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김밥 : 힘들 땐 참치 마요 - 행복은 원 플러스 원 띵 시리즈 16
봉달호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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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호 작가의 [삼각김밥: 힘들 땐 참치 마요]를 읽었다. 부제는 ‘행복은 원 플러스 원’이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6번째 책이다. 편의점 점주 10년차이자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삼각김밥에 대한 내용을 잘 전달해주고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오마주삼아 삼각김밥을 의인화시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삼각김밥에 대한 책을 읽으며 언제 내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었나 떠올려보니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았다. 편의점 자체도 잘 가지 않지만 내가 직접 삼각김밥을 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고보니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바쁘지 않아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또 한 가지 삼각김밥을 먹은지 오래된 이유는 간식으로는 주로 빵을 사먹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간단하게 먹어야 할 때 주로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곤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음부터는 삼각김밥을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에서 자주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주인공이 맥주 캔을 들이키며 신세한탄을 한다던지,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던지, 또는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육탄전이 멀어지기도 한다던지 아무튼 편의점은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의 단골 장소이다. 특히나 자리세가 포함된 그럴듯한 호프집이 부담된다면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간단한 마른 안주에 만원에 4캔 짜리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 그야말로 경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편의점이 24시간을 영업하니 시간에 대한 구애도 받지 않는다. 여기에 허기를 채울만한 음식들이 꽤나 구성지게 진열되어 있으니 한 번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거리들이 인스턴트라는 선입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는데, 저자의 삼각김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고나니 삼각김밥이 꽤나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참치마요 하나에 컵라면 하나 땡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쓱 지나간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에서 공부꽤나 한다는 학생들의 상당수가 의대나 법대를 진학한다. 워낙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졸업을 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 자격을 얻고 나면 그야말로 철밥통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특히나 의사가 되면 웬만한 직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소득자가 된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고소득을 올리는 의사들을 옆에서 지켜보니 공부를 잘했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병원이나 학교에 소속된 의사들은 항상 점심시간에 회의를 한다. 서로 진료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오전이나 오후에 다 모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회의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면서 회의를 했다고 하니, 그게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맛을 느낄수나 있었을까.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도 눈치가 보여 회의 이전에 먹거나 이후에 먹을 수 밖에 없다. 의사들 중에 병원밥이 지겨워서 그런지 상당수가 병원 내에 있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그럴때 아마도 삼각김밥은 빠질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말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삼각김밥으로서 인간 세상을 감상하고 나름대로 내린 소박한 결론은 ‘사람 살아가는 풍경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것. 대기업 사장님, 법복 입은 판사님, 샐러리맨 용준 씨, 재수생 희선 씨, 여섯 살 희준이… 직업과 처지는 달라도 누구나 ‘밥심’으로 산다. 120g짜리, 210g짜리, 혹은 320g 고봉밥을 먹더라도 어쨌든 다 ‘밥’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 황금이나 이슬을 먹고 살지는 않는다. 부자라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를 게 있겠나. 사람은 법 앞에선 평등하지 않을지 몰라도 밥 앞에선 누구나 평등해진다. 나는 그렇게 밥의 평등에 기여하는 작은 삼각형이다.(170)”


“편의점 점주에게 삼각김밥이란 꾸밈없이 그런 존재다. 애증의 대상이다. 나를 먹여 살려주고 있으니 고맙고 기쁘기도 하지만 딱 일터에서만 상대하고 싶은 존재인, 마음속 경계선이 분명한 대상이다. 날카로운 당신은 이 책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착잡함과 애증의 감정을 진즉 눈치챘을 것이다. ‘파는 자’와 ‘사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의 감정과 계산은 다르다. ‘가끔 한 번’인 자와 ‘그것이 매일’인 자의 권태로움은 다르다. ‘즐기고 나서 버리는’ 자와 ‘치우고 정리하는’ 자의 고단함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상대성 가운데 어느 정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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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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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작가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었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굴 드라이브’, ‘결로’, ‘작정기’, ‘그런 나약한 말들’, ‘마음에 없는 소리’, ‘내가 울기 시작할 때’, ‘사랑하는 일’, ‘공원에서’ 이렇게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여성이고 30대 중반 이후의 나이대이며 일반적이 시선으로 보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기 보다는 아직 혼자이고 가족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길로 인해 가족들과 때론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는 여성들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인물들이 우는 장면이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는 것보다 우는 일을 더 공들여 했고, 누군가 그 울음을 가만히 들었다. 요즘 나에게 있어 글쓰기란 엉엉 우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온 힘을 다해 남김없이 잘 울고 싶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어디선가 혼자 우는 사람이 없는지도 돌아보고 싶다. 누구도 혼자 울지 않았으면 한다.(315)”


