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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평점 :
이승우 작가의 [이국에서]를 읽었다.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국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름을 갖고 있지만, 소설 속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과 보보민주공화국에 대한 묘사는 터무니 없는 상상의 나래에서 비롯된 썰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 벌어진 과거와 현재진행형인 일들을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 황선호는 중견 기업의 대리로 일하다가 자신이 모시던 상사가 정치인이 되면서 캠프에 들어가게 된다. 회사원과 어느 정치인의 당선을 위한 캠프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향을 요구할 것이다. 소설에서 묘사하듯이 황선호는 캠프에 들어온 이후로 당선을 위해서라면 응당 해야 할 온갖 업무들을 접하게 된다. 누군가에 무엇을 주고 받거나 정보를 캐내거나 흘리거나 협박은 아니라도 회유와 설득을 오가는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어떤 것은 은밀하게 또 어떤 것은 은근히 드러나도록 설계된 마치 공장과도 같은 기린팀의 소속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치판에서 진실을 중요한 것이 아닌게 되어버렸다. 불법비자금을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성추행이나 성희롱같은 언행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물타기라는 말이 속된 말로 변질된 것처럼 언론을 통해 분위기가 형성되고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건의 진위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선거가 마무리되고 당락이 결정되고 나면 선거 전에는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던 찬반진위 논쟁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러들고 언론을 통해서도 결과를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의 황선호는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도 흔히 불거질 수 있는 시장 선거에서의 뇌물수수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그 자신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르면서. 황선호가 제안한 시나리오의 핵심은 뇌물수수의 의혹이 되는 시장이 아닌 부하직원이 모든 책임을 안고 완벽하게 잠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벽한 잠적의 공간으로 보보민주공화국을 제안한다.
어디에 붙어있는지 지도를 보고도 찾기 힘든 낯선 이국인 보보민주공화국을 제안한 황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나라를 "하늘은 투명하고 태양빛은 순수하다"는 말로 설명한다. 마치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은연중에 튀어나온 보보민주공화국에 대한 황선호의 설명은 그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누구가가 보낸 편지에 있던 구절이 떠오른 것이다.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기린팀의 준비로 황선호는 그가 제안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 이국으로 떠나게 된다. 보보민주공화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황선호는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말을 되뇌인다.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38)"
기린팀에 속했던 곳의 흔적을 지우고 보보민주공화국에 도착한 황선호는 호텔방에서 두문분출하며 술독에 빠져 괴로워한다. 선거가 남은 6개월 동안 완전한 잠적을 위해서 황선호의 보스와 그가 낯선 곳에 온 것을 아는 송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기로 약속 한 후, 황선호가 떠난 고국에서의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뻔히 예상되기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자 술에 취한 무의식이 나날이 이어졌다. 호텔 매니저와 소설가를 꿈꾸는 직원 류에 의해서 생사를 확인받은 황선호는 병원에 실려가 체력을 회복하고 그가 도착한 이국의 땅을 거닐게 된다. 그리고 이국을 거닐며 그가 도피처로 왜 보보민주공화국을 선택했는지, 그곳은 황선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바로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들었던 자전거로 전세계를 누비며 편지를 보낸 김선호라는 사람의 글이 자신을 부른 것이다.
엄마의 죽음 이후 유품을 정리하다 김선호의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보보민주공화국을 떠나기 전에 그 편지들을 모두 읽고 그가 보보민주공화국에서 보낸 편지들에 나온 '친구들의 집'을 찾아 나선다. 호텔 직원 류를 통해 그 집의 소재를 묻다가 펍 주인 필을 만나게 되고 필을 통해 쟝을 알게 되고 비로소 김선호가 머물렀던 '친구들의 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강진이란 가명으로 이국에서 머물던 황선호는 불안정한 치안과 공화국 주변의 국가들이 빗장을 걸고 외부인의 입국을 막자 그들에게 다가온 불행과 가난과 혼란스러움의 모든 이유를 외부인에게 덧씌우게 된다. 황선호도 호텔에 숙박하며 공화국에 머물 체류허가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쟝을 따라 동굴에 머무는 외부인들의 공동체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오래전 친구들의 집이 사라지고 그곳에 머물렀던 공동체의 흔적을 쫓게 된다.
'친구들의 집'은 자연발생적으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신체기관이 아주 서서히 변형되는 것처럼 보보민주공화국에 머물던 사람들이 구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리더도 없이 스스로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공생하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의 형태를 띠게 된다. 마치 수도원처럼 하지만 어떤 규칙이나 위계질서에 의한 차이도 없이 그저 모두가 명상과 공부와 운동과 노동을 의무적 권고로 받아들이며 지내는 것이다.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게 된 자전거 여행자 김경호는 그곳에 매료되어 정주하게 되고 자전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 자연주의 개더링 그룹에게 모임을 할 장소를 소개하고 그들의 모임은 보보민주공화국의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살육의 현장이 되고 만다. 필은 김경호가 개더링에 모인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잊고 지냈던, 그가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묵은 상처의 덩어리가 통채로 튀어올라는 것을 느끼며 '친구들의 집'을 지키고자 한다.
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황선호는 자전거 여행자 김경호가 엄마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친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경호가 엄마와 사랑했음에도 고국을 떠나 방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개더링의 현장에서 보았던 무고한 이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김경호는 친구들의 집에 머물며 이루려 했던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고국에 머물 때에는 외부인이 아니었지만 외부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을 치유받았고, 친구들의 집에 머물 때 그는 더 이상 보보민주공화국의 외부인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황선호의 잠적은 결과적으로 필과 쟝과 동굴에 머물던 외부인들에게 다시금 '친구들의 집'과 같은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고, 외부인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이들은 과거의 친구들의 집 구성원들처럼 구속과 규정과 계급이 없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된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 같은 '친구들의 집'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적인 요소가 전무하기에 언제든 그들을 지켜보는 보보민주공화국의 부패한 정권에게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마음 먹기만 한다면 친구들의 집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외부인들은 3일치의 양식만으로 바다에 던져진 채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친구들의 집 구성원들은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낸다. 마치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쉽게 부서질 수 있기에 감히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처럼, 작금의 현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황선호가 떠난 우연치 않게 아버지 김경호의 흔적을 따라간 길은 비록 이국이지만 고국보다 자신을 외부인이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우리의 인종, 피부 색깔, 문화, 경제적 차이는 서로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외부적 요소일 뿐,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국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움은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기를 원치 않는 이상한 감정이라고, 그리움이 성취되는 순간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어버리므로, 그리움의 상태가 해소되면 그리워할 수 없으므로 계속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그 성취를 미래의 상태로 남겨둬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몹시 쓸쓸해 보였다.(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