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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 다양한 선택을 존중하며 더불어 혼자 사는 비혼의 세상
곽민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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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지 작가의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읽었다. 부제는 “다양한 선택을 존중하며 더불어 혼자 사는 비혼의 세상”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미혼이라는 말은 있어도 비혼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있어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들은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에 다다르면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고,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부모님께 불효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면밀히 들여다보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에도 독신주의라는 이름으로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을 당연시 여겼던 시대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족 중 누군가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의 삶을 사는 것을 흠이라 여기며 그들의 친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힘들어 했기에 다른 이들 앞에서 얘기하기를 꺼려했기에 잘 몰랐던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 몇 년 전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는 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는 동생은 앞으로도 아이를 갖지 않을 계획이라는 그야말로 말로만 들었던 딩크족을 직접 마주하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맹이 몰아쳤는지 그 동생의 생각을 바꾸고 말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쳤다. 그 당시에 사랑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의 분석을 준비하고 강의하러 다니다보니 완전 무결한 사랑의 정점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강의하는 주된 내용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을 바탕으로 하기에 사랑의 정점에는 당연히 자녀 출산이 귀결되어야 한다고 얼굴을 붉혀가며 강조했다. 1시간 넘게 지속된 내 열변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 아는 동생은 그저 묵묵히 내 얘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동일한 내용을 강의할 때마다 그 아는 동생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대체 왜 그렇게 나의 생각을 강요했던 것일까 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정말로 내가 원했던 것은 그 아는 동생이 결혼 생활을 잘 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녀 출산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너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옳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잘난척 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주된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고 난 후 꼭 이렇게 덧붙인다. 누군가와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나이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구태여 가족이나 지인들이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무엇이 자신에게 옳은 길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믿고 지켜나갈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삶의 형태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개성과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혼자 튀는 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밸이 꼬일 때가 있다. 그래서 싱글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고, 딩크족이라는 이름으로 지들끼리만 즐기며 사는 것이 꼴베기 싫어지고, 사랑에 있어서는 더 이상 성별을 논하지 말자고 말하는 이들은 이 사회를 혼란시킬 불순분자로까지 바라본다. 유럽에서 공부할 때 놀란 사실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로 사는 커플들의 자녀들에게 정식 결혼을 한 이들의 자녀들과 동일한 법적 권한을 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도 그러한 변화와 적용이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의 사회적 합의를 위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을 보고 망조가 든 것인가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어쩌면 그들이 우리보다 결혼을 더욱 신중하게 생각하기에 그러한 현상들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비혼에 대한 세태의 흐름을 알고자 했는데, 사실 우리에게 비혼에 대한 호감이나 비호감의 선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나의 시선이 어떠했느냐 가 아닐까 싶다. 바로 내가 아는 동생에게 우를 범했던 것처럼 내가 생각해온 관념들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내가 너보다 나은 존재임을 과시하고 싶은 옹졸한 욕구를 돌아보게 해 주었다. 나와 참 다른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나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며, 어쩌면 오히려 나의 단순한 삶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조력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쿨하게 서로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는 길은 우리가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조심하는 길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의 보통은 나에게만 국한된 고유한 세계라는 것, 내 기준에서의 정상은 내가 규정한 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글로 쓰는 일, 결국 자신의 세계를 말하는 일은 우리가 서로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기회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26)”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인과의 관계를 포함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스쳐 지나가버릴 수도 있는 타인이 서로에게서 나와 같은, 혹은 상대에게서 전이받고 싶은 타일 조각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마주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우리는 같지 않고, 하지만 서로를 겁줄 만큼 다르기만 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관여해볼 수 있는 멋짐을 가진 둘 혹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어서 서로에게 뭔가를 남길 준비를 하고 여기 함께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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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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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었다. 얼마전 읽은 [최소한의 선의]에서 "도대체 왜 법은 범죄자들에게 관대할까"라는 주제에서 이 소설이 언급되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청소년은 성인보다 가볍게 처벌받거나 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고, 이에 대한 불만 여론도 높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처럼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소년범죄에 대한 분노를 다른 소설은 쏟아지는 공감을 얻는다.(142)" 우리나라에서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형벌 판결이 너무 약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자주 발생되곤 한다. 특히나 소설의 배경처럼 청소년 범죄일 경우에는 강력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소년법이 적용되어 성인들과 같은 형량을 받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다보니 범죄를 저지른 어떤 아이는 자신은 어리기 때문에 큰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비아냥 거려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갱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다시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과 별개로 아마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아이가 그럴리 없다며 자기 자식을 감싸기에 바쁠 것이다. 


