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대건 작가의 [급류]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0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전작인 [GV 빌런 고태경]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던터라, 이번 소설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 더군다나 표지의 그림이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는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며, 추천사에 언급된 '종일 사랑만 생각했다'는 말이 책 제목인 급류처럼 예기치않고 내 마음을 장악해버렸다. 'falling in love' 우리가 흔히 듣고 사용하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말은 원래 우리 말에 있었던 표현일까? 아니면 영어를 번역하며 생겨난 말이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다 관용어가 되어버린 것일까? 일단 이 표현의 뜻을 생각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동성이 담겨 있다. 어찌보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응한다. 아침부터 상쾌했던 기분이 출근 길에 우연히 지나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곤두박질 칠수도 있다. 짜증나는 상태로 사무실에 도착하니 또 반대로 직장 동료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분이 풀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마음 다스리기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상담을 받거나 종교적 믿음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격정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그냥 그렇게 나의 의지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소설 속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창석과 미영의 관계를 용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창석은 유능하고 성실한 소방서 구조대 반장이었지만, 아내 정미가 폐렴으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한 사이에 진평으로 이사와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영과 부적절한 만남을 갖게 된다. 창석은 딸 도담과 다이빙을 하러 계곡에 갔다가 물에 빠진 미영의 아들 해솔을 구하게 되고 그들의 인연인 진창 속에 빠져들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묘사되고 창석과 미영의 뒤엉킨 시신이 발견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은 도담과 해솔의 삶이 평탄치 않을 것을 예감케 한다. 어찌보면 진부하고 뻔한 소재로 시작했다는 무력함은 해당 사건을 급속도로 마무리하고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불의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으며 기억되지만, 실상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처럼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소설에서도 여러 차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금지어가 되어버린 진평에서의 사건은 도담이 해솔에게, 그리고 정미가 도담에게 상처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권리가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그 불행의 씨앗이 멀쩡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세상 모든 불행한 일들을 당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 뿐이다. 이 힘없고 아무 쓸모 없을 것 같은 위로의 말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납득이 된다. 하지만 그 납득은 위로의 말을 건냈던 이의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의 늪에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기어나온 자기 자신 덕분이다. 


