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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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작가의 [소설 만세]를 읽었다. 민음사 매일과 영원 6번째 에세이다. 소설가의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탄과 감동에 빠지며 동시에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분명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소감이나 이번 책처럼 여러 편의 소설을 출판한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읽게 되면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소설가들도 글이 써지지 않아 고뇌하고 자기가 쓴 글을 몇 번이나 되고치며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또 다른 위대한 작가들을 선망한다. 대체 소설가와 같은 이들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건 마치 유명한 쉐프가 오늘 음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나도 그럴듯한 요리를 쓰레기통에 처 넣은 것과 같은 나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 아닐까?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는 불같은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로 단숨에 멋진 소설과 시와 평론을 완성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왔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작가들이 일정한 루틴을 유지하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치 출근과 퇴근 도장을 찍듯이 글을 써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아 그들도 사람들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출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처럼 글이 써지던 안 써지던 무작정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예상밖의 위로를 전해준다. 그동안 감동하고 열렬히 지지해온 소설가들의 글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번쩍하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공평하고 나와 별다르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애쓴 노력으로 나의 삶을 위로해주듯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와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일상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써야 한다는 뜻밖의 깨우침 또한 전해준다. 


아마도 뒤늦게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저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저자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 것 같다. 사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하면 의례히 고전들을 다 섭렵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자신이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아 의기소침했음을 고백하고 뒤늦게라도 위대한 작품들을 읽으며 소설가로서의 삶을 준비한다. 사실 그렇다. 고전이라 칭하는 또는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쉼없이 읽고 쓰기를 지속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글에 대한 비평과 반응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늦었다 생각되지만 지금이라도 다양한 작품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때로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라 글쓰기를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드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사람들은 분명 이야기를 원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투영하게 되는데, 그런 밑바탕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이들이 쓰고자 하는 선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그럼에도 저자의 제목처럼 ‘소설 만세’라고 후회없이 외치는 이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어느 정도 빚진 시간을 갖게 되고 뿌듯한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우리는 질문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런 꿈을 가지고 있나요? 왜 그것을 좋아하나요? 왜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나요? 왜 요즘 같은 시대에 당신은 읽기와 쓰기를 하나요? 그것이 재밌나요? 좋나요? 심지어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혹은 그것은 내 기준에 별로 좋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39)”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비극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그 인물의 내일과 미래다. 어쩌면 진정한 이야기일지 모르는 삶이 작가의 무책임한 엔딩으로 인해 영원히 고통과 슬픔으로만 기입되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고통 이후 계속될 삶을, 소설은 말하거나 열어 줘야 한다. 사건이 발생했고 충격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통증을 느꼈고 슬픔 혹은 분노로 일상은 잠시 마비됐을 수 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계속 산다면, 계속 살기로 했다면, 그 경험에서 살아남았다면, 상처는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흉터는 남겠지만 그것은 새롭게 차오른 살일 뿐 영원히 지속되는 상처는 아니다. 

세월이 흘렀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유로 인해 회복되었다는 것.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다. 근거 없는 낙관도 아니다. 신파와 낭만으로 가득한 해피엔딩도 아니다. 사실과 진실의 영역이다.(88-89)”


“일상에서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다. 좋은 책을 읽어도 말할 사람이 없다. 가령 친구를 만나면 이런 대화를 한다. 

-이번에 김연수의 신작을 읽었는데 정말 좋았어. 

김연수? 누구

-‘고도를 기다리며’를 최근에 다시 읽었더니 다르게 보이더라.

아, 나 그거 들어봤어.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글이 너무 안 써진다.

