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오피스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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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작가의 [백 오피스]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4번째 작품이다. 빌딩숲으로 가득한 도시의 점심 시간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서 있다보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한 손에 테이크 아웃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직장인들을 보게 된다. 목에는 회사마다 다른 출입증을 매달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보며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엄숙한 회의 중에는 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의견을 나누고 있을까? 아니면 사내 이슈의 주인공이 된 제3자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문의 진상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나누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도 잔소리와 신경질을 부리는 상사에 대한 뒷담화로 스트레스를 푸는 중일까? 직장인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회사란 그들에게 생계를 잇도록 월급을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면서 동료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보람과 뿌듯함이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기능만을 나열하기에는 현대 사회의 회사는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긴장과 불안에 휩싸인 곳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무한 경쟁 시대가 열리면서 직장 동료에 대한 시선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퀸스턴 호텔 백 오피스 강혜원, 태영그룹 대리 홍지영,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마이스 스타트업 기획사 임강이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혜원은 출산과 휴직으로 인해 동기인 선 차장에게 승진의 기회를 빼앗기게 되고 총지배인이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 하지만 아이에게 소홀한 찰나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태영그룹의 친환경 관련 국제 행사 진행에 지원을 한 신생기업 아트스틱은 태영그룹의 비리가 드러나는 뉴스가 보도되자 실낱같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만, 오히려 태영그룹 내에서는 그들의 이미지 전환을 위해서라도 친환경 주제 국제 행사의 규모를 더욱 크게 열어 시선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행사 전반에 대한 업무를 맡은 홍지영은 그의 사수 오과장이 이벤트 장소와 기획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모습에 사내 감사실에 내부 고발을 하게 된다. 배임혐의로 좌천된 오과장을 대신해 홍지영은 이미 선정될 예상이었던 대형 기획사를 대신해 아트스틱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게 되고 혜원과 홍지영 그리고 임강이의 협업이 시작된다. 

임강이는 그동안 호텔 그랜드 홀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어온 형식에서 벗어나 친환경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행사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내어 행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물과 자연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과감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홍지영는 오균성의 비리를 고발하고, 강혜원은 선 차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강이의 기획안에 진행시킨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3명의 프로페셔널한 주인공들은 그저 일이 좋아서 자기들이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자 하는 일념 하에 최선을 다하지만 빡빡한 예산에 물길을 내는 플라스틱의 두깨를 줄인 탓인지, 아니면 물을 세어 나와 행사장 카펫을 적실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에도 물레방아까지 허용한 탓인지 결국은 행사 시작 이후 참석자들에게 물이 쏟아져 내리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속된 말로 이런 엄청난 실수로 행사를 말아먹게 되면, 누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호텔의 책임자는 사표를 쓰게 되고, 대기업의 행사 책임자 또한 그에 응당하는 인사처리가 되고, 행사를 담당한 신생 기획사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혜원의 선택을 지원해준 부지배인 박윤수가 대신 책임을 지며 호텔을 그만두게 되고, 태형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하던 상사의 말에 홍지영은 사내 게시판에 친환경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면서 환경 파괴적인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한 모순과 이 행사의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린다. 2주 후에 임강이에게 걸려온 전화는 임강이와 알렉스가 새로운 회사를 차리고 대기발령 중인 홍지영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암시한다. 그리고 홍지영에게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혼자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는 선택으로 인해 호감을 가진 알렉스와의 만남까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의 준비한 행사가 망작은 아니었나보다. 

“일터뿐일까. 무언가 유지하는 데는 그것을 아끼는 어떤 이들의 마음과 그것을 받쳐 줄 희생이 수반된다. 가정의 화목함은 누군가의 배려와 이해와 희생이 후방에서 울타리를 치고 받들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95)”

“행복과 불안을 피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회피와 침묵이었다. 배워 아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익힌 거였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어떤 관계에서든 홍지영은 침묵으로 균형에 이르렀다. 회피는 마음의 상처를 덜어 주었고 침묵은 벽을 만들어 자신을 공고하게 지켜 주었다.(151-152)”