도담과 해솔의 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아빠와 엄마를 잃게 된 진평의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마다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은 애틋한 포옹과 입맞춤으로도 도저히 해소되지 않았다. 진평에서의 이별 후 대학을 진학한 도담과 해솔은 우연히 재회하고 도담의 자취방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도담은 해솔의 규칙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며 걷잡을 수 없이 갈등이 커져간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정미가 예고없이 도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도담과 해솔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정미는 분노에 차올라 헤어질 것을 강요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도담과 해솔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때이다. 도담은 물리치료사로 병원에서 근무하며 파혼의 상처를 가진 승주와의 연인 비슷한 관계를 이어가고 해솔은 도담과의 이별 후 소방서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휴가 때 우연히 마주친 선화와 함께 간 한강 공원에서 투신한 고등학생을 구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도담은 자신을 파괴하려던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던 도중 뉴스에서 보도되는 해솔의 사고를 접하게 된다. 해솔은 한강에서 고등학생을 구한 후 약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소방서에서 구조대로 활동하게 된다. 도담의 아버지 창석이 그랬던 것처럼 해솔은 사고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한다. 도담이 뉴스에서 봤던 사고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해솔이 그렇게 자신을 투신하며 언젠가 도담이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며 보내온 시그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소설은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부모의 불행을 대 잇지 않고 도담과 해솔만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솔은 도담이 처음 만났던 부드러운 손을 가진 유약한 소년이 아니라 몸의 여러곳에 화상 자국이 깊이 남은 어른의 모습으로 그들의 사랑이 다시 연결되기까지의 생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를 끊임없이 피와 진물이 흐르고 마르는 딱지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도담과 해솔은 당당히 그 시간을 마주했고 급류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100)"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출동을 나가서 매일 사고 현장을 목격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 자다가 말벌에 쏘여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는 살아남고,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사망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 그런 현장을 수두룩하게 겪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신도 없고 인과응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가다 가라사대 - 청년 목수의 '건방 쩌는' 건설 현장 이야기, 2022 우수출판컨텐츠 선정작
송주홍 지음 / 시대의창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송주홍 작가의 [노가다 가라사대]를 읽었다. 부제는 “청년 목수의 ‘건방 쩌는’ 건설 현장 이야기”이다. 2022년을 시작하며 [노가다 칸타빌레]를 읽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고, 우리나라 건설 노동 현장의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해를 지나 우연히 다시 서점에서 저자의 후속작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궁금했고, 여전히 형틀목수의 일을 하며 1년 만에 다시 책을 내었다니 정말 놀라운 성실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러한 부류의 책을 읽을 때면 리뷰를 남기는 것조차 망설여지곤 한다. 대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와 행여나 현장의 삶을 사는 분들에게 심려를 끼치는 말을 남기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노가다를 해보지 않아도 삽질이나 곡괭이질을 할 수 있는 것은 군복무를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다양한 작업거리의 지시가 하달된다. 심지어 진지보수를 하거나 구덩이를 만드는 이유가 딱히 할 일이 없는 기간에 몸을 놀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야말로 무상의 노동력을 가만히 나둘 이유가 있겠는가?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1등급을 받으려 애쓰며 어디에 배치가 되던 상관없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보충대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면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편한 보직을 받을 수 있을까란 상념에 빠졌다. 군대에서도 학벌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기 전까지 말이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사단 본부에서 필요한 우수한 자원들이 빠지고 연대 본부에서 또 조금 덜 우수한 자원들이 빠지고 대대 본부에서 또 그렇게 쫌 덜 우수한 자원을 빼고 더 이상 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최후의 보루로 행정실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아주 우수와 그럭저럭 우수의 모든 자원들이 빠져나가기까지 난 어째서 한 번도 걸려지지 않은 것인지 그냥 몸으로 때워야 하는 보직을 받게 되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는데, 나를 잘 몰랐던 고참들끼리 나를 두고 ‘힘들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니 왜 나에게 그런 이상한 별명이 붙었는지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이런 저런 작업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아오 힘들어 죽겠네’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것이다. 내막을 알고나니 부끄러움이 한도까지 차올라 내 입을 꿰메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럭저럭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시작한 군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를 꽤나 아껴주는 선임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 군번에 해당되는 선임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라 반갑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뭘하고 지내느냐는 질문에 갑자기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선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뭐 재주가 있냐? 그냥 노가다 하면서 입에 풀칠한다. 넌 어떻게 지내? 이제 복학하는 거야?” 어떻게 통화를 마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그 선임 생각이 났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이제는 노동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어디선가 책임자를 맡고 있지는 않을까 막연히 기대해본다. 


얼마전 가족모임을 하며 조만간 맞이하게 될 조카들의 취업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형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바로 공부야. 공부만큼 쉬운 일이 없어.” 혹자가 들으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형 말이 맞는 것 같다. 공부야말로 그냥 나 혼자 성실하게 잘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공부말고 나 혼자 잘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특히나 노가다 현장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빨리와 헐레벌떡 일하는 현장에서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관계를 통해서 가장 큰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관계가 필요없으니 가장 쉬운 일이 맞는것 아닐까? 물론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어디에서든지 관계를 맺고 일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내 입에 밥을 먹여주는 노동은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이 가장 신성하며, 가장 욕된 순간에도 나를 버티게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인용한 김훈 작가의 글은 몸을 지탱하기 위한 지긋지긋한 밥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준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99)”


특히나 이번 책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부분은 ‘촉촉하게 젖은 사람들’라는 쳅터이다. 항상 큰 현장에서만 일하던 저자가 원룸 공사 현장에서 만난 아저씨들의 이야기이다. 큰 현장에서는 작업 중에 술을 마시는 일 불가능한데, 저자가 놀란 작은 현장에서는 아저씨들이 아침부터 아니 어제 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종일 거의 취한 상태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불감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짐작하며 이어진 내용을 읽다보니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천명관 작가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라는 소설을 오마주하여 그 아저씨들의 일상을 전해준다. 