제대로 우는 일은 쉽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다가 감동적인 장면에 찔금찔금 흘러내리는 눈물로는 눈꼽만치도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기 마련이다. 제대로 울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일단 내가 울때 누군가 있어야 한다. 토닥이든 휴지를 건네든 살포시 안아주든 지금 내가 서럽고 폭발적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 울음을 갑작스럽게 멈출 외부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이 없어야 한다. 길 한 가운데에서 눈물샘이 폭발한다던지, 운전 중에 쉴세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면 내 눈물을 지켜볼 사람은 그 과정을 멈추려 할 것이고 나 또한 어디선가 브레이크를 잡으려 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화점이다.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 하나에서 어마어마한 산불이 시작되듯이 묵히고 쌓아두었던 내 감정의 강둑을 와르르 무너뜨릴 우연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모든 조건들이 잘 맞아떨어져 남들이 보면 대성통곡을 하듯이 눈물보가 터지는 경우는 평생에 걸쳐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아마도 어쩌면 엄청난 눈물의 폭발력을 감추고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인 것처럼 느껴진다. 재난의 연속도, 불행의 난타전도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주인공들의 삶이 고독해보인다. 그들이 눈물을 강둑에 차곡차곡 감아두고 싶지 않아도 한 방울, 한 방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견디고 감내하는 가운데 그렇게 쌓여가는 것만 같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의 어린 애인 진영이 나이든 상대의 건강 상태를 알고 떠나갈까봐 두려워서 검진 이후 결과를 알리지 않고 이별을 감내하는 것처럼, ‘굴 드라이브’에서 이주노동자 미셸과 함께 배달 일을 마치고 자신도 서울로 데려가는 말이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결로’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처음 만나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의 내용을 전해주다가 얻어입은 가디건을 결국은 헌옷 수거함에 넣으며 동생의 죽음을 상기하는 것처럼, ‘작정기’에서 갑작스런 원진과의 일본 여행이 틀어지고 홀로 떠난 곳에서 만난 유코에게 원진이 죽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결국은 사실이 되어버리는 위로의 재회를 통해서, ‘그런 나약한 말들’에서 정은은 친구 혜수를 통해서 자신이 돌아가신 선생님과 함께 시간이 때론 스토커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에서는 할머니의 휴업한 식당을 이어받아 고향에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려는 나에게 화영과 민구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찾다가 그들과는 다르게 같은 공간에서 예술적인 행위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하면서, ‘사랑하는 일’에서는 영지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마, 아빠, 할머니의 태도에서 상처를 받고 미워하며 결국은 영지에게서 끔찍해하는 아빠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에, ‘공원에서’는 불륜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공원을 지나치며 겪게된 끔찍한 일을 통해서 울음을 터트리거나 울음이 시작된다. 


“한바탕 울고 난 다음에도 완전히 용해되지 못한 어떤 것들이 천천히 가라앉아 앙금이 된다. 앙금이 부정적인 걸 이르는 말이라면 긍정의 감정으로 가라앉은 것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누나, 긍정의 감정은 다 녹아들겠지. 가라앉을 리가 없잖아.(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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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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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의 [돌보는 마음]을 읽었다. 소설집으로 ‘대추’, ‘안’, ‘경자’, ‘연주의 절반’, ‘조리원 천국’, ‘돌보는 마음’, ‘내 이웃과의 거리’, ‘입원’, ‘특별재난구역’, ‘태풍주의보’ 이렇게 여러 편의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연작 소설이 아니기에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이 모두 다 다르고 배경도 정황도 다르지만,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금방 몰입할 수 있었고 매 순간 난감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가 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주 가끔씩 간난 아기를 마주할 때가 있다. 한 번 안아보라는 권유에도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아직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행여나 떨어드릴까 두려워 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그냥 괜찮다며 손사레를 치고 아기의 볼을 살짝 눌러볼 뿐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를 볼 때마다 항상 비슷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기가 나중에 그렇게 변한단 말이지? 어떻게 변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평생 해야 할 효도를 몸도 못 가누는 시기에 다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옹알이를 하며 먹고 자고 싸는 일 밖에 안하는데도 부모들은 아기가 예뻐서 어쩔줄을 모른다. 