“그러므로 이 소설은 지긋지긋하고도 찬란한 세상에 매일 나를 밀어 넣으며 고행을 떠나는, 일하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애정의 메시지다. 저마다 맡은 일도 다르고 일하는 속도나 방법도 다르지만, 어쨌든 일을 하며 힘을 내고 인정을 갈망하고 보람도 느끼는, 자기 일을 매 순간 조금씩 해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진심의 응원이다. 무엇보다, 숨 쉬는 생명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이미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믿음의 이야기다.-작가의 말 중에서(23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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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마치 비트코인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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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작가의 [인생 마치 비트코인]을 읽었다. 제목만 먼저 봤을 때는 요즘 뜨거운 감자인 비트코인을 다룬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와 비슷한 소재가 등장하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잠깐 비트코인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 ‘나’의 삶에 있어서 비트코인은 벼락부자를 가능케 만들어주는 도박과도 같은 시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아무렇게 않게 내뱉는 평범한 삶이라는 것을 함묵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은 너무 무난해서 대충 혹은 아무나 쉽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화자인 ‘나’가 살아온 삶에 대한 독백과 403호에 살던 이의 일기를 통해 만난 여성의 삶은 그 평범한 삶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행운이 깃들여야만 가능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의 일부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고, 겉으로는 나보다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도움을 준다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의 시간은 단 1분 가까이에 머물 뿐 지금까지 내가 누리지 못한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온갖 것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의 풍선에 바람을 넣고 있는 형국이다. 


아주 편한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가 이성적이고 냉철하지 못하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말을 떠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얘기에서 저 얘기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사건을 정리하지 않고 때로는 뒤섞여서 말해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사과나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약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화자인 ‘나’가 오피스텔 관리인이 되어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을 처리하게 되는 약간은 으스스한 내용으로 시작되어 과거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다가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 그렇게 오피스텔에서 죽게 된 403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하지만 게으르게 생겼다고 첨언한 여성이 남긴 일기에 집중하게 된다. ‘나’가 주정뱅이 아버지와 못생기고 다리까지 절며 평생을 밭일에 매다린 엄마가 살던 시골집에서 벗어나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에 정착하는 내용은 마치 성장 소설처럼 그려진다. 그렇게 용산 전자상가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해본 ‘나’는 그를 잘 눈여겨본 오피스텔 건물주에게 관리인 일을 제안받게 되고 그곳에서 홀로 죽어간 이들을 마주하곤 한다. 