“다들 그랬다고 한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인생이었다. 군대 다녀와 노가다판에 왔더니만, 일 못 한다고 욕먹고, 눈치 없다고 욕먹는 신세였다. 돈 없고 빽 없는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서러운데 욕까지 먹으면서 일하려니 더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참 먹을 때 나눠주는 한잔 술에 위안을 얻었다. 그것으로 젊은 날 차올랐던 세상에 대한 울분을 식힐 수 있었다. ~~ 언젠가부터 외롭다고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가봐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자기 방으로 ‘훽’ 들어가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날 더운데 수고했다는 한마디 건네주지 않는 아내와 마주할 때마다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 일찍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239-2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화진 작가의 [나주에 대하여]를 읽었다. 가끔씩 '민음사TV'를 통해서 편집자로 알고 있었는데, 신작을 둘러보다가 저자의 이름을 보고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게다가 출판사가 문학동네라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띠지에 나온 사진을 보고 '맞구나'싶고 왠지 모르게 아는 사람이 책을 낸 것 같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책을 사놓고도 한 동안 다른 책들을 읽다가 새해를 맞이하는 겨울이 되어서야 손에 쥐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조금 미루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소설이 겨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따뜻한 방 안에서 스탠드 불빛에 비추어 오롯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쓸쓸한 마음들을 보듬기에는 겨울이 제격인거 같아서. 


이번 소설집에는 "새 이야기", "나주에 대하여", "꿈과 요리", "근육의 모양", "척출기", "정체기", "쉬운 마음", "침묵의 사자" 이렇게 8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의 해설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 단편들의 주인공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 관계적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성인이 되기 이전에 정규 교육 과정의 학교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교우 관계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는 사뭇 다른 이제는 누군가의 법적 보호자가 필요치 않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완성되지 못한 자신과의 내적 투쟁을 뜻한다. 특히나 주인공들의 공통된 관심은 바로 타자의 마음이다. 사실 내 마음도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때가 많은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이라니, 독심술과 같은 투시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지레짐작으로 무엇보다도 공감으로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 노력한다. 


가끔은 '타인의 마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란 의심이 드는 이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타인에게 쉽사리 불쾌감을 안기고 자기는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며 선연히 제 갈길을 가버리는 그들의 쿨함을 이기성의 극치라고 욕하며, 다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의 주변에도 타인의 마음이 존재했다. 당연히 왕따가 되고 고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가 함께 하며 웃었고 정보를 교환했으며 칭찬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차오르는 무력함은 세상이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면서 어쩌면 내가 욕했던 그 사람도 타인의 마음에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헤아려보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몹시 사랑해주고 아껴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 "침묵의 사자"에서 화자인 '나'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지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수의 모든 것을 따라 하다가 결국 지수에게 이런 말을듣게 된다. "너 왜 자꾸 나 따라 해?" 누군가의 마음을 동경하게 되면 무작정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롤모델이라는 말도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는 것 또한 위대한 이들의 삶을 따라해보라는 권유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자기를 좋아하는 화자가 자신을 따라하는 것을 왜 싫어했을까? 이런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 비슷한 것 같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티셔츠나 자켓을 누군가 똑같은 옷을 입고 온 것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내가 입은 옷이 멋져 보여서 따라 입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갑자기 기분이 상한다. 왜냐하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타인의 마음을 갑자기 알아챘기 때문이다. 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냥 모른 척 내 마음만 들여다보며 살고 싶은데, 어느 순간 이미 확인해버린 타인의 마음이 이기적인 나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무례하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범. 그런 말을 할 때 너는 너무나 규희 같다. 자기 공간을 소중하는 사람들. 오롯한 혼자를 내버려둬야 하고 스스로가 세운 원칙을 존중받아야 해서 섣불리 노크하거나 노크조차 않고 불쑥 가까워지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내향적이라고 소개하며 절대 먼저 뭔가를 제안하지 않는 사람들. 깉이 저녁 먹을래요? 시간 되면 볼래요? 하는 말을 주로 듣는 쪽인 사람들(62-63)"