내가 일하는 곳에도 조만간 출산을 위해 휴직하는 분이 있다. 잠깐 얘기 나눌 시간이 있어서 언제가 출산 예정이냐고 휴직 기간은 얼마나 되냐고 묻자, 석달 후에 돌아오고 싶은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아이가 중요하지요’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인공수정과 관련되어 야기되는 문제 중에 대리모와의 계약을 인정하느냐가 있다. 극단적인 주장 중에 여성의 경력단절과 임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몸매를 유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대리모를 통해 유전적 결합을 유지한 자녀를 낳겠다는 내용도 있다. 아마도 이런 주장을 내뱉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경력단절이 얼마나 큰 삶의 위협으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기와의 9개월 동안 이어질 단독적이고 직접적인 연결의 시간을 포기할 정도의 위협이라면 저출산의 통계률을 들먹이며 자못 심각한 도표만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전면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표제작인 ‘돌보는 마음’에서도 주인공이 시터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 신경쓰는 모습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바쁜 와중에도 경험이 있는 친구의 조언을 듣고 면접을 하고 한 달 월급의 반을 쏟아부을 정도로 비용이 소요되는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만 경력단절이 되지 않고 원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팀장으로 승진한 이후 덜컥 아이를 갖게 되어 휴직을 하는 동안 입사한 사무적인 계약직 직원으로 인해 한차례의 소동을 겪게 된다. 주인공은 상사에게 불려가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말에 팀장을 맡겨준거라며 마치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된 것이 회사에 커다란 손해라도 끼친 것처럼 말한다. 불의하고 용납될 수 없는 말이지만 이렇게 비겁한 상황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닌 실제상황에서는 더욱 난감하고 비참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소낙비 같은 시련을 견뎌내는 것만이 자녀를 돌보는 길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용납할 수 있을까? 


“미연 씨, 힘들어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버텨야 해. 난. 쌍둥이라 시터 월급 빼면 진짜 남는 게 없었어. 회사 다니면서 내가 쓰는 돈까지 생각하면 마이너스였다니까. 그래도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연 씨도 아이 키우는 동안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버티면서 커리어 지켜.(158-159)”


“[돌보는 마음]은 남을 돌보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된 여자들의 삶에 주목한다. 가족로망스의 주인공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이 ‘평범한’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면서도 자기만의 집을 짓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로망스는 서늘하다. 어머니와 딸, 아내와 남편, 친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둘러싼다. 어머니가 집을 떠나지 않고 가족을 지키며 유지되었던 돌봄은 이제 대부분 경제적 비용으로 환산된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기꺼이 이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경력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길 위의 삶은 누구에게나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외된 삶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읽는다. 김유담의 ‘우리 집 이야기’가 여러 독자에게 가닿는 것은, 그 어떤 집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작품 해설 중에서(296-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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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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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외국에 나가서 살려는 사람이 긴장과 두려움에 휩싸이면 흔히 이런 말로 위로한다. “너무 걱정하지마.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해” 반은 맞는 말이면서도 반은 틀린 말 같다. 이 세상 어디든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응당 비슷한 인간 삶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에 언어와 문화와 음식이 다르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된다 하더라도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내 피의 원천에 대한 갈증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저자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엄마와의 이별과 회복의 시간을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에세이가 아니라 한 편의 성장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자가 묘사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엄마가 투병하는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내용들은 유사한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엄마의 병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은 눈물이 맺히지 않고서는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애절했다. 