가욋돈을 만져볼 요량으로 특수청소업체를 부르지 않고 403호를 청소하다가 죽은 여성이 남긴 의문의 상자와 일기를 발견하게 된다. 상자를 열어보니 깨끗한 아이의 신발이 들어있고 일기를 읽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그녀의 이혼한 전 남편을 만나 아이의 신발을 돌려주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척같이 살아온 ‘나’는 타인의 삶에 무관하려고 했지만, 403호의 일기를 읽고나서는 그렇게 돌아가지 못한다. 그녀의 남편을, 그녀의 예전 직장동료를 만나 그녀의 죽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일기에 담긴 그녀의 어머니와의 삶의 고된 마지막 여정을 추모하게 된다. 마치 ‘나’의 삶이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작은 침대하나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아터진 구역처럼 ‘나’에게 주어진 삶의 운명은 결단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부모 복이 없는 평범한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비참한 삶을 살다가 403호의 일기는 그에게 별이 아닌 금성이 별처럼 빛나는 것이라 생각해왔던 그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퉁명스럽게만 통화하던 엄마의 시골집을 가게 만든다. 정신없던 주식장의 그래프처럼, 오로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투자했던 비트코인마저 그의 등을 돌리는 순간 화자인 ‘나’가 전해준 이야기들은 더 이상 의식의 흐름으로 아무렇게 나불거린 악취를 풍기는 토사물이 아니라 ‘나’와 독자인 나에게까지도 구원의 등불을 비춰주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은퇴 인터뷰에서 <이제 평범하게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게 정말 싫었다. 자기가 뭐라도 된 듯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 살다 보니 그들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배우자를 만나고, 은행 빚 별로 없이 아파트를 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은퇴 후 취미를 즐기며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중간에 자신 혹은 가족이 죽거나 다치는 일도 없어야 하니, 평범한 삶이란 곧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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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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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작가의 [호수의 일]을 읽었다. 엄마와 아빠와 나이차가 꽤 나는 어린 동생과 함께 얼어붙은 호수에 썰매를 타러왔다. 꽤나 다정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같지만 주인공 호정은 썰매를 탄다고 신이난 동생 진주와는 다르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엄마와 아빠의 권유에도 호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헤드폰을 쓴 호정은 사춘기가 한창인 예민한 언니의 모습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해 썰매를 타느라 신난 가족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빠가 말한대로 꽝꽝 얼어붙은 호수도 결국 계절의 변화에 따라 녹아버리고 마는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호정은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난다고 과거의 상처가 그냥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이렇게 한참 흐른뒤에 갑작스럽게 과거의 그 일 때문에 나는 아직도 분노의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고 말하 수 도 없다. 헤드폰을 쓰고 가족과 철벽을 치는 호정의 마음은 호정의 것임에도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음이 내 맘대로 정리가 된다면 우리는 좀 더 편히 살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꽤나 오래된 호정 나이 때의 시절이 떠올랐다. 궁금하던 차에 출신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익숙한 이름의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분은 지금 몇살일까 헤아려봤다. 그리고 호정이의 절친 나래와 지후처럼 그때 나의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들처럼 애틋하고 가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나의 기억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까? 급식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때라 점심 시간이 되면 각자의 반찬통을 열때 집중이 되곤 했다. 조금이라도 맛있는 반찬을 싸가지고 온 날이면 젓가락과 포크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순식간에 반찬통은 바닥이 보이고 때로는 혈기왕성한 녀석들이 힘조절을 못해서 먹어보지도 못하고 반찬통을 뒤엎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급식을 먹으며 커플 데이트를 하는 나래와 보람, 호정과 은기의 모습과 스타벅스에서 인강을 듣는 호정의 모습은 나의 학창시절과는 너무나도 달라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이지만, 시대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호정이 엄마와 아빠의 부재 기간 동안 느껴던 외로움과 은기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감정은 여전히 나와 같아 호정의 독백이 서린 많은 장면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입시지옥을 살아가는 여느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호정과 나래는 수업과 야자와 학원을 오가는 틈바구니에서도 연애세포의 재생을 멈추지 않는다. 나래와는 다르게 어딘가 시크해 보이는 호정은 전학생 은기에게 서서히 호감을 갖게 되고 버스를 타지 않고 자전거로 통학하는 은기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엄마, 아빠가 아닌 할머니네 집에서 자전거를 배웠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몇 년 동안 호정이 엄마와 아빠와 떨어져 지낸 이유가 밝혀진다. 그리고 7년 후에 태어난 진주는 호정이 누리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와의 친밀감을 보이며 사춘기에 들어선 호정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이유없이 까칠해보이던 호정은 은기와 사이가 가까워지며 드디어 '오늘부터 1일' 비슷한 연애를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 중학교 시절 호정을 어이없는 상황에 빠뜨렸던 모범생 곽근을 비롯한 무리로부터 은기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은기의 슬프고 아픈 과거는 호정과 은기의 만남을 가로막게 된다. 호정이 은기의 상처에 몰입하며 자전거라는 매개체를 통해 학교를 떠난 은기를 찾아나서 추위속에 지쳐 잠들어버리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오랜시간 자신도 모른채 텅빈 마음을 견뎌내며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어머 나 미쳤나봐'라는 황망함을 내뱉게 만들지만, 그 눈물을 보이게끔 만든 이는 얼어붙은 호수의 일을 알아채고 호정의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호수의 얼음을 녹이는 계절이 찾아오듯 우리의 상처와 눈물도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그저 내 삶의 한 장면이었음을 기억하는 시간이 오리라 믿는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136)"


"그때 할머니의 눈길이 내게 머물러 있음을 안다. 미안한, 안타까운, 애처로운, 딱한, 가여운, 짠한, 안쓰러운. 결국 그 모두는 사랑이라는 것도 안다.(144)"


"서운하다는 건,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에만 생겨 나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서운해지기도 하는 일인 모양이다.(181)"