"나주에 대하여"의 화자인 '나'는 한 평생 이렇게 제안을 기다리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몸부림치며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 덕분에 기다리는 이들은 어느덧 고고한 학처럼 정갈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반문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분위기를 주도하고 설레발을 치는 이들을 보며 왜 저렇게 설치나 싶다가도 그러한 활기참을 부러워하다가도 과도한 리액션에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지는. 타인의 마음은 다양한 모양의 처신이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몸에 집중하는 일. 은영은 그걸 바라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서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을 악질적으로 즐겼다. 은영의 상사부터가 그랬다. 은영은 회사에서 사람들을 깊이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의 일을 잘하는 것. 그것이 은영의 회사생활 원칙이었다. 그 외엔 신경쓰고 싶지 않았고 휘둘리고 싶지 않았는데, 상사의 곁에 있으면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언제든 후배들을 비꼬았고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 비꼬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옷차림, 말투, 습관 같은 업무 능력 외의 것을 평가하며 우습게 만들고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그의 업무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며 우습게 만ㄷ르었다. 그러면서 티나게 사람을 가려 칭찬을 하거나 추켜세워서 후배들로 하여금 계속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은영의 동기와 후배들은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며 알았다. 저 사람 눈 밖에 나면 지옥 같을 것이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하는 예감이 모두에게 있었다.(131)"


일을 하려고 모인 곳에서는 당연히 서로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영의 상사가 그런 것처럼, 상사에게는 일을 잘하는 직원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도 잘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언제든 알아챌 준비를 하라는 것. 생각보다 어렵고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상사의 마음을 알아채는 노력을 서투르게 하는 순간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소설은 알려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이기적인 타인의 마음을 맞춰주는 역할에 서투른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다. 


