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세계 - 뇌과학자가 전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의 경이로움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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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론적 걷기를 거듭거듭 말하는 이유는 걷기가 어떤 다른 목적에 이용되는 도구로나 여겨지는 현실이 참담해서다. 걷기의 세계도 이 통속한 현실에 몸을 무겁게 담그고 있다. 희망 한 가닥 품어볼 만한 부분이라면 고작 이 정도다.

 

문제 해결에 대한 답을 반드시 얻어야겠다는 기대 없이 걸어라. 대신 걷기 자체 즐거움을 위해, 또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 걸어라.”(213)

 

걸으면 즐거워지니까 걷는다면 이 또한 다른 목적일 수밖에 없다. 걷기 본성이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을 엄밀하게 표현하면 경이로움이다. 경이로운 이유는 걷기가 찰나마다 창발이기 때문이다. 창발이 지닌 경이로움은 영적이다. 영적 즐거움을 일으키는 네트워킹, 바로 그 걷기가 인간 본성이다. 본성을 도구로 전락시킨 유일한 종이 인간이다. 그러니 전복은 불가결이다.

 

인간은 몸과 뇌를 치유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걷기를 도구 삼아 진화하지 않았다. 거꾸로다. 걷기 위해, 더 잘 걷기 위해 인간은 몸과 뇌를 네트워킹 체계로 진화시켰다. 대체 이 이치가 그토록 심오하고 복잡한가. 아님에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한사코 걷기를 도구화하는 까닭은 걷기 자체가 아름답거나 가치 있는 무엇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긍정적 뉘앙스로 표현했지만, 기껏해야 걷기는 활동적인 나태함”(196)일 뿐이다. 활동적인 나태함으로 대뇌 중심주의에 봉사할 따름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이 건강에 좋다니까, 두뇌활동에 좋다니까 걷는다. 그런 걷기는 트레드밀 걷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트레드밀 걷기는 형벌이다. 형벌 걷기 하는 사람을 걷는 인간homo ambultus라 하지 않는다. homo ambultus는 걷기 자체가 목적인, 천명인, 본성인 사람이다. 이 각성이 한꺼번에 일어날 때가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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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생명사 -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상 패자였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생존 전략 3부작 3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박유미 옮김, 장수철 감수 / 더숲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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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치열한 경쟁 끝에 공존의 길을 찾아내 다른 생물과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경쟁하기보다 서로 도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치열한 자연에서 속씨식물이 내린 결론이다. 서로 돕는 공생관계를 위해 속씨식물은 무엇을 했을까. 곤충에게 꽃가루를 주고 꿀을 주었다. 새들에게는 달콤한 열매를 준비했다. 자기 이익보다 먼저 상대방 이익을 위해 베풀어주는 일이 바로 공생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방법이다.

  신약성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리라.” 이 말을 설파한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 아득히 먼 옛날, 속씨식물은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패자의 생명사165~166)

 

서로 돕는다느니, 심지어 먼저 베풀어준다느니 하는 표현은 인간에게나 해당한다고 생각하므로 식물이 그런다고 하면 우리는 으레 수사학 수준으로 치부한다. 더군다나 기독교도라면 예수보다 속씨식물을 높이는 이런 말에 실재성을 부여할 리 만무다. 이미 너무 진부한 진실이어서 거듭하기 뭣한 말이지만, 이런 태도는 오만도 아니고 그냥 치기puerility일 따름이다.

 

서로 돕고, 먼저 베푸는 일을 통속윤리 맥락에서 읽으면 인간적인 미덕으로 들린다. 윤리를 생존하기 위한 수리數理로 이해할 때 비로소 패자 미학에 깃들 수 있다. 서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결핍, 기다리고만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곤경에 내몰린 생명이 결단하는 결곡하고 곡진한 행위가 이 말고 달리 있겠는가. 참 생명윤리는 인간 이전에 이미 엄존하고 있었다.

 

인간 이전 참 생명윤리는 자연Sein과 당위Sollen 사이 간극이 없다. 정신과 신체, 이론과 실천 사이 괴리도 없다. 정신이 과잉 진화한 인간만이 이 간극과 괴리를 떠안고 있다. 그래서 명령이 필요하다: “주라”. 심지어 보장도 필요하다: “주리라”. 이 예수 명령을 옹글게 따를 때만 인간은 식물 생명윤리 경지에 온전히 오를 수 있다. 어찌하면 옹글게 따를 수 있는가?