나도 출근하기 싫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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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운
문경민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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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민 작가의 [화이트 타운]을 읽었다. 누아르 영화를 보면 가장 악독한 놈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첫 장면의 자극적인 액션과 극악무도한 폭력이 난무할 때면 ‘아 이 놈이 정말 나쁜 놈인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그렇게 쎈 놈처럼 보이는 놈도 알고보면 누군가의 수하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악독한 놈을 지배하는 또 다른 실세가 등장하고 그렇게 실세로 보이는 완벽무결한 놈처럼 보이는 이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진짜 지시를 내리는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기도 한다. 처음부터 워낙 센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2시간이 지날 무렵에는 웬만한 폭력과 잔인한 장면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저 가기에 차라리 진짜 쎈 놈이 등장하지 않는게 오히려 신비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대체 폭력과 악독함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폭관련 영화는 지금도 끝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어쩌면 그런 영화의 원작이 될 만한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누아르 소설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터너처럼 휘리릭 전개되는 이야기에 금방 몰입되고 과연 주인공들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진다.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 중의 하나를 고른다면, 소설은 영화보다 결말을 확실히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이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지만 만일 주인공이 비참하고 어이없게 죽음을 당하고 악의 세력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속된다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이들의 마음이 고구마를 급히 먹은 것처럼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처럼 끝맺는 경우가 거의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비극적인 결말도 많고 아예 결말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영화처럼 속이 답답해지지는 않는다. 텍스트와 영상의 자극에서 오는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이 영화처럼 해피엔딩을 그리려고 한다면 소설을 지금처럼 많이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소설의 마지막은 장걸의 액션신이 과도함을 갖고 있음에도 자영의 이기적인 선택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리고 자영이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실제적인 배경으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지보유세에 대한 쟁점을 부각시킨다. 자영에게는 자폐 장애가 있는 남동생이 있다. 얼마전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자폐 장애가 있는 동생을 둔 주인공이 연애를 하다가 어차리 동생 때문에 상처 받을게 뻔한 결말을 두려워하며 일방적인 이별을 고한다. 소설 속에서도 자영은 장걸과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을 느끼며 일부러 장걸에게 동생 준호를 맡긴다. 장걸은 준호를 맡은 2박3일 동안 분노와 인내와 시름하며 만일 자영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준호에 대한 책임이 생길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제3자로 지켜보는 것과 실제로 준호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된다. 


장걸의 엄마인 중선은 창현의 돈세탁 하수인이 되어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선이 창현에게 얽매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중선은 어째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장걸을 학대하며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일까? 같은 아파트 이웃으로 만난 자영과 준호에게는 아주 다정한 엄마처럼 지내면서도 샤또 오 브리옹을 마시면 멈추지 못하는 알콜릭 증세는 왜 생겨난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을 자아내며 특수학교 건립의 찬반대로 창현이 만들어낸 지주회라는 불법을 자행하는 조직과 자영의 주도로 모인 몇 장애인 가족들의 대립이 소설의 긴장을 극대화시킨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이 마치 신의 계명처럼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평범한 사람이 큰 돈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아니면 부동산을 통해 큰 돈을 버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복권 당첨자야 워낙에 드물고 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덜하지만, 부동산의 경우는 다르다. 한 다리만 건너면 부동산으로 수억을 손쉽게 번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기본 자산이 있어야 부동산에 투자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런저런 온갖 방법 요즘은 영혼까지 끓어모은다는 영끌로 투자하여 재수가 좋으면 집값이 오르고 수천에서 수억을 벌게 된다. 그래서 집값을 떨어뜨리는 각종 혐오시설이 자기 집 앞에 세워지는 것을 결사반대한다. 이런 님비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이런 이기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해결책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영을 도와주는 국회의원 강정혜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지만 그녀는 창현의 윗조직을 대항하여 토지보유세가 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열심히 애쓴다. 강정혜의 주장대로 토지보유세가 제정된다면 땅 투기를 비롯하여 과도한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된다. 이 이상적인 법안은 적지 않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땅을 가진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강정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눈엣가시 거리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을 평생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영은 우청식과 손을 잡게 된다. 단지 특수학교를 건립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하지만 자영의 선택은 중선의 죽음과 스스로를 악의 세력에 옭아매게 만들고 미래를 상상할 정도로 가까워진 장걸에게 큰 아픔을 주게 된다. 자영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자영을 욕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핵심은 불로소득이었다.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됐다. 불로소득을 마음껏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가진 사람들만 신나는 세상이 될 터였다. 가진 사람들이 앉아서 부를 쌓는 동안 없는 이들은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서 번 임금의 4분의 1이 넘는 돈을 집세로 내야 하는 세상이 강정혜는 싫었다. ~~ 토지보유세는 모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 전액을 전국민이 똑같이 나누는 제도였다. 토지보유세는 단순했다. 토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내는 것 없이 받기만 하면 됐다. 필요한 토지만 소유한 사람들은 부담보다 혜택이 많았다. 토지를 과하게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은 혜택보다 부담이 더 많았다. 간단한 만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제도였다.(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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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게임즈 :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오늘의 젊은 작가 38
심민아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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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아 작가의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8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아직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않고 있는 발표작도 많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기에 매번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때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소설의 형식인 경우도, 난해한 내용이 전개될 때도 있어 전작을 전혀 읽지 못한 작가의 책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번 작품은 제목부터 몇 번을 읽어야 기억될 정도로 뭔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소설 속으로 들어가니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내용은 제목의 첫인상처럼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제목부터 게임이 들어가니 당연히 게임에 대한 내용이 나올 것이고 소설의 도입부터 게임에 관한 전문용어들이 난립하기 시작해서 이걸 끝까지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들었지만, 소설의 주인공 조유라 또한 게임의 문외한이기에 주인공의 심리에 빙의되어 게임을 저주하고 거부하면서도 입에 풀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장생활에 젖어들어갔다. 