"아픈 것은 그런 일인 것 같았다. 평소의 나와 아주 많이 달라지는 일. 혼자가 되는 일. 평소에도 영은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다르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서로 모두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달라도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외로운 걸.(157)"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타인의 마음을 읽기 위해 마음과 마음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그 헤아릴 길 없는 왕복 운동, 그 지난한 마음 읽기의 실패는 사랑이다. 마음 읽기는 알 수 없다는 막연함과 끝내 모르겠다는 실패 속에서만 가능하다. 실패 속에 있을 때만 우리는 사랑을 한다. 실패하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작가 김화진이 쓴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지치지 않는 열정일 것이다. 그 열정은 우리를 애타는 마음의 온도보다 더 뜨겁고 깊은 곳에 데려다 놓는다. 실패로서의 사랑과 그런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 밑도 끝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무모한 사랑의 주체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읽는 중이다. 때로 천국이고 주로 지옥인 그곳을 무엇 하나 건너뛰는 법 없이 모두 읽어내는 이 완전한 짝사랑의 고백을 읽는 내 마음도 어느새 사랑이다.(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주은 작가의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읽었다. 망언이라는 말이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시대이다. 실언도 아니고 망언이라니 아마도 농담처럼 사용되지 않았다면 본래의 뜻을 제대로 담아 내뱉게 되는 순간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이상한 말을 들었을 때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망언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연유를 들여다보게 되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치가들의 헛소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논리를 펼치는 기사와 뉴스를 통해서 큰 헤드라인으로 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곤 했다.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내용을 담은 망언이라는 말이 어느덧 유행어처럼 사용되다보니 본래의 말이 지닌 뜻이 감소되는 것 같이 느껴져 아쉽기만 하다. 며칠 전 기사에서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어르신 중의 한 분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우리와 동시대의 삶을 살아간 분들조차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한맺힌 삶을 마감하셨어야 했으니, 그 옛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공녀로 끌려간 수천명의 소녀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슬픔과 한은 도대체 어디서 풀어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예전에 국사 공부를 하며 명나라에 공물과 함께 공녀로 보내진 수많은 10대의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운 적이 있었다. 워낙 시간적 거리감이 멀어서였을까. 당시에는 그냥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힘이 약해 나라의 딸들마져 바쳐야했던 비운의 역사에 씁쓸함을 느낀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소설을 통해서 가만히 떠올려보니 공녀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딸이 태어나면 아주 가까운 이웃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하니 딸을 가진 부모와 가족들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서도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고려 시대 학자였던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쓴 편지에 우리나라 처녀들을 데려가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에서 착안했다고 말한다. 원나라부터 이어진 공녀는 결국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2천 명이 넘는 소녀들이 끌려갔다고 하니, 그렇게 비운의 삶을 살다가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들의 삶을 그냥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한 번 고향을 떠나면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다시는 가족을 만나기 쉽지 않았을 지리적 상황에서 같은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 끌려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어찌 다 헤이릴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착안된 이 소설은 제주의 숲속에서 사라진 열세 명의 소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선의 최고의 수사관이었던 민환이와 민매월 자매의 아버지 민제우 종사관은 제주에서 소녀들을 찾다가 실종된다. 큰딸 환이는 목포의 고모집에서 새신부로 끌려가기 전 집을 나와 무작정 아버지를 찾아 제주가는 배를 탄다. 지금과는 다르게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왕의 눈 밖에 난 이들의 유배지이며, 가난과 척박함이 지속된 곳이었다. 또한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뭍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내륙과의 소통이 원할하지 않았기에 탐관오리와 같은 목사가 부임할 경우 수많은 양민들의 재산이 수탈되어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제주의 고유한 전통인 해녀가 생겨난 것은 그렇게 물질을 통해서라도 해산물을 구하지 않는다면 당장 굶어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원나라와 명나라에 끌려간 공녀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환이와 매월 두 자매가 있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지만 환이가 목포에 머물렀다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환이는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거부하듯이 아버지처럼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결국 환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종용된 삶을 거부한 것이다. 매월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환이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동행한다. 환이와 매월과는 상반되는 인물로 등장하는 문촌장과 죄인 백씨는 자신의 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이의 딸을 납치하고 민 종사관을 죽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하지만 환이와 매월 자매의 용기있는 수사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며 문촌장과 죄인 백씨의 딸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매의 수사를 도와준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무슨 일까지 했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사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다.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죄인 백씨가 자신을 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소녀를 납치하고 딸의 얼굴을 난도질해서 공녀를 끌려가지 않도록 한 행동이 과연 딸을 위한 일이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딸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아비의 심정이 오죽했겠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 백씨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소설의 무대와 배경만 과거일 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과 딸의 모습은 지금다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처한 어려움과 고통의 종류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과 모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법망을 벗어나고 힘없고 약한 이들이 대신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문촌장과 죄인 백씨와 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뚫릴 것 같지 않는 단단한 바위도 낙숫물 한 방울 한 방울로 인해 반으로 갈라지듯이 독을 먹은 약해진 몸으로도, 신열에 들뜬 몸으로도 동굴 속에 갇힌 소녀들을 찾아낸 민 자매의 용기를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들에게 무한정 빚지고 있는 덕분에 그래도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면구스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것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시련을 주고,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앞길을 장애물로 가로막지. 그러는 동안 가슴에 악을 품은 자의 길으 수월하게 뚫린다네. 악을 퇴치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 사실을 일찍 받아들일수록 삶도 편해질 것이오.(243)”