암이란 병은 우리의 삶을 갈갈이 찢어놓아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까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주변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으며 변해가는 외모를 지켜봐야만 하는 시간을 견뎌내지만, 그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안고 산다. 행여나 가까운 사람의 가족 중 누군가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앞으로 펼쳐질 지인의 힘든 시간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가족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얄팍한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그런 일은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데 라며 순간적인 변명을 하지만 실상 그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저자가 엄마와 보낸 유년 시절은 우리나라처럼 작은 땅덩어리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좀처럼 겪기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주변에 집이 아무도 없는 마치 산골 깊숙한 곳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딸을 키우는 삶이란 어쩌면 가슴이 터져버릴 만큼 답답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집안일을 하고 자신을 먹이며 키워온 시간을 경멸한다. 애틋했던 모녀간의 관계는 저자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까지 극에 달하게 되고 사춘기를 극복한 저자가 다시 엄마와의 평온함을 되찾을 무렵 마치 누군가 그들 모녀 사이를 질투라도 하듯이 엄마에게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의 질병이 발견된다. 


엄마의 병세가 심해져 한국에서의 여행을 계획하지만 상태가 악화되어 간신히 오리건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며 저자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보여드리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피터와의 결혼식을 무사히 고향집에서 치뤄지고 마치 엄마는 딸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결혼식을 견뎌낸 것처럼 사위와 춤까지 추게 된다. 엄마에게 결혼식을 보여준 후 이제는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아프다는 말과 함께 의식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디 잠시라고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라지만 엄마는 그렇게 딸과 이별을 한다. 엄마의 몸을 사람들이 옮기기 전에 혼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힐때 얼마나 많은 격정의 울음을 토해냈을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럼에도 저자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는 가운데 상실에 대한 아픔을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음식을 재생하는 방법을 통해 조금씩 회복해 간다. 계씨 아주머니가 엄마를 돌보며 알려주지 않았던 잣죽을 망치 여사의 영상을 통해 만들어 맛보며 부드럽고 고소한 잣죽이 목으로 넘어가며 저자의 마음 속의 생채기를 따뜻이 감싸주지 않았을까 싶다. 감히 저자의 슬픔과 아픔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때밀이 아줌마에게 몸을 맡기고 찜질방에서 몸을 노곤하게 녹이며 받았던 치유의 시간이 앞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힘겨운 시간을 기억하며…


“진행자 제임스 립튼은 이 배우에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248)”


“이러나저러나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와닿은 부분은, 시종일관 어머니의 투병과 때 이른 죽음이라는 무거운 상실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추억하면서 부지런히 자기 치유와 타인과의 연결과 소통을 도모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저자의 건강한 삶의 태도였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막막한 순간이 오더라도 어디엔가는 반드시 당장의 숨구멍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고, 하루하루 그런 반짝이는 구멍들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라고 그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옮긴이의 말 중에서(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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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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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작가의 [헬프 미 시스터]를 읽었다. 전작인 [당신의 4분 33초]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도 평범해서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무색무취의 공기처럼 존재감 제로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굵은 조각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돌판에 새겨주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무색무취하지 않다고,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재단해서 없었던 것처럼 지워낼 수 없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수경, 우재, 여숙, 천식, 보라, 은지의 흔적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온 우주가 그들을 기억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릴때에는 막연하게나마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특별한 사람이 되기도, 유명한 사람이 되기도 원치 않았으면서도 말이다. 마치 유명세와 잘난 능력 덕분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것 같은 관심은 귀찮으면서도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은 놓고 싶지 않았던 양가감정의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특별한 사람은 커녕 일상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얼마나 엄청난 노력과 행운이 깃들어야 하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무일이 없다는 것은 노잼처럼 지루한 일이지만, 가족 중의 누군가가 큰 병을 앓게 되거나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면 그때서야 그 노잼의 하루가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리고 다시 그 노잼의 하루를 만회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일상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수경은 어쩌면 그렇게 일상적인 직장생활로 조금씩 능력을 인정받으며 살아온 평범한 딸이자 아내였다. 그런 그에게 매일 마주하고 때론 친절을 베풀던 직장동료가 회식자리에서 약을 탄 음료를 건내며 모텔에 데려갔다가 모텔 주인의 신고로 미수에 그친 일이 벌어진다. 소설 속에서는 수경이 겪었던 지옥같은 시간이 묘사되지 않지만 그녀가 다시금 세상의 일원으로 회복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어떤 고통의 늪을 지나와야 할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수경의 남편 우재는 직장을 그만두고 몇년 간 선물거래로 한 밑천 잡으려 하지만 터무니없는 그의 바람은 그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소설의 서두에서 수경의 직장생활로 먹고 살아온 남편 우재와 잘못된 투자로 집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수경의 집에 얹혀 살게된 수경의 모 여숙과 부 천식의 모습이 몹시도 무능력하고 나태한 것처럼 느껴진다. 수경이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제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혹시 이 집은 수경의 겪었던 일을 나몰라라 하는 염치없는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들에게 정당한 반론의 기회라도 얻은 것처럼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의 쳅터 제목으로 붙이며 지금의 말이 안나오는 처지에 이른 내력을 덤덤히 전해준다. 우재가 순진하게도 선물거래로 돈을 벌고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망언에 가까운 판단을 내려 실직자가 되었음에도 그가 가진 선함과 대리기사를 비롯한 다양한 노동의 현장에 복귀하려는 모습은 그가 막되먹은 놈팽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비록 천식이 집을 날려버리고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고 오는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처럼 비춰지더라도 회비를 내지 않아서 고깃집에서도 된장찌개에 밥만 먹고 오는 우직함을 가진 아비임을 알게 된다. 수경의 엄마 여숙은 언제든 청소할 준비를 위해 고무장갑을 뒤춤에 넣고 다니며 다시 운전을 배워서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준비성을 갖추고자 한다. 


