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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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 Veiller sur elle: Vegliare su di lei]를 읽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면 우측 한 편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 빽빽히 사람이 들이차서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는 깨끔발을 들거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통해서나 슬쩍 감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넓은 성당 안에서도 유독 두터운 방탄 유리 속에 감춰진 피에타상을 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군중들 틈에 기꺼이 끼어들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원래 피에타상이 지금처럼 두터운 유리관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다고 들었었는데, 지금처럼 유리에 반사된 빛으로 인해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소설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기이한 광기로 인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가 손상되었다면 아마 누구라도 지금처럼 보호재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삶의 생애에 따라 피에타상의 모습도 확연히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바티칸 안에 천지창조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맞이한 아들 그리스도를 껴안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상의 공존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예술품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게 된다. 이번 소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상을 모티브 삼아 20세기 초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이 득세했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또 다른 피에타상을 제작한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라는 인물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모 비탈리아니가 숨겨진 피에타상과 함께 하고자 했던 비올라 오르시니와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기에 해당되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부유하고 안락했던 유럽 사람들에게도 혹독한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을 '벨 에포크' 라고 칭하며 경제 문화가 발전하며 태평성대를 이뤘던 그 시기를 간절히 그리워했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 행복한 시기는 일부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었을 것이고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생존의 위협을 받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또한 그런 가난한 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심지어 왜소증으로 인해 일평생 난쟁이라는 무시를 당했으며 일거리를 찾아 프랑스에서 머물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유로 일 프란체제라는 비아냥 거림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미모를 돌보기에 힘이 부쳤는지 어린 아들을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트라달바'라는 곳의 알베르토에게 보낸다. 조각가였던 아버지에게서 어릴때부터 대리석 조각에 대해서 배웠던 미모는 알베르토의 공방의 도제로 머물게 되지만, 미모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알베르토는 미모의 능력을 야비하게 이용만 할 뿐 구타와 폭력으로 미모를 학대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미모가 보낸 끔찍한 유년시절을 단지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미모는 왜소증이라는 신체적 한계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와 자신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두리는 공방 주인의 위협 속에서도 꾿꾿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어쩌면 미모가 오르시니 가문의 대저택에서 우연히 같은 또래의 비올라를 만나고 밤마다 재연된 무덤가에서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수도원의 지하에 꽁꽁 숨겨둘 만큼 화재를 일으킬 피에타상을 조각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미모 비탈리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은 대리석 안에 그가 조각하고자 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투시력과 같은 통찰력을 드러냈으며, 비올라 오르시니는 당대의 여성에게 국한된 지위를 벗어나 특히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만남을 거부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모의 집안과 그의 친구들은 그냥 별볼일 없는 일상을 견뎌내는 서민이었지만, 비올라는 가족은 오리시니 가문으로 첫째 오빠 비르질리오는 어이없게도 전쟁에 참전하여 기차 사고로 죽게 되지만, 둘째 오빠 스테파노는 파시즘 정권에 빌붙어 승승장구하게 되고, 셋째 오빠 프란체스코는 성직의 길로 나아가 교황의 오른팔에 오르게 되는 극소수의 부류 중의 하나였다. 이런 미모와 비올라의 만남 자체가 파격적이었지만 비올라의 범상치 않는 행동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당시 여성들에게는 권고되지 않던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모는 비올라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그들이 지속한 무덤가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미모는 위대한 조각가가 될 것임을 비올라는 하늘을 나는 원대한 꿈을 이룰 것임을 서약하게 된다. 