 

패자 정체성을 찐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화 정점이니 만물 영장이니 하느님 형상이니 하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류는 패자로서 수관tree crown으로 쫓겨나 생존하는 동안 나무 덕분에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보행은 축복이어서 저주가 되었다. 공생을 팽개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외길은 나무, 즉 속씨식물로 열린다. 거기가 에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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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탐욕이 중첩된 도시, 그 뒷골목에 핀 참나리꽃조차 관음증적 풍경을 그려낸다. 그런데 묘한 안도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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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16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리꽃 실제로 본지 꽤 오래 지나서, 저렇게 키가 컸던 식물인가?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bari_che 2022-07-19 09:44   좋아요 1 | URL
햇볕이 덜 드는 위치라 웃자란 탓도 있겠지만, 담장 안 집에 사는 누군가 가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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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상대적으로 친족 범위가 좁은 편이다. 생물학적 친족 외에도 우리는 공통된 민족이나 인종, 성별 또는 사회·경제적 지위 같은 다소 편협한 정의에 근거해 가치를 공유했다고 여기는 이들을 실용적인 친족으로 포함하는 인습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인습은 우리가 누구와 친구가 될지, 누구와 같은 동네 또는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지, 그리고 누구와 사회적 맥락에서 주기적으로 관계를 유지할지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이들과 친족 형태로 가까이 지내지만, 이는 사실 동종애Homophily로 알려진 개념이다.

  나는 친족관계에 대한 우리 인습을 재고할 때라고 느낀다. 조언이나 지도 역할을 맡은 사람 주된 목표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 사이에 동류의식을 증진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특정 개인 아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전략적 에너지 할당을 위한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친족 개념을 확장해 전 세계 모든 존재에 적용하기로 결단할 때, 인류로서 우리, 그리고 지구 전체 건강과 존속에 좋은 결과가 나온다. (식물의 방식173~174)

 

어떤 결정적 대목마다 떠오르는 사상가가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자기 고향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숙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강한 자다. 전 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자다. 미숙한 영혼을 지닌 자는 자기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한 장소에 고착시킨다. 강한 자는 자기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게 하려 한다. 완전한 자는 자기 장소를 없애버린다.”

 

유그, 그가 남긴 이름이다. 그가 남긴 이름과 이 말 이외에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는 내게 어떤 사상가보다 빛나는 존재다. 그가 서양 사상사에서 투명 인간에 가까운 까닭은 그가 남긴 이 말이 서양 사상 본진을 내파內破하기 때문이다.

 

유그 어법대로라면 서양 사상 본진은 강한 자를 추구한다. 실제 정치와 경제도 그 사상을 좇는다. 90% 가까운 미국 하원의원이 여권을 소지하지 않는다. 모든 나라를 자기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강자들이 지구 전체 건강과 존속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를 느낄 수 없다.

 

유그는 초보자와 강자가 준동하는 세상을 고요히 관통해버린다; 자기 근거를 지움으로써 중심주의를 베어버린다. 식물의 방식저자도 강한 자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친족 개념을 확장해 전 세계 모든 존재에게 적용하자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동종애Homophily를 비판한 취지를 헤아리면 친족 확장이 동종 확장과 같은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달라도 공생 당사자로 맞이한다면 그를 친족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식물 방식으로 우리 삶을 정향하고자 한다는 이 책 종지에 따라 나는 유그 눈으로 재해석한다. 유그 눈은 나무, 그리고 소뇌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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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세계 - 뇌과학자가 전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의 경이로움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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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 투쟁으로서 소뇌 혁명은 간단명료하다: 걷기.

 

La marche est spiritualité, elle nous connecte à l’univers.

 

나는 녹색의학 이야기50<몸짓의 녹색의학-걷기를 종지 삼다(2017. 11. 6.)>에서 걷기 존재론을 말했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본령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하모니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걷기가 존재론적 차원임을 걷기의 세계저자도 인정한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다. (167)

 

나는 녹색의학 이야기55(2017. 11. 6.)서 사회정치적 걷기를 말했다.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사회가 문화가 뒤집힌다. 정치가 경제가 엎어진다.”

 

저자도 <사회적 걷기>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기는 개인적 운동성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한다.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 원동력이 되는 일이다.......걷기가.......뚜렷한 사회적 목적을 지니고 진화했다는 사실은 걷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지만 쉽게 간과된다(232)

 

나나 그나 걷기가 지닌 누락 불가 진실에 닿아 있다. 그런데 둘 다 가 닿지 못한 지성소가 있다: 존재론적이며 사회정치적인 걷기 인텔리전트터미널은 소뇌다. 그런데 그가 지성소 소뇌에 가 닿지 못한 일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그는 뇌 과학자다. 걷기의 세계그 어디에도 소뇌는 언급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소뇌 혁명, 정확히 소뇌 인식 혁명이 필요하다. 기존 소뇌 인식을 혁파해야 걷기에 대한 인식 실재에 도달한다. 실재로서 걷기는 그 자체로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은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선다.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서는 사건을 영이라 한다. 영은 공생을 무궁토록 일으키는 통렬한 운동이다. 이 통렬 운동으로만이 대뇌 제국주의 일극 집중 음모를 끌어안아 본디 비대칭 대칭 세계를 재건할 수 있다. 재건 본진이 다름 아닌 소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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