수경은 되도록이면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워 플랫폼 앱을 통해 일을 할당받는 개입 택배사업자의 일을 시작한다. 때로는 우재가, 때로는 엄마 여숙이 함께 하며 서서히 택배 노동에 익숙해지지만 그 일도 영원히 사람을 마주하지 않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수경과 여숙은 <헬프 미 시스터>라는 또 다른 플랫폼 앱의 일에 지원하여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의뢰를 맡게 된다. 첫 의뢰는 집에서 거행되는 스몰 웨딩에 엄마와 언니로서의 대리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라는 새로운 플랫폼 사업은 여성들이 안전하게 의뢰를 하고 의뢰받은 일을 무난히 해내며 돈을 벌 수 있는 형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평점과 수시로 변경되는 조건들은 수경과 여숙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음식배달을 시키고 운전을 할 때마다 곡예운전을 하는 라이더들에게 불평을 내뱉곤 했는데 그들도 플랫폼 노동자였다. 필요한 물건이 생길 때마다 앱을 열고 클릭 몇 번으로 주문완료 하고 빨리 택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수경처럼 아무런 노동 현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입사업자로 등록된 이들이 상당수임을 알게 되었다. 사이버 프롤레타리아 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면 언젠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부당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이버 쟁의가 반드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노동의 형태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테두리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다시금 과거의 부조리함을 반복시키는 오늘날의 문제점과 전통적 가족의 형태만을 강조해온 사회 문화 안에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원하는 이들의 반목 또한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된다. 읽는 내내 보지 않으려고 하면 그냥 지나처버릴 수 있는 남 얘기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관된 냉소적인 자세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간다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가난이 드러나는 지점은 옷과 얼굴이 아니라 손등과 발꿈치, 정수리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61)”


“가장 큰 문제는 근로자를 사업자라 칭하고, 고용주를 중개자라고 칭하는 거야. 자기들은 그저 중개만 하니까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지. 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고 파견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이젠 앱이나 웹 같은 플랫폼으로 일을 시켜.(159)”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수경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렇게 결론내릴 때마다 늘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수경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수경을 지켜보는 보라가 받고 있는 고통이 수경의 고통보다 더 클 수 있다고. 그리고 수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수경의 사건을 기사로 접하고 받는 고통이 수경의 고통보다 더 클 수 있다고. 그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총체적 가해의 형태를 이해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수경은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있는 동안 차츰 보라의 아픔이 만져졌다.(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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