하지만 미모와 비올라의 행복했던 만남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비올라와 정략혼인을 약속하는 파티에서 벌어진 비올라의 기막힌 선택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비올라는 지붕에서 몸을 날리며 그동안 미모와 그의 친구들과 준비한 비행의 실패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미모는 비올라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알베르토의 속임수로 인해 피렌체의 공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미모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또 다른 천적과도 같은 네리의 훼방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피에트라달라로 돌아가려던 찰나 네리 일당의 린치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어이없게도 피렌체 뒷역에 머물던 서커스단의 일원이 된다. 어쩌면 조각가라는 일을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시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왜소증을 가진 서커스 단장과 그의 누이 사라를 만나면서 서서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티칸의 고위직으로 수직상승하는 프란체스코의 제안으로 미모는 내적 고향인 피에트라달바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조각가로서의 삶은 꽃을 피우게 된다. 미모는 로마와 피에트라달바의 공방을 오가며 수많은 고관대작의 요청에 밀당을 하며 조각품의 가치를 드높이게 되고, 파시즘 정권을 상징하는 조각품을 수탁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미모의 공방의 직원과 제자들은 늘어나고 수입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상류층의 삶을 살기에 충분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미모와 비올라는 미모가 파시즘 정권의 상징물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사이가 멀어지는 듯 하지만 미모는 비올라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올라의 방황과 괴로움은 그의 남편이 보란듯이 벌이는 외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무시하며 비올라가 사춘기 시기에 쓴 시를 비웃으며 낭송하는 남편을 식사용 나이프로 찌른 일로 인해 비올라는 남편과 헤어지게 되고,미모는 끔찍해보이는 수녀원의 요양 프로그램을 단번에 무시한 채 비올라를 데리고 떠나 그녀를 지켜준다. 


시간은 흘러 미모가 그토록 바라는 것처럼 보이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고 그동안 미모의 삶은 녹록치 않았음을 단숨에 보상받듯이 앞으로의 시간은 꽃길만 펼져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정점에서 미모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그동안 비올라의 간청과 조언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듯 했던 미모는 수용소에 갇혔던 사라를 빼내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깨닫게 되었고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모는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받고 이어진 소감에서 앞으로는 더 이상 정권의 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미모는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비올라는 미모의 놀라운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중간 중간에 짧은 쳅터로 그려지는 임종을 앞둔 고령의 노인이 된 미모를 지키는 파드레 빈첸초의 피에타상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서류를 확인하는 모습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미모가 만든 피에타상은 어째서 전대미문의 문제를 일으켰으며 바티칸에서 조차 미모의 피에타상을 숨기기를 바라고 아무도 모르는 수도원의 지하에 놓여진 것일까? 미모의 피에타상을 본 수많은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이상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나 미모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프란체스코의 권유를 마다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더 이상 대리석 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가의 천부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 같아 피에타상을 조각할 수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에 일어난 끔찍한 반전인 천재지변 때문에 벌어진 영원한 이별이 아닐까 싶다. 스포일러에 해당되겠지만 미모가 아주 잠시 피에트라달바를 떠난 사이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오르시니 일가는 추기경이 된 프란체스코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극의 사상자가 되고 만다. 넋이 나간 미모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를 찾기 위해 무너진 오르시니 저택의 일부를 헤짚게 되고, 어쩌면 오르시니 일가에게 주어진 죽음과의 이상한 협약처럼 오빠 비르질리오가 열차 사고에도 아무런 외상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비올라 역시 외양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미모가 어떤 울부짖음으로 비올라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잠도 자지 않고 피렌체의 공방으로 내려가 다시금 조각을 시작하여 피에타상의 제작에 몰입했다는 것만으로 미모에게 있어서 비올라가 어떤 의미였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미모에게 죽어버린 대리석 너머의 아른거렸던 작품의 모습이 비올라의 죽음으로 부활하였고, 미모는 피에타상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라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의 상에 비올라의 모습을 대입시킨다.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미술 관계자들은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본 상당수의 이들이 기이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예수의 상에서 기존의 비올라의 여성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혼란을 자아내는 피에타상을 감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미모의 피에타상은 수도원의 지하에 유폐되고 미모는 비올라를 그리는 피에타상 제작 이후 그녀를 지키며 수도자와 같은 형제라 불리며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극악한 사건들은 시간을 늘어뜨린다. 비올라가 시간에 관해 아무 말이나 했던 게 아니라는 증거. 정신이 조금 전의 순간에서 굳어 버리고 믿기지 않는 마음이 시간의 톱니바퀴에 들러붙어 운행을 늦추는 바람에 초대객 중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496)"

이번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뛰어난 비유와 묘사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이 문장처럼 한 마디로 뜨악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을 때를 마치 시간의 운행이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인하여 늦춰지게 만들었다는 표현력은 정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네 양심이 네 손목에 찬 그 시계보다 더 값이 나갈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전 재산을 동원해도 되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고.(527)"