소설의 시작은 조유라의 출근장면부터이다. ‘늦잠과 버스 연착과 미친 날씨. 망할 트리플 콤보’라는 첫 줄부터 어떤 가림막이 제거된 듯한 속살의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주인공이 출근하는 곳은 키코라는 거대한 게임회사이지만 그녀는 게임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문과를 나온 인문학도였다. 인문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 법이라고는 없지만 소설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듯이 행여나 SNS나 유튜브에 발끝이라도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관종의 유행병에 전염된 요즘 젊음이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관심도 없는 게임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경력 관리에 도움이 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동생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조유라에게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200개가 넘는 자기소개서의 파일 목록을 보며 조유라는 어떻게 해서든 매달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키코게임즈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한 키코게임즈는 아마도 실제 우리나라의 대형 게임회사를 모티브로 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TV광고 중에 아주 고퀄리티의 마치 밀레니엄을 앞둔 시기에 뮤직비디오가 유행했듯이 영화같은 그래픽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광고인가 라는 생각이 들무렵 갑자기 화려한 최첨단의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나오며 육감적인 몸매를 뽑낸다. 그래픽도 상당하지만 그 게임을 소개하는 이들도 유명한 연예인이 대부분이다. 그런 광고를 볼 때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게임을 많이 하길래 게임 광고가 끊이지를 않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이미 꼰대가 되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PC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스타크래프트를 몇 번 시전해보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의 조유라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조유라가 키코게임즈의 게임룸에서 3D 게임을 몇 번 하고 나서 극심한 멀미 증세와 몸살까지 난 것을 보면 요즘같이 난해해 보이는 전략게임은 아무나 할 수 없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조카들이나 학생들을 보면 하나같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게임 얘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이상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인가란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조유라의 키코게임즈에서의 고군분투기는 게임 용어를 몰라도 꽤나 재미있다. 입사 후 처음 발령받은 월드팀에서는 사실 거의 게임과는 상관없는 업무를 배정받았다. 회사 생활을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회사든 인사팀과 기획팀 같은 곳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어쨌든 회사의 사업 핵심을 구성하는 부서들이 힘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곳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인정받고 승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업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주는 부서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게임 회사라면 소설에도 나오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장 중요시 할 것이고, 기껏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고 해봤자 어차피 싸우고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는 내용이지만 그럴듯한 서사와 언제든 감각적인 성적 요소들을 교묘하게 삽입하여 게임 참여자들이 떠나지 않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중요해 보이는 일들 외에도 여타의 사무적인 절차를 진행시킬 사람이 필요한데 조유라는 키코게임즈에서 그런 업무를 배당받은 것이다. 그렇게 월드팀이 해체되고 드디어 오메가3 라는 게임을 만드는 부서로 배치 받게 되지만 조유라는 팀장과의 첫 면담에서부터 어긋나게 된다. 어찌보면 인문학적 사고와 정의를 갖고 살아온 이에게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오로지 가성비와 서열을 따지며 자극적인 게임을 구성해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았을까. 조유라의 사고 체계를 가장 크게 흔든 사건으로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오메가3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조유라와 다른 부서에서도 유사한 이유로 발탁된 이들은 장차 게임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대학생들의 인턴쉽 프로그램의 멘토로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유라는 어떤 대학생이 만든 게임을 보고 이런 게임을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 게임은 장애를 가진 이가 장애를 극복하여 끝까지 도달하게 되면 비장애인들이 환호하는 것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안에서 네모가 극복하는 내용이었다. 조유라는 이런 생각은 분명 문제가 있기에 이상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지만 학생은 생각을 많이 했다며 유라에게 반문한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노오력과 장애와 인정이 결코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약육강식이란 것은 너무 당연한 세상의 진리라고 항변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이 강한 쪽에 서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 자신감. 강한 쪽에서 육식을 실컷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 자신감. 나로서는 도저히 그 근거도, 출처도 짐작이 안 되었던 자신감. 그건 대체 무엇있을까…(200)” 