예전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아무 사전 정보없이 보다가 말미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전도연 님의 열연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수작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내용을 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주인공 신애는 바람난 남편을 교통사고 잃고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을 살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이가 유괴당해 죽게 되고 교회를 다니며 유괴범을 용서하라는 말에 마음이 변화가 생긴것처럼 보인다. 교도소에 가서 막상 유괴살해범을 마주하니 그자는 오히려 평온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하느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그제서야 신애는 분노와 슬픔에 울부짓으며 아들을 잃은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느냐고 목놓아 외친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 된 에마는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또래의 불량한 3명의 소년에게 납치되어 유린당하다가 과도한 약물주입으로 죽게 된다. 아무 생각이 없는 10대 후반의 소년들은 에마를 강가에 유기하게 되고 에마의 아버지 나가미네는 딸을 기다리다 불안감에 휩싸인다. 3명의 소년 중 실제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마코토는 나가미네에게 아쓰야와 가이지의 범죄를 인정하고 그들은 은신처를 알리는 메시지를 남긴다. 분노에 휩싸인 나가미네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아쓰야의 아파트에 잠입하여 그들이 딸을 유린하는 비디오를 보게 되고 때마침 들어온 아쓰야를 보고 광분하며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잔인한 복수를 마친 나가미네는 비디오에 등장하는 또 다른 범죄자 가이지를 찾아 남은 복수를 하고 자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후의 이야기는 나가미네가 복수를 하기 위해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 그리고 나가미네를 막기 위해 범죄자 가이자를 보호할 수 밖에 없는 경찰들의 수사 진행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그러한 과정 중에 경찰임에도 나가미네의 마음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오리베와 같은 형사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외에도 직접 강간과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비겁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마코토의 반응과 그의 아버지와 다른 소년들의 부모들도 피해자와 나가미네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죄하려 하기보다는 귀찮은 현실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에 반해 소설 후반에 등장한 와카코는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외딴 곳에서 아버지와 팬션을 운영하며 지내다 복수를 하기 위해 팬션에 머물던 나가미네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가 복수를 않도록 마음 깊이 그 슬픔을 헤아리며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결국 나가미네는 도쿄의 우에노역에서 가이자를 엽총으로 겨누고 살해하려다 와카코가 외친 그의 이름을 듣고 주저하는 사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너무나도 슬픈 결말이고 결국 희생당한 이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파탄낸 장본인은 경찰에 호송되어 끌려가고 끝난다. [최소한의 선의]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생각해보자.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 중에 실제로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가 자주 벌어지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법원에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자기 사는 집에 도둑이 든 판사는 이후 주거침입이나 절도범에 대해 엄청나게 형을 세개 내린다는 말이 있다. 그게 인간이다. 남이 일일 때와 자기가 직접 겪었을 때는 천양지차다. 정작 범죄로 인한 피해로부터 평균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법을 운용한다면, 실제 범죄 피해자들의 공포와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153)"


소설을 읽는 내내 나 또한 형사 오리베와 같은 무력함과 의구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는 도대체 뭔가? 오리베는 생각했다.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게 우리 일이다. 그럼으로써 악을 없앤다는 게 표면적인 목표다. 

하지만 이런다고 악이 없어질까? 체포해 격리하는 건 달리 보면 보호다. 일정 기간 '보호'된 죄인들은 세상의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대다수는 또 다시 법을 어긴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 오리베는 의문을 품었다.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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