미모를 미행하던 비차로의 마지막 말이 미모의 양심선언과도 같은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미모는 비올라에게 다시금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음을, 추구하던 그것은 슬며시 빠져나가 저만치 앞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면 그것 역시 한 걸음 내딛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어 보려고, 그저 그 것의 보폭이 우리 걸음보다 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538)"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613)"

이 마지막 한 문장이 또르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재의 순간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예수의 모습이 비올라라는 여성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렇게 삶의 소중한 이들의 부재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장바티스트앙드레아 #그녀를지키다 #Veillersurelle #정혜용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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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자서전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지음, 이재협 외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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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을 읽었다. 최근 포탈 기사에 연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병세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고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전쟁에 대한 기사도 자주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를 종교의 수장에 대한 건강보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교황님의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바티칸과 관련된 내용을 평론하는 이들의 기사에 의하면 냉전시대에 비해 교황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작아졌음을 지적하며, 교황님의 직접적인 중재에도 분쟁을 일으킨 각국의 지도자들은 예전만큼 그분의 비판과 지적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교황님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는 여전한 것은 아마도 불가지론자든 다른 종교인이든 점점 망국으로 치닫는 것 같은 불우한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교황님의 자서전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어떤 특정한 한 개인의 놀랍고 신비로운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 개개인이 불의와 거짓이 주는 이익에 편승하지 않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들이 모여 가능하기에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2013년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스스로 교황좌에서 물러나겠다는 보도로 전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었다. 그 이전까지 물론 600년 전에도 생전에 같은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종신직에 해당했던 교황좌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아직 외적으로 봐서는 건강에 큰 무리가 없어보였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사임 소식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문화가 지배적인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분의 사임 소식 못지 않게 새로운 교황님의 탄생과 그 이후 이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소박하지만 혁신적인 행보는 마치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넣은 것과 같은 싱그러움을 안겨주었다. 


최근 전세계의 80세 미만의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님을 선출하는 과정을 그린 <콘클라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 역작에 해당되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아래 100여명의 추기경들이 모여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물을 뽑는 과정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마치 실제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원래 사제들이 입는 검은 수단(열혈사제에서 김남길 배우가 입고 나오니 더 멋져보였지만) 자체가 허리라인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길게 뻗어 그 자체로 맵시가 나는 옷인데, 주교 이상의 직분을 가진 이들이 영화 속에 등장인물 다수로 나오다보니, 대주교의 자색 수단과 추기경의 홍색 수단 그리고 교황님의 흰색 수단이 시스티나 성당의 빨간색 카펫과 어우려져 그야말로 영원히 힙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을 뽑아냈다. 


아무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렇게 콘클라베를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첫 인사를 건네실 때부터 이전의 정형화된 관례를 깨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자서전에도 나오듯이 원래 첫 인사는 정해진 라틴말의 축복을 해야 함에도 'Bounasera'라는 이탈리아 인사말을 친근하게 건네시며 자신의 첫 인사를 기다리는 수많은 군중에게 기도를 먼저 부탁하셨다. 이후 교황을 상징하는 의복의 화려함을 거부하고 사도궁전이 아닌 마르타의 집에서 거주와 고급 리무진이 아닌 피앗 같은 소형차를 타는 소박함을 보여주어 많이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런 교황님의 파격적인 어쩌면 전임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는 놀라운 선택의 과정들은 단순히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정말로 그분이 불편했기 때문임을 자서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째서 그분이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으신지, 어떻게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는지, 시원치 않은 무릎을 굽혀 독재자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라도 그들의 마음이 돌아서 분쟁이 멈추기를 기원했는지, 그분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고백하는 내용을 통해서 놀라운 용기와 결단과 실행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서전에는 조부모님 세대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아 교황님이 태어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어릴 때의 철없던 행동에 대한 반성과 서서히 사제 성소를 갖게 된 경험들을 전해준다. 단순히 교황된 한 개인의 개별적인 고백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교황님이 겪었던 실제의 일들과 견주어 교황님의 가르침이 덧붙여져 교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권고와 회칙 그리고 교회의 문헌들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해주는 종합판을 아우르는 것 같았다. 특히나 교황님의 두 번째 회칙에 해당하는 <찬미받으소서>는 환경오염과 생태보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환경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단지 지구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함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손쉽게 만들어 쓰고 버리는 문화가 비단 물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소비의 행태가 종국에는 가난한 지역의 이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을 경각시키기 위함임을 말한다. 