이제 제목의 뒤에 붙은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에 담긴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혜를 갖고 자기 보다 힘센 동물들을 지배하는 인간의 학명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상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밟고 일어서는 것에 심취하는 시간을 습관적으로 갖게 된다면, 우리 몸 안 저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광기가 아주 비좁은 틈을 열고 나와 호모사피엔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습지만,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는 사이에서 누구가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이면 된다. 일머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을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다. 마음과 호감의 문제랄까. ~~ 인간은 마음의 동물이고, 마음은 호불호의 동물이다. 한 번 좋음의 궤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좋으므로 좋고, 좋아서 좋으므로 더 좋게 된다. 그 무서운 원심력은 잘 깨지지 않는다. 거의 무한 동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또 반대로, 한 번 싫음의 궤도에 올라타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싫으므로 싫고, 싫어서 싫으므로 더 싫은 악순환. 이것은 영구 기관의 반대편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차분히 지켜 나간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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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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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 작가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읽었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윤광호",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알 것 같은 밤과 대부분의 끝",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첫 번째 장편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퀴어 문학의 포문을 제대로 열어졌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명실상부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방콕]에서도 느꼈지만 퀴어라는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가 지닌 특징을 배제하더라도 저자의 글은 어느 때는 너무 간절하고 슬프도록 아름다워 한 동안 그 문장에서 계속 머물게 만드는 저력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지'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문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매우 진중하고 새드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별안간 터지는 터무니없는 개그력에 또한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지난 장편소설을 읽을 때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유명한 연예인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감추기를 그만두기까지의 용기를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제3자의 시선에서 퀴어에 대한 소재가 펼쳐졌다면, 이번 소설집은 화자가 '나'라서 그런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7편의 단편이 조금씩 다른 환경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한 사람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이렇게 다채로운 만남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제작년 이태원발 코로나 사태가 정점에 달했을 때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과 모욕은 끝을 모를 듯 정점을 치닫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한 개인의 이동 경로를 동의도 없이 까발릴 수 있었을까 반발감이 들지만, 당시에 목숨을 저당잡힌 것 같은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개인정보 정도야 당연히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마땅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정의는 소멸해버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확진자 추적이 불가능한 유럽의 문화를 지탄하며 확진자가 폭주하듯 늘어나 장례조차 제대로 치룰 수 없는 상황을 비웃곤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뿌리깊은 서구에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한 개인의 인권이 마구잡이 취급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미지에 마주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또 다시 개인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까? 아무튼 이태원발 코로나는 그곳을 다녀간 이가 거짓말을 하고 그로 인해 학원을 다니던 학생들이 감염되고 학부모들의 엄청난 항의로 일파만파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그 학원강사가 이동 경로를 거짓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웃팅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별 생각없이 내뱉었던 무심한 말들이 그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닌지 착찹함이 밀려왔다.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방역을 빌미로 연일 게이 혐오 기사가 쏟아지고 폭력적인 아우팅이 자행되던 그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 혹시나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될까 봐 공포에 떨며 숨죽였던 상황 속에서, 단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192)"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소설가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실제 삶과는 다른 이야기만 쓸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내 아무리 꾸며내는 가공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도려낸다면 그건 결고 진실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에서는 큰 감동을 받았다. "혐오와 비난, 배제와 박탈, 우울과 고립, 질병과 고통, 그리고 성소수자와 자살(204)"이라는 상황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는 누구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이 자신의 소설을 진실하게 마주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윤광호가 이러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이러한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없는 세상을 이끌어낸 '나'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이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20)"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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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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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었다. 