"사람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모를까. 그 무엇보다 온전한 제 것인데.(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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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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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서영동 이야기]를 읽었다. "봄날아빠(새싹멤버)", "경고맨", "샐리 엄마 은주", "다큐멘터리 감독 안보미",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이상한 나라의 엘리"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서영동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는 가상의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을 배경으로 각각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연작 소설집이다. 나도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연립 주택을 시작으로 아파트에서 꽤 오랫동안 살아봤기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쉽게 몰입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아파트에 살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미 아파트가 넘쳐나는 것 같은데도 둘러보면 여전히 신축 아파트 공사장이 쉽게 눈에 띈다. 대체 이 많은 아파트의 주인은 누구일까? 인구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는데,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혹시나 빈 아파트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막연히 떠올려본다.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1980년대 이전에 결혼하신 분들의 경우 신혼부터 자기 집을 갖고 시작하신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삿말로 숟가락 두 개만 들고 시작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사글세, 월세, 전세를 거쳐 몇 십년 만에 드디어 자기 집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라의 사정도 어려웠고,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형편이었기에 자기 집 없이 결혼해서 서서히 살림을 넓혀가는 것이 당연하 수순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에게 그런 수순을 밟으라는 얘기를 쉽게 할 수 없다. 불과 몇 십년 만에 사람들이 느끼는 경제적 수준은 꽤나 올라갔고 상대적 부의 격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1년 내내 죽도록 일해도 천 만원을 저금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파트 시세 이익으로 수억원을 손 쉽게 얻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이 커져 있는 상황에서 예전 세대처럼 숟가락 두 개만 들고 시작하라는 말을 감히 누가 할 수 있을까? 사실 N포 세대라던지, 딩크족이라던지, 비혼주의라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생겨난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정상적인 벌이로는 평범한 삶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빚을 지고 부산동 중개인의 적절한 개입과 과감한 투자의 선택으로 24평, 35평 그리고 40평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 집을 장만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10억원이 넘는 집을 소유하게 된 희진의 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센스있는 아내이자 엄마의 모습을 모델로 하고 있다.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지향해온 이들에게조차도 가만히 있으면 손해이고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 과감한 배팅을 시도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의 상황은 수익을 떨어뜨리는 위험요소라면 매몰차게 유해시설로 치부해 버리는 님비현상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손가락질하고 험담했던 이들의 자세한 내막을 그려낸 저자의 단편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동의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누군가의 의 다정한 엄마이고, 무뚜뚝하지만 딸과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가리지 않고 나설 희생적인 아버지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정도 없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있다는 이해심이 생겨나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욕하고 미워한다. 그게 편하고 빠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바른영어수학학원 원장 경화가 생계가 빠듯하고 결국 살던 집에서 철거 시가가 다가와 오갈데 없어진 아르바이트생 아영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학원 옆 새로 지워지는 빌딩에 요양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다가 엄마가 초기 치매증상을 보인 것을 계기로 남의 사정을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싶다. 