더불어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지금의 상황을 개탄하며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악에 받친 분노와 복수의 비극이 지속될 뿐임을 일깨워준다. 지금도 뉴스를 통해서 끊임없이 보도되는 부모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교황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세상의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치부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공포와 억압, 비참과 타락의 언어, 인간이 빠져드는 가장 어두운 골짜기의 언어는 늘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이 쓰이는 것은 침묵의 언어입니다. 무관심은 말조차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모른 척하면 그만이야...' 이런 속삭임들이 가장 무서운 말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376)"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가 사는 곳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행되는 비극적인 만행들을 손쉽게 눈감아 버리고 모른 척하는 것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불행을 가져올 것이기에 교황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봐야 함을 일깨워 주신다. 자서전의 말미에 이어지는 희망에 대한 권고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예화들은 시시 때때로 포기와 좌절을 낳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나태의 유혹을 벗어나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에 해당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가장 좋은 포도주가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빗대어 독자들에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언제나 간직하기를 바라신다. 


"혹시 언젠가 두려움과 근심이 밀려올 때면, 요한 복음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떠올려 봅시다(요한 2,1-12). 그리고 스스로 말해 보세요. '가장 좋은 포도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농민의 후속인 제게는 이 비유가 특별히 가슴에 와닿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가장 깊고 기쁘며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통계가 다른 말을 하고, 지친 몸은 힘이 빠져도, 결코 꺽이지 않을 이 희망만은 잃지 마십시오. 이 말을 기도처럼 되뇌어 보세요. 기도가 어렵다면 마음속으로 작게 속삭여도 좋습니다. 믿음이 약하더라도, 진심으로 믿을 때까지 계속해서 속삭여 보세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도, 사랑이 메말랐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 주세요. '가장 좋은 포도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496)"


#프란치스코교황 #카를로무쏘 #희망 #SPERA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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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뚫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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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작가의 [어둠 뚫기]를 읽었다. 한 인물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유년시절이 말도 못할 정도로 힘겨운 고통의 장애물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빨리 흘러가기나 할 것처럼 주인공의 어려운 유년시절은 휙휙 지나가고, 그 시간을 바탕으로 단단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들은 주인공의 고통의 순간에 쉽게 몰입되어 성숙한 어른이 된 주인공에게 마음 속 박수를 보내며 당연한 보상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간과하게 되는 것은 실존의 인물이 거쳐간 시간의 거대함이다. 배가 고파 시장통에서 만두 하나를 훔쳐 먹다가 걸려서 호되게 얻어터지는 일이 수일째 지속된다면, 빚지고 도망간 애비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몇 년간 시달리게 된다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이리저리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처지가 유년시절의 전부라면 그래도 우리는 단단해지고 성숙해진 인물을 보며 당연한 보상을 받았다고 손쉽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돌아보면, 아니 어느 정도 지난 시간보다 안정되어 자리를 잡게 되면 대체 그 지옥같은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낸 것인지 스스로가 놀라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놀람의 이유는 현재의 내가 과거와 동일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지금도 그때처럼 힘들다면, 어쩌면 그 긴 터널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아예 견뎌내볼까 하는 희망조차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을 때, 한 걸음만 더 내뎌볼까 하는 작은 용기가 생겨나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바꾸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아닌가 싶다. 