“이 나라의 암담함에 겁먹은 새처럼 도망쳐서 자기들끼리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빛을 올곧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 대신 싸우고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은 항상 반짝일 거요.(4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리커버 에디션)
김옥선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옥선 작가의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를 읽었다. 팬데믹 상황이 시작되고 나서 여행관련 책자들의 출간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든 시점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식적은 아니지만 엔데믹에 이른 것 같이 전염병 발발 이전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아주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들이 반증하고 있지만, 막상 내 앞의 일로 닥치니 이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여겨지기만 한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수많은 인구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니. 그동안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를 통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 이들 모두가 뒤통수 정도가 아니라 철퇴를 맞은 느낌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리하고 온갖 고통을 자아난 시간 이 흘러 전염병의 마지막에 이른 것이 아닐까란 희망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그런면에서 저자의 책은 누구나 좋아해마지 않는 여행이라는 주제를 새삼스레 싱그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다. 셀레는게 있다는 것은 누구 뭐래도 행복감을 느낀다는 증거일테니 말이다. 여행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여행의 기회를 갖을 수 있는 복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여행이라는 걸 처음 계획하고 떠날 때만 해도 여행은 그냥 새로운 곳을 방문해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못 먹어본 음식을 먹고 함께 여행을 간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좀 더 내적인 친밀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의 구력이 쌓이다보니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금의 삶의 자리에 만족하고 감사하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하게 준비된 여행을 떠난 다고 해도 집을 떠나는 것은 상당한 귀찮음을 수반하게 된다. 짐을 꾸리는 것에서부터 낯선 잠자리에서 오는 불편함과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떨떠름과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언어가 주는 압박과 두려움들이 일상을 살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스트레스를 양산시킨다. 그래서 그런지 고질병처럼 집 떠난지 3일만 지나면 내 입에서 저절로 ‘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터져나온다. 행여나 함께 간 이들이 들을까봐 혼잣말처럼 중얼거려야 했지만, 그 이후로 육체적 피로가 가중될 때면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무조건 더블’로 상승한다. 이런 생각이 들면 동시에 아니 대체 왜 내가 비싼 돈 들여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지루하고 재미없기는 해도 집에 있다면 이런 낭비를 하지 않았을텐데 라는 원초적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바보같고 무한반복되는 푸념은 집으로 돌아올 즈음 되어서야 떠남의 확실하 이유를 찾게 된다. 바로 집과 나의 일터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여행지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내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불편함 잠자리, 그리운 고국의 음식, 맘에 맞지 않아 어색해진 동료와의 거리감. 마치 신발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처럼 대놓고 티낼 수 없는 불편함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이다. 단지 일정이 다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비싼 돈 들여 내돈내산한 여행지의 스트레스는 일상에서 겪어내야만 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일상에서 겪었던 갈등의 기억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분주하게 여행지를 돌아다니다가도 갑작스레 밀려온 장엄한 자연 경관이 주는 감동으로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며 눈물을 줄줄 흘릴 수도 있다. 그때서야 깨닫게 된다. ‘아 내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할 필요가 있어.’라며 스스로를 칭찬해 줄 여유를 되찾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주로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줘야 하는 순간에 사진첩을 보며 여행지를 떠올리곤 한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힘을 주다가 혼자 끼득거리는 게 미친놈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여행지의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담겨 있음을 증명한다. 지난 금요일에 방송된 ‘나 혼자 산다’의 팜유세미나를 보던 기안84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이리저리 분주해진 등장인물들이 극적으로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는 장면을 보며 “아 근데 이렇게 끈끈해지는 걸 보니까 부럽네요.”라고 말한다. 당사자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민망하고 부끄러웠겠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는 함께 공유할 추억을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이 부러운 것이다. 결국 여행은 나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떠나기 전에는 늪지대같이 느껴지던 집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좁다고 느껴졌던 한국이 두 다리로 걷고 나니 무지막지하게 크다고 느껴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카페에 앉아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들어 보니 우리 동네도 사건 사고가 참 많았다. 최근에 책에서 ‘땅 멀미’라는 단어를 봤다. 매일 육지에 서 있다가 흔들리는 배에 타면 뱃멀미를 느끼는 것처럼 배를 오래 타던 사람이 배에 내리면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땅 멀미를 느낀다고 한다. 뱃멀미를 하든 땅 멀미를 하든 멀리는 괴롭다. 

어릴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워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 많은 것들을 보고, 만나고, 느끼고 많이도 웃었다. 그러다 한동안은 끝없이 펼쳐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불안해했다. 이제는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와 일상이 주는 것들의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다. 아마 나는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어딘가로 나아가는 도중에 멀리를 한 게 아닐까.(3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