"보미는 아버지가 검소하고 성실하고 영리한 어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대한민국을 살았던 운 좋은 기성세대라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규제가 촘촘하지 않고 취득, 양도, 보유에 따르는 세금 부담도 거의 없던 시절, 아버지는 투기에 가까운 횟수와 방식으로 부동산을 끊임없이 사고팔았다. 분양받은 아파트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지하철이 생겼고, 잘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던 아파트 건너편에 백화점이 들어왔고, 시끄러운 것이 유일한 단점이던 아파트 앞 대로가 지하화 되었고, 큰 욕심 없이 구입한 빌라 인근에 대규모 디지털단지가 조성되었다. 운도 좋았고 건설 경기가 호황이기도 했다. 이후 빌라를 원룸 건물로 리모델링해 월세를 놓았는데 디지털단지에 젊은 직장인이 많아 공실 한 번 없이 지금까지도 집안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고 있다. 아버지에게 집은 뭘까. 아파는 뭘까.(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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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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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었다. 서점 어플에 뜬 광고 문구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잡화점, 백화점, 편의점, 이번엔 서점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베스트셀러가 떠올랐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달러구트 꿈 백화점], [불편한 편의점] 그리고 이번 작품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까지. 잡화점과 백화점은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 주인공들에게 놀라운 일상이 펼쳐진다면, 편의점과 서점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주인공들의 평범한 모습 속에서 판타지 못지 않은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10여년 전 쯤 도서 정가제가 실행될 무렵에 더 이상 싼 가격에 책을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그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독립 서점들의 발전을 지켜보며 도서 정가제가 실행되길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대형 서점들이 떨이 판매를 하듯이 묶음으로 처분하는 것과 동시에 인터넷 주문으로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네 서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간간히 작은 서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독립 서점이라는 이름으로 여느 서점들처럼 베스트셀러 위주가 아닌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개성이 담긴 책 선정이 특징적이다. 특히나 소설에 나온 것처럼 서점은 더 이상 책을 팔고 사는 공간만이 아니라 저자와의 만남 또는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발견되고 있다. 인터넷의 넘쳐나는 플랫폼과 콘텐츠의 바다 속에서도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담긴 종이책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나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로마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유럽에 가면 비슷한 느낌을 가질 것 같은데, 바로 ‘아니 여긴 왜 이렇게 어두워’라는 반응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처럼 백색 형광등을 사용하지 않고 주광색 백열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에서는 아무래도 전기세가 이유일텐데, 백열등을 형광등으로 교체하겠다는 정부의 의견에 시민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마 형광등이나 LED등으로 교체한다고 해도 절대로 백색등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둡게만 느껴지던 주광색 백열등에 한 번 매료되면 오히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백색 형광등에 대한 거부감이 생긴다. 아마도 주광색이 주는 따뜻함 때문일 것이다. 

퇴근길 지친 발걸음으로 한숨과 푸념으로 오늘 하루는 간신히 마감했다는 생각으로 힘없이 걸어가는 도중에 집 근처에 은은한 주광색 불빛을 내비치며 누군가 고요히 책을 읽고 있고, 그 앞에는 가만히 커피를 내리고 있는 서점을 발견한다면 무언의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을까? 나도 그곳에 동참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잠시라도 머물수 있다면 방전된 나의 헛헛한 마음도 어느 정도는 충전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 휴남동 서점은 나름대로의 사정과 상처가 있는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재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처럼 어서 빨리 추스리고 일어나 너의 몫을 해내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한 것인지, 그냥 주어진 일을 해서 행복하지 않은지, 불협화음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화음이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그저 묵묵히 따뜻한 불빛으로 나를 기다려준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진짜 행복은 그렇게 말없이 기다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하루를 보내는 것일지 않을까.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하루들이 모여 우리의 일상을 적지 않게 채워간다면 성공과 성취라는 목표와는 무관하게 나를 의미있는 존재로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고 하잖아요. 밝아진 눈으로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요.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 강해져요. 바로 이 강해지는 면과 성공을 연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강해질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워지기도 하거든요. 책 속에는 내 좁은 경험으론 결코 보지 못하던 세상의 고통이 가득해요. 예전에 못 보던 고통이 이제는 보이는 거죠. 누군가의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데, 내 성공, 내 행복만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읽으면 오히려 흔히 말하는 성공에서는 멀어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책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 앞이나 위에 서게 해주지 않는 거죠. 대신, 곁에 서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른 면에서 성공하게 되는 거예요. 조금 더 인간다워지는 거요. 책을 읽다 보면 자꾸 타인에게 공감하게 되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절로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 하게끔 설계된 이 세상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좋아질 거라고 전 생각해요.(55-56)”

“지미의 말처럼 원두는 무한대의 경우의 수로 블렌딩할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배해도 원두 맛은 달라지고, 같은 원두라도 커피 맛은 달라진다. 자연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책을 읽는 일과 커피 내리는 일은 비슷한 점이 꽤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든다는 점이 그렇고, 한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고, 점점 더 섬세함이 요구된다는 점이 그렇고, 결국 독서의 질과 커피의 질을 좌우하는 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이 그렇다. 결국 독서가와 바리스타는 독서하는 그 자체, 커피 내리는 그 자체를 즐기게 되는 듯했다.(122)”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 사회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을지라도 매일매일 성공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거든, 그 사람들 덕분에.(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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