오랜시간 고질병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의 하나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동료의 삶의 행태를 험담하는 말투였다. 개는 대체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서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데, 개는 대체 왜 그렇게 일을 하는건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소한 것까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한테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정말 답답하고 걱정이 되면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도움을 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뒷담화를 마치고 혼자가 되면 몹쓸 것을 먹은 것처럼 텁텁함이 입안을 가득채웠음에도 마치 중독된 것처럼 다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험담을 위한 험담과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선가 나 또한 그 담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번 소설을 읽고 특히나 말미에 화자인 '나'가 엄마와의 있는 그대로의 관계와 존재를 인정하는 부분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혈족인 엄마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을 수십년 간 반복해오고 있음에도 한 치의 양보조차 없이 싸움과 갈등이 오고 가지만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해결책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주인공의 커밍아웃에도 엄마는 여전히 아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큰아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의 말을 홧김에 했다는 것조차 부정하며 연락이 없는 큰아들 내외를 욕하면서도 명절이 되면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전을 잔뜩 부치는 모습이 영 탐탁치 않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저명한 예술가 게이들이 엄마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서른 일곱살의 나이에도 독립하지 않고 엄마와 함께 살아간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게이로 살아가며 데이팅앱으로 만난 이들과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 행여나 데이트 폭력을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성정체성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반복된 만남 끝에 들려오는 모멸의 말들이 주인공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든다. 결국은 이렇게 살아갈 바에는 그냥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끝장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란 우울함의 단초는 아마도 주인공이 부단히 편집자로서의 일상을 살아가고, 그 일상의 원천은 40년을 넘게 미싱일을 마치고 나서도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엄마의 성실함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 강인한 엄마 또한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가슴 아픈 일을 아무렇지도 않고 아들에게 고백하는 말을 통해 주인공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가 비록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진 존재인 것 같지만 그렇게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듯이 자신을 비난하는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 짙은 어둠 또한 뚫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주인공이 글쓰기 아카데미를 열어 수강생들과 꽤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속깊은 이야기를 글로 쓰고 나누는 시간을 갖았음에도 막상 아카데미 일정이 끝나고 나서는 아무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는 모습을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장면과 결부시킨 것이 인상적이었다. 훈련소마다 다르겠지만 퇴소를 앞둔 훈련병들이 갑자기 그동안의 땀과 고통이 한 순간에 밀려와서 일지 수백명의 남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대에 가서도 휴가 나오면 꼭 연락하자며 연락처를 주고받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대 배치를 받고 휴가를 나가서 연락을 했을까 하면 당연한 대답은 '미쳤냐' 였으니. 그렇다면 아카데미에서 글쓰기 수강자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과 퇴소식의 훈련병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울며 연락하자는 약속을 잡은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일일까? 

박선우 작가는 수상 작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끝을 상정해야만 진심을 다할 수 있다고. '헤어짐'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기에 함께인 지금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다고.(244)"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누군가를 험담하는 불필요한 악습을 떨쳐내고 진심을 다해 자신의 어둠을 마주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언젠가는 정말 혼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되리라. 엄마 없이 살아가게 되리라. 그런 날은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종료되니까. 마지막에 이르고, 기어이 끝나고야 마니까. 
놀라운 사실은 끝을 가듬하다보면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어떤 가능성들이 눈에 보일 듯하고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 걸음, 적어도 한 걸음은 더 옮길 수 있다. 속는 셈 치고 하루만, 오늘 하루만 더 하면서.(220-221)"

"나는 이제부터 변할 거라고,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게 될 거라고,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둔 채 살아가게 될 거라고, 선배가 울 뻔했던 이유는 그걸 다 알고 있어서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지금도 자식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를 사랑했던 것과 지금 부모를 사랑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아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니까, 그런 걸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시간이 지닌 또다른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놓을 수 있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 건 소설 속에서나 이렇게 쓰일 뿐이니까.(180)"

#박선우 #어둠뚫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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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9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코루 2025-04-09 11:33   좋아요 0 | URL
네 좋습니다.
 