부제는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이다. 제목과 부제부터 묵직한 어두움을 안겨준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두배 이상으로 연장시켜주었다. 이제는 백세시대라는 말이 그냥 막연한 꿈이 아니라 실재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고 오래 산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체감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인간의 삶이 남긴 흔적은 먼지처럼 흐릿할 뿐이지만 개개인이 겪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참으로 지리멸렬한 시간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안락사'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안락사와 자살이 뭐가 다르냐는 듯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생명연장의 가속도가 붙으면서 또한 웰빙과 더불어 웰다잉이라는 말이 번져가면서 안락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조조 모예스의 [미비포유]라는 소설을 읽기 전에 스위스에서 실제로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설에 나오는 이그니타스라는 병원은 실제하며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시기에 자발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벌써 수년 전이니 아마도 지금은 스위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어느 곳에서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실행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8년 연명의료 결정법이 실행되었다. 사실 연명의료 결정법이 법적으로 공표되고 법적 효력을 갖기까지 논의된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야의 문제였다. 오용과 잘못된 이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불필요한 치료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의 상황을 받아들여 임종기에 이른 사람에 한해서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문서가 법적 효력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되고 공표되기까지 가장 염려한 부분이 바로 안락사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란 우려였다. 이런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얼마전 어느 국회의원이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취지의 법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연명의료 결정법에서도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연로한 어른들은 아직 큰 병을 앓고 있지 않아도 혹시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어차피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느니 차라리 좀 더 상태가 원만할 때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의 일반적 상태가 아닐까 싶다.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배변을 배출해야 하거나 제대로 먹지고 마시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될까 두렵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존엄한 죽음이라는 표현은 아직 죽음과는 먼 거리에 있는 건강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막상 나 자신이 생사를 오가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온전히 대소변을 자발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차이가 과연 임종자에게 존엄함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 이후의 경험을 듣고 볼 수 없기에 죽는 자가 존엄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이 스스로 존엄함을 느끼고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삶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죽음 또한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조작하고 선택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안락사 현장에 대한 동반기는 페이지를 넘기기에 참으로 힘든 시간이지만, 가족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안락사를 선택한 이의 여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권리로 생각하며 안락사를 법으로 제정하고 싶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생명연장이라는 꿈같은 일이 가능해지는 세상에 이렇듯 개인주의적인 선택의 만연이 팽배해질 상황에 저자의 맺음말이 더욱 깊이있게 와닿는다. 비록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인듯 하지만 그 개인이 함께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속된다. 나의 삶을 당장 끝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의 소멸 이후에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이니 그 숙제를 잘 마무리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부재의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는 과목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곧 사랑을 일깨운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죽음보다 더 깊었던 무지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 무지란 사랑하는 능력을 그냥 묻어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전 존재를 거는 일'입니다. 나의 관심사나 이기적 욕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나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 갑니다.(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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