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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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 작가의 [영원에 빚을 져서]를 읽었다. 근래에 들어 저자의 책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얼마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그 개와 혁명'을 읽고 나서 순식간에 팬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두 작품은 아버지를 잃고 나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지독한 상실감에 몰입된 저자의 실제상황을 바탕으로 삼아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죽음이라는 이별의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 준다. 주어진 일의 특성상 또래에 비해 젊은 나이부터 죽음의 과정을 지켜볼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폭넓은 공감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나에게 실제로 벌어진 영원한 이별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수없이 머리속으로 상상해온 시물레이션을 통해 그 이별의 슬픔을 낱낱이 기록해두려고 했었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른 후에 1분 1초의 순간이 그리워질 때를 대비해서 영원히 잊지 않고 되새길 수 있도록 슬픔을 남겨두려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다가오고 폭풍같은 이별의 순차적인 절차를 밟고 나니 그게 얼마나 큰 만용이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득문득 두렵고 절망적이고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 마지막 순간들이 불현듯 내 삶을 덮쳐오자 도망가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그 슬픔의 장면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는 더 이상 예전처럼 지내지 못할 것만 같아 애써 외면하려고만 했다. 그러니 슬픔의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짐짓 그동안 내가 어른스러운척 건냈던 어쭙잖은 위로의 말들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무력한 나를 감추려던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저자의 소설을 읽으며 참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영원한 이별 이후에 다가오는 상실의 아픔에 몰입되어 그 슬픔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 남겨진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은 화자인 나와 함께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친구인 혜란과 석이의 이야기이다.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뜸해진 혜란과 함께 석이를 찾아 다시금 캄보디아로 떠나게 된다. 화자인 '나'는 소설 속에서 엄마를 잃은지 얼마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사정에 마음을 준 여유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캄보디아에 가는 것이 석이에게 주었던 상처에 용서를 구하는 유일한 길임을 자각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셋 중에 가장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석이는 캄보디아의 봉사활동 중에 절실한 믿음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화자인 동이와 혜란에게 세월호 사고와 같은 참사의 비극을 재생시킨다. 


석이를 찾으러 캄보디아에 도착한 동이와 혜란은 봉사활동 시절 석이와 가까웠던 학생인 삐썻을 다시 만나게 되고, 오래 전 삐썻과 함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한 사고에 대해 언급했던 석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프놈펜에서 큰 물축제가 열리는 날 사람들이 먼저 입장하려고 마꾸 뛰다가 다리 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고 3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끼어서 질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얘기에 석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 그런 죽음이 다 있어.(58)"

동이와 혜란은 삐썻과 함께 석이가 왔을 것이라 짐작되는 꺼삑섬의 다리에 도착하여 당시 참사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게 된다. 정부가 책임을 지우려는듯 원래 있던 다리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새 다리를 지었음을.


"나와 혜란은 사고의 흔적이 너무도 명백하게 지워진 그 다리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왜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고 할까. 또 어떤 죽음은 거룩하게 포장되고 어떤 죽음은 조용히 잊힌다. 그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경험했던 그 거대한 상실을 떠올렸다. 엄마의 죽음.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갈라지고 쪼개지고 으깨지고 녹아내렸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처량하고 처절하고 절실한 것들을 믿을 거야.(112-113)"


상실의 아픔과 슬픔에 절여져 일상이 무너지는 꼴을 무심하게 방관하는 것 또한 나에게 벌어진 불가항력적인 일을 받아들이는 절차 중의 하나임을 깨달아 간다. 그렇게 점점 희미해지다가도 이러다가는 완전히 다 잊어버릴 것만 같아 뒤늦게나마 조금씩 용기를 내어 하나씩 조심스레 슬픔의 장면들을 톺아보는 것은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아마도 나를 강건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 


"나와 나 아닌 이들의 삶은 아주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 있고 그 얽힌 모양을 면면히 바라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서로의 슬픔에 의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틈틈이 슬퍼하고 그 슬픔을 평생 간직하겠다는 태도야말로 나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저는 지금 슬퍼하고 추억하며 비로소 온전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빈자리를 곱씹으며 비로서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슬픔 앞에 무력하지만 그만큼 단단해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껏 슬퍼하고 그것을 내보이기로 했습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창 너머 말간 하늘을 바라볼 때, 새가 아주 높이 날고 있을 때, 앞으로는 강건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할 때.... 저는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을 호명합니다. 그래야 산 사람도 살고 죽음 사람도 산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지겠죠. 그래도 끝끝내 붙잡고 있어보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작가의 말 중에서(144-146)"


#예소연 #영원에빚을져서 #현대문학 #핀시리즈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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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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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을 읽었다. 꽤 오래 전에 헬싱키를 경유하는 핀에어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경유 시간이 짧아 공항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그저 깔끔하고 모던한 헬싱키 공항을 둘러보다 가판대에 적힌 콜라값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북유럽의 물가가 상상 이상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거의 두배값에 달하는 가격 표시를 보고 이곳이 경유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잊고 있었던 헬싱키 공항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이번 에세이는 핀란드에 대한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고, "여름에 서유럽을 왜 가? 무조건 핀란드지"라는 저자의 단호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핀에어 항공 사이트를 뒤적거리게 된다. 


핀란드의 쿠오피오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 교환학생으로 당첨된 저자의 회상과 더불어 에필로그에서 가명을 쓴 친구 예진과의 리유니언 여행을 다녀온 후기를 따라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2008년이라는 평행이론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1월부터 교환학생으로 쿠오피오에 머물렀다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2008년 2월부터 해외살이를 시작했었다. 아 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같은 시기에 비슷한 낯섬과 새로움을 느끼며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냈겠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때는 그곳이 그렇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어나고 싶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함께 교환학생으로 절친이 된 저자와 예진이라는 친구는 15년 만에 다시금 쿠오피오를 방문하게 된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졸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커다란 획을 그을만한 사건들이 훅훅 지나가고 21살 때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때의 자신을 커다란 나무 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평행이론에 끼어맞춰보자면 2년 전에 가장 친한 동기와 내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을 방문했었다. 사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일부러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야했기에 구태여 바쁜 여행 일정에 넣을 필요가 없었지만, 내가 머물렀던 곳을 동기 또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해줬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재방문하지 않았기에 내심 그곳을 가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설레이는 순간이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기에 단테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고 온통 붉은색과 녹색이 앞다투어 꾸며진 아치를 지나 아기자기한 장식물을 파는 가판대를 휘휘 둘러보고 나니 먹거리 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출출한 배를 채워줄 티롤 지방의 소세지와 더불어 차가워진 몸을 데워줄 글루바인을 먹고 마시니 내가 진짜 여기에 다시 왔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컨디션이 떨어진 동기가 잠시 쉬겠다는 찰나에 나는 혼자 2008년에 부단히도 많이 걸었던 아주 오래된 다리를 가보았다. 서재의 메인 화면에 걸린 사진 속 오래된 다리의 강변길이 마치 마음의 고향처럼 아련히 새겨져 있었기에 옷긴을 여미고 아직 남겨진 낙엽을 밟으며 지나온 15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분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 체력도 떨어지고 어딘가 몸이 아픈 곳이 있어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병원을 다녀야 하는 뭔가 서글프게만 보이는 시기에 이른 분들을 보고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그분들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세세히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대에는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노 단위로도 세밀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오늘 뭘 먹었는지가 아니라 지난 주에 친구 누구랑 몇 시에 만나서 어디로 걸어가 무엇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낱낱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심지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내 삶의 어느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것처럼 안개 속에 가려져 돌아보면 하루, 한달, 한해가 지나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우리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너무나도 생생하다면 남겨진 시간이 두려기만 할테니 말이다. 


이전에 출간된 저자의 소설을 전부 읽었기에 당연히 소설가의 삶을 꿈꾼지 알았다. 그런데 저자가 교환학생으로 머물 당시만 해도 소설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니 정말 앞으로의 15년 후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겠지만 부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책에 나와 있듯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설은 읽은 이에게 분명히 무엇인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는 삶이 아마도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이 내 마음속에 남긴 무언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건 정말이지 '무언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각자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형태로 남는 고유한 자국이다. 소설마다 다르고 또 그 소설을 읽는 사람 각각이 다른, 두 지문의 결합같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자국.(122)"


두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하고 지나온 시간 덕분인지 사우나 안에서 너무나도 간절히 사진을 찍고 싶었던 욕심을 내려놓도록 만든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절친의 몰입에 방해가 될까 싶어 후회할 선택을 똑같이 품은 마음이 아마도 15년 후에 다시금 리유니언하는 원천적인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 여행이라고 치면, 일기는 마치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그 여행지에서만 찍을 수 있는 그 순간의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사진. 나는 인생이란 여행을 하면서 일기를 쓰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신, 소설을 썼다.(391)"


아 자작나무 키친웨어 '코이비코'를 사는 부분을 읽고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런 브랜드가 나오지 않기에 정말 우리나라에는 소개가 되지 않은 레어템인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에필로그에 나온 가상의 브랜드라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아 작가님 진짜 진심이구나, 나중에 코이비코가 대박을 터트리길 기대해본다. 


#장류진 #우리가반짝이는계절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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